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7화
똑똑, 문을 노크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문이 열렸다. 멀쩡해 보이는 주환희였다. 정말 메이크업 실력이라면 끝내주는 실력이었다.
“머야. 노을횽이네요. 왜요 횽?”
“쭈, 물어볼 게 있어서.”
“뭐에요 횽. 그냥 암때나 물어보면 되는데.”
그렇게 말하면서 주환희는 여유롭게 침대를 의자 삼아 앉았다. 겉모습은 평상시처럼 태평해 보였다.
방 안의 간이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오늘 아침에 말이야. 이상한 전화를 받았어. 주하늘이라는 친구를 찾던데.”
“그래요? 희한하네요 횽.”
주환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내게는 살짝, 아주 미세하게 눈이 떨리는 모습이 보였다.
“주하늘이라는 TYB 연습생의 어머니인 거 같았어. 하늘이에게 핸드폰 놓고 갔다고 전해달라는데.”
“잘못 전화 하신 거라고 말하지 그랬어요 횽.”
“들어보니, 잘못 전화 받은 게 아닌 거 같아서.”
주환희가 나를 쳐다봤다.
“무슨 말이에요 횽?”
“너, 주하늘 아냐?”
“뭔 소리예요 횽. 저 주환희에요.”
“주 씨는 흔한 성이 아니야.”
“없는 성도 아니잔아여. 주원장 몰라요 횽?”
교포가 보통 주원장을 아나?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말을 계속했다.
“주하늘도 TYB의 연습생이라고 주하늘 어머니가 그러시던데.”
“그런 애도 있나 보죠. 횽, 저희 회사 연생 음~~총 많아요! 보이밴드 연생을 거쳐 가는 애들은 항상 백 명은 될걸요?”
“주씨 성을 가진 스무 살 장기 연습생이 많다고?”
“아~ 전 모르죠 횽!”
주환희가 어깨를 으쓱하며 시치미를 뗐다. 절대 말해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애초에 너, 교포 맞아?
“뭔 말이예요 횽.”
“미국에 대해서 아는 게 하나도 없잖아? 오늘도 베이비 심사위원의 말 다 회피만 하고.”
“연생 된 지 너무 오래돼서 헷갈려요 횽. 어차피 횽은 미국 잘 몰르잖아요? 말해준들 이해가 되게써요?”
‘이 녀석 생각보다 완강하게 거부하는데. 절대 말 안 해주겠어.’
형사도 아니고, 저 녀석이 주하늘이라는 완전무결한 증거는 없었다. 작전을 바꿔보기로 했다.
“뭐 좋아, 니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럼요 횽.”
“그래도 말이야. 말해주고 싶은 건, 사람들은 거짓을 알아본다는 거야.”
주환희 눈빛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그도 공감하는 말인 듯했다. 기세를 몰아 말을 이어갔다.
“제아무리 훌륭한 배우라도, 진짜 자신을 가져와서 이야기하는 거야. 만약 누가 가짜 자신을 말한다면, 분명히 부자연스러운 점을 발견할 거야. 그런 사람은 대중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어.”
주환희가 차갑게 비웃었다. 처음으로 보는 냉소적인 모습이었다.
“하하! 그건 형이 잘 모르는 거예요. 대중은 믿고 싶은 부분만 보죠. 진실은 중요하지 않아요. 진실을 본들, 좋아하지도 않고.”
그새 말투가 바뀐 거 같았다.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는지, 말투가 원래 주환희 말투로 돌아왔다. 주환희가 말을 이어갔다.
“만약 누군가 실력 있는 사람이, 대중이 믿고 싶은 거짓말을 한다면, 절대 대중은 몰라봐요. 네버. 이건 제가 장담할 수 있어요 횽.”
아무래도 결정적인 증거도 없고, 그냥 빙빙 도는 대화만 계속할 듯했다. 일단 퇴각할 타이밍이었다.
“쭈.”
“왜요 횽.”
환희가 평소보다 한층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내가 꼬치꼬치 캐물어서 기분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프라이버시를 지키려는 건 좋아. 나도 그러니까.”
“그니까요 횽. 그만해요.”
“근데 말이야. 니가 놓친 게 하나 있어.”
“몬대요 횽?”
“이번 미션 말이야. ‘진짜 나의 모습’. 어차피 이걸 할 때 어느 정도는 이야기해야 하지 않겠어? 제작진이 추가 촬영을 할 텐데?”
주환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처 생각 못 한 부분인 모양이었다.
물론, 속일 수 있었다. 적당히 둘러대도 됐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주환희 본인 마음에 드는 무대가 나올 리가 없었다.
저 녀석과 함께 때로는 한 편으로, 또 때로는 경쟁자로 수많은 무대를 섰다. 그러면서 알게 된 점이 있었다. 주환희, 저 녀석은 무대에서 철저하게 진실함을 추구했다. 저 녀석의 현실이 거짓이더라도 무대만은 확실히 진심이었다.
주환희가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슬슬 타협안을 제안할 차례였다.
“서로 돕자.”
“어떻게요?”
“나도, 내 자신의 모습을 이야기해야 하는 거잖아? 이거 엄청난 부담이야. 내가 방송에서 할 이야기를 알려 줄 테니까, 너도 알려줘 봐. 시청자가 어떻게 반응할지 내 생각을 알려 줄 테니까.”
“끄응…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횽.”
주환희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내 눈길을 피하고 있었다. 사실 이 정도면 충분히 말했다 싶었다.
그리고 사실 나도, 내 진짜 모습에 대해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든가 그럼.”
* * *
다음 날 새벽. 언제나처럼 일어나서 스탯을 올리고 있었다. 달리기부터 발성 연습까지, 골고루 스탯을 올렸다.
매번 이렇게 하다 보니, 이제는 제법 스탯 포인트가 쌓여 있었다. 곧 있으면 평균점이 A-에 가까워질 듯했다.
그에 반해, 이미 A급 이상의 능력이 일단 되면 어지간하면 스탯이 오르지 않았다. A-까지 올린 체력은 한 달 넘게 요지부동이었다. B까지는 순식간에 올랐었다. 이제는 엄청난 노력이나 노하우 전수 등을 통해서만 스탯이 오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mp3도, 내 선곡을 도와줄 순 없었다.
Mp3는 능력을 올려 줄 뿐이었다.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속도를 올려 주는 악셀이었다. 핸들은 어디까지나 내가 잡아야 했다.
지금까지는 쉬웠다. 더 좋은 무대, 그거면 됐다. 이제는 아니었다. 내 자신이 어떤 가수인지, 나는 왜 이 음악을 하는지를 꼬치꼬치 묻는 미션이 계속됐다. 이전 생의 가볍고 단순한 미션보다 훨씬 고난이도였다.
아무래도, TYB, 그중에서도 천채왕 심사위원이 오디션을 완전히 책임지고 재시작한 이후 미션은 역시나 남달랐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이것만은 mp3가 아니라, 내가 직접 해야 했다.
과거를 돌이켜봤다. 여지까지는 mp3를 통해 ‘외부의 기사’나 ‘외부의 정보’를 살펴봤다. 이제는 mp3의 도움 없이, 내 과거를 찬찬히 떠올려봤다.
‘…좀 막히는데?’
파편적인 기억들이 떠올랐지만, 선곡에 도움이 될 정도로 코어한 이야기는 없었다. 에피소드들은 많았지만, 이를 연결해줄 테마나 이야기가 없었다. 구슬은 있는데, 이를 꿰어 줄 실이 없는 꼴이었다.
이럴 때는 역시나… 운동이었다. 헤드폰을 끼고 무작정 달렸다. 음악은 이번에 새로 나온 알리시아 키스의 언플러그드 앨범을 선곡했다.
이전 생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운동을 하면서 음악을 듣는다니 말이다.
이제는 매일 달리면서 앨범을 듣는 게 낙이었다. 처음에는 멜로디에 집중했다. 이후에는 이번 오디션을 거치며 깨달은 대로 발음과 가사에 집중했다. 마지막으로는 악기 하나, 음향효과 하나까지 곱씹으며 전체적인 편곡을 들었다. 땀을 흘리면서 음악을 듣다 보면, 음악이 온 세포 단위로 스며드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계속 추락해. 계속~>
알리시아 키스의 화려한 보컬에 맞춰 서서히 달렸다. 이번 곡은 초반에 대표적인 히트곡 ‘Fallin’이었다. 굉장한 ‘한’이 느껴지는, 정통 소울 알앤비 곡이었다.
‘본토에서는 뽕삘이 안 느껴진다고 하지만. 흑인 알앤비 가수들 발라드는 정말 찐하단 말이야. 가요처럼 슬프긴 한데, 뭔가 좀 더 찐한 느낌? 얘네들은 어떤 슬픈 일들을 겪었길래 이런 감정을 쓰지?’
‘Fallin’을 듣다 보니, 알리시아 키스가 대체 어떤 배경을 가졌는지 궁금해졌다. 대체 어떤 슬픔을 느꼈길래, 이렇게 그 블루지한 감정을 토해낼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잠깐, 이건?
남을 보니 내가 보였다.
…드디어, ‘진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은 기분이었다.
* * *
아침 일정을 마치고, 곧장 오전 연습 시간에 돌입했다. 밴드 합주를 돌아가면서 진행하고, 그 외 가수들은 연습실에서 무대를 준비했다.
원래는 발성 연습이나 하면서 방황하고 있었을 터였다. 이제는 아니었다. 내가 무슨 무대를 해야 할지, 명확하게 구상이 떠올랐다.
수첩에 선곡과 편곡 아이디어를 적어 내려갔다. 한 번 풀리니 쑥쑥 진행됐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주환희였다.
“무슨 일이야?”
“무대 준비 잘 돼요 횽?”
“조금?”
“저는 아무 생각도 안 나요!”
주환희가 머리를 쥐어뜯었다. 얼굴이 푸석푸석했다. 고민을 하다 하다 안 돼서 내게 온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랑 이야기라도 해볼래?”
“그래요 횽. 어차피 방송으로 전국에 다 퍼질 건데. 해봐요. 형 먼저 하면 안 돼요?”
먼저 이야기할 용기까지는 없는 모양이었다.
“뭐 그래 그럼.”
나는 이미 내가 할 말이 다 정리된 상태였다. 심지어 그 스토리를 표현하는 무대도 대충 밑그림이 그려졌다. 무대가 아니라 이야기는 얼마든지 알려줄 수 있었다.
“내가 진짜 살이 쪘었거든.”
“들었어요 횽.”
“아니, 듣는 것만으로는 상상이 안 돼. 드럼통이었어. 드럼통.”
“흠…”
“뭐 핑계는 있었지. 원래 나는 삐쩍 마른 체질이었어. 엄마는 항상 그게 걱정이라 그랬었지. 그래서 엄마가 간혹 보약을 싸주곤 했는데.”
“했는데?”
“그 보약이 잘못된 거야.”
“아이구.”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다. 뭔가 수상한 보약을 먹고, 그 부작용으로 갑자기 확 살이 찌는 일 정도는.
“이후로는 급식도 세 그릇씩 먹게 되고. 간식도 자꾸 땡기고. 좌우지간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살이 빠지질 않는 거야. 핑계 같겠지만.”
“아니에요 횽. 그럴 수도 있죠.”
항상 몸 관리하는 헬스 빌런인 주환희이지만, 의외로 남에게는 관대했다.
“여튼, 그렇게 몸무게가 엄청 커지니까. 자신감이 확 떨어졌어. 뭔가 몸에 냄새도 나는 거 같고. 다들 나를 비웃는 거 같고. 그래서 점점 더 남들과 거리를 두고. 더 바깥에 안 나가고. 스트레스는 먹을 거로 풀고. 그러니까 살이 찌고. 자존감은 더 낮아지고. 악순환의 반복이었지. 너같이 몸 좋은 놈은 이해 못 하겠지만.”
주환희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말을 이었다.
“그건 아니에요 횽. 그건…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여튼 계속하세요.”
“그래, 여튼. 그러다가 어쩌다 보니, 최근에 살 빼는 방법? 약물? 같은 게 있다고 해서 한 번에 살을 뺐어.”
“그런 게 있을 수가 이써요?”
“니가 직접 결과를 보고 있잖아?”
주환희는 뭔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요요현상이 걱정이었는데 다행히도 여기저기서 다이어트 노하우를 배워서 잘 극복했지. 지금은 보는 대로 미용 체중 유지 중이야.”
“축하해요? 뭐 그래야 하는 거죠 횽?”
주환희는 ‘겨우 그거에요?’라는 표정이었다. 사실 이거만 보면 이미 방송만 보던 사람도 알 수 있는 이야기니 그럴 법했다.
“그치. 축하해야지. 하지만, 살을 뺀 거만 축하받아야 하는 건 아니야.”
주환희 눈이 동그래졌다.
“그럼 뭘 또 축하해요?”
“그야, 내가 살이 쪄서 사춘기를 보냈던 걸 축하해줘야지.”
“왜요? 형 되게 고통스러웠다면서요?”
“그랬지. 자존감도 낮았고. 우울했고. 고독했지. 재호 말고는 친구도 없었던 거 같고.”
“근데 그걸 왜 축하해요?”
“그래서 가수가 된 거니까.”
“뭔 소리예요 횽?”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