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53화 (53/280)

제53화

가수 오창선.

레전드 발라드 가수였다. 90년대 후반까지 오랜 무명 생활을 거쳤다. 그러다 2000년에 초대형 히트곡 ‘죽지 않아’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이후 ‘사랑에 빠졌다’ ‘화려한 고백’ ‘나의 마음’ ‘수술실’ 등의 곡이 연일 성공했다. 그렇게 그는 절대적인 발라드 가수가 되었다.

그와 나의 인연은, 10년이 넘었다. 이전 생에서, 힘들게 살던 내게 재호가 코러스 가수 자리를 소개해주었다. 재호가 가장 친했던 선배 가수, 오창선의 코러스를 해보자는 제안이었다.

레전드 가수 오창선은 당시 살찌고 소심했던 나를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모든 콘서트 투어에서 항상 나를 대동하고 다녔다. 덕분에 이전 생에서 나는 가수로는 실패했지만, 굶어 죽지는 않고 살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건 레전드 가수와 함께하며 가수의 삶을 지켜봤다는 점이었다. 콘서트 사운드 체크부터 무대 돌발 상황 대처, 1시간 넘는 무대를 지루하지 않게 채우는 방법까지, 엄청나게 많은 부분을 배웠다. 이 경험들 덕분에 알게 모르게 오디션에서 닥친 다양한 문제를 손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내게 오창선은 스승 같은 존재였다.

그런 그를, 얄궂게도, 오디션의 마지막에 듀엣곡 무대에서 만나게 됐다. 운명의 장난이었다.

‘하필 여기서 만나게 되다니…’

기분은 좋았다. 최고의 가수이자, 내가 멘토로 생각하는 분을 만나게 된 거니 말이다. 다만 하나가 걸렸다. 이전 생에서 10년 넘게 쌓았던 친밀도는 사라졌다. 그와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 * *

윤작가의 말대로 입구로 가니 PD가 오창선 가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노경진 PD가 나를 발견하더니 인사했다.

“노을 군! 여기에요.”

다가가자 오창선이 밝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권노을 씨 무대 TV로 잘 봤어요. 노래 참 잘하시던데요?”

30대 후반의 대가수인데도 오디션 참가자에게 존댓말을 썼다. 내가 기억하는 오창선 가수의 모습 그대로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노경진 PD가 상황을 설명했다.

“바로 다음 주 금요일에 듀엣 무대를 두 분이 하실 겁니다. 오늘은 두 분이서 함께 하시면서, 무대를 구상하는 시간을 가질 거에요. 카메라와 제작진을 최소 인원으로 둘 테니, 알아서 좋은 그림 만들어 주세요. 오창선 가수님이 워낙 경험이 많으시니 잘 이끌어 주시리라 믿습니다.

“아이~ PD님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오창선 가수에게 가기 직전, 노경진 PD가 살짝 나를 붙잡았다. 노 PD는 오창선 가수가 멀찍이 떨어져 있는 걸 확인하고 슬쩍 귀띔을 했다.

“조심해요 노을 군.”

“조심이요?”

“오창선 선배가. 사람 좋아 보여도. 의외로… 까탈스러운 면이 있어서. 사실 후배들이 잘 견디질 못해요. 선곡도 본인이 제멋대로 정하고. 파트 분배도 다 자기 마음대로고.”

“그래요?”

그러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오창선은 레전드 가수였다. 이전 생에서 그의 코러스 자리가 나 같은 무경험자에게까지 온 이유도 오창선이 유독 음악에 까탈스러워서였다.

사생활이나 취미의 영역에서 오창선은 매우 너그러웠다. 하지만 음악에서만은 매우 깐깐했다. 자기 회사를 차려서 모든 음악을 자기가 직접 관리했다. 코러스도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어떻게든 압박을 하거나 교체해서 수준을 유지했다. 자기 수준에 맞는 사람을 찾기 어려웠던 덕분에 나에게까지 기회가 올 수 있었다.

다행히 나는 그의 마음에 들어서, 코러스 생활을 할 수 있었었다.

‘그러고 보면, 오창선 가수가 후배 가수 입장에서 친해지기 어려운 존재이긴 했겠네.’

이전에야, 10년 넘게 동고동락하며 서서히 친해졌다. 덕분에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6일밖에 남지 않았다. 무엇보다 항상 카메라가 함께 있었다.

이 짧은 시간 동안에 오창선 가수와 친해져서, 좋은 무대를 꾸밀 수 있을까, 담당 PD가 걱정할 만했다.

물론 기우였지만 말이다.

* * *

입구를 나가자 오창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으리으리한 벤틀리 자동차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익숙한, 오창선의 자동차였다.

“일단 작업실로 가시죠. 제가 운전할게요.”

오창선이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뒷좌석은 엄청나게 넓고 편안했다. 자연스럽게 카메라도 설치되어 있었다. 이동 중에도 방송 분량을 뽑으려는 제작진의 의도였다.

“감사합니다.”

감사를 표하고 차에 들어갔다. 이전 생에서 몇 번 타본 차였다. 덕분에 크게 긴장하지는 않았다.

“작업실은 용산 쪽에 있어요. 조금 걸립니다. 벨트 매세요.”

차는 금방 속도를 냈다.

“뭐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하세요.”

오창선 가수가 선선하게 말을 걸었다.

내가 솔직하게 궁금했던 부분을 말했다.

“그럼… 이 방송에 왜 나오신 건가요?”

“왜요?”

“평소에 오디션 프로 같은 곳에 오시는 분은 아니시니까요.”

내 솔직한 의문이었다. 오창선 가수는 TYB 소속도 아니었다. 오디션에 나오지도 않았었다. 이전 생에서도 오창선 가수는 슈퍼스타 T에 출연하지 않았었다.

대체 왜 오창선은 슈퍼스타 T에 출연하러 온 걸까? 도저히 이게 감이 오지 않아 말했다.

오창선이 피식 웃었다.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뭘요?”

“하도 주변이 권노을 권노을. 제2의 오창선이다 뭐다 해서. 대체 얼마나 대단한가 싶어서 한번 보고 싶었어요.”

그러면서 오창선은 나를 빤하니 쳐다봤다.

적대적이라고까지 하긴 어려웠다. 하지만 좀 쎄한 눈빛이긴 했다. 분노까지는 아니고 ‘경계’하는 눈빛이랄까?

“저랑 별로 안 닮은 것 같은데. 제2의 오창선이라 그러더라고요?”

사실 오창선은 오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겸손한 편이었다. 무엇이 오창선을 신경 쓰이게 했을까 궁금했다.

“영광입니다 선배님.”

오창선이 차 시동을 걸며 툭 내뱉었다.

“아니죠. 아니죠. 저보단 나은 사람을 롤모델로 해야죠.”

“왜요? 선배님은 정말 대단한 가수신데.”

“뭐가 대단해요? 그냥 뻔한 사랑 노래 몇 개 떠서 먹고 사는 가수지. 명반도 없고. 밴드도 배신했고. 쓰레기예요.”

‘아하.’

이제 알 거 같았다.

오창선에게는 죄책감이 있었다. 록밴드를 배신하고, 발라드 가수로 타협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밴드 시장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창선은 이를 엄청난 변절로 생각했었다. 그리고 밴드 음악으로 성공한 외국 뮤지션과 비교하면서 자신을 자책했다.

그가 그런 자책에서 벗어나게 된 건, 한류 드라마 OST에 참여하면서부터였다. 밴드 음악이 탄탄한 일본에서도 성공하자 비로소 자기 죄의식을 떨칠 수 있었다.

지금은 아직 그러기 전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조금 빨리 죄책감을 덜어주면 어떨까?

“사랑 노래가 뭐가 나쁘죠?”

오창선이 나를 쳐다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사랑 노래는 상업적이잖아요.”

“일단, 말 놓으셔도 됩니다.”

오창선은 친한 후배에게만 반말을 했다. 거꾸로 말하자면, 말을 놓게 되면, 금방 친해졌다.

“그래도 돼요?”

“그럼요. 대선배신데.”

“이미 본인도 프로 가수 후배라 이거죠? 그 패기 맘에 들어요. 좋아. 노을아.”

일단 말을 편하게 하니, 훨씬 오창선 가수의 말에 에너지가 실렸다. 친한 사람에게만 보여주는 진짜 오창선의 모습이었다.

“진짜 위대한 가수는, 명반을 내는 거야. 자기 장르를 지키면서. 들국화나 유앤미블루. 핑크 플로이드. 비틀스. 레드 제플린. 뭐 그런 음악들 말야. 나는 그냥 반짝하고 잊혀지는 유행가 발라드 가수일 뿐이고. 나 같은 놈보다는 핑크 플로이드나 들국화를 롤모델로 삼는 게 낫다. 뭐 그런 거야. 목표는 높은 게 좋잖아?”

“그 사람들만큼 오창선 선배님도 유명한 가수잖아요. 똑같은 거 아닌가요?”

“뭐가 똑같아. 완전 다르지. 진지한 아티스트하고. 나 같은 딴따라하고.”

“그건 누가 정해주는 건데요?”

“평론가나….”

“평론가가 무슨 소용이에요? 평론가가 밥 먹여주는 것도 아닌데. 말씀하신 외국 가수들, 죄다 그냥 유명한 가수잖아요. 장르가 다른 거지. 더 우월한 건 아닌 거 같은데요.”

“허~ 희한한 말을 다 하네. 노을이. 그래도 말이야. 아닌 건 아닌 거야.”

“뭐가요?”

“비틀스랑 난 다른 가수라고.”

“비틀스도 아이돌이었잖아요. 처음에.”

“음…”

“비틀스가 우리가 아는 명반이란 걸 낸 건 후반기 몇 년뿐이잖아요. 시작은 다 비슷하죠. 그리고 지금은 이제 점점 사람들이 CD로 음악을 안 듣기 시작했잖아요? MP3다 뭐다 해서.”

“그렇긴 하지.”

“듣는 방식이 달라지면, 당연히 가수도 달라지는 거 아닐까요? CD로 안 듣는데 CD를 열심히 만들 필요가 있을까요?”

“짜식. 이상한 소리를 하는데. 은근 설득력이 있네.”

당연히 오창선은 이 말이 설득력 있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이 말, 이전 생에서 오창선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읊은 거니까.

<알겠냐 노을이? 옛날에는 비틀스 하면 쫄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아니야. 듣는 방식이 달라지면 당연히 가수도 달라지는 거지. 혹시 알어? 나도 60년대에 리버풀에 있었으면 비틀스 같은 음악 했을지. 그냥 다를 뿐인 거야. 비틀스 같은 명가수 코러스 한다 생각해. 알았어?>

오창선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곰곰이 내가 하는 말을 생각 중인 모양이었다.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톨게이트 앞에서 오창선이 불쑥 다시 내게 말을 걸었다.

“노을이.”

“네.”

“음악 틀어 봐. 니가 좋아하는 걸로. 거기 케이블 있다.”

UV 케이블로 차에 내 MP3를 연결했다.

뭘 선곡할지 알고 있었다.

“아레사 프랭클린?”

오창선이 반색했다.

“네. 좋아해서요.”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네. 야, 니가 아레사 프랭클린을 왜 들어?”

“너무 좋은걸요.”

“나도 너무 좋아.”

그야 나도 그럴 줄 알고 있었다. 오창선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 중 하나가 아레사 프랭클린이었다. 최고의 가창력을 가진 알앤비 가수면서, 록커처럼 강렬했다. 내 취향의 알앤비와, 록 취향의 오창선을 모두 만족시키는 최적의 선곡이었다.

이전 생에서 오창선과 함께 음악을 들을 때면, 언제나 아레사 프랭클린의 음악을 들었다. 오창선이 불쑥 말했다.

“너 뭐 좋아하냐?”

“글쎄요…”

“취미 같은 거.”

“아하 네.”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스타크래프트 좀 보는데요.”

“뭐!!!”

오창선이 갑자기 정색했다.

“너 누구 좋아하냐.”

“박정석 선수요.”

“그래~~ 나도 엄청 좋아하지!!”

이후로 오창선은 20분도 넘게 스타크래프트에 대해 떠들어댔다. 본인이 신나서 말을 토해냈다.

실제로 나도 스타크래프트를 좀 좋아했다. 하지만 오창선은 스타 크래프트를 무지하게 좋아했다. 이전 생에서도 스타 이야기를 하면서 확 관계가 가까워졌다.

확실히, 미리 취향을 알게 되니 훨씬 관계 개선이 쉬웠다.

깔깔대면서 30분 가까이 떠들다 갑자기 오창선이 침묵했다. 그러더니 툭 말을 내뱉었다.

“노을이.”

“네 선배님.”

“니 무대 봤을 때. 솔직히 별로였어.”

기분이 나쁘기에 앞서, 호기심이 들었다. 레전드 가수 오창선은 대체 뭐가 마음에 안 들었을까?

“어떤 점이…?”

“너무 전략적이랄까? 너무 관객 반응을 계산한 느낌이 들었어. 15년쯤 된 노회한 가수 같달까?”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15년간 무명 기간 이를 갈며 준비했던 무대들이었으니 말이다.

“그게 안 좋은 건가요?”

“신인은 신인만 할 수 있는 미련한 무대가 있는 법이거든. 다른 참가자들은 그런 고집이 있는데. 너만 없더라고. 점수는 제일 좋은데, 니가 무슨 음악을 하고 싶은지를 정작 잘 모르겠어.”

이건 뭔가 참고가 될 것도 같았다.

“참고해서 결승 무대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럼 일단 듀엣곡은 뭐할까?”

“네?”

“네 의견 말해봐. 뭔 곡 하고 싶어?”

“선배님은요?”

“그게. 원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선곡이 있었는데. 노을이 니는 나랑 취향도 잘 맞고. 한번 니 의견을 들어보고 싶네? 이제 안 지 30분 됐는데 꼭 오래 만난 놈 같애.”

‘그야 이전 생에서 형이랑 10년도 넘게 알고 지냈으니까요.’

PD는 오창선이 내게 선곡을 강요할 거라 경고했었다. 그런데 지금 오창선은 내게 의사를 묻고 있었다.

오창선이 벌써 나를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왠지 이번 무대 준비도 그다지 어렵지 않을 듯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