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45화 (45/280)

제45화

“제가 주… 하늘이에게 말 잘 전하겠습니다.”

<고오맙소~>

일단 적당히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통화를 통해 너무 많은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 누구에게도 말하기 곤란한 정보였다.

‘아무래도 주환희가 오면, 단둘이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 * *

이윽고 제작진과 출연진이 모두 모였다. 녹화를 위해서였다.

지금은 너무 보는 눈이 많았다. 주환희와는 나중에 이야기를 하기로 했다.

이번 촬영을 위해서 베이비 심사위원이 직접 숙소에 방문했다.

“이렇게 큰 집을 네 분이서 쓰시는 거예요? 부럽습니다.”

문루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청소가 어려워요 선배.”

“어머! 그렇겠네.”

“저희들끼리 돌아가면서 하고 있어요.”

다들 정답게 이야기를 나눴다. 나만 예외였다. 자꾸 힐끗힐끗 주환희를 쳐다봤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다.

머릿속에는 온갖 의문이 들었다.

첫 번째, 저 녀석이 정말 주하늘일까?

그렇다면 뭐하러 이름을 바꿨을까? 무슨 스파이도 아니고 이름을 바꿀 이유가 없었다.

두 번째, 저 녀석은 정말 교포일까?

방금 통화한 목소리는 정황상 주환희 어머니가 맞았다. 주환희 어머니는 구수한 말투의 시골 사람이었다. 당연히 교포는 아니었다.

교포 특유의 어설픈 한국어는 주환희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거짓이라면 대체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가늠이 안 됐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저 녀석이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든 모습이 거짓일 수도 있었다.

주환희가 툭 내게 말을 걸었다.

“횽 왜 자꾸 절 쳐다봐요? 뭐 묻었어요?”

“아, 아냐.”

적당히 둘러대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이 원래 교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 많은 의문이 풀렸다. 대표적으로 말투. 주환희는 이전에 급격히 마음이 동요했을 때 갑자기 말투가 바뀌었다.

<자다 깨다 했어요. 고민이 많다 보니까…>

이번 오디션이 끝났다고 진심으로 생각했었던 그때, 주환희 말투는 분명 바뀌었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교포의 어눌한 발음이 아예 없어졌었다. 단정하고 가냘픈 목소리였다

뭐가 진짜 저 녀석인지, 진짜 자신을 숨긴다면 왜 자기 정체를 숨기는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물론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만 한다고 크게 바뀔 일은 없었다. 기회를 봐서 주환희와 직접 대면해야 했다.

* * *

방송 녹화는 계속됐다. 이번에는 모두가 베란다에 모였다. 테이블에는 베이비 심사위원이 직접 구워 온 쿠키와 고급 다즐링 티가 준비되었다. 카메라 앞에서 촬영 분량을 찍기 위한 연출이었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촬영 중이지만, 이야기는 진짜였다. 한창 유행하던 ‘리얼 예능’ 감성이었다.

“요새 무대 어떠신가요? 많이 힘드시죠? 계속 달리는 무대만 하시니까.”

사실이었다. 오디션이 시작되고 몇 번씩이나 사활을 건 무대를 했다. 다행히 3주간 휴식 덕분에 어느 정도 회복되었지만, 마지막 3주 연속 라이브는 상당한 부담이었다. 매번 새로운 무대를 단 1주 만에 완성해야 했다. 상당한 강행군이었다.

문루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래 알고 지낸 선배인 베이비 심사위원 앞이라 그런지 조금 편해 보였다.

“저는 무대 자체는 좀 익숙한 편인데요. 그래도 어려운 것 같아요. 제 특기인 퍼포먼스를 너무 많이 쓰면 안 되니까. 댄서도 쓰면 안 되고요. 제가 여태껏 해왔던 무대와 전혀 다른 무대를 하고 있는 느낌이에요. 그러고 싶어서 참가한 거지만요.”

베이비 심사위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참 리액션이 좋은 분이었다.

“그렇군요. 저도 상당히 어려우실 거라 생각하구요. 사실 저도 비슷한 고민을 했었습니다. 문루아 양 만큼 퍼포먼스를 제가 잘 하진 않았지만, 저도 댄스 가수였거든요. 시간이 지나니까 자연스럽게 재즈, AOR 같은 다른 장르를 해야 하더라고요. 그때 굉장히 어려웠어요.”

“아…”

“아티스트는 인생을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나이에 맞게 장르나 이미지를 변경하게 된답니다. 영원히 10대 가수일 순 없으니 적응력을 키워야 해요. 인생은 기니까요. 저도 지금은 작사가로 활동을 더 하고 있구요.”

“네… 네… 적응해야 되는 거군요. 감사합니다.”

역시나 베이비 심사위원이었다. 조언 자체가 대단한 건 아니었다. 어쩌면 흔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르치려 들기보다 공감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경험했던 이야기를 공유했다.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공통의 조언이 나왔다.

나도 조언을 들어보고 싶었다.

“노을 군? 노을 군은 어때요?”

심호흡을 했다. 생각을 가다듬었다. 일단 주환희 녀석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내 진짜 고민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금방 하나가 나왔다.

“이 대회 다음이 걱정입니다.”

“다음이요?”

“대회 끝이 점점 다가오니까, 이 대회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대회만 생각하느라, 그걸 놓친 거 같습니다.”

지금 내 가장 큰 고민이었다. 대회 이후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회귀 전에 내가 매일 같이 떠올렸던 건 오디션 결승전이었다. 바로 다음 주였다.

그러면 그다음은 어쩌지? 난 뭘 해야 할까? 내 인생은 뭐지?

그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차를 한잔 쭈욱 마셨다. 입을 냅킨으로 살짝 닦아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좋은 질문이에요. 이건 모든 가수들이 한 번쯤 꼭 새겨야 하는 질문입니다. 다른 분들도 다 잘 들어주세요. 보통 신인들은 이런 생각을 잘 못 하는데. 권노을 군은 실제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여요. 생각이 성숙하네요.”

그야, 회귀자니 그 말이 맞았다. 물론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성공한 가수인 나 베이비. 스타 베이비. 이 외에 다른 정체성이 꼭 있어야 하더라구요. 좋은 가족 구성원인 나. 좋은 내 동네의 부녀회 회원인 나. 좋은 아이 엄마인 나. 엄마의 딸인 나. 이런 다른 정체성이 없이 스타로서의 정체성에만 중독되면, 오래 못 가더라구요. 그렇게 수많은 가수들이 자연스러운 하락을 견디지 못하고 사라졌습니다.”

“가수 외의 인생이 중요하단 말씀이신가요?”

사실, 내게는 좀 어려운 말이었다. 내게는 노래뿐이었다. 가수 생활 외에 다른 취미는 없었다.

“취미가 있어야 한다, 그런 단순한 차원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경쟁, 성공, 비교에 인생을 걸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뭐로 대신하면 좋을까요?”

“성공 대신이라… 글쎄요. 주변을 되돌아보면 어떨까요? 저도 이렇게, 후배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서 엄청난 만족감을 느끼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차 한잔 더할까요?”

경쟁하지 마라, 대신 주변을 봐라.

말대로 주변을 살펴봤다. 이제 많이 친해진 TOP4가 보였다.

사실 우승을 꿈꾸는 시간보다, 이들과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더 즐겁지 않나 싶기도 했다.

그리고, 다음 주면 반드시 우승을 하리라는 야망만큼이나, 이제 다음 주부터 이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생겼다.

베이비 심사위원의 말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 * *

다음 스케줄은 라디오 생방이었다. TOP4가 함께 뮤직넷 라디오 스튜디오로 향했다. 오늘은 유독 TOP4가 함께하는 스케줄이 많았다.

‘결국 주환희 저놈하고는 오늘 밤에나 독대해야겠네.’

제작진이 이동 중에 다음 스케쥴에 대해 브리핑을 해줬다.

이번에 우리가 출연하는 방송은 뮤직넷의 라디오 프로그램, ‘깊고 푸른 젊은 날’이었다. TYB 소속의 연습생이 DJ를 곧 시작한다고 했다. 이 정도 대형 기획사는, 연습생이 라디오 디제이도 하는 모양이었다.

“말이 연생이지. 스완횽은 이미 연예인에요. 주말 예능 고정도 한대니까요.”

“그냐.”

이제는 뭔가 주환희의 말투도 곧이곧대로 들을 수가 없었다. 저게 다 거짓이란 생각을 하니 더 그랬다.

하지만 주환희도 TYB 소속 연습생이었다. 그 녀석은 더 정보가 많았다.

“너는 그럼 그 사람 잘 알겠네? 스완이란 사람.”

“이스완이에요 활동명이.”

“뭐 그런 희한한 활동명이 다 있어?”

“글게요. 선생님이 좀 작명 센스가 특이하신 거 같네여. 여튼 그 형은 전형적인 예능 멤버에요. 원래는 아이돌이 아니라 예능을 하기로 하고 뽑은 사람인데. 뽑아보니까, 생각보다 랩을 너무 잘하는 그에요. 그래서 그냥 아이돌 팀 준비 연습생에도 넣기로 했어요.”

이야기만 들어도 독특한 이력이었다.

“형이라는 거 보면 너보다 나이 많네?”

“횽보다도 한 살 많아요.”

“연습생치고는 나이 많은 거 아냐?”

“어쩌다 그렇게 됐나 봐여. 프로젝트가 엎어지고 그런 거 만차나여. 여튼 연생 맞아요.”

“근데 벌써 예능에 나오는 거야?”

“그 횽이 워낙 예능감이 좋아서. 계속 어딘가에 나오더라구요.”

“아무리 그래도 라디오 디제이까지 해?”

라디오 디제이라고 하면.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상당한 자리였다. 전성기인 80년대 이전처럼 연예계 최고라고 할 수야 없었다. 그래도 연습생이 쉬이 할 직책은 아니었다.

“글게요? 워낙 연생치고 인기가 많으니까 그런 거도 하나 보죠?”

“흐음…”

일단 뭔가 수상했지만, 그냥 넘어갔다. 말하는 사이에 뮤직넷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 * *

네 명 모두 머리와 의상 세팅을 마치고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이미 이스완이 기다리고 있었다. 말로 들었던 인상과 달리 굉장한 미남이었다. 엔간한 여자 아이돌보다 단발머리가 잘 어울렸다. 막상 보니 아이돌 할 만한 얼굴이었다.

불쑥 이스완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브뤄!”

“브뤄?”

문루아가 퉁명스럽게 내게 말했다.

“저 친구 맨날 브러 브러 저래요. 그러려니 해요.”

이스완이 유쾌하게 차렷! 자세로 문루아에게 말했다.

“무슨 말이십니까 선배님! 좋은 바이브를 넣어 드리려는 겁니다. 브뤄!”

“하하.”

뭔가 에너지가 독특한 사람이었다. 항상 데뷔 못 했다고 주눅이 들어있는 주환희랑은 달랐다. 나보다도 나이가 많은 연습생임에도 당당해 보였다. 오히려 너무 당당해서 거의 안하무인으로 보일 정도였다.

“여튼 오늘, 슈퍼스타 T TOP4 네 분을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 방송 잘 부탁드려요. 잘 부탁드리고. 생방송이니까. 절대! 실수 없게 말조심 부탁드려요.”

문루아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후배 님이 제일 위험한 거 아니에요?”

“아니! 선배 그걸 어떻게 알았죠! 브뤄! 크허허허허!”

컹컹대며 웃었지만 사실 둘은 친해 보였다.

우리 넷 모두 대본을 받았다. 전형적인 라디오 대본이었다. 4명의 프로필 소개로 시작했다. 우리가 생방송에서 각각 불렀던 대표곡 라이브가 하나씩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프로그램 스폰서 소개, 팬과의 대화 등을 할 예정이었다.

“…”

하지만 뭔가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슬쩍 이스완에게 떠봤다.

“선배님 질문 있습니다.”

“아이 무슨 선배예요. 저도 연습생입니다. 형이라고 해주세요. ‘형’.”

“알겠습니다. 형. 질문 있는데요. 이 방송 몇 시에 하나요.”

“매일 6시부터 8시까지 방송합니다. 그러니까 곧 시작한다는 얘기죠. 크흠~. 그럼 스탠바이 해주세요. 다들 마이크 테스트해 볼까요? 문 선배부터~!”

문루아가 마이크 테스트를 시작했다.

“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속으로 싱긋 웃었다.

그런 거였다.

이 생방송은, 가짜였다.

몰래카메라 확률 100%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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