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1화
‘침입자라니? 왜? 무슨 마피아 영화도 아니고?’
하지만 이 소리는 분명 침입자의 그것이었다. 묘하게 조심하는 듯한 발걸음이 더욱 수상했다. 숫자는 많아야 3명 정도였다.
‘뭐 사람 죽이러 오는 건 아닐 테고 왜 오는 거지?’
내 방문을 여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딱히 무기가 될만한 건 없었다. 혹시 몰라서 일단 호텔에서 가장 위험해 보이는 다림질 판을 방패 삼아 쥐고 있었다.’
<끼이익~>
머릿결이 곤두섰다. 열쇠로 문을 여는 소리였다. 분명히 침입자인데, 열쇠를 가지고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의 타깃은 내 방이 아니었다. 내 방 옆, 재호 방이었다.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에 집중했다. 뭔가 찰칵찰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내가 아무 준비도 안 했다면. 이때 별생각이 다 들었을 터였다.
‘경찰을 부르면 이미 너무 늦어. 매니저도 마찬가지. 그렇다고 내가 직접 재호 방에 뛰어 들어가는 것도 너무 위험하지. 누가 몇 명 있는 줄 알고? 심지어 한국도 아닌데.’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위협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면 미리 준비를 해뒀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가 기다리고 있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만하시죠.”
밥맛 없는 저 목소리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몰랐다. 배영웅의 목소리였다.
불이 켜지고 우당탕탕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소리가 잠잠해졌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환희, 하니 주하늘이 보였다. 하늘이는 벌벌 떨고 있었다. 손에는 옷걸이를 쥔 채였다.
하늘이가 덜덜거리며 내게 물었다.
“형형! 방금 그 소리 뭐예요? 재호 형 방에서 난 소리죠?”
“그래. 야 그 옷걸이는 됐어. 소용없더라 그거.”
주하늘은 모기 기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없는 거보단 낫겠죠…”
“놀고 있네.”
환희면 모를까, 주하늘은 딱히 이런 위급 상황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바로 재호 방으로 갔다.
재호 방에는 예상대로 소인중과, 그의 패거리 한둘이 있었다. 모두 배영웅에게 내동댕이쳐져서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 중에게는 계속 우리를 수행했던 운전수도 있었다.
‘저 사람이었구만.’
지금껏 소인중 편에서 우리 방에 들어오게 했던 끄나풀은 저 운전수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배영웅 매니저가 조안과 다른 매니저들과 함께 서 있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소인중에게 차갑게 말했다.
“소인중 이사님이시군요?”
“대표인데욥.”
소인중은 바닥에 자빠져 있어도 껌을 씹듯 질겅질겅 말했다. 아무래도 배영웅에게 업어치기를 당한 모양이었다. 저게 얼마나 아픈지 실제로 경험해본 나는 알고 있었다.
배영웅이 인공지능 기계음처럼 차갑게 말했다.
“재호 군 노트북을 훔치려 했던데. 협박이라고 하려던 건가요?"
“..."
소인중은 묵묵부답이었다. 배영웅이 계속 말을 이었다.
“곧 호텔 직원들과 경찰이 올 겁니다. 세분은 주거침입죄 및 절도 미수로 현지 경찰에게 넘기겠습니다. 다만.”
배영웅이 잠시 숨을 골랐다. 0.5초 정도 침묵이 흘렀다. 소인중이 살짝 읊조리듯 물었다.
“다만?”
배영웅이 대답했다.
“이국에서 동포 좋다는 게 뭡니까. 진심으로 사과하시고. 다시는 비원더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없는 걸로 하겠습니다.”
소인중이 피식 웃었다.
“아~ 무릎이라도 꿇게 만드시겠다? 그럼 내가 ‘아이구 죄송합니다' 그럴 줄 알았나?”
소인중은 당당한 발걸음으로 방문을 나가려 했다. 그가 나가기 전에 내가 나직하게 한마디 했다.
“저희들 사이를 이간질을 하셨더군요? 거짓말을 옮겨서 한 명이라도 건져 보려고?”
재호도 말을 덧붙였다.
“저는 노을이가 올드하다 생각한 적 없어요. 다 유행 따를 필요도 없구. 노을이는 클래식한 거죠.”
소인중은 내게 거짓말을 했다. 재호가 나를 비방했다는 거짓말을 흘려 우리 사이를 이간질하려 했다. 이를 그대로 되갚아줬다.
소인중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내가 한 마디 마무리로 쏘아붙였다.
“당신과 계약할 생각 없으니까. 이제 그만 좀 해요. 강제로 총구라도 들이대서 계약할 셈이에요?”
소인중이 빽! 소리 질러 내 말을 끊었다.
“안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이었어! 보자 보자 하니까. 니들보다 훨씬 잘난 놈을 이미 찾았다고. 한 놈이라도 내게 안 붙은 걸 다 후회하게 될 거다. 네놈들 다 패배자로 만들 거니까!”
소인중이 뚜벅뚜벅 제 발로 방문을 뻥 차고 나갔다. 그를 붙잡아 경찰에게 인계하는 호텔 직원들이 오히려 초라해 보였다. 누가 누굴 체포하러 온 건지 모르겠는 광경이었다.
주하늘이 어느새 마음을 정리했는지, 환희가 되어 나지막하게 말했다.
“저 사람, 재호 횽 방엔 왜 왔을까여?”
배영웅 매니저가 담담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재호 군 컴퓨터 하드 드라이버를 훔쳐 가려 한 모양입니다. 곡을 볼모로 협박을 하거나, 경고의 메시지를 남기려 했던 모양이네요.”
재호가 물었다.
“무슨 메시지요?”
배영웅 매니저가 항상 하는 실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에는 섬뜩했지만, 이제는 우리 편이라는 생각에 좀 든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내 말 안 들으면 재미없다’ 뭐 그런 거려나요?”
내가 배영웅 매니저에게 물었다.
“이제 저 사람 어떻게 되는 거죠?”
배영웅이 어깨를 으쓱 해 보이며 말했다.
“경찰에 잡혀가는 거죠 뭐. 어떤 법률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네요. 이탈리아 사법 체계는.”
아마도 잘 알 법한 조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 조안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하는 꼴을 보니, 저 녀석, 지역 경찰과 뭔가 커넥션이 있어서 적당히 풀려나려 하는 모양이었다 이탈리아도 법치국가다. 당연히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미래에 소인중이 구속된다는 기사를 미리 읽었기에, 소인중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전 세계적인 로비와 마약, 유흥 커넥션으로 엮인 놈이니 어떤 재주를 부려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었다. 방금 내뱉은 말을 곱씹어 보니, 소인중은 우리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재호가 자기 컴퓨터를 확인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문제가 없는 모양이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우리들을 다독였다.
“자자. 아직 새벽 두 시에요. 내일 일정도 있으니 다시 주무시죠. 내일은 제가 특별히 다시 깨워드릴게요.”
방으로 돌아가는 길, 복도에서 하늘이가 내게 살짝 물었다.
“형.”
“왜?”
“소인중 대표님… ‘니들보다 훨씬 잘난 놈’을 찾았다고 했죠?”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했던 것 같았다.
“그랬지?”
“누굴까요?”
“뭐 글쎄? 생각을 안 해봤네. 생각을 해본들 알 수가 있겠어? 그 사람이 누굴 아는지도 모르는데?”
“솔직히 저희 셋, 각자 뛰어난 능력과 개성을 가진 것 같거든요? 우리들보다 더 낫다니. 대체 누구일지..”
“너무 걱정하지 마. 잠이나 자.”
“그래요 형. 형도 잘 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뭔가 흥미가 동했다. 말하는 태도로 볼 때 허세는 아니었다. 정말 자신이 있어서 한 말이었다.
<니들을 다 패배자로 만들 테니까!>
소인중의 마지막 말이 귀에 아른거렸다.
침대에 누워있으니 피식 웃음이 났다.
상관없었다.
‘할 테면 해 보라지. 나에게는 이 mp3가 있어.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는 동료가 있었다. 재호와 환희, 그리고 객원 동료 문루아와 심지어 천채왕, 배영웅까지.
제아무리 무서운 놈이라도, 겁나지 않았다.
* * *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배영웅이 잠을 깨워 주었다. 재호와 환희는 언제나처럼 깔끔하게 일어나 있었다. 아침에 조금 깨어나기 어려운 편인 나도 ‘위버멘쉬의 회복력'을 쓴 덕에 깔끔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내게 귀띔을 해줬다.
“감독님이 조식 코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아폴로 빈이 기다린다니, 뭔가 있겠다 싶었다. 서둘러 재호, 환희와 내려가 보니 이미 문루아와 아폴로 빈, 고미진이 앉아 있었다. 문루아가 오랜만에(?) 아폴로 빈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아폴로 빈은 쩔쩔매고 있었고 고미진은 문루아를 말리고 있었다.
문루아가 말했다.
“아니, 왜 그렇게 무책임하게 말하는 거예요? 스케쥴은 미리 알려 줘야죠.”
아폴로 빈이 고개를 돌려 카메라로 우리를 찍고 있는 노경진 PD 쪽을 보며 말했다.
“아 저 제작진 부탁으로..”
문루아가 쏘아붙였다.
“제작진이 죽으라면 죽을 거예요? 정말.”
내가 문루아에게 말했다.
“선배.”
“왜요?”
“이거 다 찍혀요. 편집은 할 거지만. 그래도 편집은 할 수 있게…”
“알고 있어요!”
하긴, 생각해보면 문루아는 욕설을 하거나, 선을 넘는 행동을 하진 않았다. 말은 차가웠지만, 태도는 전혀 감정적이지 않았고 프로다웠다. 나름대로 화가 났지만 참고 행동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재호가 물었다.
“뭘 해야 하는데 그러는 건가요 감독님?”
아폴로 빈이 대답했다.
“아니 그게 저… 오늘 저녁, 광장에서 게릴라 버스킹을 잡아 놨습니다.”
문루아가 중간에 말을 끼어들었다. 냉정한 말투였지만 조금 감정도 실려 있었다.
“오.늘.저.녁. 이래요. 아무런 사전 고지 없이! 그게 말이 돼요?”
아폴로 빈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한 곡씩만 부르시면 됩니다. 하우스 밴드도 극비리에 미리 불렀고요. 오디션에서 부르셨던 곡 하셔도 됩니다.”
내가 문루아에게 물었다.
“선배는 캐롤 앨범도 내셨었잖아요?”
“윽 그걸 어떻게…”
“저도 그거 테이프 사서 들었으니까요.”
“흠! 이왕이면 CD로 들어주세요. 테이프는 들을수록 음질이 떨어지니까.”
말은 냉정했지만 말투는 한층 누그러졌다.
“선배님은 충분히 하실 수 있지 않아요?”
“비원더 3명은 아직 신인이라 무리 아니에요?”
환희가 말했다.
“저는 기획사 월말 평가 때 불렀던 ‘This Christmas’ 부르면 될 거 가타여. 12월만 되면 했어서 문제 없어여.”
재호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개인적으로 저도 재즈풍 노래를 좋아해서. ‘White Christmas’는 당장 부를 수 있을 거 같네요. 재즈풍 노래가 몇 개 없더겅요. 저는 준비 됐구…”
그러면서 재호가 나를 쳐다봤다. 아폴로 빈부터 심지어 노경진 PD까지 조식 뷔페 안에 모두가 나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 저는 뭐…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라도 부를까요? 하하.”
문루아가 가뜩이나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면서 물었다. 어찌나 눈을 크게 떴는지 포니테일로 묶은 머리마저 흔들리는 것 같았다.
“그걸 부른다고요?”
“자주 들었던 노래라 금방 부를 거 같아서요.”
환희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횽 그거 얼마나 어려운데요. 무리예요 무리.”
“그런가? 그럼 악보 보면서 한번 캐롤 쭉 확인해볼게요. 다 익숙한 노래니 어떻게든 되겠죠.”
문루아가 어이없다는 듯, 우리 셋을 쳐다봤다.
“진짜 괜찮아요? 오디션 프로 무대랑은 달라요. 길거리라고요 길거리. 심지어 말도 안 통해요. 우리를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반응이 차가울 수 있는지 알아요?”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니까 더 재미있죠. 유명세가 아니라 노래로만 평가받을 수 있는 거니까.”
문루아가 헛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맘대로 해요!”
아폴로 빈이 박수를 짝짝 치면서 말했다.
“좋네요 좋네요. 저희, 이 무대 준비 과정과 버스킹 과정을 담아서 후속곡의 뮤직비디오로 써볼까 하는데. 어떠세요?”
내가 대답했다.
“아하 그런 거였군요…”
“모처럼 이런 곳에 왔으니까. 좀 돌발적인 상황을 뮤직비디오에 담으면 이쁠 거 같아서요. 여지껏 한국에 없었던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보는 거죠.”
비원더 3인과 문루아 모두 찬성했다. 이제 다들 정리해서 밴드와 연습을 하러 가면 됐다.
그때, 잠자코 듣고만 있던 고미진이 말했다.
“저도 갈래요.”
아폴로 빈이 되물었다.
“네?”
“저도 가겠다고요.”
아폴로 빈이 꽥하고 소리 질렀다.
“안 됩니다!”
고미진뿐 아니라 우리들 모두 놀랐다. 누가 화를 내도 항상 냉정하고 차분했던 아폴로 빈이 갑자기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와 지나치게 큰 볼륨으로 말했기 때문이었다.
문루아는 ‘툴툴대는' 정도였다면, 아폴로 빈은 진짜 급발진이었다. 갑자기 방 안 모두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급격히 분위기가 차가워졌다.
고미진이 아폴로 빈을 달랬다.
“저도 출연자잖아요. 뮤지컬도 했었고. 한 곡만 하고 싶..”
“아니, 안 된다고요!”
아폴로 빈이 고미진에게 쏘아붙이고는 방을 나가 버렸다.
문루아가 말했다.
“아니, 아무리 감독이라도 한참 선배인데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나이 차이가 몇인데.”
고미진이 문루아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재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한국이 유교 사회인데. 하늘 같은 선배 대배우한테 저래도 되냐. 원래 아폴로 빈이 저랬냐?”
환희가 손바닥을 우리에게 펴 보이며 말했다. 뭔가 미국식 놀랐다는 제스쳐였다.
“전혀요 횽! 되게 예의 바른데? 왜 저러는지 모르게써요. 오히려 어른들이랑 음총 친한 편인데.”
고미진이 돌아서서 우리에게 말했다.
“아니에요. 제 잘못이에요.”
문루아가 고미진에 손을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아니에요 선배! 빈이가 버릇없는 거지. 왜 잘못이에요.”
고미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요. 제가 좀 고집을 부리긴 했죠. 저… 임신한 몸이니까. 그것도 빈이 아이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