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왜 몰래카메라냐고?
우선, 제아무리 TYB라고 해도, 오후 6시 퇴근 시간대 라디오 DJ를 연습생을 시킬 수는 없었다. 처음부터 부자연스럽다 생각했다. 그러다 퇴근 시간 라디오라 하니 더더욱 확신이 들었다. 이렇게 중요한 시간대에 연습생이 DJ를 할 수는 없었다.
몰래카메라에서 쓰기 가장 좋은 내부 직원을 사용했다고 보면 훨씬 자연스러웠다.
방송명도 어색했다. 오후 6시에 깊고 푸른 젊은 날이라니, 누가 봐도 새벽 방송 제목이었다.
의심을 가지고 보니 대본도 의심스러웠다. 신청곡을 트는 시간도 너무 짧았고, 스폰서를 듣는 시간도 부자연스럽게 짧았다. 라디오 생방이라기보다는 방송을 위한 준비로 보는 게 자연스러워 보였다.
무엇보다, 장비가 의심스러웠다. 라디오는 스튜디오에 고정 마이크만 잘 쓰면 된다. 다른 마이크를 굳이 몸에 채울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제작진들이 구렁이 담 넘어가듯 TV 방송을 녹화할 때와 마찬가지로 소형 마이크를 옷에 채웠다.
그러고 보면 제작진도 너무 많았다. 최대한 조심해서 촬영을 하고 있었지만, 일단 의심하는 내 눈에는 요소요소 숨어있는 카메라들이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 오기 전 슬쩍 화장실에서 리스완의 기사를 검색해뒀다. 혹시나 조심해야 할 점이 있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현재 디오 DJ가 되었다는 기사가 없었다. 리스완은 2010년대쯤은 가야 고정 DJ가 됐다.
이건 무조건 몰래카메라였다.
리스완이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대본 다 확인해보셨죠? 대본 외에 돌발 질문이 조오금 나올 수는 있습니다? 양해 해주시고요. 생방송이니까 문제 발언은 피해 주시고. 또 말씀드려야 할 게 있나요 작가님?”
리스완 저 사람, 정말 연기가 능숙했다. 거짓말하는 솜씨가 배우 감이었다. 이게 몰래카메라라는 진실을 알고 나자 더욱 놀라웠다.
하지만 나는 속이지 못했다.
곧바로 방송시간이 됐다.
“시작이란, 언제나 참 어색하고 두렵습니다. 하지만 시작은 그만큼 떨리고 아름답기도 하지요. 한 주의 시작, 어떻게 하셨나요? 깊고 푸른 젊은 날, 리스완입니다.
과연, 주환희 말대로 리스완은 예능에 재능이 있었다. 평소에 껄렁대는 말투를 싹 빼고, 제법 디제이답게 오프닝을 진행했다.
“다들 잘 지내셨나요. 오늘은 화제의 프로죠. 슈퍼스타 T! 슈퍼스타 T의 TOP4와 함께하는 시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고요. 전하는 말씀 듣고 오겠습니다. 브뤄!”
리스완의 오프닝 후 라디오 광고들이 이어졌다. 정말 프로페셔널한 라디오 방송 같았다.
솔직히, 이미 의심하지 않았다면 깜빡 속았을 정도로 리얼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TOP4는 철석같이 믿는 눈치였다.
하지만 점점 방송은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했다.
“재호 브뤄~. 이 사연 읽어주세요.”
리스완 디제이의 진행에 맞춰, 재호가 사연을 읽었다.
“저희 어머니께서 지난 2월, 세상을 달리하셨습니다. (아이구~ 하고 내가 탄식했다.) 추운 겨울이라 온 방문을 닫고 주무셨는데요. 환기가 되지 않은 게 문제였습니다. 결국 본인이 뀐 방귀 냄새를 이기지 못하고 그만…”
문루아, 환희, 심지어 재호까지 모두 ‘풉’ 하는 소리를 냈다. 제작진은 ‘웃음 X! 방송사고!’라는 푯말을 들었다. 일부러 엄격, 근엄,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송 각을 재고 있는 게 뻔히 보였다.
“쉿!”
TOP4들에게 심호흡을 하며 웃음을 참으라고 말해주었다. 쉽진 않았지만 일단 사연 읽기는 대충 넘어갔다. 하지만 몰래카메라 강도는 점점 더 심해졌다.
“권노을, 원재호, 주환희 참가자의 그룹곡. ‘오명’을 함께 청해 듣겠습니다~.”
이번에는 비원더 3인이 함께 부른 곡 ‘오명’을 라이브로 부를 차례였다.
<나를 떠나지 말아줘
내 곁에서 함께해줘>
재호의 목소리로 곡이 시작됐다. 주환희가 후렴으로 가려는 순간…
<너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
갑자기 반주 템포가 2배속으로 빨라졌다.
<가르쳐줘…>
헉헉대며 정신없이 노래를 불렀다. 감미로웠던 ‘오명’ 재호 편곡 버전이 무슨 트로트처럼 들렸다. 웃음이 계속 나왔다. 항상 장난기 넘쳤던 주환희는 거의 숨넘어가라 웃었다. 재호도 꺽꺽대며 웃음을 참았다.
‘나라도 중심을 잡아야지.’
최대한 안정적으로 후렴을 불렀다. 다른 두 멤버와는 달리, 뭔가 문제가 있을 거리라 마음의 준비를 해둔 덕에 그래도 중심을 잡고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너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어.
열쇠를 어디에다 둔 거야.
가르쳐줘. 그러면 내가 찾겠어.>
마음의 준비만 되어 있다면, 빠르게 부르기가 오히려 더 쉬웠다. 노래 실력을 빠른 템포 속에 숨길 수 있었다. 나는 그럴 필요는 없었지만, 아쉬운 대로 빠른 템포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박찬용 드러머의 빠른 드럼에 맞춰 노래를 불러 본 덕에 2배속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베이비, 이젠 떠나지 못해요.>
다행히 나라도 정신을 차린 덕에 무대를 아쉽게나마 끝냈다. 자리로 돌아가면서 주환희가 내게 말을 걸었다.
“와! 대박! 대단해요 횽. 이런 방송 실수를 어떻게 대처해요? 꼭 방송 경력 있는 카수 가테요. 저 쏙이는 거 아니에요?”
“그냥 뭐 어쩌다 보니 그런 거지.”
‘속이는 거 아니냐니, 내가 니놈한테 하고 싶은 말이다.’
그다음은 전화 인터뷰였다. 리스완이 문루아에게 말을 걸었다.
“전화 통화가 하나 준비되어 있습니다. 누군거 같으세요 선배?”
문루아가 답했다.
“글쎄요. 애드리아나?”
“뻔해! 뻔해! 뻔하네요 선배. 그렇게 저희들이 뻔할 줄 알았다면… 정답입니다! 애드리아나 양?”
애드리아나 목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렸다.
“애드리아나~!”
문루아 목소리가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무래도 같은 팀원이었고, 룸메이트였다 보니 정이 많이 든 모양이었다. 비원더 멤버들도 반갑게 인사했다.
…하지만 인터뷰는 금방 당혹스러운 방향으로 넘어갔다.
<언니! 저한테 권노을 자꾸 신경 쓰인다 그랬잖아요. 지금도 그래요? You know?>
“야!”
문루아가 당황한 듯 소리를 질렀다.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나도 당황스러웠다.
문루아와도 친분이 있던 주환희는 마음껏 깔깔대며 웃었다.
“핫핫핫핫핫 뭐에요 누나 그랬던 거예요?”
애드리아나의 폭탄 발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빠는 아직 대니얼 만나요?>
“왓!”
이번에는 주환희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으이구. 좀 한국 여자 위주로 만나요. 한국에 살자나요~>
애드리아나는 방송 사고급 폭탄 발언을 쏟아냈다. 나야 몰래카메라인 줄 알았지만, 나머지 참가자들은 얼굴이 흙빛이 됐다.
당연히 제작진은 해당 내용을 녹화해서 적당히 편집하고, TOP4의 당황하는 표정만 내보낼 작정이었다. 하지만 이게 모두 공개 방송이라 하면 상당히 큰 방송 사고였다.
‘어디까지가 진담인지는 모르겠지만.’
몰래카메라의 하이라이트는 스폰서 광고였다.
“자~ 오늘 사연에 당첨되실 분들에게 드릴, 안 매운 청양고추입니다. 지금 TOP4 참가자들 앞에 한 봉지씩 드리고 있는데요. 청취자분들 드리기 전에 우리도 한 번 먹어볼까요?”
보나 마나 매운, 그냥 청양고추였다.
…이거만은 나도 커버가 안 됐다.
다행히 몰래카메라는 청양고추에서 끝났다.
“짜자잔~ 몰래카메라였습니다~~!!!”
몰래카메라를 눈치챘다고 해서, 알아챈 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방송에서 편집 각이었다. 애초에 참가자들이 당황하고, 의외의 매력 포인트를 보여주겠다는 의도였다. 내가 아는 체한들 분위기만 차가워질 뿐이었다. 통편집으로 날라갈 게 뻔했다.
그래서 최대한 정제된 모습으로 놀라고, 당했다. 적당히 리더십을 보여주기도 했다.
다행히, 회귀를 통해 미리 본 과거는 아니었지만, ‘몰래카메라’라는 결말이라도 알고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고 잘 대처할 수 있었다.
“하하하 브뤄~ 사실 다 가짜에요. 이런 방송 없어요. 저도 DJ 아니고. 헤헤!”
리스완이 본색을 드러내며 껄렁껄렁하게 놀려댔다.
“어쩐지~ 이상하더라구요.”
재호가 이제야 눈치챈 게 분하다는 듯 투덜댔다.
“이거 아무도 안 듣고 있는 거죠?”
문루아가 눈을 번득이며 물었다.
“네네 그럼요.”
“편집 잘 해주세요 제작진!”
“네네 그럽죠 그럽죠.”
진짜 리스완은 좋은 DJ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연기력이나 돌발 상황 대처 능력이 대단했다. 너구리처럼 능글맞았다.
“자! 그럼 이제 마지막 순서입니다.. 제가 뽑은 이번 미션 ‘돌발 상황 대처 미션’ 우승자는~~~ 권노을 군입니다! 노래 방송사고 대처, 정말 존경스러웠어요 브뤄!”
멤버들과 제작진의 박수를 받으며 상패를 받았다.
무엇보다, 이번 주 라이브의 순서를 정하는 권한을 얻었다.
아직 미션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이번 주 무대는 좀 더 마음 편하게 준비할 수 있을 듯했다.
* * *
몰래카메라 미션이 끝나고 참가자들은 숙소로 돌아왔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우리를 맞았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닭고기 스튜가 놓여 있었다.
주환희가 밝게 물어봤다.
“와~ 심사위원님께서 만드신 그에요?”
“맞아요 환희 군. 코코뱅이에요. 미국에서 먹어보지 않았어요?”
“아, 저는 집밥만 먹는 편이였어서여.”
그러고 보면 미국 이야기를 할 때마다 주환희는 저런 식이었다. 대충 어물쩍 넘겼다. 매우 수상쩍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에, 베이비 심사위원의 주도로 저녁 식사 시간이 시작됐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직접 만든 포도주 닭고기 스튜였다. 감탄이 나올 정도의 맛이었다. 그 기분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정말 맛있네요 심사위원님. 포도주를 넣었다고 하셨던데, 그렇다고 상상하기 어려운 맛이에요.”
“맛이 괜찮다니 다행입니다. 이건 저를 표현해주는 음식이에요. 저는 그 당시에 환희 군처럼 온 가족이 미국에 이민을 갔었습니다. 워낙 환경이 안 좋았어요. 부모님이 온 힘을 다해 세탁소를 하면서 간신히 생계를 꾸렸죠.”
“그렇군요.”
베이비 심사위원의 과거라고 하면, 못해도 90년대 초였다. 내 기억에도 없을 정도로 옛날이었다.
“그때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었던 음식이 이 코코뱅입니다. 미국은 닭고기하고 와인이 싸니까, 조금 노력만 기울이면 금방 만들 수 있는 요리였지요. 간장 등을 조금만 첨부하면 바로 닭볶음탕 같은 맛이 나기도 하구요.”
“네에.”
다들 음식을 먹는데 심취해서 아주 성의 있는 대답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죄송할 정도였다.
“이번 미션은, 이 요리처럼 ‘본인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참가자들이 다들 갑자기 음식을 먹던 손을 멈췄다. 느닷없이 기습적으로 미션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재호가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이번 주 라이브 미션… 인거군요?”
“맞습니다 재호 군. ‘진짜 내 모습’을 보여주는 무대입니다.”
다들 조금 표정이 굳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누구보다 주환희 표정이 썩었다.
진짜 주환희의 모습이 뭔지, 정말 주하늘인지 알고 싶었다.
* * *
미션을 발표한 저녁 식사 후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TYB가 완전히 전권을 잡은 후에는 자유시간에 대한 참가자의 자유도가 현격히 커졌다. 문루아는 헬스클럽에 가서 다시 운동 중이었다. 재호는 편곡 아이디어를 얻겠다며 합주 연습실로 들어갔다. 주환희는 굳은 얼굴로 자기 방에 틀어박혔다. 뭔가 고민이 있는 얼굴이었다.
고민은 내게도 있었다.
내게는 지금 두 가지 생각거리가 있었다. 하나는 ‘내 진짜 모습은 뭘까’였다. 사실 회귀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벌써 회귀 전 내 모습이 잘 기억이 나지도 않았다. 그 정도로 요 근래 몇 달의 기억이 강렬했다.
‘회귀 전의 내가 진짜 내 모습일까? 아니면 오디션을 겪고 발전하고 다듬어진 지금이 내 진짜 모습일까?’
해답을 선뜻 내리기 어려운 질문이었다. 내가 누구인지가 애매하니, 어떤 무대를 보여야 할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생각거리는, 두말할 거리 없이 주환희였다.
이 녀석은 미국 교포 주환희일까? 아니면 시골 출신의 주하늘일까? 내게는 이미 어느 정도 해답이 나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의미인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궁금했다. 게다가 지금은 숙소에 단둘밖에 없었다. 설치된 카메라도 없었다. 주환희와 단둘이서 이야기하기에 너무도 좋은 타이밍이었다.
주환희 방 앞으로 갔다. 문을 슬쩍 열려다 멈췄다. 방 안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다.
…훌쩍훌쩍
누군가 훌쩍이며 우는 소리였다.
‘갑자기 울긴 왜 울어? 저 미션이 울기까지 할 일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