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48화 (48/280)

제48화

“그야 당연히 그때는 힘들었지. 자신감이 없었고. 재호 말고 친구도 별로 없었고. 뭐 하나 잘하는 것도 없었고. 데이트도 한 번도 해본 적도 없었고. 뭐 하나 되는 게 없는 우울한 학창시절이었지.”

“근데 그게 뭐가 좋아요?”

“그때의 감정들 덕에 지금 노래를 부르는 거야. 세상에 나만 혼자 있는 거 같은 감정이라면 실컷 느껴봤으니까. 너도 그렇지 않아?”

“모르게써요.”

“아마 그럴 거야.”

주환희는 겉보기에는 마냥 능글맞아 보이는 녀석이었다. 하지만 자주 본 내게는 보였다. 이 녀석의 슬픔이 말이다. 게다가 내가 한번 살짝 본 듯한 그 녀석의 본모습은 아니나 다를까, 좀 음울해 보였다. 마냥 밝기만 한 평소와는 달랐다.

“그런가요…”

주환희가 뭔가 납득을 완벽하게 하지는 못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가사 쓸 때, 어떤 감정을 잡고 쓰잖아? 근데 듣는 사람보다 내가 슬픔을 덜 겪었으면 어떻게 그 사람들을 감동시키겠어? 그 에너지를 청자들은 예민하게 포착하잖아?”

“그렇긴 하죠.”

“너도 네 생각보다 부정적인 감정들이 네 가사에 많이 담겨 있을 거야. 발라드 가사를 잘 쓰는데 항상 행복할 리가 있겠어?”

그렇게 자연스럽게 이번에는 주환희 이야기로 넘어갔다.

“저도 우울했던 적이 많았죠…”

“어차피 너…”

”알아요 알아요. 어차피 관객들한테 이야기해야 한다는 거. 쫌만 시간을 줘요.”

“뭔 시간을 줘? 말하기로 했는데.”

“잠깐만요.”

한 10초 정도 텀을 뒀다. 이윽고 주환희가 말을 이어갔다.

“저도 원래 좀, 소심해써요. 학창 시절에.”

“그랬을 거 같아. 그래서?”

“그래서, 연습생이 된 다음부터 성격을 억지로 바꿨어여. 좀 더 활발하고 껄렁하게. 그렇게 계속 살다 보니까, 점점 그게 제 진짜 성격이 됐어여. 그게 전부에요.”

“그게 전부라고?”

“네.”

“주하늘은 우연이고?”

“네.”

“……”

이미 거짓말인 줄 알고는 있었다. 그래도 이 녀석, 입을 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슨 무력으로 입을 열 수는 없었다.

일단은 여기서 이 주제는 끊기로 했다.

“....일단 그래. 그래서, 너는 그 스토리를 무대에서 어떻게 써먹을 건데?”

“지금은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을 하면 어떨까 싶은데여.”

너무 뻔한 선곡이었다.

“너무 뻔해. 너랑 어울리지도 않아. 멜로디와 가사를 변형하고, 자유자재로 주무르는 게 쭈 네놈 특기잖아. 유재하 곡은 그런 특기를 살리기 어려워.”

“그럼 더 좋은 선곡 있으세여?”

조금 생각해봤다. 지금 주환희의 상태를 떠올려보니 좋은 선곡이 나왔다.

“노이즈에 ‘너에게 원한 건’ 어때?”

“음… 못 들어봐써요.”

“김창환 사단에 보이그룹 노이즈 노래야. 멜로디도 좋구. ‘거짓보다 진심이 좋다’는 메시지가 있으니까. 템포가 있는 곡이라 중간에 랩도 넣을 수 있고. 너한테는 나을 거야.”

“음… 들어볼게여. 고마워요 횽.”

“내 선곡은 어떤 거 같냐?”

“좋아 보여요. 근데 횽, 이런 곡을 소화하려면…”

내 선곡은 여성 곡이었다. 주환희가 세심하게 여자 키를 남자 키로 만들려면 어느 정도 키를 올려야 하는지.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최고음이 어느 정도일지 등 다양한 팁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착한 놈이긴 했다.

하지만 주환희에 본심은 결국 오리무중이었다. 찜찜하게 미팅을 끝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 이렇게 되면 방법이 있었다. 사실 남의 프라이버시를 굳이 찾아보는데 거부감이 있었다. 심지어 무슨 일반적인 방법이 아니라 mp3를 쓰는 방식은 더더욱 별로였다.

하지만 이쯤 되면, 찾아봐야겠다 싶었다. 너무 열심히 숨겼다. 단순히 보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이 정도로 숨긴다면 뭔가 곪은 상처가 있다는 뜻이 아닐까 싶었으니까. 오히려 혹시나 큰 문제가 있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주환희를 도와주기 위해서 이 부분을 mp3로 알아보기로 결심했다.

굳이 말하자면 주환희가 알려 주기로 약속했던 부분만 사실인지 알아보는 셈이었다. 반칙은 아니었다. 그 외에 사생활은 들여다보지 않기로 했으니까.

그리고, 주환희의 비밀은 그날 밤에 알게 되었다.

* * *

몇 시간 후 밴드연습실.

이번에는 내가 합주를 시작할 차례였다. 연습실로 들어가니 언제나처럼 밴드 마스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 노을이~ 왔나. 이번 선곡은 또 뭐꼬?”

“네네. ‘널 사랑해’ 입니다.”

“’널 사랑해’? 못 들어봤는데.”

“’김정은’이란 여가수 노래입니다.”

밴드 마스터가 노트북으로 DB를 뒤졌다.

“하이고~. 예엣날 곡이네! 권노을 니는 대체 몇 살이고? 범상치 않은 곡밖에 안 고르네.”

“감사합니다.”

‘널 사랑해’란 곡을 고른 이유는 가사 때문이었다. 노래 자체는 무난한 사랑 노래였다.

이번에 나는, 내 운명, 구체적으로는 내 엄마를 위해 노래를 하려 했다.

지난 생에서 나는 가난했고, 나를 살찌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고, 심지어 일찍 죽으면서 나를 가장으로 만든 엄마를 원망하며 살았었다. 무엇보다 엄마는 내가 선택할 수도 없었다. 왜 나는 이런 엄마를 만나서 이렇게 고생했을까 하고 불평했던 적도 솔직히 있었다.

다시 생을 살면서, 많이 반성했다. 문제는 나였다. 내 노력 여하에 따라 운명은 분명히 바뀔 수 있었다. 지금 내게 mp3가 있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내가 가장 탓해야 할 건 나였다.

엄마에 대한, 그리고 엄마가 상징하는 내 운명에 대한 반성을 담았다. 이제는, 엄마를, 내 운명을 사랑하겠다고 마음에 담았다.

<널 사랑해~>

합주가 끝났다. 밴드 마스터가 ‘엄지 척!’을 했다.

“아따 노래 잘하네!”

“감사합니다.”

“뭐 전형적인 발라드라 더 수정할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어떠나?”

“잠시만요. 박찬용 선배님, 어떠신가요?

“나 말인가?”

일부러 박찬용 드러머를 불렀다. 발라드곡 드럼이라면 만 번은 연주해 봤을 사람이었다. 그의 의견이 궁금했다.

“지금처럼 뻔하게 연주해도 될까요? 여자 가수 노래니까 남자가 부르기만 하면 충분히 신선한 걸지. 아니면 다른 게 필요할지.”

“좀 더 추가하면 좋겠네.”

역시나, 박찬용 드러머는 의견이 있었다.

“뭘 더 추가하면 좋을까요?”

“발라드는 뻔한 장르 같지만, 은근히 그사이 많이 바뀌었네. 이제는 사실… 발라드 자체는 죽은 음악이야. 끊임없이 귀에 자극을 줘야 하네.”

박찬용 드러머가 날카로운 의견을 냈다. 그에 따라 밴드 마스터도 의견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아 선배! 좋은 말씀이시네요. 약간 요즘 느낌이 나게… 그럼 전조를 몇 번 줘볼까요?”

“전조도 전조고, 리듬 조금 더 미니멀해지면 좋을 거 같네. 아예 이 부분에서는 내가 빠져보면 어떨까?”

“아예 빠지기보다는 조금 더 편안한 리듬으로 가보면 어떨까요?”

밴드 마스터와 드러머가 토론의 물꼬를 텄다. 이제는 기타리스트부터 베이시스트까지, 모두 다양한 의견을 내기 시작했다. 밴드 마스터는 능숙하게 모두의 의견을 듣고, 이를 하나로 수렴했다. 밴드의 리더다웠다.

토론 이후의 합주는 훨씬 더 좋았다.

“어떠나?”

“너무 좋습니다! 조금씩 다듬기만 하면 될 거 같습니다!”

라이브 무대를 하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가수는 노래만 하는 직업이 아니었다.

내가 코러스로 참여했을 때 레전드 가수의 모습이 기억났다. 자기 목소리도 철저하게 관리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무대 전체를 세심하게 신경 쓰고 관리했다.

그때는 그냥 지나쳤지만, 이제는 깨달았다. 나 혼자 노래를 잘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나를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연주자와 엔지니어, 무대 스태프가 정말 중요했다.

관점을 바꾸고 나니, 행동도 바뀌었다. 박찬용 드러머와의 갈등이 전부가 아니었다. 연주자를 신경 쓰고, 그들과 함께 무대를 만드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처음에는 좀 어색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하우스 밴드의 최고의 연주자들의 재능을 어떻게 써먹는지 조금씩 알 듯했다. Mp3에서 미처 보여주지 않은 스탯인 뮤지션의 필수 스킬, ‘연주자 활용법’도 조금씩 늘고 있었다.

이번 무대도 기대해볼 만했다.

* * *

고대현 기자는 내가 준재벌 3세 기사로 단숨에 스타 기자가 된 모양이었다. 이번에는 제작진이 TOP4 단독 인터뷰 기자로 고대현 기자를 선정했다. 방송사 회의실에서 고대현 기자를 만났다.

고대현 기자는 덩치가 크고 말쑥하게 키도 큰 미남이었다. 이글거리는 눈을 보면 거짓말도 못 할 거 같았다. 캐쥬얼한 옷을 입고 와서 내가 생각했던 기자와는 좀 이미지가 달랐다.

“안녕하십니까. 토요신문 고대현 기자입니다.”

“안녕하세요.”

가장 언론 인터뷰에 능숙한 문루아가 인터뷰를 리딩했다.

“별 질문은 아닙니다. 방송 조작 사건 관련해서 참가자들의 심경 인터뷰를 좀 해볼려구요. 솔직히 큰 특종감은 아닙니다. 편안하게 임해주시면 됩니다.”

역시나 레전드 가수가 인정한 기자다웠다. 인터뷰는 매끄럽게 진행됐다. 가수를 편안하게 해주면서도, 궁금한 부분은 모두 물어보는 날카로운 질문을 기분 나쁘지 않게 밀어 넣었다.

“방송이 중단되고, 쉬시는 3주 동안 뭘 하셨나요?”

평소랑 큰 차이 없는 대답을 했다. 문루아는 운동, 재호는 음악 편곡, 나는 노래 연습이 주였다.

의외라면 의외는 주환희였다.

“데모테잎 작업 중이에여.”

고대현 기자는 처음 들어본 말인 모양이었다.

“데모… 테잎이 뭔가요?”

주환희가 답변했다.

“자기 음악을 보여주는 샘플이에여.”

“TYB 연습생인데, 그런 걸 왜 만드시죠?”

주환희는 복잡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웃는 표정도 우는 표정도 아니었다.

“째미있어서요.”

“재미요?”

“나와 다른 화자를 만들고, 내가 겪어보지 못한 상황에 놓아 보고, 스토리를 연결하고. 그런 게 재밌더라구여.”

“대형기획사에서는 싱어송라이터는 못 하지 않나요?”

“저희 회사는 그런 거 의외로 좋아해여. 타이틀곡은 상의해서 해서야겠지만여.”

“그렇군요…”

이야기를 들으면서 뭔가 감이 왔다. 주환희 이 녀석은 작사가이자 탑라이너, 멜로디 메이커였다.

좀 더 쉽게 말하자면, 이 녀석은 가수이기에 앞서 작가였다.

저 녀석이 어떤 타입인지 알고 나니, 주환희의 이해하기 어려웠던 행동들도 조금씩 이해가 되는 듯했다.

그 외에는 질문도 답변도 무난했다. 고대현 기자가 만족스러운 듯 노트북을 닫으며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고생하셨습니다.”

그렇게 모든 인터뷰가 마무리됐다.

깔끔하게 인터뷰를 끝내고, 모두 나가려는 순간, 내 눈에 밟히는 장면이 있었다.

‘뭐야 저 녀석?’

주환희였다. 최대한 티 나지 않게 행동한 덕에 다른 이들은 눈치채지 못했다. 하지만 내게는 보였다. 주환희가 슬쩍 고대현 기자에게 뭔가를 주는 모습이 말이다.

저 녀석, 뭔가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 모든 게 내 예상범위 내였긴 했지만 말이다.

* * *

어느덧 생방송 무대 하루 전. TOP4가 모두 무대 마무리 준비 중이었다. 재호는 여전히 연습실에 처박혀 있었다. 문루아는 헬스클럽행이었다.

또 나와 주환희만 숙소에 남았다.

주환희는 거실에서 노트북 컴퓨터를 초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쉽게도 침대방에서는 와이파이가 잘되지 않았다. 인터넷 서핑은 거실에서만 가능했다. 자유를 준 제작진의 마지막 자존심 같기도 했다. 인터넷이 연결되는 노트북이 있으면 뭘 할지 모르니 말이다.

슬쩍 주환희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뭘 그렇게 보냐?”

주환희가 화들짝 놀랐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대충 뭘 보고 있을지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화면을 보니 내 생각이 맞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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