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80화 (80/280)

제80화

슬쩍 아폴로 빈의 침실에 들어갔다. 문을 똑똑 두드리자, 아폴로 빈이 상기된 얼굴로 나왔다.

“아 안녕하세요 노을 님! 이 밤에 무슨 일로?”

“잠깐 들어가도 될까요? 하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지금이요?”

“네.”

“아 지금은 좀… 아, 그래요 잠시라면 뭐. 대신 바깥으로 나가죠.”

아폴로 빈과 함께 호텔 1층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코코아를 두 잔 가져왔다.

“그래서 어떤 일이시죠?”

단도직입적으로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은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커리어를 쌓고 싶으시죠?”

“아 네네. 뭐 그렇죠.”

어정쩡한 말투와는 달리 ‘뮤직비디오'라는 말을 하자마자 아폴로 빈의 눈빛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아폴로 빈은 참 독특한 사람이었다. 나랑 동갑이지만, 벌서 4년 차 아이돌이었다. 지금은 제 발로 아이돌을 사실상 은퇴하고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새 시작을 하려 하는 참이었다. 더욱 놀라운 건, 그걸 미래에 해냈다는 점이었다. 그의 과거와 미래를 보니,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가 보였다.

나는 아폴로 빈에게 말을 이어갔다.

“아폴로 빈 님과 어제 촬영을 하다 보니. 정말 감각 있으시더라구요. 편집 영상을 보지도 않았는데, 화면이 감각적이어서 놀랐습니다. 게다가 촬영 장면을 배우들에게 보여주는 것도 굉장히 좋았고요. 소통이 잘 되는 것 같았습니다.”

“아유 과찬이십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사실 그렇긴 하죠.’

속마음은 속마음으로 남겨두고, 말을 이어갔다.

“감독님은 뭐가 부족하시다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침묵이 잠시 흘렀다. 아폴로 빈은 멀리 밤하늘을 쳐다보더니, 툭 자기 고민을 고백했다.

"제가 계획성이 좀 부족한 거 같습니다. 자꾸 마음에 드는 장면이 안 나와서요. 계속 하염없이 찍게 되더라고요. 출연진분들에게는 죄송하다 생각하고 있어요.”

“그겁니다. 본인 머릿속에 있는 장면이 있는데. 그걸 스태프들에게 말하고, 그런 장면이 나올 때까지 찍는 그 과정이 너무 오래 걸리는 거잖아요?”

“맞습니다. 맞습니다.”

“봉준호 감독님 아시죠?”

“그럼요. ‘살인의 추억'의 그 감독님!”

그러고 보니 지금은 2005년, ‘괴물'이 나오기도 전이었다.

내가 말을 이어갔다.

“그분은 촬영 콘티를 만화로 그리신다고 하더라고요.”

아폴로 빈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만화요?”

“네. 그렇게 철저하게 그려서 그걸 스태프들과 소통하면, 훨씬 촬영과 편집이 수월해진다고 하더라고요. 물론 촬영이든 편집이든, 콘티랑 똑같이 갈 수는 없겠지만요.”

“그렇겠네요. 그렇겠네요. 와. 제가 사실 만화를 엄청 좋아하거든요. 그림을 끄적이기도 했고. 와~ 제가 왜 그걸 몰랐을까요? 저랑 너무 딱 맞는 방법이네요. 고맙습니다.”

‘그야, 이건 당신 미래 인터뷰에서 딴 거니까요 당신하고 잘 맞겠죠.’

미래에 뮤직비디오 감독 아폴로 빈의 인터뷰를 보고 가져온 미래의 노하우였다. 미래에 아폴로 빈이 스스로 터득한 노하우를 과거의 아폴로 빈에게 전달한 셈이었다.

* * *

다음 날.

새벽부터 메이크업을 받고, 준비된 입고 촬영장에 나왔다. 촬영 무대가 될 길거리에는 인공 눈이 뿌려져 있었다.

문루아도 이미 준비를 완료하고 대기 중이었다. 꽃집 직원 차림이었다. 검정 치마에 블랙 앤 레드 체크 셔츠, 그리고 검은 베레모를 썼다.

나를 본 문루아가 말했다.

“춥네요. 이탈리아는 따뜻할 줄 알았더니.”

“아침이니까요. 선배도 이탈리아는 처음이신가요?”

“투어 때 와봤어요. 그때는 여름이었지만요.”

“대단하네요.”

맨날 봐서 익숙해졌지만, 이렇게 이야기하다 보면 간혹 말에서 확실히 월드 스타구나 하는 실감이 나곤 했다.

“이탈리아도 겨울에는 별수 없네요. 아, 고마워요 조안~.”

조안이 문루아에게 롱코트를 건네주었다. 따뜻한 카푸치노도 함께였다.

나도 조안에게 카푸치노를 받았다. 마시자마자 몸이 따뜻해졌다.

“오늘 촬영은 빨리 끝나야 할 텐데요.”

문루아가 살짝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그러게요. 오늘은 특히.”

“걱정이네요.”

사실 걱정은 들지 않았다. 이미 생각해둔 게 있었으니까 말이다.

그때 아폴로 빈이 소란스럽게 들어왔다.

“아 반갑습니다 반갑습니다. 예정대로 30분 뒤에 시작할게요. 준비 완료해주세요.”

“네네.”

“아 잠깐! 일단 스태프분들, 이거 좀 봐주시겠어요?”

아폴로 빈이 가방에서 뭔가를 꺼냈다. 스케치북이었다. 스케치북을 펼치자 뭔가 ‘만화' 같은 그림들이 보였다.

‘왔군.’

어제 내가 전했던 어드바이스를 그대로 따른 모양이었다.

스태프들이 뚫어져라 아폴로 빈의 스케치를 쳐다봤다.

문루아가 내게 물었다

“뭘 하는 거죠?”

내가 대답했다.

“액셀레이터죠.”

“액셀레이터요?”

“촬영에 가속도를 붙여주는.”

문루아가 살짝 눈썹을 찡그리며 몰아붙였다.”

“무슨 소리예요. 어제 못 봤어요? 질질 끄는 게 아주 습관이에요. 그러다가 까르보나라를 거의 토할 때까지 먹었잖아요?”

“토할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뀔 리가 있겠어요?”

문루아 말은 일반적으로 맞았다. 사람은 보통 하루 만에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나만 해도 그랬다. 하루아침에 회귀하면서 인생이 바뀌었으니까 말이었다.

그리고 그 회귀자를 만난 아폴로 빈도 그 예외를 만난 셈이었다.

* * *

아폴로 빈이 이번에는 우리 둘에게 스케치를 보여줬다.

“이렇게 찍을 겁니다.”

파스타 집 둘째 아들과 옆 꽃집 직원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씬이었다. 눈을 빗자루로 쓸면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둘의 모습이 나왔다. 꽃집 직원이 둘째 아들에게 눈을 던지는 장난을 쳤다. 장난은 점점 눈싸움으로 번진다. 그러다가 꽃집 직원이 눈을 던지려는 의도가 과해 넘어지려는 걸 둘째 아들이 부축한다. 그리고 둘이 키스하면서 씬이 디졸브됐다.

말로 할 때는 애매하게 전달되던 아폴로 빈의 기획이 그림으로 보니 확실하게 이해가 되었다. 어떤 각도로 찍을지, 나와 문루아가 어떤 감정으로 이 장면에 임할지, 우리 둘의 동선이 어찌 될지 까지 모두 한눈에 보였다.

문루아는 말문이 막힌 듯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내가 물었다.

“뭐 문제 있으세요?”

“아니 이거요. 대본이 바뀌었네요? 원래는 당신이 저한테 편지를 전해주고. 그걸 읽던 나랑 눈이 마주치고 키스하고 그런 거였는데.”

그러고 보니 처음 읽었을 때 나도 그 부분이 좀 올드하단 생각이 들었었다.

“아 그러네요.”

문루아가 눈으로 대본을 살펴보며 말했다.

“그거. 솔직히 좀 별로였는데 바뀌었네요?”

아폴로 빈이 자랑스러운 듯 손을 하늘 위로 올리며 만세 포즈를 취했다. 한껏 과장된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가 열정에 차서는 말했다.

“솔직히 어제까지 그걸 못 느꼈습니다. 로맨틱한 줄 알았는데. 편지 고백은 루아 선배랑은 안 어울리더군요.”

문루아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랑 뭐가 어울리는데요?”

“루아 선배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를 콕 찜! 하는 스타일이죠?”

“그, 그걸 어떻게 알아요!”

“아니세요?”

“...말 안 해요!”

‘뭔가 문루아가 나를 흘겨보면서 말 하는 거 같은데 이건 착각이겠지?’

아폴로 빈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게 훨씬 두 분하고 어울립니다. 노을 군은 아주 시원하게~ 루아 선배가 던지는 눈에 맞아주면 됩니다. 눈 맞는 연기가 가장 중요해요. 눈덩이 맞으면서 둘이 눈 맞는 겁니다, 아시겠죠? 자! 그럼 갑니다~~”

문루아가 눈을 쓸었다. 나도 스케치북 콘티에서 보듯 등을 보이고 눈을 쓸었다. 그러다 등에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문루아가 빗자루로 눈을 휙 쓸어서 내게 보냈다. 콘티와 똑같은 장면이었다.

내가 콘티에서 봤던 짜증 나는 표정을 보여줬다. 그리곤 눈을 뭉쳐서 던졌다.

문루아는 휙 도망가더니 내게 눈 뭉치를 던졌다. 기가 막히게 내 가슴에 명중했다.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앗 차가워!”

문루아가 깔깔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런 말은 대본에 없네요~”

“방금 선배가 그 말 해서 이번 컷 못 쓰게 됐잖아요?”

문루아가 내게 눈 뭉치를 던지며 말했다.

“또 찍으면 되죠! 바보~”

눈 뭉치가 이번에는 내 허벅지에 명중했다. 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앗 차거! 선배 어제는 그렇게 촬영 길어진다고 싫었잖아요!”

“꺄하하하하하하!”

저렇게 크게 웃는 문루아는 처음이었다. 계속 문루아가 눈덩이를 던졌다. 계속 하염없이 나는 비명을 질렀다.

“앗 차거! 앗 차거!”

아무래도 촬영은 망했구나. 재촬영 각이구나 싶었을 때 아폴로 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좋~습니다. 이제 선배 다가가서 넘어지세요! 한 번에 갑시다~”

‘이게 괜찮다고?’

문루아가 가까이에 다가왔다. 빗자루로 눈을 어마무지하게 뿌리려는 듯 스윙 자세를 취했다.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하려고 리액션을 취하려는 순간… 문루아는 그림같이 내게 넘어졌다. 스케치에서 본 바로 그대로였다.

바로 내가 손을 들어 문루아를 잡았다. 문루아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아마도 추워서 그렇게 된 거겠지만 말이었다. 그리고 서서히… 입술이… 닿으려는 그 순간.

“컷!”

아폴로 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루아가 단발마 비명을 질렀다.

“앗!”

아폴로 빈이 태연하게 세트를 챙기며 말했다.

“두 분 너무 수고하셨어요. 끝났습니다.”

조안이 어느새 다가와서 나와 문루아에게 따뜻한 담요와 뜨거운 카푸치노를 주었다. 한 모금 커피를 마시자 몸이 금방 따뜻해졌다.

문루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해 말을 걸었다.

“일찍 끝나서 다행이죠 선배?”

문루아가 대답했다.

“무, 물론이죠. 빈이가 먼저 말 안 했으면 제가 멈추려고 했어요!”

“뭘요?”

“우… 아무것도 아니에요!”

문루아는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때 아폴로 빈이 해맑게 웃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지금 촬영본 봤는데요. 콘티보다 더 좋아요! 이대로 그대로 가겠습니다. 나머지는 인물 없이 눈 찍고 배경 찍고 그런 겁니다. 두 분 없이 갈게요. 차에라도 가서 쉬세요!”

하루 만에 아폴로 빈이 각성했다. 그때까지 하염없이 배우들과 제작진을 기다리게 하던 아폴로 빈이 이제는 기계처럼 착착 계산해서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장 효율적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아무래도 구체적으로 콘티를 그리면서 자연스럽게 스토리도 다듬고, 계획도 미리 머릿속에 그린 듯했다.

‘이거 내가 했지만, 내 조언이 꽤 효과가 있었는걸?’

왠지 앞으로의 촬영, 예감이 좋았다.

* * *

내 예감은 그대로 적중했다. 이후에는 촬영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매일 밤마다 아폴로 빈은 저녁 6시면 칼같이 촬영을 끝냈다. 그리고는 방에 틀어박혀서 다음 날 찍을 장면을 모두 스케치북에 콘티로 그려서 가지고 왔다. 이를 보고 제작진과 출연진이 그대로 촬영을 진행했다.

모두가 아폴로 빈의 명확한 뮤직비디오 아이디어를 이해하니 촬영이 금방 진행했다. 게다가 아폴로 빈은 이미 준비했던 대본을 임의로 마구 바꾸었다. 아무래도 아침, 점심을 출연진과 함께 먹으면서 하는 대화를 그대로 대본에 반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원래 수줍었던 환희 배역은, 먼저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역할로 바뀌었다. 재호 배역은 순둥이에서, 사랑도 하지만 레스토랑에 주인 욕심을 내기도 하는 야망남으로 바뀌었다. 분 단위로 시간을 지켜서 데이트하는 모습까지 재호 모습을 반영했다. 고미진 파트만 딱히 크게 바뀌지 않았다.

너무 효율적으로 진행하는 바람에, 촬영 일자가 딱 하루 비어 버렸다. 아폴로 빈은 하루를 어떻게 쓸지는 본인이 내일 알려 주겠다고 말했다. 뭔가 깜짝 계획이 있는 모양이었다.

‘게릴라 콘서트라도 하나? 아 그건 90년대인가?’

mp3를 자꾸 만지작거렸다. 미래가 궁금했다. 하지만 미래를 보는 일에는 중독성이 있었다. 명확한 이유가 없이는 미래를 보는 기능은 사용하지 않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다. 단순한 호기심은 이유가 안 됐다.

“끄응~~”

평소에는 잠을 그냥 일반적으로 7~8시간씩 잤다. 하지만 왠지 오늘은 새벽을 효율적으로 써보고 싶어 ‘위버멘시의 회복력'을 사용했다. 뮤비를 찍을 때 스케쥴이 워낙 빡빡하고 밤샘 촬영은 일상이라 들어서 ‘위버멘시의 회복력'이 유용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별것 없었다. 매일 저녁 6~7시면 촬영이 끝나고 다음 날 아침 7시부터 준비하면 충분했다.

“그럼 오늘은 오랜만에 한번 신보나 체크해볼까? 어디 보자…”

mp3를 켜고 하나씩 신보를 살펴보려던 참이었다. 어딘가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복도에, 침입자가 온 듯했다.

'누구지??‘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