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안뇽.”
대록그룹 3세가 손을 들어 캐쥬얼하게 인사했다. 좀 가벼워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성격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일단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저놈의 실체를 알고 있지.’
재호에게 마약 누명을 씌운 약 중독자였다. 단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었다.
“불쑥 찾아와서 먄해요. 이 친구가 여기 있다길래. 오늘 재밌게 놀아봅시당.”
“잘 부탁드립니다.”
재호가 밝은 얼굴로 악수했다. TV에서 본 사람을 본다는 흥분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대록그룹 3세는 그대로 의자를 드르륵 밀어 자리에 앉으려 했다. 그러다 실수로 뒤에 있던 조명을 툭 하고 쳤고, 조명이 와장창하며 깨졌다. 부주의한 사람이었다.
정장 차림에 종업원이 들어왔다. 딱 봐도 덩치 좋아 보이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시죠?”
종업원이 눈으로 대록 그룹 3세를 째려보며 말했다.
“아 얘가 자빠졌네요?”
“물어주셔야겠는데요. 30만 원입니다.”
그 말을 듣자, 여유가 있던 대록그룹 3세의 표정이 굳었다.
“아니, 지금 내가 뭐 돈 안 줄줄 아는 거예요? 하 참. 어이가 없네?”
피식피식 웃으면서 대록그룹 3세가 손을 폈다. 재호 형 선배라는 변호사가 그에게 가방을 건넸다. 김동현이 가방을 열고 뭔가를 휙휙 집었다.
“자! 자! 자! 받고 꺼져. 또 돈 달라고 해봐 이씨.”
김 대표가 휘리릭 뭔가를 던졌다. 100만 원 수표 3장이었다.
종업원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계산이 잘못되었는데요. 30만 원입니다 손님.”
“이거 받고 꺼지라고. 거스름돈 됐어. 아 재수 없어. 야 너!”
“저요?”
재호의 형을 호명했다.
“자. 이걸로 금화 사와.”
“금화요?”
“그래 금화 사와. 금은방 가서. 자. 꼬꼬. 꼬꼬.(go go). 야 우리 물수제비나 뜨자.”
재벌 3세가 변호사를 데리고 나가려 했다. 재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물수제비요?”
“왜 너도 할래? 뭐 껴줄게,”
“물수제비가 뭔가요?”
“누가 멀리 던지나 보는 거지. 물수제비 몰라?”
“물에 금화를 던진다구요?”
“그지?”
“왜요?”
“아~ 자꾸 꼬치꼬치 캐묻네. 아 어쩌라구요. 니는 얼마나 대단한 걸 하길래?”
그러면서 대록그룹 3세가 손가락으로 재호 얼굴을 툭툭 건드리려 했다.
재호가 무표정하게 대록그룹 3세를 보고 있었다. 저렇게 싸한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가, 가시죠 대표님!”
재벌 3세는 재호와 나를 노려봤다. 그리곤 변호사와 함께 방을 나갔다. 투덜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 TV 나오는 게 무슨 감투야? 아주 그냥 꼴값을 떠네.”
그 녀석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집안 좋아서 재벌 된 게 감투냐?’
손님들이 모두 나가자 우리 둘만 덩그러니 방 안에 남았다. 칠흑 같은 침묵이 방을 채웠다.
침묵을 깬 건 재호였다.
“싸이코네.”
재호가 잘 쓰지 않는 임팩트 있는 어휘였다.
“어… 음… 그러네.”
딱히 우리에게 뭘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단 1~2분 만에 우리 두 사람 기분을 효과적으로 잡치게 했다. 아주 효율적인 성격파탄자였다.
재호가 누군가 시켜놓은 과일 안주를 깠다. 옆에는 소주와 회도 깔려 있었다.
“형이 변호사가 되면, 저런 애들 뒤처리해주고 그러는 건가?”
“뭐 그런 거 아닐까? 직원이니까. 보통 대형 로펌 고객은 부자들이잖아?”
“참…”
재호가 소주에 얼음을 섞어 마셨다. 마시기 싫은 쓴 물을 마시는 듯 얼굴 표정이 일그러졌다.
“가수도 나쁘지 않지?”
재호가 피식 웃었다. 이대로면 자연스럽게 S대 법대 나온 형에 대한 자격지심을 씻어낼 수 있을까 싶었다.
그때 문이 획 열렸다. 대록그룹 3세와 변호사, 그리고 재호 형까지 함께였다. 모두 온몸이 홀딱 젖었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아~ 왜 또 갑자기 비가 오고 지랄이냐. 야. 수건 사와. 빨리!”
“네네!”
재호 형이 또 부리나케 어디론가 달려갔다. 참 불쌍해 보였다.
대록그룹 3세가 재호를 봤다. 재호가 소주와 회를 먹는 걸 봤는지 빈정대며 싸움을 걸었다.
“야 그거 내 껀데? 연예인이면 남의 안주 막 처먹어도 되나?”
재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이거 저 변호사분이 사준 건데요.”
“걔 월급은? 하늘에서 나오나? 내가 준 거니까 내 안주지.”
재호가 뭐라 쏘아붙이려 하는 순간, 어디엔가 통화 중이던 변호사가 굳은 표정으로 대록그룹 3세에게 뭐라 귓속말을 했다.
재벌 3세 얼굴이 굳었다.
‘왔군.’
대충 짐작이 갔다. 내가 손 써둔 내용이 드디어 터진 모양이었다. 하필, 내 눈앞에서 리액션을 볼 수 있게 됐다.
김동현이 변호사에게 꽥 소리를 질렀다.
“야! 빨리 막어! 너 이거 못 막으면 죽을 줄 알어.”
“대표님!”
변호사가 눈빛으로 우리를 가리켰다. 외부인이 있다는 뜻이었으리라.
“야 너 입 닥쳐라. 응?”
대록그룹 3세는 온 눈을 부라리며 방으로 뛰쳐나갔다. 그 뒤로 변호사와 재호 형이 뛰어갔다. 재호 형은 그래 봐야 대학생인데 왜 쫓아가는지 모르겠지만.
“니 형은 왜 따라가냐?”
“몰라. 저 선배한테 나중에 자리 소개라도 하나 받고 싶은가 보지 뭐. 쩔쩔매는 거 봐.”
듣고 보니 그럴 법했다.
재호가 웬일로 먼저 술을 권했다.
“소주나 할까? 다들 나가니까 갑자기 안주가 풍성해졌네. 둘이서 배 터지게 먹겠는데? 게다가 회랑 샐러드, 소주니까. 다이어트에 크게 걱정은 없거덩?”
“좋지.”
딱 봐도 무지하게 비싸 보이는 안주들이었다. 우선 회를 젓가락으로 입에 가져갔다. 쫀득한 식감이 느껴졌다.
회는 맛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 고소한 기분에 비하지는 못했다.
이 고소한 기분을 재호에게 약간이라도 나눠주고 싶었다. TV를 슬쩍 틀어 뉴스 채널을 돌렸다.
“웬 TV?”
“쉿.”
TV를 통해 리포터가 다급하게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대록그룹 3세 김동현 대표의 구속영장이 청구되었습니다. 죄목은 음주운전 및 범죄 은닉입니다. 걸그룹 출신 패션 모델 Y양이 어제 새벽 4시에 과속 및 음주운전 혐의로 구속되었는데요. 알고 보니, 운전석에는 김동현 대표가 앉아 있었다는 증거가 나왔습니다. 사진이 공개되었는데요. 김동현 대표가 운전하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입니다.
대록그룹 측에 연락을 해보았으나, 답변은 없었습니다.
YBS 이지현 기자였습니다.]
재호 눈이 무시무시하게 커졌다. 너무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뭐 무리도 아니지. 나도 처음에는 놀랐으니까.’
* * *
한 번 남을 누명을 씌우는 놈이 한 번만 그랬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무작정 관련 기사를 뒤져봤다. 그러다 보니 금방 뭔가 보였다.
[재벌 3세 김동현의 수상한 사생활. 신용 레벨 D]
돈을 먹여서 언론 대부분을 막았지만, 다 막지는 못했다. 매우 수상한, 찌라시에 가까운 기사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진짜였다.
[김동현 3세는 항상 묘령의 모델들과 비밀 회동을 벌인다. 그리고 그녀들은 매번 음주운전으로 적발되어 연예계를 마감한다. 이게 우연일까? 아니라는 분석이다. 매번 음주운전을 권유하는 나쁜 버릇을 가졌다는 후문이다.]
이 재벌 3세 놈, 내 생각보다 훨씬 쓰레기 같은 녀석이었다. 승무원부터 배우 지망생까지, 온갖 여자들과 마약 파티를 했다. 그리고 마약과 술에 취한 채로 폭주 운전을 했다. 그러다 걸리면 운전하지 않았던 여자친구를 넘겼다. 한 명이면 우연인데 매년 다섯 명이 넘었다. 조이월드 방명록 등에 나온 사진들과 재벌 3세 놈의 얼굴을 대조해봐도 명확했다. 이놈이 범인이었다.
과거와 미래, 모든 데이터를 수사할 수 있는 나는 어쩌면 세상 누구보다 뛰어난 수사관일지 몰랐다.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막을 수는 있었다.
‘어디 보자… 토요신문 고대현 기자…가 가장 믿을 만하다고 그랬지?’
정보를 정리하고 바로 연예부 기자 중 가장 신뢰할 만한 기자에게 정리된 정보를 소포로 보냈다. 레전드 가수가 내게 말했던 기자 썰 기억을 더듬어서 찾아냈다. 제보자가 나란 걸 알지 못하게 손은 써 둔 채였다.
고대현 기자가 이 기사를 묻을 리는 없었다. 그의 미래의 행보를 이미 알고 있었다. 대쪽 기자로 권력자의 비리를 싸악 파헤치는 기자였다.
문제는 ‘언제’ 그게 되는가였다. 그냥 내가 준 제보만으로 기사를 낼 리는 없었다. 모든 방향에서 취재를 하고, 확신이 선 다음에야 기사를 낼 터였다. 결국 언제 터지냐가 관건이었는데, 하필 그게 오늘 터졌다. 내가 딱 재벌 3세를 만났던 그 날 말이다.
* * *
그리고 지금, 나와 재호가 그 결과를 보고 있었다. 고대현 기자의 특종이 발표됐다. 당연히 TV는 난리가 났다. 난리가 났을 재벌 기업 사무실도 상상이 되었다.
“그, 오늘 잠은 다 잔 거 같지?”
재호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재호는 이제야 조금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소주를 한 잔 들이켰다.
“그러게. 너, 잔 비었다.”
재호가 내 소주잔에 소주를 따랐다. 슬쩍 운을 떴다.
“이 정도면 증거가 되냐?
그 순간 재호 표정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아마 며칠 전 그 대화를 기억한 모양이었다.
* * *
“내가 보기에는 말이야. 니 음악적 재능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그 어떤 전문직이나 학벌, 심지어 대기업 이름값보다 나아.”
“아… 그냐?”
“증거 보여줄까?”
“뭔 증거를 보여준다는 거냐구.”
* * *
재호가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리고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설마? 너?”
“그럴 리가 있냐. 마셔.”
재호가 뭔가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말해줄 생각이 당연히 없었다. 조금 후, 재호도 체념하고 잠자코 내가 주는 술을 마셨다.
* * *
다음 날 아침.
플루트 소리에 잠을 깼다. 바흐의 연주가 방 안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신을 가다듬었다. 내가 있는 곳은 숙소 거실 소파였다.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일어났냐?”
재호가 언제나처럼 계란 요리를 하고 있었다.
“어제는 어떻게 된 거지?”
“기억이 안 나는구만. 너 너무 마셨어. 그냥 자빠져 자더라구. 그래서 택시 타고 숙소에 왔지.”
“넌 잠도 없냐?”
나야, 곧 ‘위버멘시의 회복력’ 특성을 사용하면 회복은 금방이었지만 재호는 걱정이 좀 됐다.
“모자란 잠은 나중에 일찍 자서 보충하면 되지. 아침에 더 잔다고 해결이 되진 않아. 다 고딩 때 시험 기간에 실험해 봤다구.”
모범생 재호다운 말이었다.
재호가 내게 커피와, 냉수 한 컵을 줬다. 오믈렛도 함께였다. 머리가 깨질 정도로 시원한 물을 마시니 머리가 서서히 깼다.
“캬아아아 시원하네.”
그러고 보니 재호 접시에 못 보던 게 담겨 있었다.
“너 뭐 먹냐?”
“에그 샐러드.”
“너는 맨날 프라이드 에그만 먹잖아? 써니 사이드 업으로.”
“오올 권노을. 써니 사이드 업을 외우다니 제법인데?”
“니가 맨날 그거만 먹으니까 외웠지.”
“바꿔보려구.”
재호는 항상 규칙대로 사는 타입이었다.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행동을 했다. 요리 방식을 바꾼다?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별것도 아니지만 재호에게는 큰 변화였다.
묵묵히 에그 샐러드를 먹던 재호가 불쑥 말했다.
“형이랑 통화했어.”
“그래?”
희한했다. 재호는 절대 먼저 자기 가족 이야기를 안 했다.
“선배가 하루 종일 빌고 싸우고… 그런 걸 직접 봤나 봐? 자유로운 내 삶이 부럽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그냥, 그렇다구.”
그러면서 재호는 싱긋 웃었다. 지금까지 재호는 항상 웃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미소는 또 전혀 달라 보였다.
형과의 비교에서 드디어 풀려난, 자유인의 미소였다.
왠지, 재벌 3세와 상관없이, 앞으로 재호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잘 됐어.’
그때였다.
<따르르르르릉!>
숙소 전화벨이 울렸다. 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둔탁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늘아! 너 핸드폰 놓고 갔다!>
‘하늘이?’
모르는 이름이었다.
“전화 잘못 거신 거 같은데요.”
<“워메~ 몬 소리여. 방송국 양반들이 이게 니 전화라고 했구만!>
“방송국이요?”
방송국 이야기를 하는 거 보니 틀린 번호 같지는 않았다.
<아닌갑네… 주하늘이 오면 핸드폰 찾으러 오라고 말해 주씨오!>
주 씨는 흔한 성이 아니었다. 바로 한 녀석 이름이 생각이 났다.
주환희였다.
‘근데 왜 주환희를 주하늘이라 부르는 거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