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곧 이탈리아에 촬영하러 가시잖아요?”
“아.”
근데 그것도 좀 이상해서 배영우 매니저에게 물었다.
“근데 주 매니저가 이탈리아라고 바뀌나요?”
“TYB 유럽 지사가 있어서 그쪽에서 매니징을 맡으실 겁니다. 제가 영어는 가능하지만 이탈리아어가 가능하거나 현지 사정에 밝거나 하진 않아서요.”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매니저는 결국 그 지역의 사정을 잘 알아야 했다. 그래야 연예인을 배려하고 보호할 수 있었다. 확실히 낯선 곳에서는 매니저가 자기 업무를 자신감 있게 보기 어려웠다. 지사가 있다면 당연히 그곳 현지 직원이 더 잘할 터였다.
배영웅이 하던 말을 마무리했다.
“현지 직원분 중에 한국 분도 있고, 한국어 가능한 현지인도 있는 걸로 알아요.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제가 드렸던 말씀은…”
“네 회사에 전달하겠습니다. 이탈리아에서도 조심하도록 해야겠네요.”
왠지, 이탈리아의 현지 직원들은 배영웅 매니저만큼 철저하게 막아주진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뭐 별수는 없었다. 그냥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 * *
우리가 했던 녹음이 천채왕 프로듀서와 A&R팀에게 들어갔다. 이후는 초조하게 기다릴 따름이었다.
그 사이 미션도 주어졌다. 각자 한 곡씩 ‘솔로곡을 생각해오라'는 지령이었다. 프로듀싱에 일부가 가능한 재호와 환희는 여러 아이디어를 떠올렸지만 솔직히 나는 좀 막막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그렇게 조금씩 내 아이디어를 키워드만 잡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며칠 안 되어 배영웅에게 전화가 왔다.
녹음 관련 A&R 팀의 회의 결과는?
합격이었다.
-정말 대단한 거예요 권노을 아티스트님. 우리 회사 A&R팀 프로세스 진짜 악명 높은데. 월드 클래스 아티스트들도 재녹음 왕왕하거든요? 이번에는 너무 쉽게 통과했어요.
배영웅이 나보다 더 흥분해서 말했다. 그리고는 우리가 원하던 출연진도 모두 구성이 완료되었다고 말했다. 여배우부터 뮤직비디오 감독까지, 우리 제안대로 꾸려졌다는 소식이었다.
여튼 이걸로 이탈리아에 촬영하러 갈 준비는 다 끝난 셈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뮤직비디오 촬영 날이 왔다.
* * *
배영웅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공항에 도착했다. 매니저는 내게 필요한 모든 수속을 대신 해주었다. 정말 편했다. 필요한 서류들도 모두 정리해서 전달해줬다.
확인해보니 우리 좌석은 무려 비즈니스석이었다. 깜짝 놀라서 배영웅에게 물었다.
“와… 비즈니스석이에요?”
“퍼스트 클래스를 드려야 했는데. 아직 데뷔 전이라 저희도 예산이 부족하네요. 죄송합니다.”
연예인은 그렇게 생각하나 싶었다.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비행기 처음인데 비즈니스라니 황송해서.”
배영웅이 씨이익 웃으며 말했다.
“저희 회사에서 활동하시는 동안에는 비원더는 저희 회사 특급 자산이니까요. 더 신경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부유한 집안 출신인 재호나, 여지껏 연예인들과 함께 살았던 장기 연습생 출신 환희는 멀뚱멀뚱하게 우리를 쳐다봤다. 하지만 나는 살짝 눈물이 날 뻔했다.
‘첫 비행기가 비즈니스라니…! 행복이 별거야?’
그때였다. 모자부터 선글라스, 마스크, 옷까지 검은색으로 둘둘 온몸을 말아 변장한 여자가 우리를 지나치며 툭 말을 내뱉었다.
“빨리 와요. 늦겠어요.”
환희가 어이없다는 듯 검은 옷 여성을 쳐다보며 말했다.
“뭐에요? 왜 우릴 아는 사람 마냥 말을 걸어여?”
배영웅이 뭐라 말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냥 내가 대신 말해주기로 했다.
“문루아 선배잖아.”
환희가 입을 쩍 벌렸다.
“루아 누나요? 누나 우리랑 가치 가여?”
배영웅이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말했다.
“사실 문루아 아티스트님은 TYB에서도 특급 대우라. 당연히 일등석으로 따로 가셔야 하는데. 꼭 비원더랑 같이 가겠다고 신신당부를 하시더라구요.”
내가 말을 이었다.
“뭐 잘 됐잖아요? 루아 선배도 사실상 비원더 멤버니까. 자 가죠!”
뭔가 시끌벅적한 여행이 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이탈리아까지는 직항으로 무려 12시간이 넘게 걸리는 코스였다. 하지만, 비즈니스석이라 괜찮을 것 같았다.
비즈니스석에 앉자마자 의자를 이리저리 돌렸다. 거의 침대처럼 편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이전 생이라면 살이 쪘어서 함부로 누울 수도 없었을 것 같지만, 지금 사이즈에는 딱 맞아서 편안하게 누울 수 있었다.
‘이거 여기서 12시간 내내 잘 수도 있겠는데?’
요새 철야 녹음이 잦아서 마침 좀 피곤했던 참이었다. 잠이나 잘까 싶었다.
옆자리에 문루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주 그냥 12시간 푹 잘 기세네요.”
“정확하게 아셨어요 루아 선배.”
“쉿!”
문루아가 나더러 입조심 하라는 손짓을 했다.
“왜요?”
“바보예요? 승무원들에게라도 우리가 탔다는 거 알려지면 복잡해진다구요.”
“이미 알지 않을까요?”
“비즈니스석 예산밖에 없다고 해서 비밀리에 하기로 했어요. 알게 되면 여러모로 불편해지니까. 그러니까 조용히 해요.”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적당히 불러요.”
“본명이 뭐에요 선배?”
“나 본명이에요.”
본명이 루아라니, 정말 남다른 부모님을 뒀구나 싶었다.
“그럼 뭐 문 선배 이럴 게요.”
“맘대로 해요.”
문루아는 바로 뭔가 종이 뭉치를 가방에서 꺼냈다. 나도 익숙하게 본 서류라 익숙했다.
“선배도 뮤비 대본 보셨군요.”
“연습하려고요.”
“근데 사실 대사도 없고. 다들 너무 모호하지 않아요? 약간 느낌 위주로 써서요.”
대본이 좀 어설퍼 보였다. 나중에 뮤비 감독으로 대성하는 아폴로 빈이지만, 지금까지는 뮤비 연출을 겸하는 아이돌 멤버인 상태라 그런지 아직 덜 여물었다는 느낌이었다.
문루아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생각이 비슷한 듯했다.
“뭔가 좀 불안하죠? 빈이 얘가 전문 감독은 아니니까. 잘할지 모르겠네요.”
“천신군단 뮤비는 거의 다 도맡으셨다고 하니 괜찮지 않을까요?”
“오래 활동했던 팀이랑 같이 댄스 위주 뮤비를 찍는 거랑. 발라드 뮤비를 모르는 가수들이랑 찍는 건 다르니까요. 환희 말고는 빈이 처음 보는 거 아니에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과거에 환희와 아폴로 빈의 악연을 끊어주려 노력하다 보니, 꼭 아폴로 빈도 아는 사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폴로 빈은 대기업 재벌가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도 모자라 곧 속도위반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이전 생에서는 환희가 자신은 데뷔하지 못하고, 대놓고 연애하는 아폴로 빈은 데뷔한 것에 앙심을 품고 고발하다 걸려서 연예계 데뷔가 꼬였었다. 이번엔 내가 적당히 중재해서 둘 다 안 다치게 끝냈지만 말이다.
‘뭐 결국 아폴로 빈은 사실상 아이돌은 은퇴했지만.’
이번 뮤직비디오 감독에 아폴로 빈을 추천한 건, 그의 미래를 알고 있어서였다. 그는 최고의 뮤직비디오 감독이 되었다. TYB의 아티스트들의 뮤직비디오는 물론, 나중에는 팝스타들의 뮤직비디오를 찍으며 영상계의 거물이 되었다.
그런 그의 미래 가능성을 보고 한 선택이었지만, 막상 그의 어설픈 대본을 보고 나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거 아무래도 좀 꼬일 거 같았다.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불쑥 문루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요? 아침은 먹고 자지 그래요? 스테이크하고 와인도 줘요.”
“비행기에서 와인도 줘요?”
“비즈니스석이잖아요.”
계획 취소.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났다.
* * *
베네치아의 마르코 폴로 공항에 도착했다. 분위기가 시끌시끌했다.
문루아가 뾰루퉁해져서는 말했다.
“매니저가 어디 있죠?”
내가 대답했다.
“그러게요. 아마 공항 나오자마자 올 거 같은데.” 공항까지는 우리끼리 나와야 하는 모양이에요.”
문루아가 갑자기 목소리를 확 낮추었다. 나지막이 우리에게 말했다.
“사실 내 매니저는 지금 우리 뒤를 쫓고 있어요.”
환희가 깜짝 놀란 듯 반응했다.
“네에~?”
“쉿! 비원더는 신인이라 그런가. 태평하네요. 매니저 없이도 돌아다니게 하고.”
“하하.”
아마 신인이라서 보다는 우리의 특수한 상황 때문이지 않을까 싶었다.
여튼 분위기를 좀 환기하기로 했다.
“커피라도 한잔하실래요, 다들? 제가 쏠게요. 이탈리아가 또 커피의 본고장이잖아요.”
문루아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비행기에서 그렇게 와인을 많이 마셨는데. 또 뭘 마시고 싶어요?”
환희가 나를 쿡쿡 찌르며 말했다.
“횽 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예요! 이제 우리 팀인데 조심 좀 해요! 음주운전 절대 안 돼요!”
“말도 마라. 난 쫄보라서 면허도 없다.”
공항 내 카페에 들어갔다.
“넌 뭐 먹고 싶냐?”
“에스프레소요 횽.”
다들 에스프레소를 선택했다. 어쩌다 맨 앞에 섰던 재호가 영어로 바리스타에게 말했다.
“포(Four) 에스프레소 플리즈.”
바리스타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재호가 고개를 돌려 우리에게 말했다.
“영어 못 알아듣나 본데?”
아니었다.
내가 바로 바리스타에게 차갑게 말했다. 미리 스탯을 높여 둔 이탈리아어로 말이다.
“에스프레소 네 개라고요. 인종차별주의자 같으니.”
바리스타 남자가 얼굴이 벌게지더니, 말없이 에스프레소 4잔을 주었다.
재호는 공부는 잘했지만 완전 국내파였다. 영어 발음이 좀 투박했다. 동양인이 투박하게 영어를 하니, 놀려먹을 겸 못 알아듣는 척을 한 것이었다. 애초에 영어를 못 하는 사람이 국제공항에서 일할 리가 없었다.
‘설마 이탈리아어를 배운들 도움이 될까 싶었는데, 도움이 되긴 될 거 같군. 다른 언어도 더 배워 볼까.’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루아와 눈이 딱 마주쳤다. 문루아가 피식 웃었다.
‘설마 문루아 선배도 이탈리아어... 할 줄 아나?’
문루아가 내게 말했다.
“저기 있네요.”
문루아가 손으로 가리킨 곳으로 눈을 돌렸다. 그곳에는 붉은 곱슬머리의 이탈리아 여성이 서 있었다.
환희가 문루아에게 물었다.
“현지 분이신 거 같은데여?”
“아뇽하세요. 조안이라고 합니다.”
당황한 환희가 헉 소리를 냈다.
“헉!”
아무래도 저분이, 이번 여행의 현지 매니저인 모양이었다.
* * *
우리는 조안의 차를 타고 이동했다. 그녀가 능숙하게 대형 밴을 운전했다. 붉은 머리를 질끈 묶은 모습부터 강인한 여성으로 보였다.
“조금 시간이 부족해서. 바로 촬영장 갈게요.”
조안의 한국말도 심지어 상당히 능숙했다. 환희가 물었다.
“와… 저보다 한국어 잘하시는 거 가테요.”
‘그야, 너는 연기하는 거니까.’
조안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한국에서 4년 공부했어요. 그래도 한자 어려워요. 부족해요.”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다. 다행히 걱정하던 것보다는 현지 적응이 쉽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쉴 틈 없이 차는 바로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 뮤비 촬영 스태프들은 이미 모두 먼저 와 있었다. 아폴로빈과, 베테랑 여배우 고미진이 촬영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도 했다. 우리도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아폴로 빈은 이미 TYB의 유럽 지사에서 유명 인사인 모양이었다. 아시아 최고 그룹이니만큼 파리부터 더블린까지. 온갖 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었다. 자신이 소속된 천신군단이 아닌 다른 가수의 뮤직비디오는 처음이라는 게 변수였지만 말이다.
뮤비 촬영 현장에 도착하기 직전, 조안이 우리에게 신신당부를 했다.
“마음 단단히 먹어요. 비니 스타일이. 좀… 특이해요.”
그 경고가 무슨 뜻인지는 촬영을 하자마자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