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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왕-76화 (76/280)

제76화

아폴로 빈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실제로 보니 정말 미남이었다. 소화하기 힘든 5:5 가르마의 긴 머리. 170cm 초반 정도 되는 연예인 치고 크지 않은 키. 무엇보다 회색 츄리닝에 비니 모자를 적당히 쓴 옷차림까지. 사실 되게 별로일 수 있는 스펙이었음에도 광채가 나는 얼굴이었다. 사슴 같은 눈빛을 보니 ‘아 연예인이구나' 싶었다.

아폴로 빈은 우리를 보더니 촬영을 중지하고는 우리에게 성큼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아폴로 빈입니다. 야누스에게 말 많이 들었습니다.”

나를 포함한 비원더 세 멤버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하지만 나는 하나 마음에 걸리는 내용이 있어 슬쩍 물어보았다.

“야누스요?”

환희가 잽싸게 인터셉트해서 대답했다.

“아… 제가 원래 천신군단에 데뷔했으면 그 이름으로 하려 해써서요.”

“아하. 그럼 야누스... 하?”

“야누스 환… 이요.”

재호가 큭! 하고 소리를 냈다. 웃음 참는 소리였다.

하지만 나는 재호와 달리 못 참았다.

“푸하하하하하! 그게 뭐야!”

“아 뭐에요 횽! 떠서 그렇지. 아폴로 빈도 만만찮게 이상하다고요. 아.”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자기 앞에 아폴로 빈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폴로 빈은 환희를 쳐다보더니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어쩌라고~. 난 내 활동명 좋아. 이제 이게 더 내 이름 같을 정도야.”

“이제는 활동도 못하는 거 아니냐?”

“짜아식. 이제 좀 데뷔 하려는 애송이가. 벌써 너무 건방진 거 아니야?”

둘이 심한 말을 주고받았지만, 모두 입꼬리는 웃고 있었다. 상당히 친한 사이인 모양이었다. 내가 슬쩍 재호에게 귓속말을 했다.

‘둘이 진짜 친한 거 같지?’

재호가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게. 나랑 니만큼은 친한 거 같구. 뭐 좀 촬영도 편하겠는데?’

하지만 재호의 예상은, 완벽한 오산이었다.

* * *

촬영장에 가보니 고미진의 요리 촬영이 한창이었다. 아름다운 햇살이 비치는 별장에서 여배우가 진심으로 요리를 하는 장면을 한 땀 한 땀 찍었다. 햇살이 눈이 부시도록 밝았다. 밝은 빛에 비치니 한층 음식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음악과 리듬이 정확하게 맞도록 계산해서 요리 장면을 하나하나 찍는 모양이었다.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광경이었다.

촬영장에 돌아오자마자 아폴로 빈은 진지해졌다. 입을 꾹 다물자 제법 감독 같은 모습이 되었다. 그는 카메라를 쉴새 없이 확인하며 촬영을 지휘했다.

엄마 배역인 고미진이 촬영을 하는 중이라 우리가 당장 할 일은 없었다. 바로 조안의 디렉션으로 탈의실에 가서 의상을 뮤직비디오 의상으로 교체했다. 보기만 해도 번쩍번쩍 광이 나는 듯한 고급스러운 이탈리아 정장들이었다. 심지어 넥타이는 애스콧 타이로 처리해서 한층 도발적으로 보였다. 재호는 흑요석 같은 검은색, 환희는 밝은 하늘색, 나는 짙은 와인 같은 붉은 색의 정장을 주었다.

환희가 뿌듯한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옷 너무 멋지네요! 이런 옷을 다 입어보다니.”

재호는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툴툴거렸다.

“좋긴 한데. 이게 뮤직비디오에 어울리는 거 맞아? 요리사 아들들이 이런 비싼 옷을 입겠냐구?”

내가 어깨를 툭툭 치면서 대답했다.

“이탈리아 남자들은 그러나 보지. 여자 꼬시려고 월급 다 털어서 아르마니 정장 산다던가.”

재호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찡그리며 말했다. 입은 큭큭 웃고 있었다.

“니가 인종차별주의자다 인마.”

“이런 건 ‘데이터'라는 거지.”

“편견은 아니구?”

그렇게 틱틱 말로 장난치면서 가다 보니 어느새 촬영 현장 앞이었다.

* * *

촬영 현장은 생각보다 정말 지루했다. 노경진 PD와 함께했던 광고 촬영은 양반이다 싶을 정도였다.

가장 힘든 건 역시나 대기 시간이었다. 실제 레스토랑 주방을 대관해서 고미진 배우가 요리하는 장면을 찍고, 또 찍었다. 같은 동작도 각도를 다시 해서 계속 촬영했다. 그동안 우리는 레스토랑 탁자에 앉아서 대본을 읽으며 기다렸다. 하염없이 대기 시간이 반복됐다.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지루하죠?”

고개를 돌렸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순박한 얼굴 위에 뿔테안경을 쓴 노경진 PD가 더플코트 차림으로서 있었다.

반가웠다. 손을 들어 그에게 인사했다.

“PD님!”

“야. 요리 진짜 하는 거예요? 고미진 선배 요리 잘하네.”

“잘 아시나요?”

“작년에 잠깐 드라마 팀에 지원 나간 적이 있어요. 조금 알죠.”

노경진 PD는 나중에 드라마 PD로도 대성할 운명이었다. 드라마에 조금 경험이 있다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말 대단하네요. 벌써 3시간째 요리만 찍고 계시는데. 전혀 흔들림이 없으세요.”

“그게 프로죠. 배우란 게 결국 기다림이에요. 눈에 띄는 순간은 정말 짧죠.”

“왜 저렇게 자꾸 똑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찍는 건가요?”

“매번 새로운 각도로 다시 찍으니까요.”

“한꺼번에 다양한 각도에 카메라를 세워놓고 한 번만 찍으면 안 되나요?”

“카메라나 스태프나 선이나 이런 게 노출될 수도 있고 해서 보통 세팅을 다시 해서 같은 장면을 계속 찍어요.”

“그렇군요.”

가수랑은 참 달랐다. 가수는 여튼 자기 마음에 드는 퀄리티의 공연이 나오면 끝이었다. 똑같은 노래를 몇 번씩 다시 촬영하거나, 공연할 필요는 거의 없었다. 배우는 달랐다. 아무런 문제가 없더라도 계속 비슷하게 다시 찍고 찍고 또 찍어야 했다.

고미진은 정말 대단했다. 프로다웠다. 계속 촬영이 반복됨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었다. 고미진 외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배우가 아니었다. 그들도 과연 고미진처럼 끈기 있게 촬영에 임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내 불안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 * *

4시간이 넘게 걸리는 촬영이 끝나고, 드디어 요리 장면 촬영이 끝났다.

아폴로 빈이 자리에서 일어서 힘차게 말했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다음 촬영 바로 갈게요!”

아폴로 빈이 일어나면서 슬쩍 고미진 선배에게 수건을 주었다. 땀이 뻘뻘 날 때까지 고생한 여배우에 대한 배려인 모양이었다. 고미진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대기실로 들어갔다.

“자! 다음은 먹는 리액션 촬영하겠습니다. 비원더 나오세요.”

나를 포함해 비원더 3인이 걸어 나왔다. 까르보나라가 나왔다. 쉬운 장면이었다. 파스타를 먹고 ‘와 맛있다!’ 하는 느낌의 리액션 장면을 보여주면 됐다.

까르보나라를 한 입 삼키자 진한 노른자 맛이 낫다. 씹을수록 찐한 치즈 맛까지 느껴졌다. 저절로 ‘맛있다'는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다시요!”

“다시!”

“한 번 더 갈게요.”

“카메라 위치 바꿔서 한 번 더 갈게요.”

“이번에는 움직이지 말고 카메라 고정해서 다시 찍어볼게요.”

그렇게 열댓 번씩 찍다 보니 벌써 까르보나라가 물리기 시작했다. 진한 달걀 맛과 치즈의 끈적한 풍비가 질리기 시작했다.

재호도 흙빛이 되었다. 매번 음식을 그램 단위로 계산해서 시간까지 맞춰 먹는 놈이었다. 제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계속 반복해서 먹는 짓은 처음일 터였다. 아마 로마 시대 사람이 그랬다는 것처럼 뱉고 싶을 것 같았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었다. 환희만은 천하태평이었다.

“와 진짜 먹어도 먹어도 존맛이네여 존맛!”

‘...부러운 새끼.’

환희도 다섯 접시는 먹었다. 그래도 끄떡없이 맛있게 먹고 있었다. 저것도 재능의 일종이구나 싶었다.

질투 섞인 눈길로 환희를 쳐다보다, 체념하고 까르보나라를 다시 묵묵히 먹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폴로 빈이 갑자기 간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뭐지?’

내가 오더니 그가 나지막이 말했다.

“노을 님.”

“네?”

아폴로 빈이 내 주위를 빙빙 돌았다. 단어를 세심하게 고르는 느낌이었다. 자신도 떠올리기 어려운지 머리를 연신 긁었다. 그러더니 결국 말을 이었다.

“뭔가… 맛이 있다고 자꾸 강요하는 느낌이에요.”

“네?”

감이 전혀 오지 않았다.

“그러니까 뭐랄까. 너무 연기하려 하시는 느낌? 연기를 좀 덜 해보시면 어때요?”

나도 세심하게 말을 골랐다. 저절로 말을 더듬거리게 됐다. 아폴로 빈의 말이 이해가 잘 가지 않아서였다.

“연기를 하는 건데. 연기를 덜 하라 하시면 음…”

그때였다. 어디선가 문루아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려 퍼졌다.

“그만 좀 해요!”

나 포함, 현장의 모두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보라색 원피스 차림의 문루아가 씩씩거리며 서 있었다.

항상 쿨한 문루아가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폴로 빈이 두 손 손바닥을 드러내 보이며 말했다.

“아 선배. 이게 말이죠. 요리 장면이랑 요리 리액션 장면이 이 뮤비를 가르는 중요한 장면이라…”

“매번 다 똑같잖아요! 먹으면 먹을수록 맛이 없어져서 더 연기가 안 좋아 진다구요. 그렇다고 카메라 구도에 변화도 크게 없잖아요?”

“아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긴 한데…”

“전혀 모르겠어요. 이건 고문이라구요!”

“끄응…”

아폴로 빈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더니 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했다.

“선배.”

“왜요?”

“선배시지만. 이번 뮤직비디오 감독은 접니다. 아시죠?”“알아요!”

“그러면 저를 좀 믿어 주세요. 선배답지 않아요. 후배가 아니라 뮤비 감독으로 봐 주세요.”

“음…”

문루아가 잠시 고민하더니 털썩하고 탁자에 앉았다.

그때 고미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촬영시간이 좀 긴 거 같긴 하다~ 그죠?”

일부러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한껏 텐션을 끌어올린 듯한 미소였다. 덕분에 쎄했던 촬영장 분위기가 조금 나아졌다.

내가 얼른 고미진을 거들었다.

“네네 맞습니다 선배님!!”

아폴로 빈에게도 고미진은 한참 선배였다. 허공을 쳐다보더니만 툭 말을 내뱉었다.

“저도 촬영이 좀 길었던 것 같네요. 30분만 쉬시죠. 조감독은 까르보나라는 재촬영 시간에 맞춰서 다시 데워달라 전달해줘요. 죄송해요 선배.”

아폴로 빈은 문루아에게 사과하고는 그대로 바깥으로 휙 나가버렸다. 말은 안 했지만 열 받은게 분명했다.

현장에 찬 바람이 쌩하고 불었다.

보다 못한 조안이 우리들에게 말했다.

“자자. 그러지 말고 우선 밥이라도 먹을까요? 파스타?”

...이제 파스타는 한 가닥도 더 먹기 싫었다.

* * *

조안은 어딘가에서 맛있는 도시락을 가져왔다. 문루아와 고미진은 도시락을 먹었다. 비원더 3인은 도저히 안 되겠어서 토마토에 모짜렐라 치즈와 바질을 곁들인 이탈리아 샐러드만 먹으면서 채소를 보충했다.

문루아는 아직도 짜증이 난 상태였다. 고미진이 문루아를 달랬다.

“비니가 좀 집요하죠? 감독들이 다 그래요~”

문루아가 최대한 감정을 삭이면서 말했다. 그래도 여전히 가시는 있었다.

“너무하잖아요 선배. 어떻게 먹든 별 차이도 없어 보이는데!”

“아휴~ 말도 마요! 어떤 놈은! 감독이라는 작자가 빗속에서 일주일 동안 촬영을 시켰대니까! 화면 때깔이 그래야 좋다면서 비에다가 잉크까지 넣어가지고!”

“선배! 그런 걸 그냥 뒀어요?”

문루아 태도를 보니 고미진과 상당히 친한 관계인 듯했다.

고미진이 문루아에 손을 슬쩍 잡으며 말했다.

“그름 어떻게 해~. 그때는 지금처럼 말대답하고 그런 거 없었어~.”

“그런 식으로 찍은 게 잘 됐어요?”

“그게 웃긴 게 잘되더라~. 하여튼 잘되는 것들은 집요하더라니까? 착한 사람이든 못된 사람이든 독해야 잘돼. 감독이 참 희한~한 직업이야.”

나이와 직종을 넘어 오래된 친구처럼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문루아와 고미진과 달리, 나와 재호, 환희는 사실 고미진 배우가 초면이었다.

드라마에서 자주 본 얼굴이었다. 고미진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드라마 주연으로 날렸던 최고의 배우였다. 40이 넘어서서 결혼과 이혼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활동이 줄었지만, 단독 주연으로 스포트라이트를 2~3년에 한 번씩은 꾸준히 받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우리 앞에서 이렇게 토속적인 말투로(?) 친밀하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참 어색한 상황이었다.

문루아가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그렇겠죠. 빈이 걔도 고민이 있겠죠.”

“근데 희한하다~. 루아는 아무리 그래도 엔간하면 화는 잘 안 내잖아? 뭐 비니가 열받게 했어?”

문루아가 깜짝 놀랐다. 뭔가 얼굴도 살짝 붉어진 듯했다.

“아… 그 그건… 제가 아니라… 후배들을 그러니까..”

왠지 문루아 시선이 나를 향하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이었을까?

“아 그래… 귀여운 후배에…?”

"귀엽다는 말은 안 했는데요 선배.”

"그런 느낌이잖애~"

말하면서 고미진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눈빛은 확실히 나를 향하고 있었다.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하지만 눈이 마주친 이때가 인사를 나눌 절호의 기회였다.

“촬영 도중에 들어와서 이제서야 인사드립니다. 비원더 권노을입니다. 이쪽은 원재호. 이쪽은 주환희입니다.”

비원더 3인이 모두 꾸벅 90도로 인사했다. 연예계 기준으로는 레전드 대선배뻘이었다.

“반가워요~.”

고미진 또한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러더니 재호를 콕 집어 말했다.

“재호 군이랬죠? 되게 억~지로 먹는 느낌이던데. 식단 관리해요?”

재호가 순순히 인정했다.

“네? 네. 사실 좀… 그렇습니다.”

고미진 선배가 코트를 챙기면서 말했다.

“아이구~. 다들 엄청 힘들었구나. 어쩔 수 없네. 제가 해결하고 올게요!”

‘해결을? 어떻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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