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66화 (66/280)

제66화

“저희가 외부와 단절돼서 조용하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주세요.”

“외부와 단절? 왜?”

방금 전 식사를 하면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회의를 하다 누군가가 우리 얼굴을 알아봤던 일. 그래서 인파 속에서 간신히 빠져나왔던 일까지 말이다.

천채왕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소속 가수가 유쾌하지 않은 일에 말려든 게 썩 좋아 보이지 않았나 보다.

“그런 일이 있었어? 앞으로는 미리 대비하라고 담당 직원에게 말해둘게.”

“대비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합니다..”

“무슨 말이야?”

“인파가 있는 곳이라면 당분간…. 아마 한 1~2달? 정도는 계속 저희를 알아볼 겁니다.”

이전 생이였다면. 2020년이었다면 오디션 우승자 따위 1주일이면 잊혀질지도 몰랐다. 지금은 아니었다. 2005년이었다. 유명세가 3개월은 갔다.

“아마도? 그래서?”

“아무래도 저희도 사람이라. 그런 반응이 있으면 마음이 좀 흔들릴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붕 뜬 상태에서는 작업이 제대로 안 될 거 같습니다. 남들 시선이 없는 곳에서 제대로 작업을 완수하고 싶습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재호와 환희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침묵을 깬 건 천채왕이었다.

“노을이가 좀 유별나긴 하네. 하지만 맞는 말이야. 오디션에서 이름을 알린 가수의 십중팔구가 제대로 된 커리어를 못 남겨. 허파에 바람 들어가서야.”

주환희는 피식 웃었다. 천채왕이 살짝 농담조로 말을 걸었다.

“환희 너 왜 웃어?”

“아뇨 쌤…. 솔직히 제가 좀 그래써서요. 마음을 읽힌 줄 알았어요.”

“야. 내가 짬밥이 몇년이냐. 척하면 척이지.”

재호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이어갔다.

“그러면?”

“원래 내가 말을 해줄까 했는데. 사실 내가 정식 계약을 한 프로듀서도 아니고 좀 애매했는데. 니가 먼저 그렇게 나와주면 우리야 고맙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좋은 장소는 금방 찾을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우리가 자리를 일어서려 하는데 천채왕 심사위원이 한 마디 덧붙였다.

“아직 회의 안 끝났다.”

“네네!”

천채왕이 셋을 꼼꼼히 살펴봤다.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의 시선이 환희에게로 향했다.

“환희야.”

“네 쌤.”

“솔직히 너는 직업보다 연애를 택할 거지?”

“Umm… 네.”

환희는 잠깐 뜸을 들이다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풋.”

계속 무표정이던 재호가 빵 터졌다. 나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도 저 녀석, 오디션이 끝나자마자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바로 연애를 시작했다. 이번 여자친구는 동유럽 어딘가에서 온 모델이라고 했다.

‘우리랑 팀 짜면서 아이돌 데뷔가 무산되자마자 처음으로 한 게 연애라는 게 더 웃겨.’

여튼, 정말 환희는 딱, 일보다 연애를 택할 놈이 확실했다.

천채왕 만은 여전히 웃지 않았다. 이번에는 재호를 쳐다봤다.

“재호군은 어때?”

“저, 저요… 저는…”

“너는 안 되겠지? 가수 커리어랑 연애 둘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면. 연애를 하겠어? 데뷔 후 성적에 영향을 미칠지 모르는데?”

“못할 거 같습니다.”

“그래.”

이번에는 천채왕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마음속을 꿰뚫어 볼 듯한 싶은 눈빛이었다.

“노을이는? 어때? 연애야? 일이야?”

“어… 음… 저는…”

솔직히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말이었다. 연애는 뒷전이었다. 애초에 회귀 후 지금까지, 쉴새 없이 달려왔다. 연애감정 같은 건 사치였다.

아니, 지금껏 내가 연애에 신경 쓰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해답일지 몰랐다.

천채왕이 살짝 말을 덧붙였다.

“가수 커리어가 망가지면 동생을 부양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연애를 포기할 거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래, 이제 문제를 알았어?”

아!

천채왕 심사위원이 하려는 말이 바로 떠올랐다.

“진실함인가요?”

“그래 노을이가 역시 빠르네. 맞았어. 영어로 하면 ‘authentic’이라는 어감인데. 니들의 생각에 진실하냐 이거야.”

그러더니 천채왕 심사위원이 어느새 직원이 프린트해서 가져온 ‘음식남녀'의 포스터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 이 영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야.”

재호가 재빨리 대답했다. 마치 대답을 하고 싶어 못 이긴 듯했다.

“굴레를 벗어나 사랑하자는 이야기 아닌가요? 3자매도 그렇구. 무엇보다 아버지가 그렇구요.”

“그래 재호 군, 맞아. 정답이야. 지금부터는 내 의견이야. 누구나 동의하는 이야기는 아니야. 그냥 참고해서 들어.”

“네네 알겠습니다.”

“내가 보기에. 모든 예술은 주장이 있어. ‘나는 아무 주장도 하지 않을 테니 니 맘대로 살아라'도 주장이야. 그렇다고 캠페인을 하지는 않겠지만. 자연스럽게 창작자의 사상이 들어간다. 그런 뜻이야.”

환희가 대답했다.

“저두 그런 거 같네여.”

천채왕 프로듀서가 말을 이어갔다.

“그런 의미에서, 이 가사의 주제인 ‘사랑은 사회적 구속보다 우선한다’. ‘의무와 전통을 벗어나 사랑을 찾겠다'. 이런 이야기는 여기 셋 중 오로지 환희만 공감할 이야기야.”

“아!”

재호가 신음처럼 마른 비명을 질렀다. 나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포인트였다.

“이런 노래를 정말 진심으로 부를 수 있겠어? 가수로서의 목표가 연애보다 좋은 재호 군. 가족의 안위가 연애보다 중요한 노을이. 나는 애매하다 보는데? 아이돌이면야 연기를 하라고 할 수도 있지만. 비원더란 팀은 싱어송라이터야. 진심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천채왕이 정확했다. 나는 정말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연애는 상관없었다.

재호는 정말 허를 찔린 듯 입을 굳게 담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대답할 말이 있었다. 오히려 내가 작사, 작곡을 하지 않는, 순수한 ‘가수'라서 가능한 일이었다.

“선생님, 저는 수많은 사랑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중에는… 나중에 생각해보면 좀 찌질하다 못해, 스토킹? 범죄? 에 가까운 노래도 있었습니다.

“그럴 수 있지. 특히 옛날 가사는 옛날 정서가 들어 있으니까.”

“하지만 제가 그런 노래를 불렀다고 해서, 그렇게 행동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죠. 제가 노래를 해보고, 들어보고, 그런 정신 상태에서 나는 어떤지를 생각하면서 오히려 저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 꼭 실연해야지만 이별 노래를 부를 수 있고, 사랑해야지만 사랑 고백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요. 예술은 결국 현실에서 출발하지만, 현실과는 다른 무언가니까요.”

곡을 쓰는 재호와 환희에게는 곡이 곡을 쓰는 자신들과 똑같은 존재로 느껴질 수도 있었다. 노래를 부르는 내게는 좀 달랐다. 내게 노래는 결국 하나의 좋은 대본이고, 이야기였다. 꼭 그게 내 이야기일 필요는 없었다. 잘 해석하고, 내가 그 상황이면 어땠을지 상상해서 부르면 그걸로 족했다.

“제가 쓴 게 아니라도,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에너지를 받아서 잘 쓸 수도 있고. 그게 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배우가 자기 대본을 쓰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자기감정과 사상에 진실하지 않습니까?”

재호도 말을 덧붙였다.

“저는 모든 걸 거는 사랑을 해본 적이 없구요. 해주신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노래로라도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습니다. 어차피 가사는 환희가 써줄 거니까요.”

“하하.”

환희는 살짝 얼굴이 붉어졌다. 하긴, 아이돌 연생 출신이면서 연애하고 다니는 놈이란 사실이 득이 되는 상황은 아마 살면서 거의 없었을 터였다.

마지막으로 내가 쐐기를 박을 때였다.

“제가 혼자 부르는 솔로곡이었다면. 아마 이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비원더의 데뷔곡입니다. 재호의 비트에, 환희의 멜로디와 가사, 그리고 저희 셋의 목소리가 더해진 또 하나의 팀입니다. 저 권노을의 노래라면 안 될 수도 있지만 ‘비원더'의 노래라면 될 수도 있다 생각합니다.”

천채왕이 말했다.

“그거 참 좋은 말이다.”

재호가 말을 보탰다.

“그리고 사실 저나 노을이도 팬들에게, 또 세상에 노래로 사랑을 전하는 걸 수도 있구요. 연애만 사랑은 아니잖아요?”

천채왕이 파하하 웃었다.

“아니, 그건 아니지. 뭐, 재호 군 말이 틀린 건 아닌데. 그렇다고 그게 ‘음식남녀'가 말하는 사랑은 아니지 않나? 저기서 말하는 사랑은 ‘본능'이니까.”

“아…”

재호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뭐 고개를 숙일 것까지야 있나?’

천채왕 심사위원이 말을 이어갔다.

“뭐 여튼 좋아. 니들은 정말 이 노래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확고하구나. 이 정도라면 해보자 한번! 아 그리고 꼭 요리가 중국요리일 필요는 없지?”

환희가 먼저 대답했다.

“저는 상관없는데. 어때요 횽들?”

나는 상관없었다.

“저는 무관합니다. 화면 때깔만 좋으면 됩니다.”

재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요리면 좋긴 하겠네요. 뮤비 찍다 보면 음식을 먹어야 할 텐데. 중국요리를 먹구 식단관리가…”

‘으이구 아직도 중국요리 타령이냐.’

식단에 변태처럼 신경 쓰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내가 큰 소리로 반응했다.

“야 중국요리가 다 그런 건 아니지. 그리고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천채왕이 나를 앉혔다.

“하하하. 됐어. 됐어. 좋아, 그럼 어떤 국가 요리로 할지도 고민해볼게. 오늘은 푹 쉬어. 내일 담당 매니저가 연락줄 거야.”

“저희도 담당 매니저가 생기나요?”

“당연하지. 앞으로 두 곡 활동하는 동안에는 우리 회사 소속 가순데.”

매니저까지 생기다니, 정말 프로로 데뷔한다는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 * *

집에 오니 동생이 거실 소파에 널브러져 자고 있었다.

“으이구~”

시간이 제법 늦었다. 새벽이었다. 동생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샤워하며 상황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음식남녀를 토대로 우리 비원더 3인이 만든 스케치는 천채왕 프로듀서의 마음에 들었다. 워낙 도박적인 음악이라 사실 걱정했었다. 스티비 원더 식의 휭크(Funk)음악은 전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역시 천채왕 프로듀서는 베테랑이었다. 곡을 듣자마자 우리의 의도를 이해했다. 스티비 원더는 전통적인 모타운 음악의 계승자였지만, 또한 컴퓨터 음악, 신시사이저 등을 적극 도입한 혁신가이기도 했다. 스티비 원더 같은 음악을 하겠다는 우리도 정말 스티비 원더와 똑같은 음악을 하기보다는 그의 혁신가 기질을 본받는 게 맞다고 판단했다.

이를 천채왕 심사위원도 단박에 이해하고는 곡을 통과시켰다.

의외인 점은 오히려 가사였다. 곡은 어렵게 통과하고, 가사는 쉽게 통과하리라 생각했는데, 핵심 컨셉으로 가져온 영화‘음식남녀'에 대해서는 천채왕 프로듀서가 우려를 표했다. 나와 재호는 사랑 때문에 다른 걸 포기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뭐, 내가 연애 때문에 가수를 포기하거나 하는 타입은 아니긴 했다. 기껏 회귀했는데, 동생을 지키고 가족을 지킬 기회를 이렇게 놓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가수로서 장애물이 될 수 있다는 건 새로웠다.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본 적이 아예 없었다.

‘하긴, 확실히 몰입감은 좀 떨어질 수도 있겠지.’

천채왕 프로듀서에게는 제대로 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좀 쳤지만, 불안하긴 했다. 뭔가 진정성 있게 연애에 미친 사람이 도와줘서 진정성을 좀 추가해야 할 것 같기도 했다.

주변에 ‘음식남녀'처럼, 연애에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든 사람이 있다면 도움을 청해볼 수 있었다. 가능하면 그 사람이 우리의 활동에 참여할 수 있으면 더 좋았다.

“어?”

샤워를 끝내고 수건으로 온몸을 닦던 찰나에, 엄청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적격인 사람이 딱 한 명, 바로 우리 주변에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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