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3화
천채왕 심사위원이 아무 말 않고 와인에 입을 댔다.
문루아와 비원더 3인이 모두 아무 말 않고 천채왕만 쳐다보고 있었다.
와인을 한 모금 마신 천채왕이 서서히 말을 이어갔다.
“확실히 좋은 기회죠. 지금 권노을 군은 슈퍼스타 오디션 시리즈 우승자 중에서도 가장 인지도가 높으니까. 거기다가 최초로 오디션 TOP4 중 3명이 한 팀이 되겠다고 하니 화제성도 엄청나고. 성공은 따놓은 당상이에요. 게다가 곡도 쓸 줄 알지. 발라드 가수니까 머리 감기고 정장 입히면 메이크업 및 의상 비용도 저렴한 편이지. 제작자로는 고마운 일이죠. 이런 사람들 미리 만나서, 딜을 선점하고 싶은 게 오디션 프로에 기획사가 참여하는 이유도 맞고요.”
천채왕 심사위원은 솔직하게 자기 속내를 털어놓았다. 과하게 솔직하다 싶은 정도였다.
“그러면 왜?”
천채왕 심사위원이 와인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그냥 나이 든 사람 수법이죠.”
“수법이요?”
“내가 먼저 말을 안 하니까 노을 군이 궁금해서 이렇게 물어봤잖아요?”
“아!”
“그런 거예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푸훗 하고 웃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은 내게 반쯤 장난으로 한 말이었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다.
이번 활동이 지나면 비원더는 기획사와 계약을 맺어야 했다. 누구와 함께할지를 정해야 했다. 심지어 나뿐만 아니라 동료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처럼 모두가 이렇게 여유 있게 다가올 리는 없었다. 미리 대비해야 했다.
천채왕 심사위원의 아주 작은 테크닉이 나를 번쩍 정신 차리게 만들었다.
‘오늘부터는 새벽에 mp3로 계약 관련한 정보를 좀 모아봐야겠군.’
* * *
마당에서 1차가 끝나고 자연스럽게 거실에서 2차를 시작했다. 천채왕 프로듀서가 각종 치즈, 샐러드 등의 안주를 내놓았다. 하지만 다들 안주 말고 다른 걸 쳐다보고 있었다.
재호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이건…”
천채왕이 신나서 대답했다.
“맞습니다.”
최고급 하이엔드 오디오였다.
“노래 한 번 틀어 볼래요?”
“너무 좋죠!”
“근데 새벽 1시인데, 너무 시끄러운 거 아닐까요?”
“하하. 방음 철저하니까 실컷 틀어도 돼요.”
그렇게 음악을 들으며 술판이 시작됐다. 우선 천채왕 심사위원의 추천으로 블루스 음악을 틀었다. 에릭 클랩튼, 버디 가이 등 미국의 정취가 느껴지는 음악이었다.
문루아가 쭈우욱 와인을 들이키더니 우리에게 말했다. 지금껏 만난 모습 중 처음으로 취해 보였다.
“너희 셋! 부럽네.”
‘부럽네?’
아무래도 문루아는 술 취하면 반말을 하는 타입인 거 같았다. 나이도 더 많고, 경력은 한참 더 많은 선배니 큰 상관은 없었지만.
“그러세요?”
“그래! 나는 TYB를 한 번도 나간 적이 없어서. 계약 같은 거 해본 적이 없는데. 앞으로도 할 일 없을 거구.”
천채왕 프로듀서가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루아 너! 다른 가고 싶은 데라도 있어?”
“제가 어떻게 가요! 너무 오래 했죠. 2년이나 활동 안 하는 걸 봐주는 기획사는 없을 거예요. 보은 해야져! 하지만…. 저 사람들은 안 그래도 되잖아요?”
취한 문루아는 또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천채왕 프로듀서는 익숙한 듯 태연했다. 재호와 환희는 처음 보는 광경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내게 고개를 돌렸다.
“아 근데 그건 아닙니다. 노을 군. 그거 알죠? 첫 음원은 저희랑 함께 내야 해요. 음원 발매를 하고. 리얼리티 예능을 찍고. 첫 활동을 할 때까지는 TYB와 계약을 맺고 진행하는 거에요.”
“네넵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당연했다. TYB 엔터가 지원해준다는 건, TYB와 함께 음반 활동을 하겠다는 말과 다름없었으니까.
일단 일생일대의 결정인 ‘기획사 계약'에 유예 기간이 조금 생긴 셈이었다.
“활동 기간 관련 계약서를 곧 있으면 담당자가 가져다줄 거에요. 궁금한 거는 있으면 물어봐요.”
“감사합니다.”
“아 그러고 보니, 노래, 셋이 할 거예요?”
생각해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당연히 대답해야 할 질문이기도 했다.
“미처 생각 못 했네요.”
“일단 계획대로라면 권노을 군 솔로가 나와야 해요. 권노을 군이 우승자니까요. 그런데 지금 팀으로 데뷔하겠다고 했잖아요?”
“맞습니다.”
“그러면 비원더로 첫 곡이 나와야 되는 건가요?”
첫 음악부터 내가 솔로로 나와 버리면 어떨까? 대중의 인식 속에서 비원더라는 ‘팀'은 뒷전이 될 확률이 높았다. 어떻게든 첫 활동은 팀으로 함께 해야 했다.
“비원더로 활동하고 싶습니다.”
“비용이 많이 들 텐데요?”
“TOP4 중 3명이 함께한다는 걸로 더 많은 화제를 끌 수 있을 겁니다. 곡도 저희가 직접 쓰면 더 좋을 테고요.”
“음…”
천채왕 심사위원이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문루아도 복잡한 표정으로 나와 천채왕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가 먼저 슬쩍 말을 문루아에게 걸었다.
“선배.”
“왜요!”
“같이 곡 써요.”
“뭐?”
“선배 곡 많이 썼잖아요?”
“그걸 어떻게…”
그야 저는 당신 미래를 봤으니까요,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말을 이어갔다.
“오디션 하면서 봤으니까요. 곡을 계속 쓰셨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죠.”
‘사실은 이전 생에서 문루아의 인터뷰를 본 덕에 안 거지만.’
“음…”
“선배도 우리 멤버에요. 무대는 같이 못 서더라도, 곡을 같이 써보면 정말 의미 있을 거 같아요. 재호랑 환희도 이해해줄 거예요.”
재호랑 환희는 벌써 곯아떨어져 있었다.
문루아가 천채왕에게 말했다.
“정했어요! 저도 같이 곡 쓸게요. 저 3명이랑. 제 곡으로 뮤비 만들어주세요.”
“진짜? 대신 우리 회사 기준은 통과해야 한다? 어려운 거 알지?”
“통과할 때까지 할 거예요.”
“파이팅 넘치고 좋아.”
“대신 조건이 있어요.”
“뭐니?”
“저도 뮤비 촬영에 데려가 주세요.”
“뭐?”
“네?”
나도 모르게 반응해버렸다.
“멤버라면서요. 그 정도는 해야죠.”
“음… 솔직히 말하면. 루아 너까지 가면 너무 뮤비 예산이 커질 거 같은데…”
“선생님이 항상 그러셨잖아요? 리스크를 지고, 확실하게 투자하라고. 그래야 리턴이 온다고.”
“그랬지.”
“슈퍼스타 T가 크게 성공한 지금, TOP4가 모두 참여한 뮤직비디오 정도는 괜찮은 도박 아닐까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햐… 내가 한 말을 가지고 그러니까 할 말이 없네… 좋아!”
천채왕이 결심한 듯, 나와 문루아의 잔에 와인을 따랐다. 자신의 잔에도 넉넉하게 부었다.
“까짓거 한번 해 봐!”
쨍하는 소리를 내며 건배했다. 그 어떤 도장보다 확실한 계약 성사였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노을 군. 이제 제가 노을 군 제작자예요. 이 프로젝트가 끝날 때까지는. 알죠?”
“네네.”
“제가 제작하는 친구들은, 말 편하게 합니다. 괜찮아요?”
“네, 당연히…”
안 그래도 천채왕 프로듀서에게 꼬박꼬박 존댓말을 받는 게 부담스러웠던 참이었다.
훨씬 편안하게 천채왕은 대화를 시작했다. 여지까지는 외부인이라는 생각이었다면, 이제는 정말 내부의 가수로 대우해준다는 느낌이었다.
와인을 마시면서 천채왕이 쉴 새 없이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재호와 환희는 곯아떨어졌으니, 모든 관심은 내게 왔다. 하기로 결심한 이상, 이제 아이디어가 쏟아진 모양이었다.
“그래, 니들 셋이 데뷔를 한다 치자. 무슨 노래를 해야 하냐?”
“저희는 뭐든지 자신 있습니다. 낯선 사람들에 아카펠라 재즈도 했는데요 뭐. 심지어 환희는 춤도 되고.”
천채왕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말했다.
“그게 좋은 게 아니야.”
“그런가요?”
“봐. ‘비원더는 이런 팀이다'라고 딱! 임팩트 있게 다가가는 장르는 결국 딱 하나여야 해. 니네들 셋은 하나하나는 다 개성이 강해. 슈퍼스타 T를 거치면서 어떤 가수인지 팬들에게 각인이 됐을 거야. 하지만 비원더라는 팀은 좀 달라. 어쨌든 무대가 하나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팀이 소화할 수 있는 장르가 너무 많은 것도 문제야. 하나를 정해야 하는데 옵션이 너무 많잖아?”
역시나 국내 제일의 제작자 천채왕이었다. 음악 프로듀싱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갑자기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우선 내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저는 사실 ‘비원더'라는 이름 자체가 스티비 원더를 포함하고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요.”
“나는 아니라고 봐 노을아. 스티비 원더는 록부터 발라드, 재즈... 별별 장르가 다 가능한 사람이야. 그러면서도 스티비 원더 하면 떠오르는 특유의 음악은 있는데. 그걸 똑같이 해서는 승산이 없지. 그건 스티비 원더의 음악이니까. 아무리 스티비 원더를 원점으로 잡았어도, 원본과는 다른, 비원더만의 음악이어야지.”
듣고 보니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문루아도 말을 보탰다.
“단순히 음악만으로도 안 되죠. 가사부터 뮤직비디오, 패션까지 하나로 이어져야죠. 그게 TYB니까.”
“생각할 게 많네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말을 마무리했다.
“한 사람이면 좀 더 쉬워. 한 명의 천성에 집중해서 여기에 트렌드를 살짝 얹으면 되니까. 하지만 세 명이면 다르지. 완전 새로운 기획이 들어가야지. 훨씬 어려운 길이야. 어려운 길로 스스로 들어간 거야.”
“대신 더 가치 있는 길이기도 하겠죠?”
내 말에 천채왕 심사위원이 빙긋 웃었다.
“물론이야.”
* * *
일반적인 TYB 팀 제작은 철저하게 회사 위주였다. 회사가 먼저 기획하고. 이에 맞춰서 멤버들이 선택되었다. 이미 만들어진 기획에 멤버들이 맞춰서 연습해서 데뷔하는 게 통상 방식이었다.
“너희들을 가지고도 그렇게 하는 건 너무 재미없겠지?”
천채왕은 비원더는 다르게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일단 다양한 컨셉을 가져와 보라 말했다. 가져온 곡 컨셉을 TYB의 A&R 부서 기획자들 앞에서 발표한다. 회사 단위로 통과가 되면, 그제야 비로소 구체적인 논의를 계속해보자 말했다.
정규 앨범도 아니고, 딱 한 곡만 내는 싱글이니 가볍게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문루아가 내게 신신당부했다.
<이거 통과 결코 쉽지 않아요. 제 곡도 간신히 딱 하나 통과했어요.>
그래서, 일단 딱 하루만 쉬고 난 뒤에 비원더 3인이 함께 모여서 신곡 컨셉을 짜보기로 했다.
작사도, 작곡도 하지 못하는 나는 큰 의미가 없을 줄 알았더니만 그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곡과 가사가 나오기 이전, 전체 ‘기획'이었다. 이건 사실 내가 하지 못하리라는 법도 없었다. 실제로 오디션에서 했던 비원더의 첫 무대도 결국 내가 기획했으니 말이다.
뭔가 아이디어가 필요했다.
이런저런 음악을 들어 봤지만 효과가 없었다. 딱히 ‘이거다' 싶은 음악이 없었다. 아무래도 3인조 보컬도 없었고, 3명의 색깔 강한 보컬들이 모인 그룹이라는 기획은 더 희귀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생이었다.
“왔다!”
“벌써 왔어?”
“뭔 소리야. 이제 수능 끝나서 일찍 온다고 그랬잖아?”
“아.”
회귀할 때 고3 초기던 동생의 입시가 어느새 끝나가고 있었다. 시간은 참 잘도 흘렀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기숙사에 살던 동생이 매일 일찍 집에 오는 상황은 아무래도 금방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늘은 늦게 들어올 거야.”
“어디 가는데?”
“프랑스 문화원.”
“왠 프랑스 문화원?”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서 가보려고.”
‘예술 영화란 건가…’
솔직히 프랑스 영화 같은 걸 보면 잠이 쏟아졌다. 한 번도 끝까지 본 적이 없었다.
“근데 네가 그런 영화 보는 취미가 있었나?”
“내 친구 미야 알지?”
“아 기억하지. 그 알제리에서 온 국악 소녀?”
북아프리카에서 온 유학생이라는 캐릭터가 워낙 강렬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어 걔가 프랑스어가 모국어거든. 걔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데.”
과연. 알제리는 프랑스 문화권이었다. 이제야 프랑스 문화원행이 이해가 됐다.
“그래. 너무 늦게 오지 마.”
“알겠어 알겠어.”
동생이 바로 집을 나섰다. 이런 식으로 대학생이 되면 또 동생을 자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괜찮았다. 동생의 활동을 지원할 수 있는 경제력을 어떻게든 얻을 테니 말이었다. 가수가 되다 보면 자연스레 동생의 활동도 서포트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같이 영화는 못 보러 가겠군. 예술 영화 같은 건 질색이라. 나 같으면 수능 끝나고… 차라리 ‘로마의 휴일'이라던가 ‘싱잉 인 더 레인'같은 옛날 영화는 보러 갈지도 모르지.’
잠깐.
침을 꿀꺽 삼켰다.
동생 덕분에 벼락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