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화
곡의 리듬이 확 빨라졌다. 드럼 소리가 쏟아졌다. 브라스도 불을 뿜었다. 노래를 부르던 나, 권노을의 심장도 함께 요동쳤다.
관객들은 이런 세련된 쿨 재즈로 끝날 줄 알았을 거다. 마지막에는 강렬한 스윙재즈로 임팩트를 주기로 했다. 박찬용 드러머의 제안이였다.
‘그 영감님이 일단 내 편이 되니까 그렇게 든든한 사람이 없단 말이야.’
내가 봐도 내 무대의 편곡 방향은 최고였다. 우선 드럼 연주가 놀라웠다. 초반부에는 냉정하고 차갑게, 칼처럼 연주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절묘한 그루브감과 긴장감을 주면서 서서히 감정을 쌓았다.
갑자기 두 번째 파트에서 드럼이 돌변했다. 2절 후렴 후 나온 1초 내외의 짧은 드럼 솔로가 시작이었다. 이후 박찬용 드러머가 야수처럼 화려하게 비트를 쏟아냈다. 저절로 춤이 춰지는, 화려한 스윙 재즈 리듬이었다.
드럼의 리드에 따라 브라스도 안정적인 연주를 보여줬다. 기타와 베이스, 피아노 또한 강렬하면서도 정교하게 브라스와 드럼을 받쳐줬다.
슬슬 듣기에 지루하다 싶었을 때 즈음, 박찬용 드러머의 리딩으로 갑자기 2배속으로 속도를 올렸다. 거기에 브라스를 더했다. 절제된 차가운 얼음의 재즈가 한순간에 강렬한 불꽃 같은 재즈로 돌변했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이 압도적인 연주에 밀리지 않는 보컬을 보여줘야 했다. 일부러 이 전까지는 담담하게 노래를 불렀다. 이 마지막 구간에 모든 걸 쏟아내기 위해서였다.
마지막 구간에서는 화려한 기교로 그간 담백하게 불렀던 주멜로디를 변형했다.
게다가 이번에는 변형의 느낌이 달랐다. 이전에는 주 멜로디에, 약간의 테크닝, 벤딩, 비브라토 등을 더하는 정도였다. 이번에는 달랐다. 자유롭게 주 멜로디에 화음들을 오가며 화음을 만들었다.
코러스들의 라인을 모두 확인했다. 그리고 이에 맞춰서, 과감하게 코러스가 할 법한 진행을 내 애드립 부분에 넣었다. 항상 주 멜로디만을 부를 필요 없다고 생각하니 더 폭넓게 음을 쓸 수 있었다.
거기다가 코러스분들의 라인을 일일이 상의했다. 그래서 내 애드립과 잘 어울릴 수 있는 화성과 진행을 함께 짰다. 코러스에는 나보다 더 경륜이 있는 분들이기에, 금방 좋은 구성이 나왔다.
이번 곡은 그야말로 나 혼자서는 만들 수 없는, 연주자들과의 진정한 합작이었다.
박찬용 드러머의 조언의 효과는 뛰어났다! 내가 봐도 내 노래에서 차원이 다른 풍성한 화음이 느껴졌다. 이제야 재호에게 느꼈던 어떤 장점을 나도 흡수할 수 있었다.
이제 계산은 끝났다. 그냥 정신줄을 놓고 노래에 미칠 차례였다.
* * *
무대가 끝났다. 보통 나는 힘을 빼고 편안하게 노래 부르는 편이었다. 이번에는 온몸이 흠뻑 땀에 젖었다. 그만큼 마지막 1분 달리는 구간에 전력을 다했다는 뜻이었다.
‘반응이 괜찮았나?’
마지막 부분에 워낙 몰입해서 부르느라 관중의 반응조차 체크하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은 객석도, 심사위원석도 조용했다. 그만큼 좋은 무대라서인지 아니면 뭔가 마음에 안 들어서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할 말이 없네요. 그냥, 죽여주는 무대였습니다.”
와~ 하고 함성이 쏟아졌다. 나도 긴장이 탁하고 풀렸다.
천채왕도 거들었다.
“야~ 스티비 원더. 이분을 어떻게 이렇게 잘 알죠? 제 나이 때 가순데. 사실 스티비 원더는 암묵적으로 커버를 금지하는 가수에요. 누구도 능가할 수가 없거든요.”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정말 편곡하고 무대 준비하면서 죽는 줄 알았다.
“와~ 근데 그걸 해내네요. 놀랍습니다. 스티비 원더의 곡들은 지금도 세련된 음악입니다. 이걸 어떻게 바꾸나 싶었는데. 그걸 발상을 전환해버리네요. 스티비보다 더 옛날로 가버렸어요. 재즈의 시대로요. 그러니까 오히려 조금 더 힙해 보이는 효과가 있었어요. 놀랍네요.”
마이크를 잡았다.
“아, 그건 제 덕이 아니라. 박찬용 드러머님 덕분입니다.”
천채왕이 놀랐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찬용이요?”
둘이 아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둘이 나이가 비슷했다.
“말씀해주신 대로 편곡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박찬용 드러머님께 부탁해서 편곡을 대거 수정했습니다. 재즈를 잘 몰랐는데, 박찬용 드러머님 덕에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그 친구가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말을 받았다.
“두 분 혹시 아시는 사이 아니신가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며 턱을 목에 굈다. 갑자기 10대 소년처럼 보였다.
“그죠. 야… 언제부터죠? 80년대? 아니 70년도 후반인가? 그때부터 알던 친구예요. 미팔군 전설의 드러머였어요. 흑인 연주자들보다 고고리듬을 잘 친다고 명성이 자자했어요.”
박찬용 드러머가 손을 휘휘 저었다. 쑥스러운 모양이었다.
새삼 천채왕 심사위원이 정말 나이가 많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덧붙였다.
“아직까지 현역이라니. 두 분 다 정말 대단하시네요.”
“저야 뭐 입으로 머리로 하는 직업이니까. 현역에서 직접 드럼을 치는 저 친구가 진짜 대단해요. 그리고 또 대단한 친구가 있죠. 권노을 군.”
그러면서 천채왕 심사위원이 마이크를 잡지 않았던 왼손으로 나를 가리켰다.
“이런 무대는, 진짜 경륜 있는 가수나 휘어잡을 수 있는 겁니다. 100년 전에나 유행하는 스윙 음악으로 달려봐라? 요즘 가수 중 이런 음악 가능한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대한민국 20, 30대 중에는 없을 거 같은데요. 어때요 베이비 심사위원님?”
“어려운 질문이시네요. 사실 저도 10대 20대 때, 나이에 맞지 않게 성숙한 장르를 많이 했습니다. 천채왕 선생님 덕분에.”
천채왕 심사위원이 ‘푸웃’ 하고 웃었다.
“야 괜히 질문했네요. 한 방 먹었네.”
“갑자기 보사노바를 하자고 하시질 않나. 아프리카 음악을 가져오시질 않나. 파두 같은 전통 음악까지 접목하시고… 매 앨범마다 그만두고 싶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관객들이 파하하 웃었다. 나는 웃지 못했다. 그렇게 화려하게 매 앨범마다 장르를 바꾼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 때문이었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말을 이어갔다.
“스윙 재즈는… 파두만큼 생소하진 않지요. 보통 대중음악이 그거보다는 친숙하지만요.”
관객이 다시 폭소했다. 천채왕이 다시 헛기침을 했다.
“무튼, 그렇다고 스무 살 권노을 군이 소화하기 쉽다는 뜻은 아니에요. 거의 100년 전 음악이에요. 일반적인 알앤비, 가요, 록 같은 오디션에서 자주 나오는 시도와는 또 전혀 달라서 좋았습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동조했다.
“어! 어! 어! 정말 그래요. 재즈란 음악이 그렇거든요. 리듬을 타는 방식이 묘하게 달라요. 같은 그루브라고 해도 휭크라던가, 록, 댄스, 알앤비와 또 다른 느낌인데요. 권노을 군이 또 정통 스윙재즈 음악에 전혀 어색하지 않게 변신했어요. 놀랍습니다. 여기가 미국도 아니고. 권노을 군이 가장 즐겨 들었고 불렀던 음악이 재즈는 아닐 거란 말이에요?”
사실이었다. 그런 뜻에서 고개를 끄덕여 천채왕 심사위원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내 대답을 확인한 천채왕 심사위원이 말을 이었다.
“재즈도 이렇게 어색하지 않게 해석한다면. 권노을 군이 익숙한 음악을 한다면 어떨까? 본인다운 음악, 본인이 자연스럽게 자양분으로 삼았던 음악을 하면 얼마나 더 대단한 무대를 보여줄까? 그런 생각이 또 들었던 무대였던 거 같습니다. 미디움 템포나 업템포 노래를 부르는 노을 군을 보고 싶네요. 아, 그렇다고 이번 무대가 어색했다는 건 아니에요. 너무 잘 어울렸어요.”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이번에는 넵튠 한 심사위원 차례였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항상 쿨한 표정으로 내게 무난한 칭찬을 선사했던 넵튠 한 심사위원이 인상을 찡그리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나?’
넵튠 한 심사위원이 서서히 마이크를 들었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웃으며 농을 건넸다.
“아니, 넵튠 군 왜 그래요?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데요.”
나만 그런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넵튠 한이 입을 열었다.
“뭔가 열 받네요.”
헉, 하는 소리가 나왔다.
“여지까지 노을 군 노래가 정말 훌륭했는데. 솔직히 저랑 비교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저는 댄스그룹을 하고, 노을 군은 알앤비 베이스의 발라더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어요.”
베이비 심사위원이 맞장구를 쳤다.
“아~ 넵튠 군은 현역이니까. 그럴 수도 있을 거 같네요.”
“저라면 이 곡을 이렇게 해석할 수 있었을까? 못했을 거 같아요. 누군가, 예를 들어 선생님께서 이런 곡을 주면서 해석해보라고 하시면 이정도 완성도로 부를 수 있었을까? 못 했을 거 같아요. 그래서 뭔가 무대를 보는 내내 뭔가 분하달까? 그런 기분이 들었어요. 제가 권노을 군과 경쟁하는 참가자도 아닌데도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말했다.
“음악에는 선후배가 없죠. 그래서 무서워요. 일단 프로가 되면, 매번 계급장 떼고 차트에서 또 시장에서 경쟁을 하니까요. 무서운 세계에요. 넵튠 군 생각도 훌륭합니다. 저는 넵튠 군이라면 또 다른 재미있는 해석을 보여줄 거 같습니다만.”
넵튠 한 심사위원이 이번에는 농담을 했다.
“저희 천신군단 다음 타이틀곡은 스윙인가요?”
“하하하! 뭐 모르죠. 마무리하세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넵튠 한이 마무리 멘트를 날렸다.
“아아 네. 여튼, 제가 평가를 해야 할 후배의 무대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저보다 조금 앞서가는 동료이자 라이벌의 무대로, 그냥 감상했어요. 정말 굉장한 무대였던 거 같습니다.”
그렇게 심사위원 평이 모두 끝났다. 시청자 점수도 합계 완료되었다.
이제는 심판의 시간이었다. 일찌감치 문루아와 주환희의 점수가 먼저 공개되었다. 긴장감이 없을 정도로 무난한 점수였다. 오늘은 둘이 3, 4위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었다.
우승 후보인 두 사람의 점수 차례였다. 재호의 점수가 먼저 나왔다. 심사위원 평균 점수는 무려 94점, 총점은 372점이었다. 넘기 힘든 고득점이었다.
“권노을 군 1차 라이브 점수를~~~ 공개합니다!!”
심사위원 점수가 하나씩 공개됐다. 넵튠 한 95점. 베이비 심사위원 96점. 천채왕 심사위원 94점. 총합 95점이었다. 평균 점수로는 고작 1점 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청자 점수를 합쳐 나온 최종 점수는...
“370점! 370점으로 2위를 확정 짓습니다!”
심사위원 점수에서는 1등이었다. 하지만 시청자 점수에서 졌다. 아무래도 정통 발라드였던 재호의 음악보다, 재즈를 선곡했던 내가 한국 대중의 감성에서 불리했던 점이 컸다.
‘하지만 나쁘지 않아. 아니, 오히려 좋아.’
처음부터 너무 치고 나갈 필요는 없었다. 그렇다고 너무 1위와 차이가 커지면 따라잡기 어려웠다. 지금은 1위를 바짝 뒤쫓는 2위가 오히려 나았다. 대중적으로 고득점을 노릴 수 있는 강렬한 선곡은 마지막 무대까지 아낄 작정이었다. 최고의 반전은 마지막 날에 선사해야 했다.
* * *
1차 라이브가 끝나고, 반나절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이미 탑스타인 문루아와 사실상 연예인과 다름없는 연습생 주환희는 바로 숙소로 사라졌다. 그들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연예인이 별로라니까.’
그에 반해 일반인인 나와 재호는 훨씬 옵션이 많았다. 미리 재호와 말해 둔 대로, 재호의 형과 형의 선배를 만나기로 했다.
자유시간 이래 봤자, 사람들에게 이미 얼굴을 팔린 몸이라 한계가 있었다. 철저하게 얼굴을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가린 채로 약속장소로 갔다. 약속장소는 종로 근처의, 고려일보 소유 호텔에서 운영하는 바였다. 언론사 소유의 바에서 만난다니, 정말 보수적인 사람다운 취향이었다. 최근 내가 음악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을 만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재호 왔냐.”
“반가워.”
재호 형과 형의 선배가 쑥 들어왔다. 한 명은 조르지오 알마니, 또 한 명은 돌체 앤 가바나의 값비싼 양복 차림이었다. 저녁임에도 와이셔츠가 선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짜릿한 옷차림과는 달리, 그들과의 대화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서른 살이 넘었다는 변호사가 서로 수능 점수를 물어보며 자기소개를 하는가 하면, 천만 원짜리 시계를 두고 ‘가성비’ 운운하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재벌도 아닌 대학생과 월급쟁이 변호사가 말이다. 정말 쓰잘데기없는 말장난으로 보였다.
그렇게 지루하기 짝이 없는 대화가 계속되던 참이었다. 전화를 하던 재호 형이라는 변호사가 갑자기 전화를 받다 펄쩍 뛰었다.
“뭐라고요???”
무슨 일이든지 간에, 지금보다는 덜 지루해지는 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일이시죠?”
“무슨 일이시긴…! 대표님 온대. 빨리 안주 새로 좋은 거 시켜와! 최고로 좋은 걸로. 빨리!”
“온다고요? 누가요?”
“대표! 김 대표님이 온다 그랬다구. 빨리 서둘러!”
‘김 대표라면 김동현? 대록그룹 대표 3세? 마약쟁이? 아마도 재호를 마약 누명 씌울 그놈?’
그 빌런이 지금 제 발로 내 앞으로 걸어 들어 오고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