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소인중이 태연하게 말했다.
“우연이네욥!”
‘웃기고 있네.’
슬쩍 화장실을 다시 확인했다. 분명 촬영 중인 레스토랑 1층의 화장실이었다. 내부에 들어올 수 있는 건 직원과 관계자뿐이었다. 모니카에게는 조앤이 이미 이야기를 해 두었다. 어딘가에 소인중의 끄나풀이 또 있는 게 틀림없었다.
소인중에게 툭 말을 내뱉었다.
“어떻게 또 들어 오셨죠? 사람 부르겠습니다.”
“아아. 잠시만. 지금 나가려고 하는데 너무하시네에~.”
이제는 반말이었다.
“그럼 나가주시죠.”
“권노을 씨 너무 차가운 거 아니에요? 딱히 제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나는 묵묵하게 휴지로 재킷을 닦았다. 차라리 이깟 휴지 가지러 오지 말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인중은 계속 내게 말을 걸었다.
“그날은 왜 나갔어요? 나한테 말도 없이. 예의가 없으시네.”
처음 소인중을 만났던 그 날을 말하는 듯했다. 밴드마스터 초대로 온 식사 자리에서 소인중을 만났었다. 박찬용 드러머 핑계로 슬쩍 도망쳤지만 말이었다.
그날 나간 이후로 단장에게 사과 전화를 받았었다. 나보다 한참 선배가 사과할 필요성을 느낄 정도로 소인중은 대놓고 나에게 영업했었다.
그리고 지금. 방송 촬영 중에 불쑥 화장실에 들어와서 내게 예의를 따지는 모습이 과히 예의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말을 한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라고 판단해,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소인중이 살짝 내게 뭔가를 속삭였다.
“잘 생각해 봐요. 다 당신처럼 팀 활동을 좋아하진 않아. 재호 씨는 당신보고 ‘쌍팔년대 고음 보컬이라 곡 쓰기 부담스럽다'라는데?”
“나가라고 세 번이나 말했을 텐데요. 사람 부르겠습니다. 저기요! 여기 괴한이 있는데요?”
“쳇!”
내가 직원을 부르자 소인중은 재빠르게 어딘가로 사라졌다. 직원들이 왔을 때는 이미 소인중은 어딘가로 사라져 있었다. 왠지 직원들 중 하나가 슬쩍 소인중을 숨겨 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건 그렇고, 재호가 나를 쌍팔년대 고음 보컬이라 그랬다고?’
* * *
‘쌍팔년대 고음 보컬'이란 말은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남았다. 뭔가, 내 안에 어떤 열등감을 자극하는 듯한 말이었다.
분명 내 성량과 고음은 장기였다. 하지만 벌써 2000년도 후반기로 돌입하고 있었다. 이미 유행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미국은 이미 성량보다는 느낌으로 가는 가수들이 유행했다. 한국도 곧 그렇게 될 예정이었다. 그렇다면 두꺼운 목소리와 큰 성량으로 밀어붙이는 고음이 특기인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물론 나는 이미 해답을 세워둔 상태였다. 2020년대에도 고음 보컬의 수요는 존재했다. 어설프게 유행을 따라가기보다 나만의 특기를 최대한 살려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쌍팔년도 고음 보컬'이란 말에는 솔직히 좀 감정이 몰려왔다. 거기다가 조금은, 재호가 원망스러워지기도 했다. 소인중이 나에게 ‘재호가 그렇게 말했다'라고 전달한 것만 가지고도 말이다.
다행히도 나는 그 말이 소인중의 거짓말임을 알았다.
범죄로 소인중이 잡혀 들어가자, 그때까지 소인중이 제작했던 아이돌, 가수, 배우들이 모두 들고일어났다. 지금껏 소인중이 잘 나갈 때는 말하지 못했던 으스스한 뒷이야기가 잔뜩 공개된 것이었다. 작곡가의 저작권료를 중간에 삥땅 쳤다던가, 자신의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좋은 배역을 빼앗는다든가 하는 식의 일들이었다.
‘그중 압권이 아이돌팀이었지.’
소인중이 제작한 아이돌 팀 ‘도밍고'는 순식간에 와해되었다. 팀원들끼리 서로 싸워서였다. 알고 보니 싸움의 이유는 소인중이었다. 소인중이 멤버들에게 서로가 서로에게 뒷담화를 했다고 거짓말했다. 그 이간질 속에서 모든 멤버가 서로 싸우고, 모두가 ‘자신에게만' 의지하기를 바라서 한 짓거리였다.
황당하게도 그의 작전은 먹혔다. 정말 ‘도밍고'의 멤버들은 모두 소인중을 믿었다. 그리고 서로 불신했다. 아이러니하게도, 해체 직전이었던 도밍고는 소인중이 잡혀 들어가자 기적적으로 회생했다. 소인중 없이 모이자 서로의 오해가 모두 소인중의 이간질의 결과임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떠올리고 나니, 소인중의 이야기의 본질이 보였다. 또 거짓말을 한 셈이었다.
소인중의 미래를 안 나조차도, 소인중의 이간질에 감정적으로 반응했다. 만약 미래를 몰랐다면 어찌 되었을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교묘한 이간질의 위력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소인중의 잔기술 레시피를 모두 아는 내게는 먹히지 않았다.
싱글싱글 웃으며 식탁에 다시 앉았다. 어느새 재호도 식탁에 앉아서 수란을 먹고 있었다.
재호가 나를 보고 물었다.
“뭐 기분 좋은 일 있어? 실실 웃네?”
“아 뭐 그런 일이 있어서. 아 그리고 니들 말이야. 내가 미리 해줄 말이 있는데. 환희, 너도 좀 들어봐.”
마치 종교의식을 치르듯, 심각하게 스파게티를 포크로 빙글빙글 말고 있던 환희가 나를 쳐다보고 질문했다.
“뭔데요 횽?”
둘에게 화장실에서 소인중을 봤다고 말해 주었다. 내가 미래에서 얻은 정보 외에는 모두 공개했다. 정확하게 소인중이 어떤 사람인지, 왜 우리를 만나려 하는지, 그리고 소인중이 나에게 재호가 내 뒷담화를 했다고 말했다는 것까지 모두 알려줬다.
잠자코 듣고 있던 재호가 갑자기 책상을 손바닥으로 탕! 치며 말했다.
“뭔소리야. 그런 말 안 했어. 난 그 사람 본 적도 없다구!”
“알고 있어. 근데 머리로 이미 알고 있어도 가슴속에서 응어리가 생기더라고. 아, 이렇게 사람을 이간질하는구나 싶었지.”
내가 재호 편을 들자 재호가 갑자기 안심이 되었는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그지? 나는 너처럼 고음이 올라가면 원이 없겠다 야.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구.”
“그래그래. 믿어.”
재호가 침묵을 지키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다.”
‘짜식.’
나는 고개를 끄덕여 재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말을 이었다.
“여튼,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이간질을 시도할 거야.”
환희가 내게 물었다.
“근데요 횽. 왜 그렇게 막아야 해요?”
내가 살짝 눈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여튼 계약 제안은 많을수록 좋은 거자나요. 그럴수록 다른 제안에서 저희 몸값을 불리기도 좋은 거니까. 게다가 그 사람, 여튼 실력은 있는 사람이라던데 같이 해볼 수도 있구요.”
“그건 안돼!”
“왜여?”
‘내가 미래에서 왔는데 걔 미래가 똥망이야'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대신 다른 핑계를 댔다.
“우리 슈퍼스타 오디션 할 때 박찬용 드러머 기억나?”
“알죠 횽.”
“소인중 처음 만났을 때, 그분 만났어.”
“대단하시네요 횽. 선배님도 만나시고.”
“그분 말이. 뭔가 소인중 그 사람 성공 비법이 수상하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내가 또 개인적인 인맥을 써서 좀 알아봤는데. 수상해. 뭐랄까, 합법이 아닌 것만 같은 방식이 많아. 언제 무너질지 몰라.”
환희가 미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내게 질문했다.
“그게 설사 불법이라도 횽이 그렇게 쉽게 조사해서 알 수 이쓸까여?”
재호가 탄산수를 마신 입을 냅킨으로 닦으며 말했다.
나도 노을이 의견에 찬성이야. 뭔가 쎄하면 피하는 게 상책이지. 연예인은 한번 범죄랑 잘못 엮이면 끝장이라구. 조심해서 나쁠 건 없거덩~.”
“음…”
내가 둘에게 말했다.
“일단은 TYB와 약속한 계약까지는 성실하게 끝내고, 그다음에 다른 기획사 계약을 받아보자. 어차피 두 곡은 여기서 해야 하잖아? 그게 성적이 좋아야 어디를 가든 좋은 조건으로 가지. 여기저기 벌써부터 조건 물어보는 것보다 그게 더 우리 계약 조건을 좋게 바꾸는 방법 같은데?”
그 말에는 환희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일단 그래요 횽.”
다행히 멤버들이 나를 믿어 주었다. 오디션을 거치면서 쌓은 신뢰가 주효했다. 이게 아니었으면 소인중이 어떤 사람인지 내가 미래를 안다는 사실을 최대한 피하면서 설명해야 했다. 다행히 그럴 필요는 없어 보였다. 박찬용 선배가 내게 보여 준 소인중에 대한 우려를 둘에게 알려 주는 것으로 충분했다.
한숨은 돌렸지만 그래도 걱정은 계속되었다. 소인중이 점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찾아오고 있었다. 좀 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조안과 좀 더 이야기를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내가 여러 고민을 하고 있는 사이, 환희가 재호에게 물었다.
“횽. 횽 파트는 다 찍었어요?”
재호가 푸욱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야. 말도 마. 똑같은 장면을 몇 번이나 찍는 건지. 게다가 오늘 찍은 거 대부분 맘에 안 든다고 날린댔다구.”
환희가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그걸 다 날려요? 왜요?”
“몰라 자기가 생각했던 그림이 아니래. 이래 가지구 기간 내에 맞출 수 있겠냐?”
뭐, 아직 하루밖에 안 지났고. 사실 미리 우리에게 전달된 스케쥴은 아슬아슬 지켜지고 있었다. 하지만 뭔가 아폴로 빈의 방식이 자기 팀이 아닌, 바깥사람들에게는 좀 이상하긴 한 모양이었다.
환희가 내게 말을 걸었다.
“내일은 횽 차례에요. 아침부터.”
“알아.”
“루아 누나도 같이 찍져?”
“그래.”
“뭔 내용이에여?”
“뭐 뻔한 내용이야. 둘째 아들이 바깥을 쓸다가 옆에 꽃집에 직원인 사랑에 빠지고 그런 거야.”
재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게 다가 아닐 텐데?”
“뭐가 아니야. 그게 단데.”
“너는 키스씬 있잖아?”
환희의 입이 딱! 하고 벌어졌다.
“뭐라고요?”
둘이 리액션이 워낙 크니까 나까지 당황했다.
“응? 뭐야? 다들 그 정도는 있지 않아? 웬 호들갑이야?”
“저흰 없어요 횽!”
“게다가 아시아의 달! 아시아 최고의 아이돌 문루아라구! 놀라는 게 당연하잖아?”
“아니 그래 봐야 연기인데 왜 이리 호들갑이야? 초등학생도 아니고.”
환희는 물론, 맨날 쿨했던 재호도 이런 반응인 걸 보니. 아무래도 상당히 충격적인 장면인 모양이었다. 대중들 사이에서도 큰 화제가 될 터였다. 그게 적어도 뮤직비디오의 성공에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아마도 그게 아폴로 빈의 노림수가 아닐까 싶었다.
‘아폴로 빈. 머리는 좋네. 왠지 화제가 되는 만큼 좀 성가시게 될 것 같지만.’
괜히 미래에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대박을 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그때, 재호가 무심코 한마디를 했다.
“근데 내가 오늘 촬영했던 식으로 찍으면 키스를 20번은 넘게 해야 할걸? 계속 재촬영 했거덩~.”
“뭐어?”
* * *
저녁을 먹은 후 저녁 단체 촬영까지 끝났다 TYB는 상당히 넉넉하게 촬영 스케쥴을 잡는 편이었다. 촉박한 뮤직비디오 촬영 시에도 잠은 호텔에서 8시간 자게 해주었다.
침대에 누웠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사실 오늘 저녁 촬영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재호의 말 때문이었다.
<내가 오늘 촬영했던 식으로 찍으면 키스를 20번은 넘게 해야 할걸?>
…왜인지 모르겠지만 문루아는 오늘도 촬영이 지연되자 화를 냈었다. 심지어 키스씬이 그렇게 지연됐다가는 촬영장이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다. 내일 수월하게 촬영을 마치려면 그보다는 더 효율적으로 진행해야 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싶었다. 문을 잠그고 슬쩍 mp3를 살펴봤다,
그리고 화면을 보다 뭔가를 발견했다. 씨익 미소가 지어졌다.
이거면 내일 촬영을 더 수월하게 진행하게 할 수 있을 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