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54화 (54/280)

제54화

작업실에 도착하자마자 무대 구상을 시작했다. 오창선이 키보드에 앉아, 무대 구상을 지휘했다.

“'드럼과 심벌즈'를 하자고?”

“네 딱이죠 선배님.”

“그래. 우리 둘이랑 어울리네. 록 하는 나랑 알앤비 하는 너랑.”

원곡은 백인 가수와 흑인 가수가 인종 화합을 외치는 노래였다. 북과 심벌즈가 조화를 이루어 드럼 세트가 되듯 다양한 인종이 함께할 수 있다는 노래였다. 음악 장르가 정반대인 나와 오창선이 부르면 의미가 살 것 같았다.

“너 음역대 어디부터 어디까지 되냐? 제일 자신 있는 음역대도 같이 말해.”

“네 저는 일단 저음 중음 고음 다 자신 있고요. 최고음은 일단 E까지는 자신 있는데…”

“E? 이 음 말야?”

“네.”

“미친 거 아니야? 이게 올라가?”

“네…”

“난 놈이네 난 놈. 음역대 걱정은 할 필요 없겠네. 그럼 나는…”

오창선은 무서울 정도로 온전히 나를 신뢰했다. 덕분에 술술 무대 구상이 진행됐다. 선곡부터 편곡 방향, 음역대까지 모두 나를 배려해서 진행해주었다. 신뢰를 얻으니 못할 게 없었다. 그렇게 늦은 밤까지 작업실에서 무대 구상을 거의 마치고 집으로 귀가했다.

만나자마자 오창선의 믿음을 얻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무대 준비는 탄탄대로로 보였다.

…오창선에게 얻은 믿음이 어떻게 폭탄으로 터질지는 그때는 아직 몰랐지만 말이다.

* * *

제목: 권노을은 그냥 좀 노래 잘하는 수준이 아니다

본문: 권노을 기사마다 댓글 수준이 한숨이 나올 지경이다. 무슨 성량이 좋다는 둥. 고음이 좋다는 둥. 뻔한 소리만 하고 있다.

권노을 보컬의 진수는 리듬감이다. 리듬감은 박자와 강약을 합친 말인거 알지? 권노을은 어떤 노래도 리듬감 있게 부른다. 그루브감이 느껴진다고. 이건 조선 보컬 수준이 이미 아니다.

호랑이 같은 보컬 보고 고양이처럼 귀엽다고 하는게 아주 그냥 짜증나 뒤질 지경이다. 제대로 좀 들어라.

ㄴ 너 권노을 까던 놈 아님?

ㄴㄴ 의견이 바뀜

ㄴㄴㄴ 지랄하지 마라.

ㄴㄴㄴㄴ 권노을 실력이 바뀌었는데 당연히 생각도 바뀌어야지.

ㄴ 뭘 걍 닥치고 들어. 노래 가지고 개폼 잡지 말고.

ㄴㄴ 니나 개폼 잡지 마라.

ㄴ 니나 좀 닥쳐라.

슈퍼스타 T 팬사이트를 확인했다.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불과 몇 주 전까지 나를 욕하던 악플러가 이제는 나를 찬양하는 선플러가 되었다.

‘…아니 선플러라기는 좀 그렇고, 남을 까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요상하게 뒤틀린 악플러라 해야 하나?’

여튼, 그간 열심히 한 보람이 있었다. 확연히 나에 대한 민심이 좋아졌다.

전체 인기투표에서도 문루아를 바짝 뒤쫓는 2등이었다. 이전 생에서는 준우승자였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3, 4위보다도 한참 모자란 표를 받았었다. 감개무량했다.

일단 분위기는 충분히 우승을 노려볼 만 해 보였다. 마지막에는 점수를 채점하는 무대가 두 개, 거기다가 TOP4가 함께 공연하는 합동 무대까지 있어서, 마지막 날이 가장 중요하긴 할 테지만.

피식피식 웃으며 인터넷 칭찬 글을 보고 있었다. 어디선가 재호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어이 권노을! 빨리 오라구우~”

“아차차. 잠깐만!”

오늘은 평소에 없던 추가 밴드 연습이 있던 날이었다. 결승전은 평소와는 달리 참가자가 소화할 무대가 3개나 되었다. 그중 오늘은 TOP4 무대 연습이 있었다.

바깥에 나가니 언제나처럼 카니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에 와보니 나 외에 TOP4가 모두 이미 차에 탔다. 항상 준비가 많아 가장 마지막에 탔던 문루아마저 이미 자기 자리인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재호가 내게 핀잔을 줬다.

“늦었어.”

“아 미안.”

시청자 반응이 너무 신나서 인터넷을 계속 보다 시간을 놓쳤다.

“TOP4 연습은 근데 누가 리드하는 거야? 우리 4명이 자체적으로 리드할 순 없잖아.”

경쟁이 마지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지금껏 절친했던 TOP4지만 마지막에는 다들 욕심이 날 터였다. 선곡부터 파트 배분까지, 모든 부분이 갈등 덩어리였다.

문루아가 대답했다.

“키미 선생님이 오실 거라고 방금 PD님이 말해주셨어요. 노을 군이 없을 때.”

일부러 ‘노을 군이 없을 때’라는 부분은 딱딱 끊어서 강조했다. 내가 늦어서 화난 모양이었다. 결승 직전이라 나를 포함해 다들 조금씩 예민해졌다.

“그렇군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런 상황에서, TOP4 무대를 잘할 수 있을까 고민이 됐다. 무엇보다 키미 프로듀서는 어떻게 할까? 지난번 처럼 내게 분량 몰빵을 줄까? 그러면 다른 참가자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나는 그럼 뭐라고 반응해야 할까?

머릿속이 점점 복잡해졌다.

하지만 도착 후, 그런 고민은 금방 풀렸다.

* * *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키미는 뜻밖의 말을 했다.

“여러분이 알아서 하세요.”

“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TOP4 모두 당황해했다. 음악감독이 조율을 하겠다 했는데, 갑자기 알아서 하라니 당황할 만했다.

주환희가 당황해서 질문했다.

“저희가 하라구여? 슨생님은요?”

“여러분들이 계획을 짜면, 그걸 구체화할 수 있게 도와줄게요.”

대답 후 키미는 아예 작은 책상 앞에 앉았다. 식기에는 홍차와 쿠키가 담겨 있었다. 아예 본격적으로 티타임을 즐기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나도 모르게 질문이 나왔다.

“이전에는 직접 일일이 정해 주셨잖아요?”

키미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더니 툭 말했다.

“제작진 교체 전에요?”

“네.”

“그때는 제작진이 그러라고 했어요. 당시 참가자 중엔 저도 못 미더운 사람도 있었고.”

아무리 TYB가 편집권을 갖고 있다 해도 카메라 앞인데, 키미는 솔직한 말을 툭툭 던졌다. 내가 다 무서울 정도였다.

“그, 그랬군요.”

“게다가, 여러분들 딱 봐도 친해진 거 같은데. 서로 신뢰 있잖아요?”

“네.”

다른 3명도 모두 ‘네’라고 대답했다.

“근데 내가 왜 필요해요. 문제 있으면 말해요.”

이제는 아예 키미는 가방에서 소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 책 제목은 안 보였지만 문학동네 전집 중 하나였다. 가벼운 책도 아니고, 아주 제대로 집중해서 다른 짓을 하겠다는 결의가 느껴졌다.

어색한 침묵이 10초 정도 흘렀을까, 문루아가 당황스러운 듯 말했다.

“어쩌죠?”

“뭐가요?”

“뭐가요 라니요. 선곡 말에요.”

“글쎄요. 좋은 곡을 잘 찾아보면.”

문루아가 답답하다는 듯 손을 허공에 휘두르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요! 여기서 저만 여자잖아요! 남자랑 여자가 같이 부를 수 있는 곡은 거의 없어요. 게다가 듀엣곡도 아니고 남자 셋 여자 하나면 더더욱.”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이었다. 확실히 남자 음역대와 여자 음역대가 모두 골고루 있는 발라드곡은 거의 없었다.

재호가 아이디어를 냈다.

“남녀 혼성그룹에 맞게 쓰여진 90년대 댄스그룹 곡을 우리에게 맞게 편곡해보면 어떨까요? 키미 선생님도 계시구.”

문루아가 손가락을 튕겨 ‘딱’ 소리를 냈다. 대답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그거 괜찮은 아이디어네요.”

환희까지 가세해서 칠판에 우리가 함께 부를 수 있는 곡을 적어내기 시작했다. 쿨의 ‘아로하’부터 이소라와 김현철의 ‘그대와의 블루’까지, 온갖 혼성 곡들이 쏟아져 나왔다.

오히려 제작진이 우리를 내팽개치자, 우리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나도 의견을 보탰다.

“그런 곡이 딱 하나 있어요. B2M의 ‘One Fine Day.”

“근데 그거 팝이잖아요 횽? 팝송을 한국 대중이 많이 좋아해 줄까요?”

문루아도 말을 보탰다.

“그리고 이거, 사랑 노래잖아요? 저희랑 딱히 가사가 어울리는지도 모르겠어요.”

슬쩍 키미 프로듀서를 봤다. 책을 읽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보였다. 키미의 눈썹이 살짝 씰룩거리고 있었다. 뭔가 말에 끼어들고 싶지만, 이미 뱉은 말이 있어 참고 있는 상황이 분명했다.

내가 키미를 불러 세웠다.

“키미 선생님.”

“네.”

“혹시 그런 곡 없을까요? 남자 셋, 여성 한 명이 부를만한, 의미 있는 노래로요.”

키미가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리고 우리를 향해 고개를 돌려 대답했다.

“김철현의 ‘앙코르를 마치며’ 어때요?”

싱어송라이터 김철현은 알았지만, 이 곡은 처음이었다.

가사를 살펴봤다. 공연 앵콜이 끝나고 난 뒤의 쓸쓸함을 담은 내용이었다.

원곡을 들어보니 목소리가 풍성했다. 마치 아카펠라 곡 같았다. 솔로 남자 가수 곡인데도 목소리가 다양했다.

재호가 물었다.

“솔로곡이 아니네요?”

키미가 악보에 이리저리 지시사항을 적으며 말했다.

“맞아요. 재즈 보컬 그룹이 피처링했죠. 김다라 선배가 이 팀으로 데뷔했어요.”

과연 풍성한 화음이 있는, 혼성그룹 곡이었다.

하지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키미 프로듀서에게 직접 내가 물었다.

“이거 뭔가 곡이 너무 정서가 잔잔하지 않나요? 오디션용 곡은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러니까 좋죠. 당신들. 경쟁 곡은 안 그럴 거잖아요? 고음 터지고. 전조 하고. 폭죽 터지고. 난리 날 거 아니에요?”

다들 눈치를 살폈다. 모두 눈빛으로 동의했다. 사실 당연했다. 결승전이니까 마지막 임팩트를 모두 써야 했다.

키미 프로듀서가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잔잔한 곡이 하나 있으면 균형이 맞을 거예요. 오디션 마지막이니까 주제도 어울리고.”

다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모두가 동의한 것을 확인한 키미 프로듀서가 판사처럼 책상을 탕탕탕 두드렸다.

“좋아요. 그럼 이 곡으로 결정!”

그리고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갔다. 언제 말을 했냐는 듯, 다시 홍차를 마시며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이후 우리는 키미 프로듀서가 적어놓은 지시사항을 참고해 파트 배분을 했다. 워낙 다들 특성이 달라서 파트 나누기도 쉬웠다. 중저음이 매력적인 재호, 테크닉 위주의 미성 보컬 주환희, 파워 고음 보컬인 나, 그리고 여성 알앤비 보컬인 문루아까지 모두 색이 겹치지 않았다. 서로에게 잘 맞는 부분을 가져가니 파트가 자연스럽게 정해졌다. 제작진이 뽑아 준 악보로 서로 자기 파트를 표시했다.

“자 이제 오늘은 다들 개인 연습을 해보죠.”

환희가 답했다.

“좋아요 횽.”

갑자기 문루아가 툭 내뱉었다.

“권노을 씨는 리더십이 있네요.”

“제가요?”

“파트도 다들 만족할 만한 점을 정확하게 찔러서 배분했고.”

“다들 개성이 강해서. 겹치는 점이 없어서 좋았습니다.”

“노을 씨 좋은 팀 리더가 될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팀 리더?

사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솔로 가수가 될 거라 생각했었으니까. 여튼 무엇이라도 잘한다는 평을 들으니 기분은 좋았다.

* * *

그날 밤, 이번에도 오창선의 작업실에 갔다. 연습을 위해서였다.

“계시나요?”

똑똑 똑똑. 계속 두드렸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뭐지?’

막내 작가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오창선과 약속은 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두드려도 오창선은 나오지 않았다.

막내 작가가 전화를 하더니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뭐라 시나요 작가님?”

“곧 오신다고…”

“약속은 지금 하신 거지요?”

“맞아요. 저녁 8시까지 오라 하셨는데. 1시간 정도 늦으신다네요.”

“네네 괜찮습니다.”

할 수 없이 카니발 차량으로 돌아가서 오창선을 기다렸다.

보통이라면 짜증이 났을지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걱정이 들었다. 오창선은 어제 만난 사람이지만, 나에게는 10년간 모신 스승이었다. 그런 그가 이런 프로답지 않은 실수를 하다니, 이상했다.

차에서 이전 생을 돌이켜봤다. 원래 오창선이 이렇게 약속을 안 지키는 가수였었는지 떠올려봤다.

그러고 보면, 이전 생에서도 오창선이 가끔 사라져 버릴 때가 있었다.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더니 전화를 해야 몇 시간 뒤에 어슬렁어슬렁 약속 장소로 오곤 했다.

당시에는 코러스다 보니,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무대를 대등하게 꾸미는 상황이 됐다. 관점이 바뀌자 내 생각도 달라졌다. 정말 좀 이상하긴 했다.

‘방송국과의 약속을 이렇게 쉽게 여긴다고?’

그때였다.

똑똑똑.

누군가가 내 차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누구세요?”

창문을 열었다.

오창선의 스타일리스트가 서 있었다. 그리고, 사실은 오창선의 오랜 연인이기도 했다.

‘근데 이분이 왜 지금 나한테 왔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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