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39화 (39/280)

제39화

“팝송 대회 기억나냐?”

“아 그런 게 있던 거 같기도 하구.”

재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큰 기억이 없었던 듯했다.

“니가 우승했잖아?”

“그랬나?”

“나한테는 엄청나게 큰 충격을 준 무대였어.”

당시 재호는 스티비 원더의 노래를 불렀었다. 독특한, 지금 생각하면 재즈에 가까운 화성과 화려한 애드립이 섞인 충격의 무대였다. 재호는 품격 있는 노래로 압도적으로 우승했다.

그때부터였다. 내가 ‘저렇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 되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때가 말이다.

재호는 내 말을 듣더니 뭔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부터 가수가 되고 싶던 거야?”

“가수라는 직업을 떠올리지도 못했지. 그냥 너처럼, 스티비 원더처럼 노래를 부르고 싶어서 무작정 듣고 부르고 그랬더라고. 잊고 있었는데, 내가 가수를 시작한 건 너 덕분이었어. 고맙다.”

돌이켜 보니, 재호와 스티비 원더가 나의 첫 선생이었다. 당연히 이번에 ‘내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 무대는 재호에게 바쳐질 예정이었다.

“짜식 뭐 그런 걸 가지구. 그냥 나는 특목고 진학에 도움이라도 될까 해서 나온 건데.”

남에게는 인생을 바꾼 경험이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별일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내 입장에서 의미가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무대는 니 팝송 콘테스트 때 무대를 가지고 해보려고.”

재호가 손사래를 쳤다.

“야, 고작 학예회 같은 거 가지고, 뭘. 다른 거 해~.”

싫어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그때는 다 그런 계기로 빠지는 거지. 너는 뭐 할 건데?”

재호가 잠시 뚱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 표정을 풀고 씩 웃었다.

“라이벌 무대를 캐내려는 거야? 뭐, 이미 니 무대는 대충 알려 준 셈이니까. 나도 알려줄게. 대신 비밀이라구. 이래 봬도 공들여서 생각한 거그덩~.”

“그래그래. 뭐냐?”

사실 남의 무대를 안다고, 특별한 방법이 생기지는 않을 거 같았지만, 여튼 재호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하는 타입이었다.

그럼에도 이전 생에서는 마약 누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운명이었지만, 여튼 그랬다.

“나는 브라이언 맥나잇 하려고. Back At One.”

“오. 알앤비의 정석인데? 나야 이유가 있어서 팝을 하지만 너는 또 왜 팝이냐? 아무래도 표 받기도 어려울 텐데.”

“내가 제일 처음, 도움이 됐던 노래야.”

“누구한테?”

“형한테.”

형이라면, 재호의 친형 이야기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면, 재호는 항상 가족 이야기만 하면 주눅 들어있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면 너 말이야. 맨날 자신만만하고 계획대로 가는 녀석이. 가족 이야기만 하면 맨날 쫀단 말야? 왜 그러는 거야 너?”

재호 얼굴이 팍 구겨졌다.

“니가 뭘 알어?”

뭔가 생각하기 싫은 뭔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공부 잘해. 얼굴 잘생겼어. 음악 잘해. 대체 뭐가 부족하냐?”

“다 부족하지.”

그 한 문장에 많은 게 담겨 있었다.

대충은 짐작을 하고 있었다. 재호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 mp3로 여러 가지를 확인해봤다. 그러다 보니 재호에 대해 모르던 사실을 많이 알게 됐다.

재호의 집안은 모두 S대 출신이었다. 어머니 아버지는 물론 형까지 전부 다 그랬다. 재호만 Y대였다. 재호 성적이 훌륭하다 생각했는데, 여튼 그 집에서는 꼴찌였다.

그래도 여전히 이해는 잘 안 됐다.

“사실 나는 이해가 잘 안 된다.”

“뭐가?”

“우리 집은 아무것도 없었어. 뭐든지 내가 해야 했고, 앞으로도 내가 해야 할 거야.”

재호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래서 사실 모르겠어. 집안이 너무 잘나서 느끼는 중압감이란 게 어떤 건지. 하지만 그런다고 뭐 배부른 소리다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 아니야. 누구나 자기만의 지옥이 있겠지.”

재호는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너한테 비할 바는 아니네 확실히.”

“내가 더 불쌍하다고 인정하라는 게 아니야. 내가 보기엔 니 형보다 니가 더 멋지다는 거야.”

재호 형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재호보다도 공부를 잘했다. 하지만 매번 여유가 없었다. 항상 쫓기듯 모든 일에 임했다. 부 활동까지 입시 스펙을 쌓기 위해 남을 닦달하는, 매력 없는 인간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S대 법대를 갔던 그의 인생은 사법고시 합격을 정점으로 점점 별 볼 일 없어져 갔다.

‘나중에는 그냥 별 볼 일 없는 변호사로 입에 풀칠이나 하고 살았다는 거 같은데.’

하지만, 내게 보이는 미래를 재호에게 알려줄 수는 없었다. 다른 방식으로 재호에게 ‘형에게 휘둘릴 필요 없다’는 메시지를 각인시켜야 했다.

재호가 마약 사건에 휘말린 이유는, 왕창 그룹의 사내 변호사인 형의 선배와의 술자리 때문임이 확실했다. 형과 떼어 놓기만 해도 마약 사범 알람이 사라졌다. 굳이 형의 선배 하고까지 억지로 어울릴 필요 없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뭐 그래. 고맙다.’

재호가 힘없이 대답했다. 고마움을 표시하긴 했지만, 믿지는 못하는 티가 났다. 계기가 필요했다. 슬쩍 재호에게 떠봤다.

“너 지난번에 왕창그룹 사내 변호사인 형 선배랑 만나러 간댔지?”

“그날 갑자기 니가 문루아 님 작업실 핑계로 날 꼬셨구.”

“후회하냐?”

“설마! 그렇게 좋은 녹음실은 처음이었는데.”

역시나 재호는 무엇보다 음악을 좋아했다. 다만 자신의 취향에 자신이 없었을 뿐이었다.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음악도, 다른 분야에 꿀리지 않는 것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참 음악이란 허무해.”

“뭐가?”

“문루아 님. 그렇게 최고의 가수였는데. 겨우 1~2년 쉬었다고 다들 살아있는 송장 취급 아니냐구. 이제 겨우 스물넷인데 너무 나이 많다는 황당한 악플이나 달리구.”

“그런 놈들은 진짜 웃긴 놈들이고. 근데 세상이 다 그런 거 아닐까?”

“연예계가 유독 그렇지.”

“그럼 뭐 대기업이나. 학벌이나. 변호사, 의사 같은 전문직은 영원하다 이거냐?”

“그게 정론이지.”

이제 좀 찾은 거 같았다. 저 특유의 보수적인 사고방식이 재호의 자신감을 갉아먹고 있었다.

저 사고방식을 깨부숴야 했다.

“내가 보기에는 말이야. 니 음악적 재능과 음악에 대한 열정이 그 어떤 전문직이나 학벌, 심지어 대기업 이름값보다 나아.”

“아… 그냐?”

“증거 보여줄까?”

“뭔 증거를 보여준다는 거냐구.”

“농담이야. 뭔 증거를 보여주겠어.”

“뭐야 싱겁게.”

사실, 내가 무슨 점쟁이도 아니고, 내가 미래를 말해 준 들 믿을 리는 없었다.

하지만 그 미래에 균열이 가게는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하지만 말이야, 사람은 언제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거야.”

“그럴 수도 있지.”

말과는 달리, 재호의 눈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그럴 리 있냐?’라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서야 할 때인 거 같았다.

* * *

그날 밤.

-왜 그래 권노을? 힘이 없어?

“그냥 그래.”

-싱겁게.

숙소 생활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동생과 통화했다. 이제 정말 입시가 얼마 안 남은 동생의 상황을 확인해보려 한 전화였다. 상황 체크를 받고 있는 건 동생이 아니라 나였지만 말이다.

-숙소 생활은 익숙하자나? 요새는 차라리 다이어트식 챙겨주는 숙소가 더 편하다며.

사실이었다. 매번 배달음식의 유혹을 받는 집보다 차라리 숙소가 편했다.

“숙소 문제는 아니야.”

-구럼 몬데?

“말 해줘도 몰라.”

‘내가 미래에서 회귀했는데, 그때 받은 mp3가 재호가 마약 누명을 쓰고 입건된다고 미래를 예언해주더라, 이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

-칫 시시해!

“너는 어때?”

-그야 뭐…

조금씩 동생이 말을 열었다. 다행히, 슈퍼 캠프에서 난리를 친 후에 우리 관계는 한층 돈독해졌다. 이제는 동생이 웬만한 문제는 다 내게 상담하는 정도의 관계가 되었다. 부모님을 대신해야 하는 나로서는 고마울 따름이었다. 재호도 이렇게 해줬으면 참 편했겠지만.

“그래서, 최소 등급은 맞췄어?”

-아 몰라~

“야. 뭐가 어려워 그냥 언어, 외국어, 탐구영역 중에 1개만 맞으면 되는데. 너 영어 좋아하잖아?”

-실기 준비하느라 바빠.

“그러니까 빨리 공부해서 해치워야지. 너는 외국만 가면 유학파처럼 잘 떠드는 애가 뭐하러 그래. 수동적으로 시험 성적을 걱정하지 말고, 그냥 시험 성적을 넉넉하게 준비해두면 편하게 음악만 준비할 수 있잖아?

잠깐, 이건… 내게도 도움이 될 거 같았다.

-치. H대는 그런 거 없단 말야.

여튼 일단 지금은 동생과의 통화를 끝내야 했다.

“S대 가야 할 수도 있다. 학비도 더 싸고. 무엇보다… 폼 나잖아?”

-얼씨구, 오라버니가 자랑하려고?

“야 당연하지. 넌 이미 내 자랑이야.”

-우엑~ 느끼~

말은 거칠게 했지만, 내심 좋은지 꺄르르 웃었다.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동생이 걱정 돼서 전화했는데, 오히려 내가 도움을 받았다.

‘오늘은 좀 일찍 자야겠군.’

* * *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베란다로 나왔다. 새벽 다섯 시,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시간에 mp3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이번에는 평소와는 좀 달랐다. 이전에는 미래를 확인해보거나, 현재를 점검해보고 싶었다. 그래서 mp3로 미래의 기사를 살펴보고, 현재 나와 상대의 스탯을 확인하곤 했다. 그마저도 이제는 TOP 4의 스탯은 눈에 그려지듯 다 암기한 상태로 보지도 않았지만 말이다.

이번에 내가 알아볼 것은 ‘나의 과거’였다. 그것도 이전 생이 아닌, 이번 생의 과거였다.

‘그동안, 재호의 경고 알림이 몇 번 떴지?’

재호가 마약 관련 범죄로 잡혀간다는 알람이 몇 번 나왔었는지 세 봤다. 무려 13번이었다. 내가 회귀한 후 시간이 4개월도 채 지나지 않았으니, 거의 1주일에 한 번씩은 알람이 생겼다.

특히 재호가 오디션에서 잘 나갈수록 알람이 점점 잦아졌다. 아무래도 재호가 조금 유명세를 타니, 재호 형이 자꾸 재호를 주변인들에게 소개하려 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모임에서 뭔가 왕창그룹 사내 변호사인, 누군가와 엮여 누명을 쓰게 되는 시나리오로 보였다.

이런 식으로는 계속 재호의 과거를 막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해답은 간단했다. 수동적으로 재호를 구해주려 하니 힘들었다. 차라리 적극적으로 재호가 위험에 빠지는 이유를 제거해버리면 됐다.

팝콘을 안 먹는 사람은 존재한다. 팝콘을 우걱우걱 먹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팝콘을 한 개만 먹는 사람은 없다.

지금도 왕창그룹 자제 놈은, 미래의 재호와 같은 억울한 마약 사범을 양산하고 있을 것이었다. 생각해보니 막아야 했다. 재호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를 위해서도 언젠가는 해야 했던 일이었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어디엔가 전화를 걸었다.

* * *

전화 통화를 끝내자 어느새 조금씩 날이 밝아져 있었다. 가을이 되면서 해가 뜨는 시간이 조금 늦어졌다. 이제 조금씩 일출이 시작되고 있었다. 재호가 일어나서 아침 식사를 준비할 타이밍이었다.

“일찍 일어났네?”

역시나, 부엌으로 가니 재호가 계란 부침… (그 써니 어쩌고 저쩌고)을 하고 있었다. 커피 향이 어디선가 났다. 첼로는 생상스의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전형적인 재호의 아침이었다.

“일찍 일어났어. 선곡도 고민해볼 겸.”

“이미 곡은 정했잖아?”

“그래도 편곡 방향이라던가 고민할 게 많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편곡이 특기라는 재호가, 전형적인 알앤비 발라드인 Back At One을 대체 어떻게 편곡할지 기대가 됐다. 사실 최강의 고음 보컬인 원곡자 브라이언 맥나잇에 비해 재호는 레인지가 넓지 않았다. 어떻게 원작의 감독을 뛰어넘을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재호가 자기 계란을 따끈하게 데워 둔 접시에 담으며 말했다. 이렇게 해야 계란의 온기가 유지된다면서. 재호다운 꼼꼼함이었다.

“말도 마. 가볍게 생각했는데. 정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네. 키도 안 맞구. 재해석할 여지도 없구. 무엇보다…”

거기서 재호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묵묵하게 계란을 먹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뭐?”

“그, 드러머분 있잖아.”

“아.”

박찬용 드러머. 재호와 의견 조율이 안 돼서 갈등이 있었다. 내가 조언해서 그냥 드럼을 자기가 찍으라고 말했다.

“그거 때문에 문제가 생길 거 같은데. 자존심에 내가 스크래치를 낸 거니까. 방송 끝나고 눈빛을 봤그덩~. 장난이 아니더라.”

사실 나도 그 눈빛을 봤다. 재호가 걱정할 만한 눈빛이었다.

‘하여간 재호 이놈도 은근히 손이 많이 가는 놈이네. 누명도 풀어줘야 하고. 이제는 연주자랑 갈등도 중재해줘야 하나.’

하지만 생각해보니 둘은 같은 게 아니었다. 누명을 풀어주는 건 사실 내 책임은 아니었다. 그냥 친구니까, 그런 큰일은 어떻게든 해결해주려 당연히 노력해야 하는 일이었다.

연주자와의 갈등은 좀 달랐다. 내 책임이기도 했다. 애초에 드러머를 씹고 자기 마음대로 하라고 부추긴 건 나였으니까.

“그냥 내가 했다 그래.”

“뭐?”

“내가 했다 그러라고.”

“그럼 박찬용 님이 이번에는 너를 꼴 보기 싫어할 텐데? 너는 괜찮겠어?”

사실,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은 잡히지 않았다.

“이제부터 고민해보지 뭐.”

내일 고민은 내일 하면 됐다. 하지만 밴드 합주는 바로 오늘부터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