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2화
“98점!”
이번에는 탄성이 나왔다.
폭죽이 터졌다. 팡파레도 터졌다.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너무 밝은 빛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파바바바바바방!
한 3초 정도 정신을 잃었을까? 정신을 차려 보니 내 앞에서 다른 참가자들이 어느새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재호는 나를 꼭 껴안고 있었다. 환희는… 어느새 주하늘이 되어 펑펑 울고 있었다. 문루아는 무표정하게 꽃다발을 들고 서 있었지만 입술이 씰룩 씰룩하는 것이, 기분 좋은 얼굴이었다.
사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너무너무 기뻤다. 물론 오디션에서 우승해 서기도 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우승하건 말건, 이 판을 뒤집어엎을 준비를 이미 끝냈다. 이제는 내가 우승을 했으니, 이 판을 엎어서 진짜 승리자가 될 차례였다.
사회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사상 최고점으로 우승하셨습니다! 기분이 남다르실 거 같은데요.”
“제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너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제작진 여러분. 심사위원 여러분. 그리고 시청자 여러분. 가족들까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대회였던 거 같은데. 모두가 도와주셔서 이런 멋진 무대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묵묵히 음악을 만들어주신 하우스 밴드에도 박수를 보내주세요!”
와~ 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고마움을 표시할 시간을 드리려 했는데. 질문하기도 전에 미리 대답을 해주셨네요. 시간 아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미 사회자가 어떻게 진행할지 알고 있었다. 인생 2회차였으니까. 이다음 반전도 내게는 보였다.
사회자가 호흡을 가다듬고 말했다.
“원래 ‘슈퍼스타' 오디션은 이렇게 마무리가 됩니다. 하지만 이번 오디션은 조금 특별한 마지막이 있는데요! 천채왕 심사위원님.”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아마도 이런 말을 하고 있을 터였다.
“뭐야? 여기서 끝나는 거 아니야?”
“심사위원장이 왜 나와?”
“특별한 제안이라도 있는 거야?”
나는 이미 내용을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카메라가 일제히 천채왕 심사위원을 잡았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말을 시작했다.
“슈퍼스타 오디션 우승자에게는 음원 발매의 영예가 주어집니다. 이번 시즌은 저희 TYB가 참여한 만큼 저희 회사의 최정예 제작진이 참여할 예정이었는데요. 사실 제가 오디션 시작 전에 제작진과 약속한 게 있습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살짝 숨을 골랐다.
사실 천채왕 심사위원은 굳이 약속을 지킬 필요는 없었다. 이미 제작진은 거의 다 교체된 상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에 했던 약속을 지킬 참이었다.
“음원 발매만으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TYB는 우승자에게, 해외 뮤직비디오 촬영과, 뮤직비디오 촬영기를 담은 리얼리티 예능 촬영을 지원하려 합니다.”
관중뿐 아니라 참가자들까지도 이 특전에 놀랐다. 2005년이었다. 해외 로케이션의 뮤직비디오를 넘어, 리얼리티 예능 제작이라니, 당시에는 정말 보기 드문 큰 특혜였다.
나는 그저 이 우승자의 특전을 받으면 됐다. 하지만 뭔가 찜찜한 느낌이 있었다.
경쟁에서 이겨서 우승하고, 그 특전으로 뮤직비디오와 리얼리티 예능 촬영을 받는다. 말은 좋았다. 하지만 이는 모두 이윤강 PD의 기획이었다. 그의 판에서 놀아난다는 점이 찜찜했다.
그래서 ‘판 뒤집기'를 미리 준비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말을 마무리했다.
“권노을 군이 원하는 국가에서, 원하는 방식으로 뮤직비디오 활영과 리얼리티 촬영을 하겠습니다.”
“와아 대박~”
관중석이 술렁거렸다.
제작진이 내게 마이크를 돌렸다. 아마도 내가 감동해서 고마움을 표현하면서 마무리를 지으려 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둘 생각은 없었다.
“상의해보겠습니다.”
천채왕 심사위원 눈이 커졌다.
“상의요? 누구와?”
“제 멤버들과요.”
“멤버요?”
“재호랑 환희랑, 저희들 3명, ‘비원더'로 함께 데뷔해보기로 했습니다.”
“네에에에엣??!!!”
그렇게, 심사위원들의 놀람으로 슈퍼스타 T 오디션은 끝이 났다.
* * *
생각해보면 간단한 해답이었다.
재호는 뛰어난 편곡 능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단독으로 곡을 이끌어가는 능력은 부족했다.
환희는 멜로디 메이킹 능력과 작사 능력이 탁월했다. 가창력도 뛰어났다. 하지만 솔로 가수라는 포맷으로 대형기획사 TYB에서 데뷔하기는 쉽지 않았다. 다른 기획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노래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곡을 만드는 재주는 없었다. 게다가, 혼자 활동하는 일은 내게 외롭게 느껴졌다. ‘비원더'로 셋이 함께 곡을 만들고 계획했을 때가 훨씬 즐거웠다. 문루아까지 포함한 4명이 같이 노래를 부르는 순간이, 나 혼자서 경쟁을 위한 무대를 만들던 때보다 좋았다.
나는, 팀을 만들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결승 전날, TOP4를 모아서 내 생각을 이야기했다.
의외로 모두 담담했다. 재호와 환희는 찬성이었다. 문루아도 좋은 생각이라 말해 주었다.
“셋 다 정말 대단한 가수지만. 셋이 함께할 때 혼자 노래 부를 때보다 좋아 보여요.”
우리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문루아에게 말했다.
“선배도 명예 멤버에요.”
“저요?”
“말했잖아요? 우리 넷이 한 팀이라고. 선배가 이겨도 우리 모두가 이기는 거예요.”
문루아가 얼굴을 찌푸렸다. 입술도 씰룩씰룩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파하하 하고 웃었다.
“엉뚱하다니까… 파하하하하!”
“대신, 저희 데뷔곡 선배가 써주시는 겁니다!”
“맘대로 해요. 푸후후후훗!”
그렇게 우리는 한 팀이 되기로 했다.
* * *
방송이 끝나자마자 엄청난 취재진이 밀어닥쳤다. 관계자들도 여기저기서 우리와 말을 해보겠다고 몰려 왔다. 아무래도 내가 오디션의 마지막을 팀 발표로 끝냈다 보니, 계약 관련해서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부담스러웠다. 일단 오늘은 우리들끼리 조용히 자축하고 싶었다. 미리 제작진에게 준비한 차량을 타고 유유히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차에는 딱 5명뿐이었다. TOP4와 천채왕 심사위원뿐이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입을 열었다.
“뒤풀이를 저와 하고 싶다고 했다면서요?”
내가 대답했다.
“네 그랬습니다.”
“왜 그랬어요? 방송 끝났으니까 만나고 싶어 하는 관계자도 많을 거고. 가족이나 친지도 있을 텐데.”
“저희와 함께 방송을 만들어주신 동료니까요. 오늘은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말 참 잘하네요 노을 군. 팬들에게 이쁨받겠어요.”
천채왕 프로듀서가 하하 웃으며 말했다.
환희가 창문 바깥을 보며 말했다.
“와! 엄청 붐비네요.”
뮤직넷 주변은 인파로 완전히 꽉 막혀 있었다. 미리 제작진에게 부탁해서 빠르게 방송국을 빠져나오지 않았다면 저기서 시간을 엄청 잡아먹을 뻔했다.
조수석에 앉은 문루아가 중얼거렸다.
“저래서야 이 근처에서는 뭘 할 수 없겠네요.”
천채왕 프로듀서가 대답했다.
“제가 생각해놓은 곳이 있죠. 가볼래요?”
다른 대안이 없었다. 당연히 콜이었다.
* * *
천채왕 심사위원이 차를 몰고 온 곳은 서울 강남 한복판 주택가의 빌라였다. 말이 주택이지, 100평은 되어 보였다. 마당에는 잔디가 깔렸고, 깔끔하게 분재된 나무들로 가득했다.
“제가 작곡자들과 쓰는 작업실이에요.”
재호가 감탄하며 말했다.
“와… 강남에서 5분 거리에 이런 곳이 있네요. 꼭 교외 같구.”
“시골에 온 분위기를 내고 싶을 때 잘 쓰고 있어요. 이거 불 붙이는 거 좀 도와줄래요?”
“네네!”
천채왕 심사위원이 능숙하게 마당에서 화로를 꺼냈다. 숯을 깔고, 토치로 불을 붙였다. 바비큐를 먹을 모양이었다.
문루아는 이미 많이 와본 곳인 듯, 자연스럽게 나를 불렀다. 문루아와 함께 건물로 들어갔다. 부엌 냉장고에는 와인부터 소고기, 채소까지 다양한 먹을거리가 있었다. 적당히 사람들 취향에 맞춰 골라 꺼냈다. 딱 봐도 모두 최고급 식재료였다.
고급 식재료를 넋 놓고 보고 있어서였을까? 문루아가 내게 핀잔을 줬다.
“처음 보죠?”
“네네.”
“선생님이 좀 그러세요. 옷이나 차에는 돈을 별로 안 쓰시는데. 건강에는 아끼지 않죠. 건강은 미리 돈을 쓰는 게 오히려 돈을 아끼는 거라 세요.”
어떤 느낌인지는 알 것 같았다. 새삼, 항상 편한 아저씨지만, 정말 성공한 프로듀서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실감 났다.
문루아와 함께 와인잔까지 챙겨서 마당에 가져왔다. 화롯불이 활활 잘 타고 있었다. 잔디밭에서 불을 붙이니 교외에서 하는 캠프파이어 느낌이 났다. 방금 전까지 방송국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던 게 마치 꿈만 같았다.
캠프파이어를 하자 사람들의 의외의 면이 보였다.
부엌에서는 똑소리 나던 재호는 바비큐에는 젬병이었다.
“앗뜨뜨거!”
숯을 잘못 건드려서 손을 댈 뻔하기도 했다.
부엌에서는 아무 도움이 안 되던 주환희는 의외로 야외에서는 야무졌다.
“이렇게 하면 될까요 슨생님?”
“그래요 환희 군. 제대로 식탁 정리 잘했네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모닥불 위에 소고기와 천채왕 심사위원 특제 커리를 올렸다. 참기 힘들 정도로 좋은 음식 냄새가 났다. 거기에 풀 냄새, 자연의 소리가 섞이니 도원경이 따로 없었다.
‘이게 천채왕 선생님 취향인가?’
그러고 보면, 슈퍼스타 T에서도 항상 숙소는 자연에 가까운 곳이었다. 아무래도 교외가 천채왕 심사위원 취향인 모양이었다. 차도 평범하지만 야외 활동에 적합한 SUV였다.
슬쩍 천채왕 심사위원에게 물어봤다.
“야외 활동을 좋아하시나 봐요?”
“일할 때는 도시에만 있으니까 아무래도 더 그런 거 같아요. 사업이 좀 궤도에 오르면 파주 같은 곳으로 이사하는 게 꿈이에요.”
“이미 궤도에 오르신 거 아닌가요? 한국 최고 기획사신데.”
“노을 군이 말했던 월드 스타가 하나 나온다면 좋겠네요. 영어 할 줄 알아요?”
역시나 천채왕 프로듀서는 날카로웠다. 핵심을 단번에 꿰뚫어 봤다.
해외 진출에는 역시 외국어가 필수였다. 특히 가사로 절절하게 공감을 자아내야 하는 발라드 가수라면 무조건이었다.
“영어 공부 시작했습니다.”
“훌륭하네요. 영어는 나이가 들수록 빨리 늘지 않으니까. 일찍 시작하면 좋아요. 실력이 안 느는 거 같아도 포기하지 말구요.”
“명심하겠습니다.”
사실 걱정이 들지는 않았다. MP3의 특성 ‘빈 서판의 잠재력'을 사용해서 기하급수적으로 빠르게 영어 실력이 늘고 있었다. 곧 4년제 대학까지 졸업한 유학파 정도의 실력까지는 금방 도달할 예정이었다.
물론 그런 말까지 천채왕 프로듀서에게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환희가 부엌에서 데워온 햇반을 식탁에 펼치며 말했다.
“이럴 때는 눈하가 참 부러워여.”
문루아 물었다.
“뭐가요?”
“눈하는 이미 쌓아놓은 경력이 많잔아여. 오리콘 차트 1위도 여러 번 했구. 인지도도 높고. 저는 누나랑 몇 살 차이도 안 나는데. 쌓아놓은 게 없어여.”
“미래에 누가 얼마나 잘 될지는 모르는 거죠. 게다가 그 덕분에 저는 평범한 생활은 못 해봤는걸요. 고등학교 수학여행 같은 거요. 제 선택이니까 후회하지는 않았지만.”
말하면서 문루아는 햇반에 천채왕이 직접 담은 커리를 담았다. 딱 봐도 때깔이 정통 인도식 커리였다. 기분 좋은 맵싸한 향기가 마당에 가득 퍼졌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커리를 담으며 말했다.
“세 분은 이제 한배를 탔잖아요?”
내가 대답했다.
“네.”
“그러면 이제 그 배의 방향이 미래 성공을 결정하겠죠. 배의 속도보다는 방향이 중요하다 봐요. 방향을 잘 정하면, 조금 늦어도 반드시 성공해요. 세분이 더 잘 알겠지만.”
공감 가는 이야기였다. 지난 생에서의 나와 지금의 나는 노래 실력에서 아주 큰 차이가 있지는 않았다. 노래 실력은 대동소이했다. 하지만 더 나은 선택들을 했다. 그 결과는 천지 차이였다.
이전 생에서는 2위였고, 이번에는 1위라는 차원이 아니었다. 이전 생에서는 방송 후 아무도 관심 없는 무명가수로 살다 코러스로 쓸쓸하게 인생을 마감했었다. 이번에는 가장 핫한 가수들 둘과 함께 팀을 짰다. 거기다가, 국내 최고의 프로듀서와 아시아 제일의 댄스 가수와 함께 식사를 했다. 음악계 관계자들은 나와 내 동료들을 얻기 위해 수소문 중이었다. 그야말로 딴판이 되었다.
선택이 달랐던 덕분이었다.
“그만큼 선택을 좌우하는 리더가 중요합니다. 제작자지요.”
그때, 잠자코 밥만 먹고 있던 재호가 물었다.
“그런데 선생님.”
“네.”
“왜 선생님은 지금까지, 저희와 계약 이야기는 아예 안 하시죠? 저희랑 계약하고 싶지 않으신가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