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4화
영화였다.
신곡 아이디어를 떠올리기 힘든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많은 내용을 생각해내야 하기 때문이었다.
가사 속의 서사. 가사의 언어. 멜로디. 무대 의상. 뮤직비디오까지. 수많은 요소를 다 떠올려야 했다. 이 모든 요소에 영감을 줄 만한 컨셉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비쥬얼적인 요소까지 다 나 혼자 만들기는 어려웠다.
그러다가 떠오른 게 베이비 선배였다. 이미 비원더는 오디션에서 베이비 심사위원의 ‘오명'을 불렀던 적이 있었다. 히치콕의 영화 ‘오명'에서 영감을 얻었던 곡이었다. 워낙 비쥬얼과 스토리가 강렬했던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서, 멜로디부터 가사, 의상, 무대 연출까지 모두 강렬하고 통일감 있게 구성이 가능했다.
나에게도 그런 아이디어의 원천이 필요했다. 천채왕 심사위원처럼 나도, 영화에서 영감을 얻어 보기로 했다.
* * *
다음 날, 압구정동에 있는 TYB 엔터 회의실로 향했다. 신곡 회의 때문이었다.
TYB 엔터에는 연습 등을 위해 가끔 왔지만, 오디션 동안은 대부분 뮤직넷에서 활동했다. 제대로 TYB 사옥에서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과연 대형기획사답게 호텔처럼 모든 장소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비원더의 첫 활동은 TYB가 전담하기로 결정한 만큼, 당분간은 TYB 엔터에서 활동을 준비할 예정이었다.
회의실에 들어가니 아니나 다를까, 재호가 먼저 들어와 있었다. 재호가 나를 보더니 핀잔을 줬다.
“늦었어.”
“딱 맞춰 왔는데?”
“원래 회의는 10분 먼저 오는 거라구. 예상치 못할 문제를 대비하기 위해서. 노을이 너는… 8분 30초 일찍 왔네.”
‘변태 같은 놈.’
적당히 화제를 전환했다.
“재호 너는 잘 지냈냐?”
“뭐 그냥 그렇지 뭐. 하루 쉬었는데 벌써 활동하구 싶더라. 노을이 너는?”
하긴 재호는 원래 별로 집과 친하지 않았었다.
“나야 뭐 그렇지.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동생 있잖아?”
“걔가 얼마나 바쁜데. 수능 끝났다고 매일같이 친구랑 놀러 다녀.”
“아 벌써 그렇게 됐구나.”
“우리도 겨우 1년 전에 그랬잖아.”
사실 나에게는 1년 전이 아니라 16년 전이었다. 회귀자였으니까 말이다. 수능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이제는 점점 2005년이 내가 사는 현실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렇게 고민하면서 회의를 하는 과정도 즐겁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너희 형은 잘 지내냐?”
“뭐 그렇지. 기말고사 준비한다고 또 날 새더라구. 불쌍해.”
“이젠 별로 부럽진 않나 보지?”
“부럽긴 뭐가 부럽냐? 그냥 다른 거라구.”
이제 재호는 완전히 형에 대한 자격지심을 버린 모양이었다. 저걸 고쳐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예전 기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그래도 지금 자신감 있는 모습을 보니 기분은 괜찮았다.
그때, 급작스럽게 문이 열렸다. 문 열리는 소리만 봐도 촐랑대는 느낌이었다. 주환희였다.
“와 있었어요 횽들?”
재호가 손으로 벽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늦었어.”
“엑! 딱 맞춰어 와써요!”
“30초 지각이야.”
‘변태 자식.’
“아 뭐에요 횽!”
“30초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 아냐구. 30초면....”
“예 예~”
주환희에게 내가 슬쩍 말했다.
“하늘아.”
“네에…”
주환희가 대답했다. 주환희이진 주하늘인지 모르겠는 애매모호한 목소리였다.
“평소에는 주환희로 살아도 좋은데. 신곡 회의 때는 본 모습으로 하는 게 낫지 않냐? 어차피 나랑 재호는 알잖아. 어차피 곡 쓰는 건 주환희가 아니라 주하늘이잖아. 거기다 오늘은 우리 셋밖에 없고.”
“그러네요. 알겠어요.”
순식간에 눈빛이 차분해지면서 주환희는 주하늘로 변모했다. 왠지 헤어 스타일도 바뀐 듯한 착각이 들었다.
뭔가 소름 끼칠 정도의 변신이었다.
‘뭐 그래도, 이제는 우리에게는 숨기지 않으니 나아진 건가.’
주하늘에게 주환희는 사실 꾸며낸 또 하나의 인격이었다. 가수 활동을 위해 연기하고 있는 셈이었다. 이제는 최소한 나와 재호, 그리고 문루아 선배까지는 이 비밀을 알고 있었다. 천채왕 심사위원 및 회사에는 함구했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하늘이도 제법, 예전보다는 더 진실된 사람이 된 셈이었다.
내가 먼저 회의를 시작했다.
“일단, 이번 기획은 굉장히 고민을 많이 해서 들고 가야 해.”
하늘이가 물었다.
“왜요? 무슨 말 들었어요? 형?”
“문루아 선배가 신신당부했어.”
“뭐라고요?”
<천채왕 선생님은. 자기 데뷔 가수면, 특히 첫 데뷔 무대에서는 엄청나게 몰아붙여서 최고 수준의 무대를 준비하게 만들어요. 그런 부분에서는 정말 집요하세요. 고생 좀 할거에요. 하지만 그보다 더 집요하게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요. 데뷔곡을 쓰는 스태프들이에요.>
문루아에 따르면, TYB 소속 가수들은 모두 데뷔곡을 범상치 않게 뽑았다. 꼭 흥행하지 않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독특한 개성과, 잊혀지지 않을 퀄리티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가수도 고생하지만, 작사가와 작곡가 등 스태프들은 훨씬 더 고생한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정말 참신하고 좋은 퀄리티의 기획을 가져가야 한다는 뜻이야.”
재호와 하늘이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회의가 시작됐다.
재호와 하늘이가 가져온 기획들은 하나같이 뭔가 부족했다. 음악성은 훌륭했다. 하지만 무대와 뮤직비디오가 상상되지는 않았다.
재호는 ‘컨트리 음악과 알앤비의 조합’이나, ‘90년대 댄스 음악 멜로디에 보사노바를 조합한 음악' 같은 편곡 위주의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다 참신했지만, 뭔가 어떻게 이 음악을 알릴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늘이는 멜로디와 가사 위주로 구상을 해왔다. 특히 다들 스토리가 있었다. 어쩐지 자신이 배신했었던 아폴로 빈을 연상시키는 ‘비밀 연애' 컨셉의 가사. 처음 만난 연인과의 설레임을 담은 미디움 템포에 화려한 화음이 인상적인 알앤비 발라드 등이었다. 하늘이의 특기가 잘 살아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이 곡을 어떻게 무대에서 보여줄지. 이 곡을 어떻게 알릴지 까지는 상상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부분은 내가 채워야 할 부분인 모양이었다.
“내 이야기 잘 들어봐.”
멤버들에게 내가 ‘영화'에 착안하게 된 계기를 설명했다. ‘오명' 무대를 연결고리고 설명하니 금방 재호와 하늘이도 이해한 듯했다.
하늘이가 먼저 말했다.
“좋은데요 형. 영화를 뭘 고르죠? 노래에 영감이 될만한 영화가 많진 않잖아요? ‘쥬라기 공원' 같은 영화를 할 순 없으니까요.”
좋은 포인트였다.
“일단 노래도 노래고. 우리 무대가 상상되는 영화를 찾아봐야겠네.”
하늘이가 한 마디 덧붙였다.
“무대가 상상되면서도, 우리들 느낌이 좀 살아 있으면 좋겠어요.”
“우리들 느낌이 살아 있다…”
“SG워너비 하면 ‘Timeless.’ 휘성 하면 ‘안되나요'. 팀 하면 ‘사랑합니다’. 이렇게 데뷔곡은 평생 기억에 남잖아요? 첫인상이 평생 간다니까요.”
하늘이가 확실히 날카로웠다. 작가 기질이 있었다. 정확하게 우리가 지금 뭘 필요로 하는지를 이해했고, 내 계획에 어떤 부분을 추가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주환희의 의견을 반영해서 영화를 리스트업하기 시작했다.
우리 셋 중에는 그나마 환희가 가장 영화를 많이 알았다. 기억나는 영화를 하나하나 리스트업하고, 노트북에서 포스터를 확인하며 이야기했다. 주로 나와 재호가 제안했고, 환희가 피드백을 했다.
“이거 어때? ‘유브 갓 메일'. 로맨틱한 느낌이 괜찮지 않나?”
내가 이렇게 말하면,
“글쎄요 형. 이메일이라니. 좀 애매하게 낡은 느낌 아니에요?”
하늘이가 이렇게 대답했다.
“화양연화 어때? 절절한 사랑 느낌이 있어서 발라드에 딱인 거 같은데.”
제호가 이렇게 제안하면,
“형 근데. 이거 너무 유명한 노래잖아요. 그리고 휘성 ‘안되나요' 이거가 부제가 화양연화였어요.”
이렇게 하늘이가 피드백을 줬다.
“아 그럼 안 되지. 너무 유명한 곡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뭔가 안개처럼 꼬여갔다. 단순히 좋은 영화가 아니라 우리 무대의 뿌리가 되어 줄 영화를 찾아야 하니 어려웠다.
일단 답답한 마음에 하늘이에게 물어봤다.
“너는 뭐 없냐? 우리 곡 쓰면 가사는 사실 니가 쓸 거 아니야.”
하늘이가 대답했다.
“저는 항상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가 너무 이야기가 좋아서. 이걸 노래로 풀면 좋겠다 생각은 했어요. 친구로 살던 둘이 연인으로 발전하면서 관계가 소용돌이치는 이야기? 극적이고 좋더라구요. 그런데...”
“근데?”
“이 영화가 엄청 재즈로 가득한 그런 영화라. 노래가 좀 제지해야 할 거 같아서 좀 비원더랑은 덜 맞는 거 같아요.”
음악의 편곡 방향에 대해 이야기하자 재호도 말을 보탰다.
“말 잘했어. 비원더의 음악은 이런 거다! 라고 보여줄 수 있는 편곡이야 하거덩~. 재즈는 분명 우리 기반이긴 한데. 그렇다고 재즈가 주력이면 안 되지. 스티비 원더 느낌을 줘보자고 했으니까, 좀 더 휭키하게 가면 좋겠구. 여튼 너무 딥하게 기존 장르음악을 쓰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가사를 쓸 때 우리와 서사가 맞고, 그러면서도 편곡으로는 우리 그룹을 대표할 수 있는 느낌의 음악이어야 한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러면 문제가 있었다. 내가 재호에게 물었다.
“근데 재호야.”
“왜?”
“근데 그러면 아무래도 히트곡이 되긴 어려운 거 아닐까?”
“처음에는 일단 시청률도 대박이었구. 관심이 높으니까. 서둘러서 내면 괜찮지 않을까?”
“그래도 곡 자체의 대중성도 너무 없으면 안 될 거 같은데. 편곡으로 우리 장르를 보여주는 것도 좋지만.”
“으음…”
생각보다 이것저것, 고려해야 할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생각할수록 기존 프로듀서들이 정말 대단한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사람이 들어왔다. 키미 프로듀서였다.
“소득이 있나요?”
“키미 선생님!”
반가워서 인사했다. 키미가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이제 오디션도 끝냈는데. 그냥 프로듀서라고 해줘요. 이젠 노을 군이 제 손님이에요.”
“프로듀서님. 그런데 여긴 어떻게?”
“밥 같이 먹어요.”
“아 네.”
어느새 벌써 저녁을 먹을 시간이 되었다. 회의를 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었다.
* * *
키미 프로듀서와 A&R 인턴과 비원더 멤버까지, 총 다섯이 식사를 했다. 메뉴는 중식이었다. 빙빙 돌아가는 중국식 탁자에 온갖 음식을 담았다. 눈이 돌아갈 만큼 으리으리한 식사였다.
“우와 뭔가 으리으리하네요.”
키미 심사위원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오디션 때는 보지 못한 표정이었다.
“양껏 먹어요. 촬영중에는 다이어트 중이라 잘 먹지도 못했을 테니.”
“감사합니다!”
환희는 신나게 양껏 중식을 먹었다. 재호는 수학 공식을 풀듯 메뉴들을 같은 비율로 조금씩 맛봤다.
나도 조금씩 먹어봤다. 모두 엄청나게 맛있었다.
키미 프로듀서가 물었다.
“어때요?”
환희가 들떠서 대답했다.
“너무 맛있네요 쌤! 이렇게 요리를 다양하게 시켰는데. 어떻게 하나같이 다 맛있어요~.”
“중화요리 주방장은 그게 대단한 능력인 모양이에요. 다양한 요리를 소화할 줄 알아야 해서 인건비도 많이 든다고 들었어요.”
“헤에…”
그러고 보면 메뉴가 하나하나 달랐다. 확실히 중화요리만의 풍성함이 느껴졌다. 식재료의 다양성도 놀라웠다. 다리 달린 것은 의자와 부모님 빼고 모두 먹는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왠지 기시감이 들었다. 이런 광경을 어디서 본 것 같았다.
‘아!’
그리고 머릿속에서 한 장면이 번뜩였다. 그 순간 좋은 아이디어가 뇌리를 스쳤다. 우리 데뷔곡 소재로 딱! 인 영화였다.
그 영화의 제목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