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갑자기 모니카와 환희가 사라졌다. TYB 직원들이 서슬 퍼렇게 지켜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조안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바깥으로 나갔다. 환희를 찾기 위해서였다.
재호는 아폴로 빈과 함께 촬영 중이었다. 문루아와 고미진 만 테이블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TYB의 다른 직원들도 함께였다.
나는 잠시 화장실을 가겠다고 직원에게 양해를 구하고 나갔다. 고급 레스토랑이다 보니 화장실도 고급스러웠다.
그때, 화장실 옆에 지하로 가는 계단에서 뭔가가 느껴졌다. 그쪽에서 아주 작게 환희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소근소근… 소근소근…
분명 환희의 목소리였다. 성큼성큼 지하로 들어가 지하실 문을 열었다.
환희와 모니카가 지하실에 서 있었다. 벽에는 현대 미술처럼 보이는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환희가 태평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했다.
“오 와써요 횽?”
환희의 태연한 모습에 나는 살짝 날 선 대답을 했다.
“뭐하냐 임마.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잖아?”
“왜요 횽? 직원분이랑 같이 왔는데… 어? 사라졌네여?”
뭔가 이상했다. 환희는 태평한 놈이고, 좀 대책 없는 놈이지만, 굳이 이런 거짓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정말 직원이 함께 갔다면 별일도 아니었다. 근데 그 직원이 슬쩍 지하실에서 사라졌다는 게 좀 이상했다.
‘히트맨이라거나? 아니 그럴 리는 없고. ‘대부'를 너무 많이 봤군.’
하지만 뭔가 그 직원이 수상하긴 했다. 그때였다. 지하실 반대편에서 뚜벅뚜벅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양복 차림의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오랜만이네욥.”
저 재수 없는 말투, 기억이 났다. 소인중이었다. 한껏 멋을 낸 정장에 코트, 거기다 피처럼 붉은 셔츠를 입었다. 머리를 올백으로 넘겨서 한층 비열해 보였다.
저 사람이 지금 여기에 왜 와 있는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확실한 건 그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불쾌하게 만든다는 사실이었다.
“여기에 당신이 왜 오셨죠?”
소인중이 가죽 장갑을 만지작만지작하며 내게 대답했다. 주변에는 좋게 말해서 매니저, 나쁘게 말하면 어깨… 로 보이는 현지인 남자들로 가득했다.
“이전에는 왜 갑자기 사라지셨나욥? 그건 예의가 아니죠.”
소인중이 슬슬 내게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의도적으로 내게 잘 해주려는 비굴한 느낌이었다면. 이제는 빈정대는 느낌이 목소리에 묻어났다.
내가 최대한 간결하게 답했다.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요. 여기에 왜 오셨죠?”
소인중이 손가락으로 모니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에게 물어 보세욥.”
환희의 눈빛이 번득였다. 살짝, 소심한 주하늘의 모습이 느껴졌다. 그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모니카에게 물었다.
“모니카? 네가.. 나를 판 거야?”
모니카가 손으로 X자를 만들며 말했다.
“노노! JH 오해야. 저 사람. 내 에이전트야. TYB 현지에 날 소개해줬어. 내 에이전트니까 내가 어디 있는지 알려준 거뿐이야.”
상황이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모니카는 모델 에이전트 소속으로 자연스럽게 소인중을 거쳐, TYB의 유럽 지부와 연결된 모양이었다. 소인중은 그 정보를 이용하여, 비원더가 어디 있는지 알아냈다. 그렇게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는 게 틀림없었다.
아마 처음에는 나를 설득하려 했는데 내가 도망치자, 이번에는 환희를 꼬셔보기 위해 온 것일 터였다.
소인중이 나직하게 말했다.
“그냥 서로 알고 지내면 좋으니까욥. 이탈리아에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욥. 그 말 하러 온 겁니다.”
내가 최대한 감정을 죽이고 나직하게 대답했다.
“감사합니다만. 그건 TYB가 할 겁니다. 아직 계약 기간인데 다른 기획사와 만나는 건 부적절한 것 같네요.”
소인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부적절하기도 하지만. 지혜로운 일이기도 하지 않을까욥?”
소인중은 최대한 부드럽게 말을 했지만, 내게는 무자비한 말로 들렸다.
나는 소인중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필요하다면 선을 넘는 사람이었다. 그게 좋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은 카르마로 돌아왔다. 그가 왜 성공만큼 빠르게 몰락했는지 이제 대충 짐작이 되었다.
뭔가 말을 꺼내려는 환희를 일단 손을 들어 말을 제재했다. 그리고 소인중에게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촬영 중이라서요.”
“죄송합니다만 볼 일이 있는 쪽은 노을 님이 아니라서욥. 환희 님입니닷.”
그러면서 소인중은 손가락을 들어 환희를 가리켰다. 환희가 무심코 대답했다.
“저요?”
소인중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말했다.
“환희 님은 방금 촬영 끝났으니 시간 있으시죱?”
‘이 녀석. 촬영현장을 완전히 꿰뚫고 있잖아?’
촬영현장 내에 모니카 외에도 정보원이 있던 게 분명했다.
환희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내가 대신 답했다.
“그건 당신이 정할 게 아닙니다. 우리 회사 직원하고 이야기하시죠.”
“호오? 뭔가요 노을 님? 마치 비원더 멤버가 아니라. TYB에 동료를 팔아넘기는 끄나풀로 보이는 데욥? 내가 틀렸나욥?”
소인중의 얼굴이 굳어졌다. 최대한 세련되게 숨겼지만, 눈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그때였다. 쩌렁쩌렁한 이탈리아어가 지하실에 울려 퍼졌다.
“동작 그만~. 나가주셔야겠습니다!”
조안이었다.
소인중이 슬쩍 비웃음을 얼굴에 띄우고는 말했다.
“운이 좋았군욥 노을 군. 환희 님 당신은 운이 나빴고욥. 오늘은 이만 가도록 하죠. 또 뵈욥.”
그리고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뱀처럼 스르륵 사라졌다.
사실 소인중이 틀렸다. 운이 좋았던 게 아니었다. 내가 미리 소인중과 말하는 틈을 타 미리 적어 둔 문자 메시지를 조안에게 보냈을 뿐이었다.
조안이 환희를 보자마자 대노하여 손을 휘두르며 말했다.
“JH! 뭐 하는 거예요! 아무 말 없이 사라지면 어떻게 해요!”
환희와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모니카가 이탈리아어로 조안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워낙 말이 빠르고 감정의 진폭이 커서, 지금 내 이탈리아어 실력으로는 해석이 어려웠다. 더듬더듬 들은 말로는 대충 ‘분명 우리는 TYB 직원 대동하고 왔는데 그 직원이 사라져 버리고 저 사람이 왔다. 나를 TYB에 연결해준 에이전트다. 아무래도 저 사람 편이 지부에 있는 거 같다.’라는 내용이었다.
내용을 다 들은 조안이 바로 우리에게 말했다.
“앞으로 모르는 사람이 오면 제게 알려 주세요.”
내가 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앞으로는 어쩌실 건가요?”
“저희 직원들을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문제가 있겠네요.”
한자어를 잘 못 써서 문장이 좀 어색했지만 어떤 뜻인지 느껴졌다. 백 그라운드 체크를 하겠다는 뜻일 터였다.
내가 말을 이었다.
“저희랑 말하려는 사람은 소인중이라는 사람입니다. 아시아에서는 유명한 제작자예요. 그 사람과 연관이 되어 있는 사람이 있는지 알아보시면 좋을 거 같네요.”
조안이 나를 0.5초 정도 잠깐 바라보더니 말했다.
“그라치에.(고마워요)”
* * *
위에 올라가니, 레스토랑에 저녁상이 활짝 펴져 있었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저녁 6시라 식사를 할 시간이긴 했다. 문루아와 고미진, 아폴로 빈이 같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조안이 우리에게 말했다.
“벌써 저녁 타임이네요. 저는 일이 있으니 여기서 잠시 계세요. 모니카, 같이 가요.”
조안은 모니카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환희는 팔자 좋게 이미 식탁에 앉아서 먹을 채비를 시작했다. 정말 먹성이 좋은 놈이었다. 사실 나는 아직 배가 불렀다.
‘이거 뭐 하루종일 먹기만 하는 촬영이네.’
애초에 음식 영화를 모티브로 뮤직비디오를 찍겠다는 아이디어를 낸 건 나였다.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체념하고 옆자리에 앉았다.
배가 불러서 그렇지, 정말 맛있는 음식들로 가득했다. 소고기 커틀릿부터 라비올리까지, 온갖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이탈리아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다.
고미진이 우리가 앉은 자리를 보며 말했다.
“아이구! 왔어요? 좀 들어요.”
내가 손을 저었다.
“아 저는 아직 배가 안 꺼져서요. 감사합니다. 재호는 어디에 있나요?”
“재호 씨는 잠시 옷 갈아입으러 갔어요. 촬영은 잘 끝났어요.”
“그럼 벌써 저녁 시간인가요?”
“아 배부르죠 아직? 비니는 벌써 10시간째 아무것도 못 먹어서.”
환희가 불쑥 고미진에게 물었다.
“아폴로랑 루아 선배 뭐 하는 거예요? 딱히 아폴로가 뭘 먹는 거 같진 않은데요.”
고미진 선배가 고개를 돌려 둘을 보더니 대답했다.
“아~ 저거요.”
둘이 뭔가 매우 비밀스럽게 사담을 나누고 있었다. 문루아는 조용하게 뭔가를 말하고 있었고, 아폴로 빈은 그걸 묵묵히 들으면서 노트북으로 뭔가를 타이핑하고 있었다. 식사는 뒷전이었다.
환희가 대답했다.
“표정이 저렇게 진지하지 않았으면 무슨 데이트인 줄 알았게써여.”
고미진이 푸훗 웃으며 대답했다.
“대본을 수정 중일 거예요.”
내가 반문했다.
“대본이요? 왜요?”
“제가 제안했어요. 저는 배우지만, 다른 분들은 다들 연기자가 아니니까. 가급적 촬영이 배우에 맞춰주면 좋겠다~ 라고요.”
“그래서 대본을 바꾸는 거군요,.”
물을 한 모금 넘겼다. 또 탄산수였다. 아직까지는 지겹지 않은데, 1주일간 안 지겨울 자신은 없었다.
탄산수의 거품의 살짝 따가운 자극을 목으로 느끼며 슬쩍 문루아와 아폴로 빈을 봤다. 문루아는 한창 집중해서 뭐라고 뭐라고 말하고 있었다. 고개는 거의 푹 숙인 채로였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가 고개를 휙 들었고, 나와 눈이 마주쳤다.
문루아가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아아! 너희들. 아니, 당신들 언제 왔어? 요?”
문루아 답지 않게 엄청나게 당황한 표정이었다. 환희가 무심하게 대답했다.
“방금 전에여 누나.”
문루아가 얼굴이 빨개져서는 내게 말했다.
“들었어요?”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환희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안 들렸어요. 웅얼웅얼 이 정도 느낌? 이여써여.”
문루아는 0.1초 정도 환희에게 눈을 흘기더니 다시 내게 고개를 돌리고 물었다.
“들었냐구요!”
“안 들렸습니다.”
문루아가 후우~ 하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말했다.
“이 정도면 됐죠?”
아폴로 빈이 말했다.
“선배! 밥은요?”
“이거면 됐어요.”
문루아가 샐러드가 담긴 보울 하나를 보여주며 말했다. 저거 하나를 먹고 식사를 끝내려는 모양이었다.
환희가 방긋 웃으며 아폴로 빈에게 물었다.
“둘이 무슨 얘기 해써?”
“아 그건…”
아폴로 빈이 뭐라 말하려 하자 문루아가 아폴로 빈 입을 막으며 말했다.
“비.밀.이.라.고.요.”
아폴로 빈은 10초 정도 문루아에게 헤드락을 당한 뒤에야 풀려났다.
문루아가 다시 사라지자 환희가 또 해맑게 물었다.
“대본 바꾸면 더 괜찮을 거 같냐?”
“머 그렇지. 니도 내가 딱 니같이 쓰니까, 촬영이 술술 되잖아. 그런 거야.”
“나같이? 짜식. 나 같은 게 뭔데?”
둘이 다시 틱틱 말싸움을 시작했다. 진짜 화가 난 기색은 둘 다 없었다. 아무래도 이 두 놈은 원래 이러고 노는 놈들인 모양이었다.
둘이 서로 노는 사이에 나는 소인중에 대해 생각했다. 그의 집요함과 선을 넘는 과단성은 이미 실컷 느꼈다. 그게 아마 그의 빠른 성공의 비결이었을 터였다. 하지만 미래를 아는 내게는 보였다. 그의 끈기와 결단력이 선을 넘게 되면서 그는 몰락했다.
끈기도 좋고, 과감함도 좋았다. 하지만 이를 잘못된 방식으로. 선을 지키지 않으며 사용하면 반드시 모래성처럼 무너지게 되어 있었다.
‘능력 이전에, 확실한 기준이 서야 한다는 뜻인가?’
사실, 이전 생에서도 노래 실력은 좋지만 온갖 잘못된 일을 하며 인생을 낭비하는 인생을 많이 봐서 익숙했다.
소인중을 생각하니 목이 탔다. 무심코 손에 잡히는 물병의 물을 마셨다.
“켁!”
탄산수란 걸 잊고 무심코 물을 마셨다가 깜짝 놀랐다. 살짝 탄산수가 엎어져서 조끼를 조금 적셨다.
“아… 이거 닦아야겠네요. 휴지 있나요?”
아폴로 빈이 화장실을 가리키며 말했다.
“촬영 중이라 치워놨어요. 계단 옆 화장실에 휴지가 많이 있어요. 그걸로 닦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방금 갔었던 바로 그 화장실로 다시 들어왔다. 벌써 두 번째지만 정말 익숙해지지 않는 화장실이었다. 으리으리했다. 모든 부분이 고급 금, 거울, 그리고 대리석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나까지 황송해질 정도였다.
휴지로 슥슥 조끼를 닦아냈다. 고급 화장실에 있으니 왠지 휴지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감촉이 왠지 조금 더 부드럽게 느껴졌다.
‘응?’
그때였다. 뭔가 등 뼈를 타고 ‘찌릿'하고 뭔가 안 좋은 느낌이 들었다. 인기척이 느껴졌다. 화장실 안에 누군가가 있었다.
그때였다. 내 등 뒤에 화장실 칸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또 소인중이 서 있었다.
‘또 너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