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5화
음식남녀.
후일 거장이 된 이안 감독의 초기 영화였다. 한 가족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음식 장면과 함께 담아 큰 인기를 끌었었다.
영화 자체가 화려한 중식 요리의 향연이었다. 볼거리가 넘쳤다. 거기다가 3명의 자매의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음악적으로도, 또 스토리적으로도 다양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소재였다.
영화를 떠올리자마자 한순간에 머릿속에서 멜로디부터 가사, 편곡 방향, 무대의상, 무대 연출, 뮤직비디오까지 눈에 그려졌다. 그야말로 ‘유레카!’를 외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뭐해요?”
키미 프로듀서의 말이 이제야 귀에 들렸다. 어느새 밥 먹다 말고 흥분해서 일어나 버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이디어가 떠올라서요.”
뻘쭘하게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뭔데요?”
“조금 정리해서 회사에서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그래도 나가니까 좋죠?”
“네.”
부정할 수 없었다. 바깥에 나가서 새로운 공기, 새로운 맥락을 느끼다 보니 신선한 아이디어가 자연스레 떠올랐다.
“생각이 막히면 방구석에 박혀 있기보다 나가는 게 더 효과적이에요.”
“그렇군요.”
그때였다.
“꺄아아악!”
엄청난 데시벨을 소리와 함께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남녀노소 온갖 사람들이 우리 탁자 근처로 몰려와서는 우리를 보고 소리를 질러대기 시작했다.
“이런.”
우리를 사람들이 알아본 모양이었다.
“와아앙아아! 비원더다!”
“싸인해줘요!”
키미 프로듀서가 다급하게 말했다.
“다들! 저 친구 따라가요. 빨리!”
키미 프로듀서가 어딘가에서 시선을 끄는 사이, A&R 직원이 순식간에 우리를 TYB 엔터로 데려다주었다. 마치 ‘연예인이 주변에서 열광하는 관중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 할지 프로토콜을 보여 준 것인 양 질서정연한 모습이었다.
회의실에 오자 비로소 안심이 되었다.
“횽! 횽! 봤어요? 다들 저희 보니까 얼굴 한 번 보려고 펄쩍 펄쩍 뛰던데요! 신기했어요!”
환희는 들뜬 표정이었다.
재호도 뭔가 멍... 하니 바깥 창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뭔가 붕 뜨는 상태였다. ‘나 잘나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렸다.
이전 생에서 코러스 하던 시절, 레전드 가수 오창선 선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파에 바람 들어가면 끝이야. 인지도는 인기가 아니야. 알겠어? 내 음악을 돈 주고 들을 고객이 얼마나 있느냐가 중요하지 대중 관심? 2주 후면 꺼져.]
뭔가 분위기를 다잡을 필요가 있었다.
“야. 저건 그냥 관심이야. 우리가 TV 나와서 얻은 관심. 가수로 우리는 아직 데뷔도 하지 않았어. 차라리 우리를 따라와 주는 팬들은 가치가 있겠지만. 저런 불특정 다수의 관심은 허상이야. 집중하자 집중.”
“알겠어요 횽.”
“그래그래. 니 말이 맞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두 사람 다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그럴 법했다. 환희도 재호도, 고작 스무 살 남짓이었다. 난생처음 받아본 대중의 인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분위기 쇄신을 하려면, 더 근본적인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았다.
‘그건 천채왕 프로듀서의 도움이 필요해.’
일단은 천채왕 프로듀서와의 회의를 준비해야 할 순서였다.
* * *
그날 밤 8시 무렵.
천채왕 프로듀서와 회의를 하기로 약속된 시간이었다. 마침 우리도 때맞춰 회의가 끝났다.
천채왕 프로듀서가 정확하게 8시 10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시계를 쳐다보고 있던 재호가 천채왕 프로듀서에게 ‘따봉'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변태 자식.’
“응? 재호 군. 왠 따봉이야?”
“역시 프로듀서님입니다. 정확하시네요?”
“음?”
“아 벼, 별거 아닙니다.”
적당히 내가 얼버무렸다. 천채왕 프로듀서는 살짝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어때, 곡 기획은 어땠어? 쉽지 않지?”
한층 천채왕 프로듀서는 편안해 보였다. 문루아의 경고와는 달리 아직은 굉장히 날카롭다거나 하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프로듀서와 가수 입장으로 만나자, 심사위원이었을 때보다 더 마음을 놓고 있는 걸로 보였다.
하지만 일단, 마음은 놓지 않기로 했다. 천채왕 프로듀서가 본업에서는 평소처럼 좋기만 한 사람일 리는 없었으니까.
“네 정말 어려웠습니다. 프로듀서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실감했습니다.”
“하하! 그렇지.”
환희가 살짝 긴장한 모습으로 말했다. 회사 직원 앞에서 녀석은 여전히 주환희였다. 희한하게 그사이 머리도 올백으로 슬쩍 올라가 있어서 주환희다워졌다.
“슨생님. 근데 정말 의외여써요.”
“뭐가?”
“TYB는 원래 싱어송라이터, 셀프 프로듀싱 같은 거 잘 안 하자나요. 근데 저희는 자작곡으로 되도록 데뷔하게 하겠다고 하셔서.”
“그야, 뭐든지 잘하는 사람이 하는 게 맞으니까. 무대를 잘하는 사람은 무대에 집중하고. 곡을 잘 쓰는 사람은 곡에 집중하고. 하지만 비원더 3인은 이미 작사, 작곡, 편곡 모두 잘하는 팀이란 걸 오디션 과정을 통해 확인했으니까. 한번 보고 싶은 거야. 그렇다고 평소 곡보다 나쁜 곡을 자작곡이라는 이유로 쓰진 못해.”
역시나 제작자로 만나는 천채왕은 만만치 않았다. 시작부터 자연스러운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악을 써서 생기는 존재감이 아니라, 십여 년간 성공 가도를 달리며 자연스럽게 쌓인 것이었기에 거부하기 어려웠다.
“네넵.”
주환희가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래서?”
곡 브리핑은 전체 아이디어를 짠 내 몫이었다.
“저희가 새롭게 썼던 ‘오명' 기억하시나요?”
천채왕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기억하지! 놀라운 무대였지. 그 무대 덕분에 니들 자작곡을 쓰고 싶은 거야.”
“그때 깨달았습니다. 영화처럼 비쥬얼과 서사가 있는 레퍼런스를 하나 잡으면 굉장히 프로듀싱이 수월해진다는 걸요.”
“오~. 놀라운 발견인데? 계속해봐.”
“완전히 영화 레퍼런스랑 같게 갈 수는 없지만. ‘기댈 원 소스가 있는 것'과 ‘아예 처음부터 만드는 것'은 난이도가 아예 달라서요.”
천채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줬다.
“그러엄. 헐리웃 보면 영화, 미드, 죄다 원작 소설, 만화가 있잖아. 걔들이 바보가 아니거든. 처음부터 원작 없이, 그냥 자기들이 처음부터 전부 만들면 산으로 가는 걸 아는 거지. 여튼 그래서. 레퍼런스는?”
“이안 감독의 ‘음식남녀'라는 영화 아시나요?”
“야 그걸 니들이 알아? 90년대 영화잖아.”
“네. 그 영화를 한번 레퍼런스로 잡아봤습니다.”
“장르는 잘 감이 안 잡히는데?”
“음악 장르는 저희 특유의 장르를 짜서 하려 하고요. 이 영화로 비쥬얼과 서사를 잡아보려 합니다.”
“서사라고 하면?”
“3형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엄격한 요리사 엄마가 있어요. 아빠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없고요. 4인 가족이 매주 엄마가 차려준 정통 중국 요리를 먹으면서 식사를 하는 거죠.”
원래 영화에서는 아빠와 3자매 구성이었지만, 비원더는 남성 3인조 그룹이었다. 남녀를 바꿨다.
“흠…”
천채왕 프로듀서의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3형제는 엄마의 말에 따라 엄격하게 자랍니다. 하지만 한 명씩 엄마가 이해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죠. 그리고 마지막에는 반전으로 꽝! 사실 마지막에는 이제 엄마가 아들이 아닌 자신만의 사랑을 찾아 떠나는 결말입니다.”
“영화처럼 말이군.”
주환희가 나설 차례였다.
“네. 사회의 인식에서 안 좋게 보는 사랑. 그런 굴레에서 벗어나 사랑을 택하는 그런 정석적인 가사를 써보면 좋을 거 가테요.”
“뭐 발라드에서 많이 나오는 가사네.”
“마자요. 하지만 좀 ‘사회의 편견과의 대결'이란 각도를 강조해서 조금 전투적으로 써볼려그요.”
“키 프레이즈나 핵심 단어는?”
“핵심 멜로디와 함께 ‘이젠 나와 함께해'라는 훅을 만들어 보려고요.”
그러면서 환희는 살짝 주 멜로디를 물렀다. 피아노로 화음을 짚어 주었다.
“음~!”
천채왕 프로듀서가 눈을 감고 턱으로 리듬을 맞추며 들었다. 노래에 삘이 꽂혔다는 뜻이었다.
이제는 재호 차례였다.
“여기에 비트는 조금 세련되게 가보려 합니다.”
“세련된 느낌이라면 어떤?”
“풍성한 알앤비 편곡이 기본인데. 여기에 서정적인 스웨디시 풍의 신스를 섞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약간 동양적인 프레이즈로 ‘음식남녀'의 느낌을 주고요.”
“리듬은?”
“기본적으로는 808드럼에, 전자 드럼을 써서 최신 알앤비 느낌을 주지만 멜로디를 방해하지는 않는 선해서 해보려구요. 요즘 트렌드를 최대한 가져가지만 최대한 서정적으루.”
“오호… 뭔가 듣기만 하면 감이 안 오는데.”
“잠시만요 지금 노을이 제안으로 살짝 만든 스케치가 있습니다.”
재호가 방금 내게 컨펌받은 스케치를 틀었다. 지금은 아이디어에 가까웠다. 세련된 전자 드럼에, 잔잔하고 서정적인 피아노와 베이스가 더해져 오묘한 느낌을 보여줬다. 거기에 재호의 풍성한 코러스 화음이 더해졌다.
“오~!”
사실 2006년에 유행할 팝의 기조를 철저하게 연구해서 채워 넣은 음악이었다. 아마 지금 한창 가장 뜨거운 알앤비 스타들이 준비 중인 앨범과 스타일은 거의 흡사할 터였다.
이것도 회귀자의 이점이었다. 이미 세계 음악의 유행이 어떨지 꿰뚫고 있어서, 그에 맞춰서 남들보다 조금 앞설 수 있었다.
천채왕이 만족스러운 듯 우리를 쳐다봤다.
“비트 죽이는데?”
재호가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아니. 꼭 칭찬은 아니야. ‘너무' 좋은 거 같은데?”
내가 질문했다.
“그게 무슨 뜻이실까요?”
“노을아. 우리 넷은 그러니까 음악을 엄청 좋아하는 사람들이잖아?”
심지어 연습생이던 환희도 ‘환희 군' 이었는데. 우승 후 내 호칭은 ‘노을아'로 바뀌었다. 그만큼 나와 친하다는 친근감의 표시였다.
“그렇죠.”
“과하지 않게 절제된 힙합 리듬. 감성을 절묘하게 주입한 스웨디쉬 팝 감성, 스티비 원더를 연상시키는 풍성한 하모니의 알앤비. 거기에 약~간에 가요 감성까지. 재호가 지금 만든 비원더 음악이 뭔지는 알겠어. 근데 이거 너무 팝적인 거 아냐? 한국 대중에게는 너무 빠른 거 아닐까?”
역시나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지금 내가 만든 곡과 같은 스타일의 음악이 2006년 미국에서 유행할 예정이란 소리는, 한국에서는 너무 빠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2010년대와는 달리, 아직은 미국이 한국보다 훨씬 음악 유행의 첨단이었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미 내게는 계획이 있었다.
재호가 곡을 하나 더 틀었다.
“이 느낌으로, 조금 더 서정적인 곡도 하나 준비했습니다.”
그루비한 베이스. 서정적이다 못해 구슬픈 피아노. 이제는 좀 더 잔잔해졌지만 여전히 댄스음악에 나올 법한 약간 음의 높낮이가 있는 아프리카 리듬을 연상시키는 비트. 그리고 여기에 재호의 화려한 화음이 올라갔다.
후렴 부분에 고음이 쭉쭉 올라가면서 3명의 화음이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천채왕이 탄성을 질렀다.
“이건…!”
내가 씨익 웃어 보이며 천채왕 프로듀서에게 물었다.
“이 곡은 어떠신가요?”
“아 이건 대박이야! 근데 이걸 왜 첫 곡으로 안 하고 숨겼어?”
“이 곡을 두 번째로 하고 싶습니다.”
“후속곡으로? 왜?”
“첫 곡은 히트보다는, 우리가 이런 팀이다. 라고 우리의 음악성을 보여주는 곡을 하고 싶습니다.”
“음…”
“두 번째 곡은 너무 멜로디가 캐치해서 사실 코러스라던가, 소울풀한 리듬이라던가 이런 비원더의 색깔은 첫 곡만큼 드러나지는 않는 거 같습니다.”
천채왕 프로듀서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눈빛이 나를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첫 곡은 절제해서 자신들의 음악의 스타일을 보여주고. 대중성은 강력한 이별 감성의 후속곡으로 승부를 보겠다?”
“네. 데뷔곡은 영원히 기억에 남으니까요. 그 곡으로 저희가 ‘이런 팀이다'라고 도장을 콱 찍고 싶습니다.”
내 말을 가만히 듣던 천채왕 심사위원이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미련한데. 최고의 히트곡을 뒤로 넘기다니.”
“아…”
천채왕 프로듀서가 그대로 씨익 웃으며 말했다.
“미련한 게 딱 TYB 스타일이네. 그래! 한번 가보자 그까짓 거! 후속곡까지는 우리가 책임진다.”
환희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진짜여? 그건 약속에 없었을 텐데.”
“이 정도 곡이면 우리가 먼저 찜해놓고 싶을 정도야. 좋아. 어디보자… 뭐부터 일단 정해야 하나? 뮤직비디오서 3형제는 니들 셋이 하면 될거고. 한 명은 루아랑 연애하는 걸로 하면 되고. 가장 중요한 엄마 배역을 정해야겠네.”
천채왕 프로듀서가 마음을 정한 듯 벌써 뮤직비디오 제작을 기획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전에 내가 할 말이 있었다.
“잠시만요 프로듀서님.”
“음? 왜 노을아.”
“그 전에. 제가 요청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