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37화 (37/280)

제37화

경쾌한 피아노와 현악기가 깔렸다. 거기에 강렬한 목소리가 곁들여졌다. 피아노가 드럼의 역할을 대신했다.

재호는 물론 주환희와 문루아까지 ‘멈칫’했다.

“횽 이거…”

그랬다. ‘오명’이었다. 재호가 직접 편곡한 그 비트가 그대로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우리 네 명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곡을 끝까지 들었다. 아무리 들어봐도 아예 같은 편곡이었다. 정말 토씨 하나 바뀌지 않았다.

곡이 끝났다. 방에는 싸한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의외로 문루아였다.

“이거, 뭐에요? 왜 영어 가사가 나와요? 이거… 당신들 곡이잖아요?”

주환희도 거들었다.

“아니, 양심이 있어야지. 표절을 할 거면 좀 바꾸는 성의라도 있어야 되는 그잖아요? 이게 뭐예요. 걍 복붙이잖아여.”

환희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재호가 나직하게 말했다.

“이거 브리토 새턴 신곡 맞아?”

브리토 새턴.

현재 떠오르는 신성 알앤비 가수였다. 캐나다 출신의 백인 남성 뮤지션으로, 수많은 믹스 테잎 무료 앨범을 인터넷에 공개하면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었다.

그런 그가, 가장 최근에 낸 신곡이 바로 ‘Restless’였다. 문제는 이 곡이 재호의 곡과 아예 같은 곡이라는 사실이었다.

‘내 기억대로야.’

이전에도 저 녀석은 재호의 곡을 베꼈었다. 아니나 다를까, 또 재호 곡을 훔쳐 갔다. 이전 생과는 달리 내가 역사를 바꿨다. 내가 재호 팀에 들어가 이전과 다른 곡을 만들었지만, 이번에는 그 달라진 곡을 베꼈다.

그래서 어떻게 됐을까? 이전에는 그냥 묻혔다. 아직 케이팝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커지기 전이었다. 누구도 팝가수가 한국 곡을 훔쳤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한참 시간이 지난 뒤에야 브리토 새턴의 곡이 재호의 곡과 똑같고, 재호의 곡이 먼저 나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자 브리토 새턴은 슬쩍 곡의 기록만 지웠다. 그 어떤 사과나 보상도 없었다. 졸렬한 대응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넘어가게 할 생각이 없었다. 저작권은 예술가들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룰이었다. 게다가… 이 일을 하면서 재호의 자신감도 충분히 올라갈 터였다.

“니가 직접 봤잖아. 브리토 새턴 홈페이지에 뜬 신곡이야 이게.”

다시 방에 침묵이 흘렀다. 이번에는 환희가 나섰다.

“뭐라고 항의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횽? 눈 뜨고 당할 순 없잖아요?”

“내가 뭘 하겠어. 나는 기획사도 없다구. 변호사…”

변호사… 라는 말에 살짝 목소리가 흔들렸다. 왜 그런지 나는 알고 있었다.

재호가 콤플렉스를 느끼는 잘난 형이 바로 서울 법대생이었다. 미래의 변호사였다. 당시에는 정말 창창해 보이는 인재였다.

뭐 나는 결국 그의 미래가 별거 없다는 걸 알지만 말이다.

사정을 모르는 환희가 되물었다.

“변호사가 뭐요?”

“아니, 그냥 아는 변호사도 없다구.”

문루아가 책상을 가볍게 ‘탕’ 하고 쳤다.

“진짜 기분 나쁘네. 팝스타면 다예요? 이건 한국 음악판을 무시하는 처사죠. 한국 가수로써 저까지 기분 나쁘네요.”

재호가 문루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화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루아 님. 하지만 딱히 방법이 없어요.”

문루아가 말을 돌려줬다.

“방법이 있죠.”

나도 문루아와 같은 생각이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었다.

내가 문루아에 말에 맞장구치며 말을 이어갔다.

“저도 문루아 선배님과 똑같이 생각합니다. 방법이 있죠.”

“맞아요 방법이 있어요. TYB.”

맞다. TYB 엔터테인먼트. 천채왕 심사위원이 80년대부터 각고의 노력으로 빚어낸 회사, 그 회사가 지금 슈퍼스타 T, 이 오디션의 주체였다. 게다가 이윤강 PD가 사라지면서, 그 역할이 오히려 더 공고해졌다.

문루아가 자기 회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TYB는 해외 네트워크가 있어요. 이미 90년대부터 선생님이 직접 스웨덴, 프랑스, 일본 등을 돌아다니시면서 곡을 수집하셨어요. 제 일본 앨범들은 일본 작곡가는 물론 유럽 작곡가들의 곡이 실려 있고요.”

재호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저도 문루아 님 앨범은 들어본 적 있습니다. 한국 앨범 같지 않아서 크레딧을 보니 작곡가부터 연주자까지 해외 뮤지션이 많았다고 알고 있습니다. 근데 그게 지금, 제 상황에 도움이 될까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 했다. 저 똑똑한 재호도 자기 문제에는 어벙한 면이 있었다. 내가 슬쩍 힌트를 줬다.

“당연히 도움이 되지 무슨 소리야. 곡을 같이 쓴다는 건, 저작권에 대한 노하우가 있다는 거잖아.”

“아!”

재호가 신음에 가까운 탄성을 질렀다.

그랬다. 2005년, 당시에 대부분의 기획사는 해외 음반사와 네트워킹이나, 해외 저작권법에 능통한 로펌과의 관계 같은 건 없었을 터였다. 하지만 TYB는 달랐다. 이미 문루아를 아시아 최고의 가수로 성공시켰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다양한 분야의 인맥이 생겼다.

그중에 법조계가 없을 리 없었다. 결국 문화 사업은 저작권을 관리하는 일이 핵심이었다. 최고의 회사라면, 저작권 관련 노하우도 최고일 게 확실했다.

“아시아 전역에서 활동하는 문루아 선배 음악 저작권을 관리하는 TYB라면 가능하죠.”

재호가 살짝 기쁨에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이내 눈빛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저는 소속사가 없네요. 제가 TYB에 도움을 받을 수는…”

문루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대답했다.

“무슨 뜻이죠? 당연히 TYB가 도와주죠. 아니, 이건 이미 TYB의 일이에요.”

“무슨 말씀이신가요? 저는 소속사가 없…”

“슈퍼스타 T에서 발표한 모든 음원은 TYB와 가수의 공동 소유에요. 몰랐어요?”

“아!”

항상 꼼꼼한 재호였지만, 설마 참가 신청 계약서까지는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랬다. 슈퍼스타 T에서 발표한 음원은 모두 TYB가 관리했다. 음반을 제작하는 모든 비용부터 마케팅 비용, 심지어 저작권 등록 처리 등등까지 모두 TYB에서 도맡아 하며 얻은 권리였다.

확실한 건, 재호가 편곡한 비원더의 ‘오명’은 이미 TYB의 소유물이기도 하다는 거였다. 브리토 새턴은 무명 가수의 곡을 훔친 것만이 아니었다. 한국 최대 대형 기획사, TYB의 곡을 훔친 것이기도 했다.

문루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재호 군의 곡이기도 하지만, TYB의 재산이기도 해요. 제가 회사에 이야기할게요. 권리를 행사해야죠.”

바로 문루아가 누군가에게 연락을 했다. 천채왕 심사위원장은 아닌 거 같았다. 사무적인 말을 좀 주고받더니 끝났다.

“이야기 잘 됐어요. 곧 연락 올 거예요.”

“누구에게 전화하신 건가요?”

“이런 일이 업무인 사람에게 연락했어요. 곧 연락이 올 거예요.”

TYB에, 연습생부터 치면 10년도 넘게 있어 왔던 사람이라서일까? 이런 일에는 정말 듬직해 보였다.

얼마 후, 다시 전화가 걸렸다.

“네 팀장님. 네.. 네. 네. 감사합니다.”

문루아가 재호에게 전화를 건넸다. 내가 슬쩍 문루아에게 물었다.

“누구예요 선배?”

“TYB 음원 관리하는 변호사분이에요.”

“그런 바쁜 분이 이렇게 빨리 통화가 돼요?”

문루아가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했다.

“이게 이분 일이잖아요?”

전화가 끝난 후, 재호 얼굴이 한층 밝아 보였다. 내가 먼저 물었다.

“뭐라셔?”

“회사 단위에서, 정식으로 항의를 하기로 했데. 이미 비슷한 일이 몇 번 있다고, 걱정 말라 하시네.”

“잘 됐어요 횽!”

재호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뭔가 다른 말을 더 들었던 게 분명했다.

내가 더 물어봤다.

“뭐 다른 좋은 말 들었나 본데?”

“아.”

재호가 말을 하려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는지, 입을 슬쩍 가리고 고개를 돌렸다. 귀족처럼 우아한 몸놀림이었다.

재호는 순식간에 포커 페이스를 되찾고 말을 이어갔다.

“이런 일은 한국에서도 탑 티어 작곡가에게만 한두 번 있었다네. 역사상 몇 번 없었다고, 자랑스러워해도 된대.”

“그래 짜샤. 누가 뭐래? 차라리 대놓고 잘난 척을 해.”

“뭐라는 거냐구. 내가 너냐?”

틱틱대는 재호 얼굴이 한층 밝아 보였다.

‘하여튼 귀찮은 놈이야.’

이젠 결과를 확인해볼 차례였다. 슬쩍 눈치를 보다 화장실로 몰래 들어갔다. 문을 잠갔다. Mp3로 미래를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제목: 브리토 새턴, ‘원재호 작곡가에게 사과한다. 그는 어메이징’

본문: 표절 논란에 휩싸인 브리토 새턴이 표절 혐의를 인정했다.

그는 ‘우연한 계기로 오명을 듣게 됐고, 너무 좋은 곡이라 어느새 녹음을 하게 되었다’라고 밝혔다. ‘어디에 연락해야 할지 몰라 그냥 올렸다. 내 실수다.’라고 사과했다. 그리고 원작자인 원재호 참가자에게 정식으로 작업 요청을 하겠다고 밝혔다.

‘웃기고 있네.’

진심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다. TYB의 국제적인 네트워크와 로펌 역량이 아니었으면 오리발을 내밀었을 놈이었다. 실제로 과거에는 그런 적반하장의 태도였다.

댓글은 사뭇 달랐다.

-역시 팝스타는 달라.

ㄴ ㅇㅇ 헬조선관 다름.

15년 전만 해도 일단 팝가수면 덮어두고 선하고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나는 15년 뒤, 미래를 보고 와서 그런가, 그놈들도 똑같은 사람이라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겁대가리가 없으니까, 월드 스타를 꿈꾼 건가 싶기도 했다.

여튼 덕분에 팝스타는 제대로 교육받았다. 저작권의 소중함을, 적어도 음악가끼리는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배웠으리라 싶었다.

‘TYB라는 대형 기획사의 힘에, 내 정보력, 기획력이 더하면 이렇게도 할 수 있겠군.’

또 얼마나 많은 부조리를 바로잡을 수 있을지 기대가 됐다.

* * *

그날 저녁, 바로 우리는 대형 카니발을 타고 어딘가로 불려갔다. 소극장이었다. 뭘 찍을 예정인지는 여전히 알려주지 않았다. 룰을 어기지 않는 거지, 빡빡한 건 여전했다.

물론, 나는 무슨 미션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이전 생에 와봤던 소극장이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시간이 촉박하다 보니 기존 계획을 크게 바꾸지 못한 것 같았다.

‘소극장에서 하는 미션이라면 하나뿐이지.’

그때였다. 넵튠 한이 저벅저벅 무대 위로 걸어 올라왔다. 나를 포함한 4명의 참가자는 모두 객석에 있었다. 넵튠 한이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이번 미션은… 뮤지컬 미션입니다~~”

미래는 바뀌지 않았다. 내가 기억하던 미션이 시작되었다.

넵튠 한은 꼭 뮤지컬에서 노래하듯 말을 이어갔다.

“이번 미션은, 두 팀으로 나누어 뮤지컬 무대를 소화해보는 미션입니다. 주환희 참가자는 원재호 참가자와. 문루아 참가자는 권노을 참가자와 팀을 맡아 연기 대결을 펼칩니다.”

그리고 넵튠 한이 박수를 쳤다. 무대 위로 몇몇 사람들이 걸어 나왔다.

“그리고! 이번 미션을 이끌어 주실 심사위원들을 소개합니다.”

걸어 나온 두 사람의 정체는 심사위원이었다. 강창석과 류지혜. 모두 뮤지컬 계에서 잔뼈가 굵은 중견 배우들이었다.

나와 문루아는 유지혜 심사위원 담당이었다. 심사위원을 따라 좀 더 작은 작업실로 자리를 옮겼다.

“자! 대본이에요. 빨리 확인해봐요 두 분. 시간이 없어요.”

대본이 하나, 악보가 하나 있었다. 대사로 시작한 후, 노래로 이어졌다.

류지혜 심사위원의 설명을 들으며 대본을 확인했다. 역시 배우라 그런가, 콕콕 뇌리에 박히는 하이톤 목소리가 정확한 딕션과 합쳐져 귀에 쏙쏙 박혔다.

“씬은 간단해요. 편지로만 감정을 나눴던 두 펜팔 친구가, 시계 탑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둘이 서로 경쟁하는 라이벌 빵집의 딸, 아들 관계인 거에요. 이를 눈치챈 남주가 시계탑에 가지 않고 근처에 숨어요. 그리고 이 사실을 모르는 여주는 애타게 약속 시각이 지나도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려요.”

하나도 간단해 보이지 않았지만 일단 잠자코 말을 듣고 있었다. 문루아는 영화 출연작도 있던 대스타답게 훨씬 태평했다.

“그럼 우선 대본부터 연습해볼까요?”

“좋아요. 특히 대사에서 노래로 넘어가는 트랜지션 부분에 신경 써 주세요. 너무 과장되었다고 느끼지 않네.”

“넵!”

그렇게 연습을 시작하려던 찰나에, 갑자기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우루루 들어왔다.

‘헉!’

헛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전에 재호에게 마약 누명을 씌우는 거로 추정되는 놈. 왕창그룹 3세가 거기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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