제82화
식당에는 정적이 흘렀다. 제작진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다. 가끔 누군가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혹시 잘못 들었을까 봐 여서였다.
“선배님… 아이를 가지셨다고요?”
고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문루아가 물었다.
“그리고 아빠는… 빈이?”
“...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 같이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요요오오오오오~”
환희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오래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며?'
'몰라요 횽! 그 사람이 아닌가 봐요!'
환희도 황당하단 반응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분명 아폴로 빈은 고미진과 만나지 않았었다. 아무래도 내가 모르던 사이에 미래가 바뀐 모양이었다.
* * *
고미진이 사정을 설명했다. 고미진은 70년생이었다. 84년생인 아폴로 빈과는 15살 차이었다.
원래 둘은 아폴로 빈이 데뷔했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그때는 그저 하늘 같은 연예계 선배를 깍듯이 모시는 귀여운 아들뻘 후배일 따름이었다.
스무 살이 된 올해, 아폴로 빈은 사실 그동안 오래 사귀었던 재벌가 자녀 여자친구와 헤어졌었다.
알고 보니, 회귀 후 역사가 바뀌었다. 올해 초, 아폴로 빈은 여자친구와 헤어졌다. ‘조이월드'에 환희가 몰래 올렸던 폭로 썰이 그 원인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헤어진 후 다시 만났고. 한참 뒤에 주환희가 아폴로 빈의 연애를 폭로했다.
하지만 회귀한 이후에 양상이 달라졌다.
오랜 여자친구와 이별로 우울해하던 그를 고미진이 다독여줬다. 마침 고미진도 전남편이 금융사기꾼으로 밝혀지며 이혼 수속을 완료했다. 어느새 둘은 연인이 되었다.
이전에, 환희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내가 확인했었던 아폴로 빈의 미래가 떠올랐다. 아폴로 빈은 미래에 분명 재벌가의 사위가 되어 있었다. 나도 거기까지만 확인하고 그냥 더 확인하지 않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폴로 빈의 미래가 바뀌었던 셈이었다.
문루아가 말했다.
"그래서 계속 몸매가 안 드러나는 옷을 입고 계셨군요?"
고미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래요. 벌써 배가 좀 많이 불렀네요.”
내가 말을 이었다.
"감독님 말이 맞지 않나요? 3월이 예정일이시면 벌써 임신 중기인데요. 차가운 바깥에 계시면 별로 안 좋을 거 같은데요."
고미진이 머리를 손바닥으로 아래로 쓸어내렸다.
"그럴까요..."
문루아도 거들었다.
“그래요 선배. 굳이 나갈 필요는 없잖아요?"
고미진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흘렀다. 내가 슬쩍 마음을 떠봤다.
"혹시 노래를 하고 싶으신 이유가 있나요?"
고미진은 우리를 눈으로 쳐다보더니 천천히 말했다.
“다 함께 하는 일정이잖아요. 나도 끝까지 함께하고 싶죠. 이게 당분간… 마지막 일정일 텐데."
고미진의 말을 들으니 그녀의 마음도 이해가 갔다. 고미진은 여고생 때 데뷔해서 지금까지, 20년 넘게 바쁜 삶을 살았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갑자기 그런 세상에서 벗어난다는 뜻이었다. 이 뮤직비디오 촬영이 당분간 마지막 촬영이라 생각하니, 그녀가 끝까지 모든 일정에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내가 납득이 되니, 다음에 할 일은 쉬웠다. 고미진에게 말했다.
"제가 직접 감독님과 이야기하고 오겠습니다."
고미진이 되물었다.
"직접이요?"
"네네. 잠시만요."
바깥으로 나갔다. 환희도 허겁지겁 나를 따라왔다. 환희가 내게 물었다.
"어쩌려구요 횽!"
"설득을 하려고."
"뭘요?"
"같이 촬영하자고. 나는 방금 말 듣고 고미진 선배 말 이해 됐거든?"
"하지만 임산부가 추운 날씨에 야외 촬영은 좀 위험해 보이지 않아요?"
"너무 안에만 있는 것도 별로지 않겠어? 좀 걸어야지. 그러니까 한번 방법을 같이 찾아보자 이거지. 말을 해보면 되잖아?"
"말을 해봐요?"
환희는 납득이 가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연히 말을 해봐야지. 의견이 다르다고 그럼 연락을 끊냐? 의견이 다르다고 매번 그러면 사람을 오래 만날 리가..."
말을 하다 보니 오싹해져서 말을 멈췄다. 환희가 내게 물었다.
"왜 그래요 횽?"
"환희 너. 혹시 의견이 다르면 그냥 말을 안 해버리냐?"
"그죠?"
"그럼 우리랑은 여지껏 어떻게 활동을 한 거야?"
"횽 말이 다 맞았으니까요."
"그럼 네놈은 우리랑 의견이 다르면 어쩔 거였어?"
"머 그냥 참는 거죠."
"그러다가 못 참으면? 탈퇴하고?"
"아 횽 왜 그래요!"
아무래도 주환희 이놈은 관계에 대해서 알려줄 것이 산더미처럼 많아 보였다.
* * *
관계 과외는 오늘 밤으로 미루고, 일단 지금은 아폴로 빈을 찾아야 했다. 노경진 PD에게 연락하자 바로 답이 왔다. 아폴로 빈은 중앙 광장에서 바람을 쐬면서 스케치북에 뭔가를 벅벅거리고 있다고 했다.
광장으로 가면서 환희와 아폴로 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아폴로 빈은 나랑 동갑이지?"
"그죠?"
"너보다 한 살 많은데 친구처럼 대하네."
"제가 교포자나여."
"교포 컨셉이지."
"아 암튼요. 여튼 그래서 같이 활동하는 한두 살 정도 나이 차이 나는 동년배랑은 걍 친구처럼 지내써여~. 빈이 같은 경우는 지가 먼저 말 놓으라 그랬고."
진짜 환희는 진심으로 컨셉에 미친놈이었다. 해외파 컨셉을 연기하니 진짜 해외파처럼 행세를 하고 다닌 모양이었다.
"그런 걸 보면 아폴로 빈은 좀 유연한 편이네?"
"맞아요. 좀 깐깐하긴 한데. 엔간하면 화는 안 내요. 그래서 방금 화냈을 때는 좀 놀라써요."
"아무래도 아이 건강이 걸린 문제니까. 좀 경직된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아폴로 빈은 보통 어떤 스타일이야?"
"연습생 때 이런 일이 있었써여. 숙소 생활하면 갈등이 많거든요? 그때 말이죠 횽…"
그렇게 이런저런 아폴로 빈에 대한 정보를 환희에게 얻었다. 내가 감사를 표했다.
"큰 도움이 됐어."
"별거 아녜요 횽."
"근데 너는 계속 따라올 거야? 감독님이랑 이야기하려고?"
"모르게써요 횽. 횽이 가니까 같이 나오긴 했는데. 제가 뭔 말을 할지 참… 피임은 확실하게 해써야지!"
환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말하는 꼬라지가 별로 건설적인 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야 너는 그냥 돌아가라. 그런 말 할 거면 없는 게 나아."
"그건 싫어요 횽! 여기까지 왔는데."
벌써 거의 광장에 다 왔다.
"그건 그렇네. 그럼 말하지 말고 잠자코 있어. 설득은 내가 할 거니까."
"...그래요 횽.”
그렇게 환희와 말하다 보니 어느새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에 가자마자 아폴로 빈이 보였다. 외모도 수려한데다, 스케치북으로 뭔가를 그리고 있는 사람은 아폴로 빈뿐이었다.
그에게 다가갔다. 아폴로 빈이 먼저 내게 말을 툭 내뱉었다.
"추운데 먼 길 오셨네요."
내가 대답했다.
"감독님이야말로 추운 데서 뭐 하시나요?"
아폴로 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쓱쓱 펜 터치를 해서 그림을 마무리했다. 그림 속 인물은 누가 봐도 고미진이었다. 핑크색 원피스를 입고는 피크닉 바구니를 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아폴로 빈은 아예 그림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아폴로 빈이 내게 슬쩍 물었다.
"미진 선배가 말했나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내가 슬쩍 대답했다.
"네.”
아폴로 빈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밝히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군요."
"사실 철저하게 숨기시려면 뮤직비디오에 섭외를 안 하셔야 하지 않았을까요?"
아폴로 빈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는 표정이었다. 어느새 그는 스케치북을 덮고, 모자를 쓰고 패딩을 고쳐 입었다. 다시 이동하려는 모양이었다.
"대본을 보더니 미진 씨가 너무 하고 싶어 했어요. 너무 본인과 딱이라며."
그러고 보니 그랬다. 이 드라마 마지막에는 반전이 있었다. 고미진 역의 엄마가, 알고 보니 젊은 이탈리아인 배달부와 사랑에 빠져 있었다. 세 아들이 자신의 연인을 데려온 마지막 만찬에서, 엄마가 이 사실을 고백하면서 뮤직비디오가 끝이 났다.
“왜 그러셨을까요?"
"모르겠는데요."
“아이를 가지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러면 아무래도 당분간 배우 활동이 어려우시겠죠. 고미진 씨는 마지막 배우 활동을 감독님과 함께하고 싶던 게 아닐까요?"
"아..."
아폴로 빈도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말을 이어갔다.
“그러니까 마지막 스케쥴인 버스킹까지 함께 하고 싶으신 게 않을까요? 당분간 마지막 배우 활동이니까요."
"그래도 건강이…"
"방법을 같이 찾아보시죠."
아폴로 빈은 한층 마음이 누그러진 모양이었다. 함께 레스토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폴로 빈이 마음을 열자 비로소 환희가 까불까불대면서 아폴로 빈과 말을 걸었다.
"차라리 마지막에 미진 선배랑 사랑에 빠진 역할 그거 니가 하는 건 어때?"
아폴로 빈이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이걸로 어차피 제작진도 알게 됐고. 니고 딱히 숨기고 싶지 않은 거 가튼데. 이탈리아에까지 같이 온 거 보면."
"공개를 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는데. 이미 회사 PR팀에 업무를 너무 많이 늘렸는데 또 업무를 늘리기는 너무 죄송하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다. 하지만 사실, 나도 환희의 말에 찬성이었다.
일단, 이건 고미진과 아폴로 빈의 관계에도 좋을 터였다. 언제까지 둘의 사실을 숨길 수는 없었다. 차라리 말하는 게 나아 보였다.
그리고 사실, 그렇게 공개가 되면 우리 뮤직비디오 홍보에도 도움이 될 것도 같긴 했다.
'남의 연애사를 우리 홍보에 써먹는 건 좀 찝찝하긴 한데. 그래도 아폴로 빈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으니까.'
슬쩍 말을 해봤다.
"그럼 혹시 모르니 감독님이 하나 컷을 찍어 두시고, 회사와 상의해보신 다음에 정하시죠."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사실 마지막에 고미진 씨가 연인을 소개하는 컷 하나만 바꾸면 되는 건데. 혹시 모르니 한 컷 찍어 두겠습니다. 여러분들이 버스킹하는 동안에."
“네네. 공개 여부는 회사와도 이야기해보시고, 무엇보다 고미진 선배랑도 말해보세요."
"알겠습니다..."
* * *
돌아오자 고미진 선배가 잔뜩, ‘임산부에게 외출이 좋은 이유' '임산부가 1시간 이상 산책해야 할 이유' 등을 일장 연설했다. 아무래도 그사이에 주치의 및 의사들과 전화해서 괜찮다는 확인을 받은 모양이었다. 결국, 노래는 하지 않고, 진행만 하고 구경만 한다는 조건으로 버스킹에 참여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시간이 없었다. 비원더 3인과 문루아는 함께 대기 중인 버스킹 밴드와 조우했다. 노래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버스킹 밴드의 밴드 마스터는 구면이었다.
"노으루 군!"
...미도리였다. 이전에 천채왕이 소유했던 녹음실에서 봤던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기타리스트이자, 버스킹 밴드의 밴드 마스터였다.
"어떻게 여기에?"
미도리는 살짝 서툰 영어로 말했다. 아무래도 일본어가 불가능한 재호까지 배려하기 위해서인 모양이었다.
"버스킹한다고 해서 왔어요. 우리, 루아 밴드니까. 선곡은 준비했어요?"
"네네. 다들 준비 했습니다."
"알려주세요!"
연습할 시간은 없었다. 4명 모두 이미 준비했던 레퍼토리를 꺼냈다. 문루아는 자신이 일본에서 이미 애니메이션 주제가로 불렀던 적이 있던 'Last Christmas'를 선곡했다. 환희 또한 기획사 연습생 시절, 자주 월말 평가 때 불렀던 'This Christmas'를 부르기로 했다. 재호는 재즈풍으로 'White Christmas’를 준비했다. 다들 자주 불렀던 곡이라 금방 준비하면 될 듯했다.
4명이 함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아카펠라로 부르자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처음 함께 맞춰보는 곡이었지만, 의외로 다들 쉽게 적응했다. 금방 1절에서 4절까지, 다양하게 리듬과 분위기를 바꿔가며 아카펠라로 부를 수 있었다.
문제는 내 선곡이었다. 내 선곡을 들은 미도리가 깜짝 놀라서 말했다.
"노으루 군. 진심이에요? 이런 어려운 곡을 부른다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