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69화 (69/280)

제69화

“아직은 탈락이야.”

‘탈락? 아직은?’

워낙 센 단어 두 개가 붙어 있어서 무슨 말인지 헷갈렸다. 슬쩍 보니 재호나 환희도 비슷한 상태로 보였다.

그나마 천채왕 프로듀서가 편한 편인 내가 나설 타이밍이었다.

“무슨 뜻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 정도면 훌륭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안 되겠단 뜻이야. 솔직히 그 정도면 합격이라 보면 돼.”

재호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재호가 질문했다.

“그러면?”

“그래.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 같다. 이제부터는 가장 지난한 과정이 남았다.”

내가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뭘까요?”

“곡 수정. 아, 이번에 곡 수정은 나랑 키미가 할 거 같은데 괜찮겠어?”

나와 환희 모두 재호를 쳐다봤다. 재호가 ‘네'라고 말하려는 입 모양을 만들었다. 내가 먼저 그 녀석 입을 막았다.

재호가 내게 속삭였다.

‘뭐냐구!’

‘하겠다고 그래.’

‘뭘?’

‘곡 수정 말이야. 너 솔직히 참여하고 싶잖아. 지금 안 하면 못해.’

‘음…’

재호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천채왕 프로듀서는 우릴 멀뚱멀뚱 쳐다봤다. 그리고 한 마디 물었다.

“뭐 해 둘이?”

재호는 음악에 환장하는 녀석이었다. 세계적인 작곡가들과도 곡 협업을 하는 TYB의 곡 수정 작업을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었다. 이전에 오디션 때도 문루아가 자기 곡 작업하는 작업실에 데려가니 눈이 돌아가던 녀석이었다.

지금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게 해줘야 팀 활동도 더 원활해질 터였다.

재호가 망설이자 내가 먼저 말했다.

“재호가 곡 수정에 참여하고 싶답니다.”

재호의 눈이 두 배는 커졌다.

“야!”

천채왕이 나와 재호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말했다.

“엄청 고될 텐데. 괜찮겠어?”

재호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 하고 싶습니다!”

‘그럴 줄 알았다 이놈.’

“좋아. 그럼 재호는 내일 스튜디오로 와라. 그리고 환희랑 노을이. 너희 둘은 그사이 후속곡 작업을 미리 해두면 좋겠는데.”

내가 대답했다.

“후속곡 작업이요?”

“지난번에 들려준 스케치 하나 더 있잖아.”

“아~”

“그거 미리 가사랑 멜로디 좀 만들어 두라고. 그건 이미 재호가 비트 거의 다 완성해 둔 상태지?”

재호가 대답했다.

“네.”

“그거 작업 좀 둘이 하고 있어. 가능하면. 외국 간 김에 두 곡 다 뮤비를 찍으면 좋을 거 같아서.”

두 곡의 뮤비를 동시에 찍는다. 상당히 대담한 기획이지만, 어차피 두 곡 다 활동을 하기로 한 이상 돈을 아끼는 효율적인 방법이기도 했다. 역시 베테랑 기획자였다.

“알겠습니다!”

꼼짝없이 우리는, 데뷔곡을 만들자마자 바로 후속곡을 써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래 어디 보자… 또 말해줘야 할 게 뭐가 있나. 배팀장? 거기 있죠?”

회의실 바깥에 서 있던 배영웅 매니저가 슬쩍 들어왔다. 그는 우리에게 말 걸 때보다 한층 낮은 톤으로 대답했다.

“네 선생님.”

“또 이 친구들에게 공유해줘야 할 게 뭐가 있지요?”

“네 선생님. 뮤직비디오 관련하여 공유하지 않은 부분이 있습니다.”

“아하! 그래요 그래요.”

무슨 내용인지 궁금했다. 배영웅 매니저가 화이트보드에 자석으로 뭔가를 붙였다.

“장소는 우선, 베네치아입니다.”

헉 소리가 나왔다. 재호와 환희가 뭐라 말을 하려 했다. 일단 내가 둘의 팔을 붙잡으며 말을 막았다. 더 들어보고 싶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씨익 웃으며 말을 계속했다.

“배네치아에서 식당을 하는 어머니와 그 자식들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입니다.”

“근데 왜 베네치아죠? 다른 곳들도 많은 거 가튼데여.”

참지 못하고 재호가 물었다. 천채왕 프로듀서가 말했다.

“어머니가 요리사여서 자녀들을 이끌고 이탈리아에 요리 유학을 왔다는 설정이야. 다양한 이탈리아 음식의 향연으로 만들어 보고 싶어서. 거기다가 베네치아의 아름다운 풍경까지 함께 담으면 원작 영화에 못지않게 아름다울 거 같은데?”

재호도 나도 좀 당황스러웠다. 외국이라고 해서 기껏해야 일본, 구룡도, 혹은 호주 정도 가겠거니 싶었는데. 베네치아라니. 너무 투자의 단위가 컸다. 부담이 될 지경이었다.

셋을 대표해서 내가 그런 기분을 살짝 표현했다.

“그래도 좀 투자가 너무 큰 거 같은데요.”

“그건 걱정하지 마. 책임은 내가 져. 그냥 니들은 최선을 다해서 곡 쓰고, 활동하면 돼.”

문루아에게 천채왕이 했던 말이었다. 이번에는 우리에게 그 말을 해주고 있었다. 뭔가 좀 든든했다.

배영웅 매니저가 다시 브리핑을 시작했다.

“고미진 선생님이 엄마 역을. 원재호 아티스트께서 첫째, 권노을 아티스트님이 둘째. 주환희 아티스트께서 셋째를 맡아 주실 예정입니다. 세분 모두 상대 여배우를 준비했구요. 그중 권노을 아티스트 상대역은 문루아 아티스트가 하기로 했습니다. 녹음 완료하면 촬영을 위해 출국할 예정입니다.”

이후에는 행정적인 안내였다. 여권과 비자, 백신 접종 등에 대한 행정 업무를 하나하나 확인했다. 사소한 디테일들을 확인하고 나니 우리가 정말 뮤비를 찍으러 이탈리아까지 간다는 사실이 조금씩 실감이 났다.

TYB TYB 하더니만, 대형 엔터가 이래서 무섭구나 싶었다. 부담이 됐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기도 했다. 히죽히죽 웃음이 나왔다. 재호도 마찬가지였는지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우릴 보던 환희가 툭 한마디 했다.

“횽 꼭 웃을 일만은 아니에여.”

“왜?”

“빈이 뮤비 감독이잖아여.”

“근데?”

“피가 마를걸요. 걔 엄청 빡세데요. 뮤비 감독으로는.”

“에이 뭐 그래 봐야 가수 출신인데… 괜찮지 않을까?”

사실 괜찮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촬영을 시작하고 나서야였지만.

* * *

“베네치아에 간다고?? 갑자기?”

예상대로 동생은 깜짝 놀라는 반응이었다.

“그렇게 됐다.”

“뮤비를 찍으러 지구 반대편을 가다니. 대기업이라 그런가 통이 크네. 아휴~.”

“이거 절대 이야기하면 안 돼!”

“알써 알써. 치! 부럽다. 나도 유럽 가보고 싶은데.”

“야. 이게 무슨 수학여행 가는 줄 알아? 일하러 가는 거야 일하러.”

“치잇. 나도 가보고 싶다! 이탈리아!”

‘너 곧 갈 거야. 바로 내년에.’

사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mp3로 슬쩍 동생의 과거를 확인해봤다. 흐뭇하게도, 동생의 국악 인생은 탄탄대로가 되기 시작했다. 내년부터 벌써 세계 각국에서 연주회를 시작했다. 그 투어 리스트 중에는 이탈리아도 들어 있었다.

...뭐 그 말을 지금 동생에게 해줄 리는 없었지만 말이다.

“여튼 그래서 며칠 집 비울 거 같아.”

“피~ 새삼스레 뭐! 지금껏 반년 비웠으면서.”

“그때는 너가 기숙사에 있었잖아.”

고3 여고생을 이 험한 세상에 혼자 둘 생각을 하니 걱정이 태산이었다.

“내가 애야? 신경 쓰지 마.”

“끄응…”

뭔가 동생에 대해서도 도움을 청할 곳을 찾아 두어야 할 것 같았다. 여튼 아직은 미성년자였으니 말이었다.

“선물 사와~!”

“하하…”

처음 가는 해외여행에,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었다.

* * *

해야 할 일이 있거나 말거나,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두 번째 활동 곡 작업이었다.

두 번째 곡은 술술 작업이 되었다. 첫 번째 곡은 ‘우리만의 사운드' ‘우리만의 타입'을 만들어야 했다. 상당히 부담스러운 작업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우리만의 느낌을 만들어야 했으니 말이었다.

‘오히려 곡 제목 짓는 게 제일 어려웠지.’

고민 끝에 첫 곡 제목은 ‘남녀 본색'으로 정했다. ‘음식남녀'에서 모티브를 따온 곡이니, 제목도 여기서 따왔다.

두 번째 곡은 오히려 술술 써졌다.

“여기서 멜로디를 이렇게 쓰면 되겠죠? 우우우~.”

“어우야. 좋네 좋아. 지금 대충 부르는 거도 벌써 좋아.”

주환희, 아니, 지금은 우리 둘만 있으니 하늘이는 줄줄 멜로디를 써 내려갔다. 아무래도 두 번째 곡은 대중적인 멜로디다 보니, 이미 정해진 클리쉐가 정해져 있었다. 대부분의 일반적인 흐름을 따라가다가, 살짝살짝 기분 좋을 정도로만 기대를 배신하는 구성을 넣었다. 보통 올라가야 하는 구간에 살짝 음을 내린다거나 하는 방식이었다.

가사도 쉬웠다. 첫 번째 곡은 ‘사랑이란 감정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겠다'라는, 은근 뻔해 보이지만 가요에서 잘 나오지 않은 정서를 다뤘다.

두 번째 곡은 그런 것 없었다. 그냥 대놓고 슬픈 이별 노래였다. 정서도 강렬하고, 써야 하는 단어도 정해져 있었다.

이전 곡 가사를 쓸 때는 영영 사전, 국어사전을 뒤져가며 가사를 써 내려갔던 하늘이가 이번에는 술술 가사를 완성했다.

기승전결도 확실한 발라드다운 가사였다. 그러면서도 리듬감이 느껴지고, 풍성한 하모니와도 잘 어울렸다.

“된 거 같은데?”

“뭔가 맘에 안 드는데요”

“뭐가?”

내가 보기엔 상당히 훌륭한 가사였다.

“좀 임팩트가 없어요. 들으면 빡! 하고 남는 프레이즈가 있어야 하는데…”

‘빡!’ 소리를 내면서 하늘이가 자기 이마를 손으로 탁! 소리 나게 쳤다.

“우리끼리 고민하지 말고 키미 님이나 베이비 님한테 물어보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런 선배들이 있는 게 TYB의 강점이잖아?”

하늘이가 연필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뭔가 고민하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우리끼리 최대한 해봐야 하지 않을까여?”

아무래도 하늘이의 약점을 알 것 같았다. 이 녀석, 우연히 나와 재호에게는 본 모습을 들켰지만 대부분의 경우 자기 본 모습을 숨기는 타입이었다. 좌우지간 뭐든지 자기가 붙잡고 끝내길 바랐다.

아마, 그가 아이돌 멤버로 선발되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아이돌은 더더욱 모든 부분을 남에게 맡기고, 자기는 무대와, 팬들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일에만 집중해야 했다. 하지만 하늘이는 모든 걸 자기 혼자서 짊어지려 했다.

“결과만 좋으면 되지. 보여주는 게 완벽할 필요는 없잖아?”

“음…”

“퀄리티 컨트롤은 소속사에 맡겨야지. 다 우리 힘으로 하면 소속사가 무슨 소용이 있겠어? 비틀스도 매니저가 얼마나 많이 도와줬는데. 비틀스 멤버들은 악보도 못 봤어. 주변이 도와준 거지.”

주환희가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도 이 녀석의 비밀주의는 계속되겠구만.’

일을 같이하다 보니 멤버들의 몰랐던 모습이 속속 보이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미션이 쌓이는 느낌이랄까?

‘대신 그만큼 이 녀석들의 재능은 내 것이 되는 것이니, 괜찮은 거래지.’

재호와 하늘이가 만든 예술적인 후속곡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천채왕 프로듀서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

“됐네!”

“네?”

환희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살짝 ‘주하늘' 모습이 튀어나올 뻔했다. 그 정도로 놀란 모양이었다.

천채왕이 말을 이었다.

“충분해, 흡입력 있게 잘 뽑았네 데모. 이거 가지고 녹음하자. 나중에 믹싱은 좀 하겠지만 그대로 녹음해도 되겠는데?

내가 환희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리고 살짝 속삭였다.

“내가 뭐라고 했어.”

환희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입은 열지 못했다. 대신 천채왕 프로듀서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천채왕 프로듀서 앞에서 하고 싶은 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천채왕이 우리에게 말했다.

“그럼 나는 이제 약속이 있어서 갈게. 생각보다 진행 너~무 빠르고 맘에 든다. 진짜 니들 성실하다. 잘 될 거야.”

“네넵 감사합니다!”

나와 환희가 꾸벅 인사했다. 천채왕 프로듀서는 툭, 한 마디를 더 덧붙이고 나갔다.

“매니저랑 상의해서 녹음 일정 알려줄게.”

그리고 문이 닫혔다. 문이 닫히자마자 환희가 내게 툭 쏘아붙였다.

“끝 아니에요 횽.”

“뭐가?”

“이대로 끝난 게 아니라구요 횽.”

“그럼 뭐야?”

“녹음이 있잖아여.”

“녹음이야 뭐. 우리가 부르기 쉽게 곡을 맞춤으로 썼잖아? 별거 있겠어?”

“횽. TYB에서 작곡의 90%는 녹음 디렉이에요. 녹음에만 반년 걸리는 경우도 있다구요.”

“바… 반년? 그건 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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