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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왕-68화 (68/280)

제68화

평소에 싸움을 자주 하는 타입이라면 모를까. 재호는 항상 냉정하고 침착했다. 내게도 항상 사근사근하게 대했다.

지금처럼 갑자기 버럭 화를 내는 모습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최소한 이전 생에서는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은 이번 생에서 생긴 ‘변화'의 결과였다.

변화라면 역시 ‘비원더'로 한 팀이 된 일이었다. 함께 일을 시작하다 보니, 그전에는 몰랐던 면모가 보이기 시작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었다.

‘그럼 뭐가 문제인 거지?’

일단 최대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고 이야기를 해봤다.

“뭐가 문젠데?”

“노을이 니가 단독 행동하는 게 문제지! 그리고 내가 감정으로 한 말이 아닌데! 감정적이라고 왜 라벨을 붙이는 거냐구!”

“아…”

내가 뭐라 말할 새도 없이 재호가 말을 계속했다. 봇물 터지듯 말을 이어 나갔다.

“항상 니는 이런 식이야. 이전에도. 왜 우리한테 상의도 없이 숙소를 달라 그러냐구! 이야기를 미리 해야 할 꺼 아냐. 그리고 우리가 허파에 바람 들었다구 미리 재단하고. 나는 안 들떴거덩? 왜 내 마음 상태를 니가 마음대로 정의하는 거야?”

지금 재호가 하는 말이 내 평생 들은 재호의 말 중 제일 빨랐다.

대충 재호가 할 말이 다 끝난 모양이었다. 숨소리만 들렸다. 그사이에 내가 할 말은 정리를 마쳤다.

“다 끝났냐?”

“왜. 또 니가 정해주려구?”

“그래 미안하다. 생각해보니 니 입장에선 화가 났겠네. 내가 생각이 짧았어. 앞으로는 팀 단위로 하는 이야기는 선생님한테 이야기하기 전에 미리 이야기할게.”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라구! 당연히!”

재호는 여전히 씩씩대고 있었지만 내게는 보였다. 재호의 불안이 말이다.

재호는 나와 좀 다른 타입이었다. 나는 아무리 높은 사람이라도, 쫄지 않았다. 하지만 재호는 달랐다. 천채왕 프로듀서 앞에서는 항상 경직되어 있었다. 좀 잘해보려 하다가 오히려 실수를 하곤 했다. 그에 반해 나는 편하게 천채왕 프로듀서와 말을 하고 있었다.

재호 입장에서는, 편하게 천채왕 프로듀서와 대화하는 내가 부러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건 사실 천성에 가까운 기질이니까, 바꾸기도 어려운 노릇이고 말이다.

재호의 화가 재호의 불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짚어낸 이상, 재호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재호 말도 일리가 있고.’

매번 천채왕 프로듀서에게 내 말을 편하게 다 말하는 건 확실히 위험했다. 솔로 가수 지망생일 때야 상관없었다. 나만 책임지면 되니 말이다. 팀이 되면 달랐다. 내가 하는 말이, 세 명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재호 말대로, 미리 상의한 후에 회사에 말하는 게 맞았다.

재호에게 내가 말을 계속했다.

“니 말대로, 앞으로는 회사랑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부터 말을 맞춰야겠어.”

“당연하지!”

“야. 그럼 당장 우리, 벌써 하나 정해야 하지 않냐?”

“뭘?”

“환희 말야 환희. 환희냐 하늘이냐 하는 거.”

“아 그거?”

주환희에게는 사실 ‘주하늘'이라는 또 하나의 모습이 있었다. 아니, 사실 주하늘이 본 모습이고 주환희는 연예인 용 인격이라 보는 게 맞았다. 연예인 활동을 할 때마다 하늘이는 ‘주환희'란 배역을 연기했다.

“매니저는 항상 우리랑 붙어 다닐 건데. 결국 알게 되지 않을까?”

“흠… 그건 일단 환희가 오면 이야기 하자구. 아! 그리구 너. 자꾸 내 상태를 니 멋대로 짐작해서 말하지 말라구! 알았어?”

“그래그래.”

“건성건성 하지 말구! 너 정말이지…”

또 재호가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려는 순간이었다. 때마침 커리 냄비에서 소리가 났다.

“야야. 커리 탄다.”

“악!”

다행히 커리 덕에 살았다.

‘저게 재호가 빡치는 포인트인 건가?’

이제 재호, 환희랑 일을 하는 이상, 뭐에 열 받는 타입인지, 무엇을 거슬려 하는지 확실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팀 활동을 하려면 다양한 일을 해내야 하는 거구나 실감했다.

이건 당장 해결될 문제는 아니고, 차근차근 풀어가야 할 장기 프로젝트였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재호는 커리 요리를 완료해서 식탁에 차렸다.

내가 부르자 환희가 방에서 나왔다.

“벌써 밥이에요 횽들?”

재호가 틱틱 쏘아붙였다.

“야. 벌써 11시라구.”

“겨우 11시죠 재호횽. 오… 음청 맛있겠네요.”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야 너 그… 주하늘 말야.”

내가 ‘주하늘'이란 말을 꺼내자 환희의 눈빛이 달라졌다. 순간 차가워졌다고 할까?

“네 횽.”

말투는 여전히 주환희였지만, 얼굴에는 웃음기가 싹 가셨다.

“매니저한테는 어떻게 할 거야. 말할 거야?”

“왜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자나요.”

환희가 우걱우걱 샐러드를 입에 담으며 말했다.

“글쎄. 적어도 당분간 매니저는 우리랑 24시간을 같이 할 건데. 숨길 수 있을까?”

“횽들도 같이 있었는데 몰랐자나요. 잘 때만 제 침실에 못 들어오게 하면 되여.”

“그런가? 재호 니 생각은 어때?”

공동의 주제가 생기자 그때까지도 뭔가 꽁한 상태이던 재호가 표정을 풀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글쎄. 나는 그래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근데 결국 노을이 너는 좀 짐작을 했던 거잖아?”

“그렇지.”

“그럼 사실 언젠가는 알게 된다는 거 아닐까?”

사실 나도 재호와 같은 생각이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이미 TYB는 주하늘과 주환희를 아는 게 아닐까? 알면서도 굳이 그걸 말하지 않고 모른 척 넘어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특히 환희를 대하는 천채왕 프로듀서의 태도나 표정이 늘 의미심장했다. 마치 ‘나는 너의 실제 모습을 알아'라는 듯한 표정이 가끔 나왔었다.

‘100% 신뢰하지는 못하는 모습이랄까?’

주환희가 머리가락을 만지작만지작했다. 그러더니 불쑥 말했다.

“조금… 생각해 볼게여. 어차피 우리, TYB에서 계속할지도 모르자나요. 저 매니저가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좀 상황을 보고 시퍼요.”

납득이 가는 말이었다. 하지만 일단 고민은 시작은 해야 한다는 게 중요했다.

내가 맞장구를 쳐줬다.

“그래 그럼.”

그때 마침, 문이 열리고 배영웅 매니저가 들어왔다.

“왔습니닷. 어 세분 여기서 무슨 말씀을 나누고 계세요?”

그러면서 그는 또 예의 실눈을 뜨며 씨이익 웃었다. 하도 자주 웃어서 이젠 슬슬 무서워질 지경이었다.

내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뭔가. 되게 예의 바르고 좋은 사람인데 되게 피곤했다.

‘언젠가는 이게 잘 풀릴 수 있을까?’

* * *

매니저 한 명이 숙소에 추가됨으로써 인간관계의 변수가 수없이 많아졌다. 대신 이미 손발을 맞춰 온 우리 세 멤버의 팀플레이는 조금씩 더 단단해졌다. 되려, 배영웅 매니저라는 타인이 생기니까 우리 셋이서는 더 열심히 뭉치게 되는 효과도 있었다.

이미 데뷔곡에 대해서는 우리끼리 많이 대화를 해둔 상태라,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뭐라 말하지 않아도 재호는 척척 멋진 비트를 뽑았다. 환희는 재호의 편곡을 듣더니만 순식간에 흥얼대며 멜로디와 가사를 쭉쭉 써냈다.

너무 진행 상황이 빨라서 나도 모르게,

“이거, 숙소 괜히 빌린 거 같은데?”

이런 말이 나왔다.

하루도 안 돼서 작업의 95%가 끝나 버렸다.

환희가 노트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말했다.

“녹음 직전까지 가사는 계속 바꿀 꺼에여. 노을 횽은 한번 제 가이드 버젼 가사로 노래 불러봐 주세여. 들어보고 좀 멜로디랑 가사 바꿔 볼게요.”

“아예 녹음까지 해가게?”

"당연하죠 횽. 천채왕 프로듀서라구요. 꽤 괜찮은 상태의 녹음을 해둬야죠. 물론 다 엎겠지만. 그래도 거의 완성품이긴 해야 된다그요.”

“완성품을 받은 다음에 다시 또 완성도를 높인다고?”

“그런 셈이죠.”

말만 들어도 피곤한 작업이었다. 사실상 곡을 두 번 만드는 수준의 작업이었으니까 말이다. 괜히 TYB가 완성도와 짜임새로 명성이 드높은 게 아니었다.

“TYB는 항상 이렇게 음악을 작업해?”

“싱어송라이터는 처음이라 잘 모르겠는데. 일단 여지까지 TYB 다른 가수들은 그렇게 했다고 들었어여. 들은 바로는 백번은 고친다는데여.”

“누구한테 들었어?”

“천신군단요.”

“아폴로 빈?”

“그죠?”

‘옳거니!’

마침 내가 해보고 싶은 주제로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넘어갔다.

“환희야.”

“왜요 횽?”

“내가 천채왕 프로듀서님에게 전화를 좀 했는데…”

“네?”

왠지 말하면서도 재호에게 눈치가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재호가 나를 차갑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우리 주제가 ‘모든 구속을 버리고 얻는 사랑' 이잖아? 그 주제에 아폴로 빈이 딱 맞는 거 같아서. 아폴로 빈을 뮤비 감독으로 추천했어.”

“푸하하하하하 대박이네여 횽.! 우하하하하하하!”

환희는 깔깔대며 웃었다. 나도 당황했지만 재호가 더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재호가 환희에게 물었다.

“너는 안 열 받냐?”

“왜요?”

“단독 행동을 한 거잖아.”

“뭐 어때여. 어차피 결정은 횽이 아니라 선생님이 할 끈데.”

재호가 어이없다는 듯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확실히 두 녀석이 다 타입이 달라서, 화나는 트리거도 다른 모양이네.’

이런 미묘한 지점을 알아두는 것도 앞으로 팀 활동에 도움이 될 듯했다.

여튼, 지금은 내가 대화를 이어갈 타이밍이었다. 내가 환희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괜찮은 거 같아?”

“그럼요 횽! 대박이죠!”

“뭐 그 정도인가?”

환희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된 건 얼마 후의 일이었다.

* * *

그날 밤. 작업이 일단락되었다고 배영웅 매니저에게 말했다.

“벌써요?”

지금까지 봤던 배영웅 매니저의 눈 중 가장 큰 크기였다. 놀라긴 한 모양이었다.

내가 대답했다.

“네.”

“와서 작업하신 지 이틀도 채 지나지 않지 않았나요?”

“그죠?”

“근데 다 되셨다고요?”

“네. 이제 다음 할 일 알려주세요.”

“음… 한 번만 들을 수 있어요?”

재호는 A&R 직원도 아닌 매니저가 곡을 확인하려 하는 게 조금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한 명이라도 더 의견을 듣는 게 나았다.

재호가 음악을 틀었다. 꼼꼼하게 듣던 배영웅이 말했다.

“언제 돌아갈까요?”

재호가 대답했다.

“네?”

“완료했으니까. 이제 회사에 돌아가셔야죠. 있을 이유가 없네요.”

재호가 계속 말했다.

“아니, 뭐 피드백 같은 건 없어요?”

‘그래도 피드백을 은근히 듣고는 싶었던 모양이구만.’

배영웅 매니저는 뜻밖에 말을 했다.

“제가 평가할 레벨의 곡은 아닌 거 같네요. 좋은 의미로요. 선생님께 맡기겠습니다. 잠시만요.”

배영웅 매니저는 양해를 구하고 어디엔가 전화를 걸러 나갔다.

재호가 내게 슬쩍 말했다.

“노을아.”

“왜?”

“저 사람. 좋은 사람인 거 같거덩? 의외로?”

“아 그냐.”

재호는 저거 하나로 철석같이 믿게 된 모양이었다. 아직 내게는 좀 애매했지만.

그 사이에 배영웅 매니저가 돌아왔다. 내가 물었다.

“어때요?”

“지금 돌아오시라네요.”

“지금이요?”

“네, 바로 지금 당장.”

* * *

정말로 우리는 벼락처럼 배영웅 매니저가 운전하는 볼보를 타고 TYB 회사로 돌아왔다. 아무리 평일이라지만 이렇게 빨리 와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회사에 도착하자마자 회의실에 도착했다. 5분 정도 지났을까? 11시가 될 무렵, 천채왕 프로듀서가 불쑥 들어왔다.

“이야, 본 지 며칠 안 됐는데 다들 반가워. 대관령 숙소 괜찮지?”

내가 대답했다.

“네. 좋았습니다. 하루 더 묵었으면 좋았을 뻔했네요.”

“빨리빨리 진행하는 게 서로에게 좋잖아. 그래서 좀 급하게 불렀어. 괜찮지?”

비원더 세 멤버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진행은 우리에게도 바라는 바였다.

천채왕 프로듀서가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마커를 집었다. 그리고 우리를 보며 말했다.

“곡은 이미 들었어. 배영웅 팀장이 보내줘서.”

‘배영웅 그 사람 벌써 팀장이야? 나이는 복학생 정도로 보였는데.’

재호가 약간 조급한 표정으로 내게 속삭였다. 다급한 마음이 내게까지 전달됐다. 내가 천채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물어보았다.

“어, 어떠셨나요?”

“어떠냐고?”

천채왕 프로듀서가 화이트보드에 마커로 아무 의미 없는 선을 끄적였다. 그렇게 5초 정도 지났을까? 천채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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