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매니저를 못 찾겠다는 말씀이시죠?”
일본어로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외지에서 일본어가 가능한 사람을 만나 반가웠는지 그녀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네! 일본 분이신가요?”
“아닙니다. 그냥 취미로 배웠어요."
“취미라기에는 너무 잘하시는걸요."
그녀가 입을 가리며 살짝 웃었다. 기분이 풀린 듯하여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매니저가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TYB 매니저면 되나요? 제 매니저라도 부를까요?"
“매니저가 있으시다면 가수신가요?”
“아직 데뷔 못 한 신인입니다."
“이름 알려 주세요! 확인해볼게요."
“비원더라는 팀에 권노을이라고 합니다."
“발음하기 어렵네요 궈어노으르…”
재호랑 환희도 엉터리로 발음하는 내 이름은 알아듣고는 큭큭 웃었다.
“연락해드릴게요.”
전화로 배영웅 매니저에게 연락했다 배영웅 매니저는 우리 맞을 준비를 하려 근처 마트에서 음료수를 사 오는 중이었다. 마침 5분 내로 올 예정이었다고 했다.
-다들 되게 일찍 오시네요 아티스트 분들은 30분이나 일찍 오시고. 연주자분은 1시간이나 일찍 오시고. 일찍 오신 건 좋은데, 매니저로선 좀 힘드네요. 하하.
아무래도 저 일본인 여성은 연주자인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매니저의 말을 전달했다.
“매니저분이 10분 내로 오신다고 합니다.”
“고맙습니다.”
“연주자신가요?”
“여기에는 연주하러 왔어요. 디제잉도 하고 키보드 연주도 하고 곡도 써요.”
2천년대 일본은 정말 일렉트로닉 음악 강국이었다. 디제이이자 연주자, 작곡가라 하니 갑자기 더욱 유능한 오오라가 느껴졌다.
10분간, 우리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부아계(*시부야를 중심으로 발달한 일본 전자음악의 한 사조)부터 일본의 힙합 씬까지,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이름이 미노리이고, 현역 작곡가란 사실. 문루아의 곡을 쓰면서 TYB와 인연을 맺어 지금까지 협업하고 있다는 사실 등등을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이 만든 샘플 비트를 들려줬다. 그야말로 일본적이라는 느낌의 귀엽게 통통 튀는 전자음악이었다. 특히 편곡가인 재호가 귀를 쫑긋하고 들었다.
곡이 끝날 때쯤, 어느새 들어온 배영웅 매니저가 대뜸 능숙한 일본어로 말했다.
“미노리 상, 이제 가시죠. 키미 프로듀서는 2층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미노리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답했다. 태연한 태도로 볼 때 이미 배영웅과 자주 이야기해 본 모양이었다.
“오 키미 상이 벌써요?”
“미노리 상이 먼저 오셨으니까요.”
“그냥 이 방이 비어있으면 어떨지 궁금해서 조금 일찍 와본 거예요.”
그러면서 미노리는 문을 열고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러다 갑자기 홱 고개를 돌리더니 말을 걸었다.
“노으루 군!”
나를 부르는 소리였다
“네네."
“또 봐요!”
그리고는 미노리는 사라졌다. 바로 환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아니 횽! 일본어도 할 줄 알아요?”
MP3로 얻은 스탯이다 보니 대놓고 자랑할 순 없었다. 말을 골라야 했다.
“아 그 조금.”
“와 횽 대단해요. 딱 봐도 완벽해 보이더라구여.”
그 말은 환희도 일어를 조금 알아들었다는 뜻이었다. 환희에게 슬쩍 물어봤다.
“너도 일어 하냐?”
“그럼요 횽.”
그리고 환희는 일본어로 뭐라 뭐라 말했다.’ 영화관에 함께 가자고 내게 진지하게 말해 줬으면 해요.’ ‘저도 부끄러운 소녀랍니다' 같은 낯 뜨거운 말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얌마! 왜 여고생 같이 말하는 거야!”
“아 이게 여고생 말투에여?”
환희는 전혀 자기 말투가 이상하단 걸 자각하지 못했다. 아무래도 그 말로만 듣던 ‘애니로 일어를 배운' 타입인 모양이었다.
환희에게 충고했다.
“너 되도록 일본어는 하지 마라.”
“왜여? 노을 쿤. 귀엽네.”
환희의 일어를 들을 때마다 닭살이 돋았다.
“아, 하지 말라고!”
재호가 흐름을 끊었다.
“자자자 그만하고! 녹음 시작하자.”
배영웅 매니저도 동의했다.
“원재호 아티스트님 말씀에 동의해요. 이건 저희 스튜디오라 그럴 필요 없지만. 원래 녹음은 시간을 ‘프로' 단위로 끊어서 굉장히 비싸게 받아요. 경제적으로 진행하는 게 좋겠죠. 베이비 아티스트님도 미도리 님과 미팅 끝나면 바로 오실 거에요.”
게다가 이 곡은 다른 사람도 아닌, 천채왕 프로듀서의 검수를 받아야 했다. 어지간한 퀄리티로는 어림도 없었다.
“자! 그럼 시작하시죠.”
배영웅이 스튜디오 불을 다 켜놓고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덜렁 주환희에게 모든 걸 맡겼다.
‘아마 당황하는 모습을 생각했겠지.’
하지만 아쉽게도 그렇게는 되지 않았다.
“알게씀다! 자 우선 재호 횽! 횽부터 갈게요. 부스 들어가 주세요. 웜업하고 싶으신 만큼 하시구.”
배영웅 매니저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입도 자연스럽게 살짝 열렸다. 들고 있던 수첩도 떨어뜨렸다.
놀랄 만했다. 초보자인 환희와 재호가 능숙하게 녹음을 시작했으니 말이었다.
사실, 내가 어제 비원더를 소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처음부터 몇 번 녹음해본 환희보고 녹음 디렉을 보라는 건 무리일 거 같아서였다.
<다들 전 곡 불러 봐.>
내가 미리 나를 포함해 3 멤버 모두의 노래를 들어봤다. 그리고 재호와 환희의 의견을 거쳐서, 우리가 하고 싶은 가녹음 테마를 미리 다 짜 두었다. 추가로 녹음을 어떤 프로세스로 진행하는지도 알려 줬다. 음질은 아쉬울지언정, 둘의 노트북에 있는 음악 작업 프로그램으로도 간단한 녹음은 가능했다. 직접 해보면서 설명했다. 둘에게는 오창선 선배에게 배운 녹화 노하우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하긴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오창선 선배에게 배운 것은 맞았다. 다만 이전 생에서 15년간 배웠다는 점이 차이일 따름이었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지금, 환희와 재호는 너무도 능숙하게 녹음을 진행할 수 있었다. 역시 한국인의 공략법은 ‘예습'이었다.
환희가 능숙하게 녹음을 진행했다. 구체적으로 재호에게 노래를 지시했다.
“좋아요 횽. 코러스 하나만 더 더블링 할게요.”
(더블링: 같은 구간을 여러 번 녹음해서 덧입히는 것)
“그래. 간다.”
그대로 재호는 방금 전에 했던 노래와 완전히 같은 박자, 음정, 호흡, 발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조금 전 녹음물과 겹치니 정말 기계로 복사 및 붙여넣기를 한 듯 깔끔했다.
“그대로 쭉쭉 갈게여.”
사실 배영웅 매니저만 놀란 건 아니었다. 나도 놀랐다.
‘이전 생 인터뷰를 보고 잘할 거라고는 생각했는데 이 정도일 줄은.’
이전 생에서 아이돌에 실패했던 하늘이는, 작곡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그가 성공한 후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 하늘이가 자신의 첫 녹화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마치, 원래 제가 있어야 할 곳에 있던 느낌이었어요. 어떤 버튼을 누르고, 어떻게 녹음해야 하는지, 그냥 직감적으로 느낌이 왔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첫 곡이 나왔죠.>
처음부터 쭉쭉 진도를 나가는 모습을 보니, 정말 천상 작사가, 작곡가 체질이 맞았다.하지만 아무리 재능이 있어도, 초심자는 어수룩한 법이다. 녹음하다 환희가 갑자기 작업을 멈췄다. 뭔가 꼬인 모양이었다. 그가 우리에게 물었다.
“어?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해요?”
아무도 그 방법을 알 리 없었다. 그때, 천채왕 프로듀서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어~”
천채왕 프로듀서 옆에는 키미 프로듀서가 함께였다. 키미 프로듀서가 장난스럽게 환희에게 말했다.
“와우, 제법 프로 같은데요?”
환희가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처음이라 서툴러여. 이거 누르면 어찌 되나여?”
“절대 누르면 안 된다는 거만 알고 있어요.”
“아, 알게씁니다.”
천채왕 프로듀서가 소파에 걸터앉아서 나와 환희에게 말했다.
“야~ 녹음 완전 조질 줄 알았는데. 대단한데? 제법 프로야. 꼭 해본 애들 같아?”
내가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아니~ 뒤에서 몰래 보고 있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녹음을 꼼꼼하게 따? 진짜 무슨 코러스 해본 거 같다니까. 보통 데뷔 가수는 스튜디오 스태프들에게 휘둘려서 그저 그런 뻔한 사운드가 나오는데. 니들은 전혀 아니겠는데? 어때요 배 팀장?”
배영웅 매니저가 씨익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딱 선생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배영웅 매니저는 어느새 꿀이 든 따뜻한 차를 내놓았다. 아무래도 목에 좋다는 이유로 준비한 듯했다. 아마도 배영웅 매니저가 우리가 녹음을 일사천리로 진행하는 걸 보고, 몰래 대기 중이던 천채왕 프로듀서와 키미 프로듀서를 데려온 모양이었다.
그 사이 키미는 자연스럽게 환희 옆에 앉았다. 그녀는 짧고 효율적으로 환희에게 기술적인 문제들을 잡는 법을 알려 주었다. 덕분에 녹음이 쭉쭉 진행됐다.
재호는 코러스 부분이 많았다. 나와 환희도 화음을 조금 넣었지만, 기본적으로 화음을 리딩하는 건 재호였다. 그래서 많은 파트를 녹음해야 했다. 그런 것 치고는 굉장히 빠르게 진행됐다.
“‘헤어 나오지 못해’ 부분은 지금보다 조금 더 느리게 불러 주세요 횽.”
“오키.”
매 부분마다 두어 번 정도만 부르면 바로 오케이 싸인이 나왔다. 그만큼 재호 노래는 완벽했다.
“자! 이제 횽 차례에요.”
다음은 내 차례였다. 부스로 들어갔다. 스튜디오에 들어가니 덜렁 가사지와 마이크만 놓여 있었다. 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마이크에서 환희 목소리가 들렸다.
“워낙 환희 횽 코러스가 많아서, 약간 가녹음으로 깔아놓고 갈게여. 맞춰서 불러주세여.”
“알겠어.”
“자 그럼 우선 후렴부터 갑니다!”
첫 번째 후렴이었다,
<너와 나
마치 케익처럼
달콤해
멈출 수가 없는걸
나의 맘
마치 와인처럼
깊어져
헤어 나오지 못해>
내 후렴 노래 소절이 끝났다. 그래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음악이 끊기고, 정적이 5초 정도 흐르자 내가 답답해서 말을 했다.
“야 뭐해? 어쩔까? 다시 해?”
“와…. 와…. 와! 더 잘해! 미친!”
‘뭐야 이 녀석.’
재호가 흥분해서는 그냥 ‘미친' 이런 짧은 단어와 의성어만 반복했다. 그러다 천채왕 프로듀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충 들어보니까. 내 생각보다 더 잘 불렀다. 미친. 내가 쓴 이게 이런 노래였어?’ 뭐 그런 뜻인 거 같네.”
환희의 소리가 살짝 멀리 들렸다.
“바로 2절 들어갈 게여.”
2절 부분 한 번. 그리고 클라이맥스 부분까지 한 번에 쾌속으로 넘어갔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환희는 상관없다는 듯 쭉쭉 진도를 나갔다.
“자! 횽 마지막 후렴 애드립 파트에여. 마지막 후렴을 두 번 부르는데. 멜로디는 제가 부를 꺼에여. 횽은 애드립만 불러주세여.”
“알겠어.”
이번에는 잘 아는 멜로디 라인이 아니라, 애드립을 넣는 마지막 부분이었다. 일부러 환희나 재호가 내 마음대로 하라고 요구했다. 멜로디와 리듬, 그리고 가사의 서사에 최대한 집중했다. 그리고 자유롭게 내 목소리를 흐르게 두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한 번에 끝나지 않았다.
“한 번만 더요 횽.”
그렇게 두어 번 애드립을 부르고, 내 녹음은 끝이 났다.
* * *
녹음 오케이 소리를 받고 나오자 천채왕 프로듀서가 박수를 짝짝짝 쳤다. 너무 환한 표정이었다.
“노을아! 진짜 대박이다. 야~ 세 번 불렀는데 어떻게 하이라이트가 다 좋냐! 사실 처음 거도 너무 좋았는데. 내가 일부러 몇 번 더 듣자고 했어. 환희야 너 이거 고를 수 있겠어?”
환희가 고개를 저었다. 키미가 큭큭 웃으며 말했다.
“저렇게 선생님이 흥분하시는 거 진짜 오랜만이네요. 근 5년간 처음 봐요. 최근에는 넵튠이 ‘루나틱' 녹음할 때 고음 터트렸을 때 정도?”
천채왕 프로듀서가 키미에게 말했다.
“흥분 안 하게 생겼어! 정말 새로운 사운드잖아. 미국서도 통할 세련된 느낌이야. 이런 미래적인 사운드를 잡아 준 재호 군도, 거기에 멋진 스토리와 단어를 입힌 환희 군도 대박이고. 무엇보다 그 목소리에 영혼을 실어 준 노을이의 보컬까지! 야, 내가 살다 살다 이런 놈들을 프로듀싱 해보네.”
키미 프로듀서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그러게요. 노래 천재. 편곡 천재. 작곡 천재는 있지만. 녹음실 천재라니. 희귀하네요.”
천채왕 프로듀서가 내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그게 얘들의 매력이지. 마치 10년 넘는 녹음 경력이 있는 놈들 같다니까.”
너무 의미심장한 말이라 심장이 덜컥! 했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했다.
천채왕 프로듀서가 소파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자! 하지만 두번째 곡 녹음은 좀 만만치 않을거야. ‘남녀 본색'은 사실 히트곡이라기 보다는 비원더를 소개하는 ‘멋있는 곡'이야. 음원차트 1위는 무리일 거거든? 그러면 후속곡이 무조건 잘 되야 해. 니들을 위해서도, 그리고 니들을 프로듀싱 하는 TYB의 명예를 위해서도. 우리 모두를 위해서 후속곡 녹음은 좀 독하게 할 테니까. 각오해. 자, 그럼 푹 쉬고 내일 봐.”
천채왕 프로듀서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지만, 그 안에 뼈가 있었다. 어떤 노력을 해서라도 반드시 히트곡을 뽑아내고야 말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졌다.
그건 내 쪽에서도 바라는 바였다. 후속곡으로 반드시 큰 성공을 하고 싶은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진짜 녹음은 이제부터였다.
‘하지만 내게는 비밀 병기가 또 하나 있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