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7화
아폴로 빈이었다.
그는 아이돌이었지만, 연애가 더 소중했던 사람이었다. 결국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로 했다. 아이돌로는 사실상 은퇴 선언이었다. 그렇게 아시아 최고, 심지어 중동, 동남아, 남미까지 뻗어가는 최고 잘 나가는 아이돌 ‘천신군단'의 멤버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사랑 때문이었다. ‘음식남녀'의 스토리와 딱 맞았다.
또 하나 그가 필요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천신군단에서 뮤직비디오를 찍곤 했다. 게다가, 나중에는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대성하기까지 했다.
말인즉슨, 우리의 뮤직비디오 감독으로 적격이란 뜻이었다.
노경진 PD 또한 미래에 뮤직비디오 감독 및 영화감독, 드라마 감독, 예능 PD 등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 활약할 운명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비원더의 데뷔 리얼리티 예능을 찍어야 했다. 뮤직비디오까지 함께 찍을 여유는 없었다. 게다가 화제의 중심인 아폴로 빈이 뮤직비디오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리얼리티 예능에 반고정으로 출현한다면 프로그램에 넣을 스토리도 풍성해질 터였다.
우리가 섭외해야 할 사람이 또 하나 생긴 셈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비몽사몽 잠을 깰까 말까 하는 그 순간…
끽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아니 이건 뭔가 그리고 드디어 뮤직비디오… 음악적인 리듬과 멜로디가 있는 소리인데?
설마… 악기 연주인가? 바이올린 소리??
서서히 눈을 떴다. 커다란 뿔테 안경에, 뽀글머리, 바바리코트에 수트, 조끼까지 완벽하게 갖춰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누, 누구야!”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일단 내 몸을 지키기 위해 뭐라도 잡았다. ...잡고 보니 옷걸이였다는 게 문제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옷걸이를 촥! 하고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치켜들며 말했다.
“너, 너. 옆 방으로 가면 죽여버리겠어!”
옆 방에는 동생이 자고 있었다.
“여동생분 말인가요?”
“너… 너… 너… 여동생이 옆 방에 있는걸 어떻게 알아! 죽여버리겠어!”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옷걸이(...)를 들고 괴한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괴한이 능숙하게 내 손을 잡고는, 부드럽게 각도를 틀었다. 나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절묘하게도 매트리스로 던져져서 전혀 아프지는 않았다.
할 수만 있다면 mp3를 켜서 ‘격투' 스탯을 높이고 싶었다. 그런 스탯은 없었고, 죄다 가수를 위한 기능밖에 없었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괴한이 태연하게 말했다.
“여동생분이 들여보내 줬는데요.”
“뭐?”
괴한이 씨이익 웃으면서 안경을 만졌다. 나름 나는 전력을 다한 공격을 했는데, 괴한은 조금도 숨이 거칠어지지 않았다. 그는 바로 입을 열었다.
“아, 저는 오늘부터 비원더를 맡게 된 매니저 배영웅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그런 말은 미리 좀 하라고!’
* * *
배영웅 매니저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차에 탔다. 이번 차는 볼보였다. 좀 투박하지만, 여지껏 탔던 카니발보다 훨씬 엣지가 있었다. 뭔가 우리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는 실감도 났다.
배영웅 매니저가 운전대를 잡았다. 나는 바로 옆, 조수석에 자리를 잡았다. 차 스피커에서는 라벨의 오케스트라가 흘러나왔다.
매니저가 나를 데리러 오는 상황을 겪으니 뭔가 연예인이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좀 욱신거리는 게 짜증 나긴 했지만 말이다.
배영웅 매니저가 예의 바른 미소를 띠며 말했다.
“권노을 아티스트께서 요청하셨던 숙소 준비가 끝나서요. 모시러 왔습니다.”
원래도 눈이 크지는 않았지만, 웃을 때마다 실눈이 되어서 뭔가 매서운 느낌이었다. 나를 자빠뜨려서 매섭게 느낀 걸 수도 있지만. 그만큼 사람 지키는 데는 탁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그럼 지금은 어디로 가는 건가요?”
“원재호 아티스트에게 갑니다. 앞에 수납장 여시면 따뜻한 허브티가 있습니다. 목에 좋을 거예요.”
수납장 문을 여니 정말 보온병이 들어 있었다. 안에 있는 차를 마셨다. 몸이 따끈해졌다. 살짝 꿀이 섞여서 더 에너지가 느껴졌다.
“괜찮죠?”
“네, 너무 좋네요.”
첫인상은 좀 나빴지만, 의외로 좋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 저를 좋게만 생각 마세요.”
“네?”
“저는 아티스트를 보호하는 사람이지만. 또 ‘감시하는' 사람이기도 하니까요. 사측이라고 봐야겠죠. 선생님의 눈이라고 보셔도 돼요.”
일부러 섬짓한 말을 하는 느낌이었다. 냉정한 말을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아서 더 무서워 보였다. 진지한 말을 할 때는 눈은 조금 커진 거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건 그렇고, 그는 정말 세련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힘은 세지만 몸도 슬림했다. 나이도 그래 봐야 20대 중후반? 정도밖에 안 되어 보였다. 매니저라고 자신을 소개하지 않았다면 예술 관계 일을 하는 사람이라 생각했을 것 같았다.
“근데 배영웅 매니저님은 뭔가 제가 생각했던 느낌하고 다르네요.”
“하하. 어떤 의미시죠?”
“매니저 하면 편한 옷 입고. 약간 거친 일 하고. 깡패들이나 권모술수를 꾸미는 용역들에게서 쑥덕쑥덕 잘 협상해서 가수를 지키는? 그런 느낌인데요.”
“하하! 90년대까지는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이사님들이나 선생님이 현역으로 뛰셨을 때!”
“지금은 안 그래요?”
“저희도 회사니까요 노을 님. 리스크 관리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고. 언론 홍보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고. 그리고 저처럼, 아티스트를 담당하는 부서도 있죠.”
“양복 입고 이러시는 줄은 또 몰랐네요.”
“그건 저만 그래요.”
“윗분들이 뭐라고 안 하세요?”
“팀장이라서 괜찮아요.”
‘팀자앙?’
생각보다 더 높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근데 그러기엔 너무 어려 보이는데…
* * *
솔직히 남의 잠이 덜 깬 모습은 한 번쯤 보고 싶었다. 내가 당했을 때는 열 받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내 바람은 먹히지 않았다. 재호도, 환희도 마치 예상한 듯, 이미 깨어 있었다.
“누구시죠?”
재호는 완전히 풀 세팅 된 모습으로 우리를 맞았다.
‘제길. 하긴 뭐 맨날 시계처럼 정확하게 일어나는 놈이니까. 그럼 하늘이라도…’
환희도 마찬가지였다. 매니저와 함께 문을 두드리자 이미 주환희로 세팅을 완료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잠만요! 응? 누구예요 횽?”
“...아니다.”
배영웅 매니저가 태연하게 말했다.
“우와. 다들 일찍 일어나시는 분이네요. 너무 편하겠네요. 권노을 아티스트님만 조심하면 되겠는데요?”
마음속으로는 ‘그야 당신이 나만 봤으니까!!!’ 라고 소리를 꽥 내고 싶었지만, 첫날부터 본색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일단 꾹 참고 차에 탔다.
앞으로 배영웅 매니저와 최소 2~3개월은 함께 일해야 하는데,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느낌이었다.
* * *
배영웅 매니저는 비원더 세 멤버를 싣고 어딘가로 향했다. 내가 배영웅에게 물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요?”
“강원도요.”
“강원도는 너무 넓지 않나요?”
배영웅 매니저는 예의 눈웃음을 지어 보이며 대답했다.
“좋은 데로 모셔 드릴게요. 조용한 데 가고 싶다 하셨죠?”
“어디 절이라도 가나요?”
“에이 절은 음악 작업이 안 되죠.”
재호가 비명을 지르듯 말했다.
“아 맞다! 악기!”
내가 대답했다.
“안 가져왔어?”
“노트북이랑 기본적인 건 가져왔는데. 이걸로는 부족해.”
“야이 곡 쓰러 가는데 그러면…”
“아아 걱정하지 마세요. 선생님이 다 준비해두셨습니다. 스튜디오 시설이에요.”
천채왕 프로듀서가 준비한 스튜디오라니. 뭔가 조금씩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슬쩍 매니저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스튜디오가 엄청 많으신가 봐요?”
“아무래도 그렇죠. 선생님이 워낙 많은 작곡가들과 협업을 하시다 보니. 해외 작곡가들과도 협업을 많이 하시더라구요. 그런데도 비원더에 곡을 쓸 기회를 주시는 거예요.”
배영웅 매니저가 씨이익 웃으면서 말했다. 젠틀한 말투였지만 속에는 가시가 들어 있었다.
* * *
배영웅 매니저가 틀어 놓은 로버트 글라스퍼의 재즈 음악 CD가 두 바퀴 돌아갔을 때쯤, 우리는 숙소에 도착했다. 대관령에 위치한 연수원이었다.
주차장을 나와 바깥 공기를 쐬었다. 아직 11월 말임에도, 오싹했다. 별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추위에 깜짝 놀랐다.
환희가 물었다.
“왤케 추워여!”
배영웅 매니저가 대답했다.
“대관령이 유독 강원도에서도 다른 곳보다 추워요.”
내가 반사적으로 질문했다.
“제주도 같은 곳 가도 될 거 같은데. 굳이 겨울에 이런 데 오신 이유가 있나요?”
“스키장만 조심하면 되니까요. 제주도는 관광객이 너무 많아요.”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았다. 얼핏 봐도 이곳은 그야말로 아무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겨울에 굳이 강원도에 스키장도 아니고 워크샵을 오는 사람은 거의 없어 보였다.
“연수원 직원분들과는 다 이야기가 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자유롭게 산책하시고 물건도 사셔도 됩니다. 일단 식재료는 제가 다 드릴 거지만요. 요리는 재호 아티스트께서 해주실 수 있겠죠?”
재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리 내가 요리를 하겠다'라고 말할 녀석이었다. 배영웅 매니저가 이미 재호의 성향을 연구하고 그에 맞춰서 준비한 게 분명했다.
매니저의 안내로 들어간 숙소는 일종의 단독 주택이었다. 거실과 방 3개, 부엌이 딸려 있었다. 조금 작았지만 구조나 기능이 이전에 ‘슈퍼스타 T’를 치렀던 숙소와 비슷했다.
배영웅 매니저가 불쑥 말했다.
“여기가 좀, ‘슈퍼스타 T’ 때 기숙사랑 비슷해요. 원래 이 연수원을 슈퍼캠프 장소로 쓸까 고민했거든요. 마지막에 캠핑장으로 바뀌었지만요.”
마치 내 머릿속을 읽은 듯한 대답이었다.
“그렇군요…”
“짐 풀고 잠시만 쉬고 계세요. 식재료 가져오겠습니다.”
배영웅이 나갔다. 재호가 불쑥 말했다.
“그럼 이제 방은 어디로 하지?”
환희가 방을 돌아보면서 뭔가 말하려 했다.
“횽, 횽 저는…”
뭔가 우물쭈물한 태도였다. 이미 두 녀석의 취향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나랑은 겹치지 않았다.
“너는 안쪽에 어두침침한 방이 좋지? 재호 너는 2층이 좋고. 나는 아침에 볕 드는 곳이 좋으니까 바깥방으로 가면 되겠네. 됐지?”
이미 몇 번이나 같이 생활해봤다. 이제 둘의 취향 정도는 꿰고 있었다. 재호도 고개를 끄덕였고, 환희도 ok 사인을 날렸다.
바로 나는 내 방에 짐을 옮겼다. 바리바리 짐을 싸 들고 온 재호, 환희와는 달리 내 짐은 옷과 필기도구, 노트북, 그리고 mp3가 전부였다.
그리고 핸드폰이 있었다. 지금 연락해야 할 사람이 있었다. 바로 전화했다.
뚜뚜… 뚜뚜…
-여보세요.
“천채왕 프로듀서님.”
-어 노을이냐? 무슨 일이야?
“아 다름이 아니라 잠깐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혹시 지금 잠시 통화 가능하신가요?”
-짧게.
“네네 다름이 아니라. 저희 뮤직비디오도 찍을 거잖아요?”
-음악이 완성된 다음에는 그렇지.
“네네. 그거를 혹시. 아폴로 빈 님께서 찍어주시면 어떨까 싶어서요.”
-빈이가?
“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다니.
-푸하하하하하하!!! 너 내가 생각하는 그거 생각하는 거 맞지?
“네 맞습니다.”
-진짜 물건이다 니놈. 재밌겠네. 그거만으로도 기사감이다. 좋아. 한번 내가 빈이한테 이야기해 볼게. 뮤비 감독 정도야 문제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이러면 좀 안심이 되네.’
이것만으로 일단 대중의 관심은 잡아 둘 수 있을 터였다.
통화를 끝냈다. 벌써 좋은 냄새가 나고 있었다. 냄새를 찾아 나가보니 부엌에서 재호가 뭔가 요리를 하고 있었다.
“뭐 하냐?”
“다들 아침 안 먹었잖아? 빨리할 수 있게 커리 하는 중이야.”
일반적인 커리 느낌은 아니었다. 토마토 향이 강하게 났다. 금방 배고파졌다. 누구보다 빠르게 밥을 먹기 위해 탁자에 앉았다.
재호가 커리 맛을 보고, 무언가 조미료를 넣으며 말을 걸었다.
“누구랑 통화했어?”
“어떻게 알았어?”
“말소리가 들렸거덩~”
“아. 천채왕 프로듀서한테 말했어.”
재호가 국자를 탁 소리 나게 카운터에 놓았다. 갑자기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말했다. 정색하는 표정이었다.
“뭔 말을 했어?”
“아. 아폴로 빈 형 있잖아.”
“응 알지.”
“그 형이 딱 일을 버리고 사랑을 택했잖아. 그래서 그 형을 감독으로 해보자고 말했어.”
재호 목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야! 그런 건 좀 상의하고 나서 말하라구! 단독행동 하지 말구!”
항상 냉정하던 재호답지 않았다.
“야. 갑자기 왜 그리 감정적이야.”
“나 안 감정적이라구! 니가 문제지. 왜 자꾸 단독행동을 하는 건데?”
‘갑자기 이 녀석 왜 급발진이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