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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왕-38화 (38/280)

제38화

‘저 녀석이 여긴 왜?’

피하다 보니 이제는 호랑이가 제 발로 집 앞으로 온 격이었다.

좀 당황했지만, 카메라 앞이니 여기서 마약을 하거나 할 리는 없었다. 최대한 누구인지 못 알아본 척을 했다.

왕창그룹 자제 옆의, 비서 격으로 보이는 인물이 말을 걸었다. 나이는 훨씬 많아 보였지만 굽신대는 태도였다.

“잠깐 구경해도 될까요? 스폰서이신 대록보험 김동현 대표님께서 조금 현장을 확인하고 싶어 하셔서.”

“네네, 그러시죠.”

류지혜 연기 멘토의 눈이 살짝 짜증으로 찡긋했다. 하지만 나만 봤을 정도로 미묘한 느낌이었다. 이후 그녀는 최대한 태연하게 다시 레슨을 시작했다.

“일단 큐를 외워야 해요. 가장 중요한 건 대본을 외우고, 어디에서 자신이 나올지를 아는 거죠. 지문만 외우지 마시고, 대사 큐와 액션 큐도 함께 숙지하시는 게 좋아요.”

류지혜 심사위원의 레슨은 굉장히 전달력이 좋았다. 하지만 집중이 잘되지 않았다. 왕창그룹의 자제 놈은 전혀 연극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자꾸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엄청 신경 쓰였다.

급기야는 바닥에 걸터앉아 시가를 태우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류지혜 멘토가 한마디 했다.

“지금부터 노래 연습을 해야 해서요. 나가서 태우실 수 있을까요?”

왕창그룹 자제 놈은 뚱~ 한 표정으로 류지혜를 노려봤다. ‘한 번 붙어볼래?’하는 표정이었다.

비서가 당황스런 눈창빛으로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그도 딱히 멈출 방법은 없던 듯했다.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대기실에 외국인들이 보이던데. 어떤 분들인가요?”

“아! 태양의 서커스 분들이 공연하러 오셨어요. 저희가 연습하는 동안 무대에서 리허설을 하실 거에요. 곧 공연이라서요.”

“우와…. 대단하네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볼거리죠?”

왕창그룹 자제가 손가락으로 쿡 비서를 찔렀다. 비서가 마지못한 얼굴로 우리에게 물어봤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다른 볼 일이 있어서.”

“네네 그러세요.”

류지혜 심사위원은 오히려 마음이 편해 보였다. 사실 나도 그랬다. 왕창그룹 자제와 그 똘마니들이 방을 나가자 문을 잠가 버렸다.

‘왕창그룹 3세 루머들을 인터넷에서 자세히 읽어 둬서 다행이었군.’

여튼 저 왕창그룹 자제는 진귀한 볼거리라면 사족을 못 썼다. 무에타이 경기를 보러 태국에 주말마다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다닐 정도였다. 태양의 서커스 같은 귀한 볼거리라면 더더욱 그랬을 터였다.

“자! 그럼 한 번 대본 리딩을 해볼까요?”

다행히 이제는 방해하는 사람 없이 잘 연습을 할 수 있을 듯했다.

* * *

“노을 참가자! 그렇게 ‘노래할 거야~~” 하는 식으로 노래를 시작하면 안 돼요! 그럼 관객들 다 웃어요. 감정을 가득 담아서, 말하듯이 해주세요. 뮤지컬은 비현실적이라 현실성이 중요해요.”

“네넵! 알겠습니다.”

하하, 또 혼났다.

이전 생에서도 그랬다. 노래는 자신 있었지만, 연기는 젬병이었다. 게다가 예전에는 외모 자신감도 바닥이었다. 그래서 그냥 이 소미션은 대충 넘어갔었다.

하지만 이제는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단순히 방송 분량 때문만은 아니었다. 연기는 결국 노래에 연장 선상이었다. 뮤지컬이라면 더욱 그랬다. 그걸 최고의 전문가에게 배운다면, 당연히 노래에 도움이 될 터였다.

‘뭐, 문루아를 이기기는 어렵겠지만.’

문루아는 영화도 주연을 해본 적 있는, 소위 말하는 ‘한류스타’였다. 당연히 연기도 프로급이었다. 당연히 이전 생에서도 그녀가 이번 소 미션을 우승했다.

우승이 목표는 아니었다. 최대한 연기를 배워서 ‘감정 표현’ 스탯을 올려보기로 했다. 무지하게 안 올라가는 능력치를 올려볼 기회였다.

하지만 시작부터 문제였다. 대사가 잘 외워지질 않았다.

“왜 니가 있는 거야? 아닌데.. 왜 니가 거기에 있는 건데?”

자꾸 되뇌어도 외워지지 않았다. 희한했다. 가사는 금방금방 암기가 됐다.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대사는 외워지질 않았다.

“암기가 안 돼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암기가 안 되냐구요.”

문루아였다.

“네네. 연기는 처음이라 긴장해서인지. 암기가 잘 안 되네요.”

문루아가 대사집을 돌돌 말면서 말했다.

“맞아요. 저도 그랬어요. 처음에 연기할 때는요.”

“지금은 괜찮으신가요?”

“이제는 익숙하죠. 영화뿐 아니라 연극도 했던걸요?”

“와. 연극도요?”

역시 대단했다. 나이는 나보다 네 살 많은 사람이었지만, 경력은 십 년은 더 묵은 사람다웠다. 게다가 그녀는 한국을 너머 아시아 최정상까지 찍어 본 경험이 있었다.

오디션 무대야, 인생을 한 번 더 살면서 준비한 내가 더 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의 임기응변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비결 알려줄까요?”

“무슨 비결이요?”

“암기 비결이요.”

그러면서 문루아가 장난스럽게 씨익 웃었다.

뭔가 문루아는 내게 뭔가를 알려 주는 일에서 어떤 쾌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덕분에 동생과도 관계가 좋아졌지.’

이번에도 그녀의 도움을 받으면 이번 미션뿐 아니라, 보컬에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몰랐다.

‘무엇보다 상대가 비결을 알려 준다는데 굳이 막을 필요는 없지.’

“네, 알려주세요.”

“좋아요. 자! 대본을 펼쳐봐요.”

대본을 펼쳐서 보여주었다. 밑줄이 쳐 있었다.

“큐를 다 표시했네요?”

“선생님이 대사큐, 액션큐가 중요하다고 하셔서 표시했습니다.”

“잘했어요. 근데 안 외워지죠?”

“맞습니다.”

대사도 안 외워지는데, 대사가 들어갈 자리, 타이밍, 즉 ‘큐’가 외워질 리가 없었다.

“이 큐가 중요해요.”

“무슨 말씀이시죠?”

“이 큐가 중요한 이유가 뭘까요?”

잠깐 말을 멈추고 생각해봤다.

“잘 모르겠는데요.”

“생각해봐요.”

다시 조금 더 생각해봤다.

음악을 생각해보면, 리듬 같은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리듬… 을 배우와 맞춰야 하기 때문일까요?”

“그 생각, 어떻게 떠올랐어요?”

“어떻게 떠올랐냐니…”

“’리듬’이라는 말을 떠올린 이유가 있잖아요?”

“제가 가수니까. 아무래도 리듬을 떠올리게 됐어요.”

“바로 그거에요.”

“네?”

“바로 그거에요. 모든 대사에는 이유가 있어요. ‘이 캐릭터가 왜 이 말을 했을까? 어떤 감정과 순서를 거쳐 이 말을 뱉은 걸까?’를 생각해보면 돼요. 이유가 있는 말은 잘 외워지니까요.”

“아하…”

“그렇다고 감정에만 집중해서 적당히 외우면 안 돼요. 대본에는 어미 하나까지 모두 의미가 있으니까요.”

문루아 말을 듣고 나니 모든 대사가 다르게 느껴졌다.

‘왜 니가 거기에 있는 거야?’

이 말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시계탑에서 만난 기쁨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기의 라이벌 빵집의 딸을 만났다는 당혹감도 들어있었다. 이 사이에 공백을 채우는 건 내 몫이었다. 배우도 일종의 작가였다.

그리고, 이 지식이 어디에 쓰여야 할지도 알 거 같았다.

바로 노래였다.

노래에는 가사가 있다. 이 가사를 내뱉는 인물에는 어떤 사연이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이 가사를 내뱉는 거였다. 지금까지는 내가 그 사람의 감정에 몰입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왜 이 가사 속 말을 할까’ 까지 구체적으로 상상하지는 않았다.

이 방식을 그대로 노래에 연결한다면? 내 노래에 감정이 한결 디테일해질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 감정 표현은 더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우웅~ 우웅~

주머니에서 mp3가 울렸다. 미소가 지어졌다. 화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내 ‘감정 표현’ 스탯이 올랐다는 사실을.

* * *

감정 표현 덕분에 대사는 깔끔하게 외울 수 있었다. 하지만 연극 무대까지 선 문루아를 이길 순 없었다. 그녀가 가볍게 최고의 연기로 뮤지컬 소미션을 우승했다. 곡 순번을 정하는 권한이 그녀에게 넘어갔다.

넵튠 한이 매끄럽게 마이크를 잡고 무대를 이어나갔다.

“축하드립니다 루아 님. 자! 그럼 이제. 진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갑자기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뭔가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깨달은 참가자들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본 미션을 공개하는 타이밍이 분명했다.

“이번 생방송 라이브 미션은 바로… ‘내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입니다.”

‘내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라. 그게 뭐였지?’

사실, 워낙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질 않았다. 적어도 중학교 때부터는 노래를 하고 다녔다. 연예인을 하려고 살도 빼려 했지만, 아무리 해도 빠지지 않아 좌절했던 시절도 그즈음이었다.

‘빨리도 감정 표현을 쓸 때가 왔군.’

그랬다. 이제는 나 자신이라는 캐릭터가 노래라는 일을 하는 ‘이유’를 알아낼 차례였다. 나는 왜 노래를 부를까? 그 이유를 내가 확실히 알고 있다면, 감정 표현이 더 좋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내가 여러 가지 상념에 빠져 있는 동안, 넵튠 한의 미션 소개는 마무리되었다.

“바로 무대 준비는 내일부터 시작합니다. 이상!”

* * *

숙소에 돌아온 참가자 4명이 모두 식탁에 앉았다. 지금의 TOP 4는 경쟁자이기도 했지만 모두 동료의식을 갖고 있었다. 경쟁자지만 마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오민수 같은 이기적이고 경쟁심에 가득 찬 사람은 이제 사라졌다.

“횽들, 누나, 다들, 선곡 정했어요?”

주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자연스럽게 주제 다음 무대가 됐다.

내가 답했다.

“아직 내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가 기억이 잘 안 나서. 그걸 알아야 선곡이 되겠네. 쭈, 너는 음악을 왜 시작했냐?”

“저요? 저는 뭐 뻔하죠. 노래하고 춤추면 애들이 좋아했그든요. 찐따여서 친구가 없었는데, 음악 덕에 친구를 만들어써요. 그러다 보니 음악이 전부가 되버린 그에요.”

“아하, 그게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야?”

“재호횽은 어때요?”

뭔가 환희가 내 말을 일부러 무시한 거 같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난 예전부터 음악을 했었어.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거.”

“그래서요?”

“나는 공부도, 운동도, 형보다 못했는데 음악만은 형보다 잘하는 거 같더라구. 그래서 음악을 누구보다 열심히 했던 거 같아.”

“횽은 누구 좋아했어요? 저는 어셔랑 시스코!”

“나? 나야 뭐… 테이크 식스 같은 아카펠라 그룹? 브라이언 맥나잇도 좋아했던 거 같구. 근데 맥나잇은 가수는 다 좋아하니까.”

“아카펠라 그룹이라니 재호횽답네요. 노을횽은요?”

“나?”

가만히 생각해봤다. 왜 음악을 시작했는지, 그 이유는 몰랐지만 제일 좋아했던 가수는 확실했다.

“브라이언 맥나잇이지 역시.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듣고 또 들었어. 지금도 애드립까지 다 외웠을 정도니까.”

“허!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그야 팝송 대회에서… 아!”

“깜짝이야. 왜 그래요 횽?”

갑자기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럴 법했다. 내가 왜 브라이언 맥나잇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내가 왜 음악을 시작했는지가 기억 나버렸으니까.

하지만 지금 밝히기에는 좀 쑥스러웠다. 환희를 벤치마킹해서 말을 돌렸다.

“루아 선배는 누구 제일 좋아했어요?”

“…”

문루아가 가만히 침묵을 지켰다. 그러더니 고개를 푹 숙이고, 탁자를 쳐다봤다.

“그, 그 정도로 말하기 싫으시면 말하지 않으셔도 돼요.”

“…브라이트만.”

“네?”

문루아가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사라 브라이트만이요…”

“파하하하하하하! 사라 브라이트만이라구요?”

주환희가 호들갑스럽게 웃었다. 나랑 재호도 웃음을 찾기 바빴다. 문루아가 버럭 화를 냈다.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그래서 말 안 하려고 했잖아요!”

“하하하하하! 댄스 퀸이 클래식 가수를 좋아했다니. 너무 엉뚱하잔나여~~”

그렇게 문루아를 놀려 대면서 저녁 담화는 끝이 났다.

* * *

그날 밤, 일부러 시간에 맞춰 마당으로 나갔다. 재호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미 재호 스케쥴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재호가 마당에서 스트레칭을 하는 시간이었다. 강박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시간을 지키는 놈이라 이럴 때는 편했다.

“후~~~ 하~~~ 후~~~ 하~~”

역시나, 재호가 마당에서 스트레칭 중이었다. 내쉬고 내뱉는 숨소리마저 초시계처럼 일정하게 느껴졌다.

“여어.”

재호에게 말을 걸었다.

“어 노을이 왔냐?”

재호가 반갑게 맞아줬다.

“무슨 일이야? 너도 운동 하려구?”

“아니 난 됐어. 그보다 고맙다고 말하러 왔어.”

재호가 스트레칭을 하다 말고 내 얼굴을 쳐다봤다.

“갑자기 뭐가 고마워?”

“너였거든. 내가 음악을 시작한 이유가.”

좀 닭살스러운 말이지만 사실이었다. 내가 음악을 시작한 건, 재호 덕분이었다.

나와 재호가 다니는 중학교에서는, 매년 팝송 경연 대회를 했다. 공부만 하던 학교에서 하는 그나마 큰 행사였다.

거기서 나는 음악의 마력을 처음으로 느꼈다. 재호 덕분에 말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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