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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왕-77화 (77/280)

제77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고미진이 레스토랑 문을 박차고 나갔다. 일단 나도 따라갔다. 비원더에게 말할 틈도 없었다.

고미진은 좋게 말하자면 굉장히 순수한 성격으로 보였다. 나쁘게 말하자면, 약간 폭탄 같은 엉뚱한 성격으로 보이기도 했다. 촬영을 계속 리딩하느라 날카로워져 있는 아폴로 빈과 부딪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아폴로 빈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아폴로 빈이 나중에 뮤비 감독으로 잘 나간다는 사실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폴로 빈이 어떤 뮤직비디오 감독이었는지 내일 새벽에 좀 더 알아봐야겠어.’

준비의 필요성을 통감하며 고미진 옆으로 다가갔다. 레스토랑 입구 앞이었다.

고미진이 나를 불쑥 쳐다보며 말했다.

“어머~ 노을 씨도 따라오는 거예요?”

“네네. 아폴로 빈과 무슨 말을 하시려나 싶어서.”

고미진이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배우들이 이런 점을 어려워한다고 말해야지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지시했으면 좋겠다고 말하고요.”

너무 당연해서 솔직히 그런다고 먹힌다고 선뜻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물었다.

“그런다고 될까요?”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해답이 보여요오~.”

고미진은 해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뭔가 선뜻 믿겨지지가 않았다.

내게 설득이란, 엄청난 연구와 계획의 결과였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mp3로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머릿속에서 상대방의 성향을 감안해서 끊임없이 시뮬레이션을 해봤다. 설득을 할 때도 상대의 반응을 보면서 끊임없이 전략을 수정했다.

그냥 ‘솔직하게 이야기한다'는 생각은 잘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라면 절대 못 할 발상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왠지 고미진은 해낼 것 같았다. 그녀가 나를 슬쩍 레스토랑 안으로 밀며 말했다.

“촬영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노을 씨는 들어가서 좀 쉬어요. 제가 이야기할게요.”

“감독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내 눈에는 아폴로 빈은 보이지 않았다.

“아유~ 비니는 차 안에 있겄쥬. 금방 갈게요.”

재벌집 영애 같은 귀품있는 외모에 비해, 말투는 정말 걸쭉했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단골 드라마 주연 배우였던 그 고미진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하얀 피부 위의 짙은 눈썹. 요정 같은 이목구비의 얼굴을 보니 고미진은 맞았다.

일단 고미진이 나가서 쓰으윽 카니발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누군가가 카메라로 그 모습을 찍고 있었다.

노경진 PD가 불쑥 내 옆으로 걸어와 말을 걸었다.

“봤어요?”

내가 대답했다.

“카메라요?”

“역시 봤군요.”

노경진 PD가 한숨을 쉬더니 내게 물병을 하나 건넸다. 잠자코 받으며 내가 물었다.

“좀 불편한 갈등인데. 이런 것도 찍으실 건가요?”

“혹시 모르니까요. 뮤직비디오 촬영 과정을 담는 예능인데. 좀 새로운 시도에요. 그래서 얼마나 리얼하게 갈지. 어디까지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차피 최종본은 TYB에서 검수할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렇겠군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얼마나 MSG를 쳐야 할지. 저는 대본을 들고 와서 비원더 분들 연기시키고 싶진 않아서. 좀 리얼리티가 있었으면 해요. 시청자는 그런 거에 감동받거든요.”

2005년이었다. 아직 예능에 대본이 판칠 때였다. 뮤직비디오를 찍는 과정을 예능으로 만드는 일은 2005년 기준으로는 상당히 새로운 시도였다. 노경진 PD의 고민을 알 것도 같았다.

게다가, 뮤직넷 제작진의 목표는 어차피 비원더의 성공일 터였다. 오디션 프로의 성공은 결국 오디션 출신 가수들의 성공과 연동되니 말이었다. 우리에게 피해를 주는 내용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약간 안심을 하며 노경진 PD가 준 생수병을 땄다.

푸쉬이이이이익!

“뭐, 뭐야!”

탄산수였다.

“아 그거 탄산수에요.”

노경진 PD가 뒤늦게 무심하게 말했다.

탄산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말했다.

“탄산수를 주시다니 특이하네요. 탄산수 좋아하세요?”

“노을 군. 유럽은 물이 한국처럼 좋지가 않아요. 대부분 석회질이 많아서 못 마셔요. 수돗물 먹으면 안 돼요. 그래서 여기 사람들은 탄산수를 물처럼 마신대요.”

“아…”

그렇다는 뜻은 앞으로도 계속, 촬영하는 동안 탄산수를 마셔야 한다는 뜻이었다. 노경진 PD가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탄산수 안 좋아해요?”

대충 기억을 더듬어가며 말했다.

“10년 전에는 싫어했는데. 요새는 뭐 그냥저냥 먹긴 합니다.”

“와 노을 군 집은 초등학교 때부터 탄산수를 먹었어요? 부자였나 보네.”

아차. 아무리 그래도 90년대에, 초등학생이 탄산수를 마셨을 리가 없었다. 10년 전이란 건 이전 생 이야기였다.

“아 그 그건 아니고! 어쩌다 탄산수를 먹어본 적이 한 번 있었어서요! 하하하.”

“네에 그래요… 여튼 유럽에선 어쩔 수 없어요. 좀 참으세요. 저도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마시다 보면 괜찮아져요."

"알겠습니다."

"외국 활동이 그런 게 어렵죠. 그럼 저는 잠깐 실례할게요.”

노경진 PD가 바로 레스토랑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촬영 현장을 확인하려는 모양이었다.

사실은 회귀 전, 20대에 탄산수를 별로 안 좋아하다 이제는 그냥 좋지도 싫지도 않은 단계까지 왔었다.

하지만 솔직히 탄산수를 맹물 대신 계속 마실 생각을 하니 좀 답답해지긴 했다. 입속에는 아직도 지겹게 먹은 까르보나라의 풍미가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에 온 지 몇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슬슬 향수병이 도지려고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이렇게 아름다운 베네치아에서 말이야~.’

* * *

걱정과는 달리 아폴로 빈과 고미진은 금방 레스토랑으로 돌아왔다. 아폴로 빈의 표정이 예전보다 한결 밝아져 있었다.

아폴로 빈이 오자마자 폭탄 발언을 했다.

“까르보나라 식사 장면은 그만 찍겠습니다.”

문루아가 최대한 티 나지 않게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 뮤직비디오 감독으로서 체면을 살려주려 TYB 가수 한참 선배로서의 본능적인 감정을 최대한 참는 듯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리액션이 엄청 중요하다면서요.”

“제가 편집자랑 잘 만들어 보겠습니다. 생각해보니까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자연광 각도나 광도가 너무 달라져서 어차피 더 찍어봐야 화면들끼리 안 붙어요. 이번에는 야누스의 씬 찍을게요.”

‘남녀본색' 뮤직비디오에서는 비원더 멤버 3인이 모두 러브라인이 있었다. 내 상대역은 문루아였고, 재호의 상대역으로 신인 여배우도 한 명 미리 소개받았다. 환희만 상대역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내 상대역은?”

“야누스는 딱 니한테 맞는 사람 섭외해놔찌~”

아폴로 빈이 능글맞게 대답했다.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때, 고미진이 레스토랑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 저기 오셨네.”

외국인 여성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175를 훌쩍 넘는 키에 늘씬한 체격이 누가 봐도 모델이었다. 그녀는 이탈리아어를 섞어서 영어로 말했다.

“부오노지오로~(좋은 오후). 모니카예요.”

환희 얼굴을 슬쩍 봤다. 아주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가 능숙한 영어로 해답했다.

“내가 이번 촬영 상대역이야. JH라고 불러줘.”

환희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났다. 그때도 외국 여성과 찐한 키스를 나누고 있었다. 지금 벌써 자기소개 멘트만 봐도 ‘환희'라는 자기 예명을 발음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해본 사람의 연륜(?)이 느껴졌다.

아폴로 빈이 앞으로 나서서 둘에게 말했다.

“자자! 둘은 주방 뒤쪽에서 촬영할 겁니다. 야누스는 주방 보조! 모니카는 웨이터리스! 의상 준비하고 바로 주방으로 와요.”

환희는 아폴로 빈의 말이 안 들리는 모양이었다. 연신 모니카와 눈을 마주쳐가며 대화를 했다.

“마이 스페이스 해?”

모니카가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한국에도 마이 스페이스가 있어?”

“나는 해.”

보다 못한 재호가 한마디 했다.

“야야. 환희 너. 오바 그만하구 옷부터 갈아입어. 빨리!”

간신히 아쉬운 듯 환희는 탈의실로 갔다.

재호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뭔가 좀 불안하지 않냐 이거?”

“그러게.”

뮤비 감독 아폴로 빈은 완벽주의로 3시간 넘게 먹는 장면을 찍지 않나. 주환희는 아예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 있지 않나. 뭔가 여러모로 걱정되는 변수가 하나하나 늘어가는 기분이었다.

* * *

놀랍게도 환희의 촬영분은 벼락처럼 진행됐다. 그럴 만도 했다. 환희와 모니카의 데이트 씬은 사실상 연기가 아니었다. 그냥 현실이었다. 리얼 예능을 촬영하는 수준도 아니고, CCTV라고 보면 됐다.

촬영하는 부분은 환희가 모니카와 함께 레스토랑에서 일하면서 조금씩 친밀감이 생기는 내용이었다, 모든 장면들이 거의 2~3컷 만에 다 오케이가 났다. 내가 봐도 연기 수정이 거의 필요 없는 수준이었다. 애초에 연기가 아니었으니 말이었다.

슬쩍 옆을 봤다. 재호는 노트북과 컴퓨터를 켜고 진지한 모습으로 뭔가를 적고 있었다. 내가 슬쩍 물었다.

“뭐하냐?”

“대기 시간 길 거 같아서. 이번 주 계획 좀 수정하려구.”

“계획을 짰어? 어차피 매니저가 있잖아.”

“그건 회사 입장이구. 나는 내 개인 시간 계획을 생각해 둬야지. 그래야 효율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어.”

“그건 좀…”

‘됐다. 말을 말자.’

슬쩍 옆에 테이블을 봤다. 문루아가 헤드폰을 낀 채로, 셰익스피어 소네트 원서 시집을 읽고 있었다. 이전이라면 무슨 책인지도 몰랐겠지만, mp3로 영어 스탯을 올린 덕에 대충 어떤 책인지 짐작이 갔다.

그 옆에서는 고미진이 흐뭇한 표정으로 촬영을 보고 있었다. 너무 좋아 보여서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뭐가 그리 좋으세요?”

고미진이 나를 쳐다보더니 해시시 웃으며 역질문했다.

“뭐가요?”

“네. 엄청 기분이 좋아 보이셔서요.”

“그냥~. 좋잖아요? 현장이 단숨에 좋아졌다는 게. 비니가 쭉쭉 성장하는구나 싶어서요.”

“아폴로 빈 님이랑 친하신가 봐요? 저는 오늘 초면이라. 사실 어떤 분인지 잘 모르겠어요.”

"오래 봤죠. 빈이가 데뷔 전에 드라마 아역배우로 저랑 같이 촬영을 했어서."

“아.”

갑자기 왜 고미진이 저렇게 아폴로 빈을 특별하게 생각하는지 단박에 이해가 됐다.

“그래서 저눔은 남 같지가 않죠 당연히.”

“그래서 뮤직비디오 촬영에 대해서 노하우를 알려 주신 건가요?”

“많이 알려주진 않았어요.”

“그럼?”

“그냥 제가 초기에 뮤직비디오 찍었을 때 느낌을 말했죠. 그거로 충분했어요. 어차피 비원더 세분하고 루아는 전문 배우가 아니잖아요? 마음을 편하게 해줘야죠~. 프로 배우도 아니고. 연기가 안 되면 상황과 대본을 바꿔서라도 배우들이 할 수 있는 연기를 하게 만드는 게 좋을 거 같았어요.”

“그래서 저렇게 자연스러운 상황들이 나왔던 거군요,”

“얼마나 좋아요? 연기 같지가 않잖아요?”

고미진의 말이 사실이었다. 환희와 모니카의 썸 타는 장면은 제법 진짜 같아 보였다. 좀 지나치게 연기 같지 않았다는 게 좀 문제로 보였지만 말이었다.

“컷!”

아폴로 빈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촬영을 종료했다. 웨이터리스와 주방 보조가 음식을 주고받으면서 점점 눈빛도 주고받다, 급기야 서로 살짝 손을 잡는 과정까지가 잔잔하게 표시됐다.

아폴로 빈은 바로 재호를 호출했다.

“재호 님! 파트너 배우분과 함께 준비해주세요. 레스토랑 나와서 다리 앞에서 바로 다음 장면 찍을게요. 제작진 준비됐죠?”

재호는 기다렸다는 듯, 노트북을 탁 소리 나게 닫고 바로 연기하러 나갔다.

“기다리구 있었어요.”

‘뭔가 재호 녀석, 환희 연기에 경쟁심이 붙은 거 같은데. 그렇다고 재호가 환희보다 연기를 잘할 거 같진 않지만. 뭣보다 환희는 연기가 아니었으니까.’

연기가 아니라는 것. 바로 그게 문제였다. 진짜 연애 감정이 있었다는 것 말이다.

재호가 촬영을 하는 동안, 환희와 모니카는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이놈들! 진짜 눈 맞아서 사랑의 도피행각이라도 벌인 거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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