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6화
오창선과 연습이 끝나고 집에 가는 날, 윤은영이 슬쩍 내게 와서 전화번호를 교환했다.
“혹시 창선 오빠가 전화 안 받으면 제게 전화 주세요.”
“네… 네.”
윤은영이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툭 하고 말을 걸었다.
“노을 씨.”
“네?”
윤은영은 그다지 연예인과 친한 타입이 아니었다. 아예 오창선과 공적인 장소에는 함께 하지도 않았다. 그런 사람이 왜 굳이 내게 슬쩍 말을 거는 건지 이해가 안 됐다.
윤은영이 입을 열었다.
“창선 오빠는 누구하고나 거리를 두는 타입이에요. 그런데 이건 처음이었어요. 원래 1년이 지나도 데면데면한 관계인 경우가 많은데. 권노을 군과는 하루 만에 친해지더라고요. 소울 메이트 같다고까지 했어요.”
“영광입니다.”
“왠지 노을 씨 도움이 필요할 것 같아요. 조만간.”
윤은영이 나를 빤하니 쳐다보았다. 이건 이전 생에서는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뭔가 슬퍼 보였다.
내가 입장이 바뀌어서 몰랐던 건지, 아니면 내가 이번 생에서 했던 행동이 나비효과를 일으켜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뭔가 내가 모르는 무언가 고민거리가 생긴 모양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 * *
벌써 수요일이었다. 이제 마지막 무대가 2일 앞으로 다가왔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루틴처럼 mp3를 활용해 스탯을 키웠다. 체력 이후에는 영어였다.
영자 신문을 읽고, 영어 시트콤을 봤다. 문루아를 흉내 내서 영어 원서를 구해 큰소리로 읽기도 했다.
물론 이런다고 영어 실력이 하루아침에 늘지는 않는다. 그러다가 실력이 늘지 않으니 금방 그만둔다. 전형적인 외국어 공부 실패 패턴이 이렇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빈 서판의 잠재력-
등급: A+
설명
: 본인이 선택한 한 분야의 성장 속도를 비약적으로 빠르게 한다.
: 본인이 선택한 분야에서 본인의 능력치와 현재 잠재력을 확인할 수 있다.
: 선택 분야는 하루에 한 번씩 바꿀 수 있다.
‘빈 서판의 잠재력’ 특성 덕분에 하루가 다르게 영어 실력이 늘었다. 이 속도면 올해 내에 자유롭게 영어를 할 수 있을 터였다.
영어 실력이 느니 팝송을 부르기도 점점 쉬워졌다. 가사에 몰입이 되니 저절로 감정이 살았다. 노래 연습도 더 재미있어졌다. 한글로 번역해서, 간신히 이해한 가사로 부르는 팝송과, 마음으로 느끼는 팝송은 달랐다. 사진의 해상도가 올라가듯, 영어에 대한 이해력이 올라갔다.
월드 스타에 하루하루 가까워져 가는 기분이 들었다.
* * *
오전에는 내 개인 무대를 준비했다. 오창선의 ‘돌아서겠소’ 무대를 준비할 차례였다.
연습실에 들어갔다. 언제나처럼 하우스 밴드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밴드 마스터가 내 어깨를 살짝 넘기며 인사했다.
“노을이 왔나?”
“네넵.”
“재미있는 편곡을 가져왔대!”
“어렵게 해드린 게 아닌지…”
“뭔 소리고! 가수가 노래만 잘하면 되지. 어려운 건 우리가 해결할 거고. 잘했어! 편곡 건드리기 어려운 곡인데. 아~주 기발해!”
“감사합니다.”
고개를 돌려 연습실을 살펴봤다. 기타리스트. 베이시스트는 제 자리에서 악기를 조율하고 있었다. 박찬용 드러머는 없었다.
그리고 내가 제작진과 밴드 마스터에게 요청했던 연주자들도 없었다.
“혹시 다른 분들은?”
“아 곧 온다! 찬용 선배가 해준다 했는데. 어! 오시네!”
박찬용 드러머가 국악 뮤지션들을 대동하고 방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 관악기 연주자도 박찬용 드러머가 데려왔었다.
‘저분 되게 고집불통처럼 보이는데. 의외로 연주자들 사이에서 마당발이신가 보네.’
박찬용 드러머가 나를 보고 툭 말했다.
“왔는가.”
“친구분들과 같이 오셨네요.”
“참 여럿 힘들게 하는 참가자로구만. 이전에는 재즈더니. 이번에는 국악인가?”
말은 퉁명스러웠지만 박찬용의 입술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의 새로운 시도가 재미있다는 표정이었다.
그렇다. 록발라드는 정말 다른 느낌으로 바꾸기 어려웠다. 강렬한 기타 리프와 멜로디까지 너무 색깔이 강했다. 어떻게 바꿔도 원곡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예 더 센 색깔로 덮어버리기로 했다. 국악 악기를 활용한 오리엔탈 발라드 말이다.
“이게 꼭 필요했습니다 선배님. 그리고 또 필요한 게 있습니다.”
“뭔가?”
“선배님의 천하무적 드럼이요.”
“허튼소리 또 하는구만.”
퉁명스러운 말투와 달리 박찬용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밴드 마스터의 주도로 노래 연습이 시작됐다. 원래 전형적이던 록발라드가 서정적인 동양풍 발라드로 바뀌었다. 기타 솔로가 가야금 연주로 대체됐다.
하우스 밴드의 실력은 굉장했다. 마치 원래 이런 곡이었나 싶을 들 정도로 자연스럽게 음악을 내가 바라던 방향으로 편곡해주었다. 연습을 하면서도 감탄이 자연스레 나왔다.
박찬용도 놀라웠다. 정석적인 록발라드 드럼임에도, 오리엔탈 발라드에 맞는 잔잔한 느낌을 살렸다. 비 내리는 소리를 박자에 맞춰서 드럼으로 만든 듯한 우아한 느낌이 드는 연주였다.
연주가 끝나고 밴드 마스터가 내게 물었다.
“어떠나?”
“너무 좋습니다. 저만 잘하면 될 거 같은데요?”
“좀 어려울 거다. 알지? 이런 장르는 자칫 잘못하면 트로트 돼버려~. 그렇다고 평소처럼 부르면 또 편곡이랑 안 맞고.”
“네넵!”
역시나 밴드 마스터가 날카로운 부분을 찔렀다. 편곡은 완성됐다. 이제는 내가 그에 걸맞는 노래를 불러야 하는 과제가 남았다.
* * *
그날 밤. 숙소에 돌아와 하루를 정리하고 있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뭔가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노을 씨.
이 딱 끊어지는, 그러면서도 뭔가 희미한 거 같은 목소리는… 윤은영이 분명했다.
“안녕하세요.”
일단 대답했다.
-혹시 주변에 누가 있나요?
“아 네.”
슬쩍 주변을 돌아봤다. 내가 앉아있는 숙소 거실에서는 다른 참가자들이 자기 볼일을 보고 있었다.
-아무도 못 보는 곳에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노을 씨 무대와도 연관된 거예요.
뭔가 심각한 이야기일 거 같다는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차라리 숙소로 오시죠.”
-네?
오히려 이 말에는 윤은영이 당황한 듯했다.
“어차피 스타일리스트 분이 오시는 건데, 괜찮지 않을까요? 제작진에게는 오창선 선배 무대 준비 관련 볼 일로 스태프가 잠시 왔다고 말해 두겠습니다.”
어차피 비밀을 지키고 싶은 윤은영에게는 거절하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좋아요.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결국 윤은영은 내 제안을 수락했다.
윤은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냥 오창선의 일이라 해도 심각했는데, 결승 무대와도 관련이 있다고 하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그냥 mp3로 무슨 일인지 확인할까 생각도 들었지만, 일단은 생각을 접었다. Mp3는 최후의 수단으로 남겨 둘 생각이었다.
* * *
숙소 외부를 지키는 제작진에게 미리 말을 해두고 숙소 입구에서 윤은영 작가와 접선했다. 윤은영 작가의 차 조수석에 앉았다.
우선 내가 먼저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슬쩍 보니 윤은영은 온몸을 선글라스와 마스크, 모자로 가린 상태였다.
“아무도 없죠?”
윤은영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네.”
윤은영이 갑자기 툭 말을 내뱉었다.
“노을 씨. 솔직히 알죠? 저랑 창선 오빠 사이.”
“네… 네… 네??”
그냥 수동적으로, 쪼다같이 네네 거릴 수밖에 없었다.
“왠지 아는 기분이 들어요. 어떻게 아는지는 묻지 않을게요. 모르는 게 낫겠죠.”
“아하하…”
아무래도 내가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뭔가 다른 사람과 다른 느낌을 받은 모양이었다. 이미 직감으로 완전히 꿰뚫어 본 이상, 뭐라 변명할 거리도 없었다.
“오빠가 지금… 매우 위험한 상태에요.”
‘역시나, 이거였나.’
각오는 하고 있었다. 이 정도 일이 아니면 굳이 윤은영이 나를 보러 올 리가 없었다. 내게 연락을 했다는 건, 오창선에게 뭔가 아주 큰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 분명했다.
“무슨 일인가요? 교통사고라도?”
“건강 이상은 아니에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나서 윤은영은 침묵을 지켰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사이 나도 잠시 눈을 감고 기억을 더듬어봤다. 오창선은 건강 관리에 철저했다. 마약은 물론 술 담배도 손대지 않았다. 당연히 음주운전도 이슈가 아니었다. 여자 문제도 없었다. 윤은영 외에 연애 관계는 맺지 않았다. 폭력 성향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는 이전 생에서, 2020년, 내가 사망했을 때까지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었다.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나 말고 다른 여자가 생긴 거 같아요.”
심장이 덜컥했다.
“애인인가요?”
“그런 거 같네요.”
“어떻게 아셨나요?”
“그냥 감이에요. 제가 모르는 지출이 늘었고, 외출도 늘었어요. 아마 맞을 거예요.”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누구보다 오창선을 잘 아는 윤은영의 감이라고 하니, 그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윤은영이 살짝 한숨을 쉬고는 말을 이었다.
“솔직히 노을 씨랑은 상관없겠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제아무리 이전 생에서 좋아하던 선배라 해도, 사생활은 사생활이었다. 결혼한 사이도 아니기는 했다. 물론, 윤은영이 얼마나 오창선과 잘 어울리는지 알고 있던 나로서는 마음이 무거웠다.
윤은영이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상관이 생겼어요.”
“어떤 관계일까요?
“요새 너무 외출이 잦아요. 저는 물론 매니저도 연락이 안 될 지경이에요. 오늘도 하루 종일 연락이 안 됐어요. 이대로는 이번 주 무대도 어떻게 될지 장담을 못 하겠어요. 창선 오빠, 지난번 연습도 늦었잖아요?”
그러고 보니, 지난번 녹화 때 1시간 넘게 지각해서 다들 황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른 애인이 생긴 게 아니라 다른 일일 수도 있는 거 아닐까요? 범죄라던가…”
“처음에 저랑 사귀기 시작했던 때랑 패턴이 똑같아요.”
윤은영의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무표정이 오히려 울음보다 슬퍼 보였다.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냥 입을 닫고 있었다.
조금 생각해보니, 할 말이 떠올랐다.
“일단 제게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어떻게 하려고요?”
“제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설득하겠습니다. 모두와 약속을 제대로 지키라고. 제 공연을 포함해서요.”
윤은영이 헛웃음을 날렸다.
“그게 되겠어요? 저도, 매니저도, 회사 대표님도 창선 오빠 제어가 안 되는 상황이에요. 연락도 안 되고요. 나중에 무슨 일이냐 물어봐도 버럭 화만 낸다고요. 사립탐정이라도 붙일 거에요?”
“내일까지만 시간을 주세요.”
일단 윤은영을 달래고 차 바깥으로 나왔다. 숙소에 들어와도 울적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조금 바람을 더 쐬고 싶었다. 베란다에서 스트레칭을 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오창선은 국내 최고의 발라드 스타였다. 내 목표인 월드 스타까지는 아니어도, ‘슈퍼스타’ 정도는 되었다.
그러면 행복할 줄 알았다. 기분이 째지고, 매일이 기분 좋을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무슨 이유에선지 연락도 안 된다고 한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오창선의 인생이, 코러스였을 때 내가 봤던 핑크빛 인생은 아니라는 사실이 분명했다.
가수로 성공하려고 목숨을 건 내 자신까지 초라해지는 느낌이었다.
‘일단. 왜 연락이 안 되는 걸까?’
우선은 이유를 알아야 했다. 설득은 그다음 문제였다.
하지만 윤은영이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나는 세계 제일의 사립탐정이 맞았다. 이 mp3와 함께라면.
그리고 지금은 그 힘을 쓸 차례였다. 내 무대는 물론, 오창선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서.
MP3를 꺼내, Gift 모드를 실행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