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35화 (35/280)

제35화

거대한 폰트로 자막이 나오며 오디션이 시작됐다.

[4주 전]

내가 갑자기 불쑥 나왔다. 노경진 PD와 함께였다. 일부러 찍은 게 아니라 멀리서 우연히 찍은 부분을 확장해서 보여줬다. 거칠어서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였다.

나레이션이 나왔다. 나레이터도 어느새 넵튠 한으로 바뀌어 있었다.

“4주 전, 우리는 권노을 참가자에게서 무서운 제보를 받았습니다. 오디션의 모든 득표수가, 조금 이상하다는 제보였습니다. 모두, 정수로 딱 떨어졌습니다. 결과 변형이 의심되는 정황이었습니다.”

시작부터 노빠꾸였다. 예열 기간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제작진이 직접 친절하게 그래프로 득표수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오디션 득표수가 정수로 딱 떨어질 확률도 계산했다. 한 마디로, 로또 당첨보다 더 낮은 확률이었다.

당연히 인터넷은 난리가 났다.

-와 레알 주작인거임?

ㄴ 돋는다 돋아.

ㄴㄴ 어쩐지 작위적인거 알았음.

ㄴㄴㄴ 지금에서 누군들 그런 말 못하냐.

-각이네 폐지 각.

ㄴ 이건 방송국이 문 닫아야 하는거 아니냐.

ㄴ 레알이거 반박불가. 폐국각.

그 사이, 장면이 전환되었다. 우울한 회의실이었다.

딱 봐도 멤버들이 보였다. 천채왕 심사위원장과 노경진 PD, 그리고 윤결 작가였다. 천채왕 심사위원장 외에는 얼굴은 흐릿하게 나왔지만, 내게는 또렷하게 누구인지 구별이 되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침울하게 입을 열었다.

“그동안 방송에 참여했던 저희 회사 직원에게 물어봤습니다. 그들의 증언을 종합해 볼 때, 현 제작진에게 신뢰가 가지 않는다 판단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노경진 PD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동의합니다.”

“먼저 문제를 제기하신 두 분 외에, 모든 제작진이 이 프로그램에서 손을 떼셨으면 합니다.”

실제 회의 장면 같지는 않았다. 아마 천채왕 심사위원은 훨씬 더 분노를 토했을 터였다. 이건 방송을 위한 소위 연출 샷이었다. 지금은 2005년, 아직은 그런 방식이 먹힐 때였다.

노경진 PD와 윤결 작가가 동의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한숨을 깊게 푹 쉬었다.

“사실 이런 방송은 중지하는 게 낫다 생각합니다. 하지만…”

서서히 화면이 디졸브 되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지고, 그 자리는 나를 포함한 참가자들이 노래하는 모습으로 채워졌다.

마지막으로 천채왕 심사위원장의 목소리가 살짝 들렸다.

“참가자들이 걱정이네요.”

인터넷을 확인했다. 민심은 아직 썩 좋지 않았다.

-수작 부리지 말고 폐국 ㄱ

-저렇게 아낄 거였으면 처음부터 방송 관리를 잘 했어야지.

ㄴ 편집은 제작진 권한인데 그걸 어케 암?

ㄴㄴ 득표수가 수상하단건 알았어야지.

ㄴㄴㄴ 니는 지금까지 알았냐?

-뭔 참가자들이야. 자기 돈과 시간이 아깝겠지.

ㄴ 그걸 몰랐다는 것도 수상함.

바로 화면이 또 바뀌었다. 나와 재호, 그리고 애드리아나의 인터뷰였다. 윤결 작가와 진행했었다.

질문이 자막으로 깔렸다. ‘조작이 사실로 인정되었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내가 답했다.

“참담했죠. 제가 먼저 의문을 제기했지만 아니길 바랐습니다.”

이번에는 재호 차례였다.

“저는 기획사도 없구. 이번 시즌에서 보여드리려구 준비도 많이 했는데. 그걸 보여드릴 수 없겠다는 생각에 우울해지더라구요.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지만…”

워낙 평소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던 재호였다. 덕분에 약간 힘이 없는 목소리임에도 한층 침울해 보였다.

다음 질문이 깔렸다. ‘앞으로 오디션 진행에 의견이 있는지?’

이번에는 주환희가 답했다.

“가능하다면… 연관이 없던 사람들끼리 해쓰면 좋게써요. 제게… 이번 시즌, 놓치기 싫은 기회여서요.”

문루아의 답변이 이어졌다.

“피해 보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생각해요. 특히, 석연치 않은 탈락이 확인된 애드리아나는요. 득표수가 아예 안 맞았다면서요?”

분명 대본 없이, 그냥 자기 의견을 토해낸 인터뷰였다. 노경진 PD는 이들의 말을 묶어 절묘하게 서사를 만들어냈다. 그의 실력에 감탄하면서 나도 방송에 빠져들었다. 심지어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데도 그랬다.

자연스럽게 인터뷰는 애드리아나로 교차되었다. 화면에 잠깐, 1초 정도 LA 공항이 깔렸다. 애드리아나가 미국에 있다는 소개였다.

“Hello.”

자막에 질문이 깔렸다.

‘슈퍼스타 T에 다시 참여 요청을 했는데 어떤지?’

애드리아나가 곤란한 듯 대답했다.

“정말 감사했어요. 물론 억울하게 떨어졌지만. 바로 보상을 해주신 거니까요. 오히려 이게 제 가수 인생에 도움이 될 거 같단 생각도 해요. 너무 Selfish 한가요?”

자막이 다시 깔렸다. ‘참가를 고사했는데 이유는?’

화면에는 애드리아나가, 흑인들과 함께, 4인조로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이 깔렸다.

“오디션이 끝나고, 언니들이 도와달라 해서요. Try out 했어요. 근데… 제가 좀 노래를 잘하잖아요? 바로 Accept 됐어요. 이 팀에는 제가 필요해요. 이 팀을 버리고 돌아갈 순 없었어요.”

자막이 한 번 더 나왔다. ‘슈퍼스타 T 시청자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많은 사랑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러분 덕분에 구제를 받게 된 거 같아요. 당분간 한국에서 볼 수 없겠지만, 다시 보게 되면 저도 응원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슈퍼스타 T도, 많이 응원 해주세요! Thank you very much!”

-언니 나죽어

-애드리아나만 억울한거 아님?

ㄴ 모르는 소리 하지 마. 글로벌 비전이 뭔지 알아?

ㄴㄴ 덕분에 헬조선 탈출 완료한거임.

ㄴㄴ 세계 최고 오디션이라 들었음.

ㄴㄴㄴ 서울대 떨어졌더니 하버드 붙은 격이네.

인터넷 반응은 한층 누그러져 있었다. 냉소적인 반응은 있었지만, 욕설은 거의 사라졌다. 특히 석연치 않게 탈락한 피해자 애드리아나의 인터뷰가 좀 도움이 된 것 같았다.

다시 화면이 전환되었다. 수트 차림의 천채왕 심사위원이, 텅 빈 슈퍼스타 메인 무대에 걸어 들어왔다. 핀포인트 조명 하나 외에는 암흑이었다.

“우선 방송에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방송에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모두 제 불찰입니다.”

그리고 천채왕 심사위원이 90도로 카메라에 대고 인사했다.

“솔직히. 이런 방송 그냥 때려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참가자들의 간절한 요청이 아른거렸습니다. 취소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계속하는 것이, 피해를 본 참가자들에게 보답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부분은 나도 알고 있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은 굳이 이 프로그램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참가자를 위해 하는 일이었다.

“약속을 받았습니다. 앞으로 ‘슈퍼스타’시리즈는 더는 없습니다. 이번이 마지막 시리즈입니다. 그리고 이번 시리즈에는, 그 어떤 조작과 결과 변형도 없을 것임을 저, 천채왕이 약속드립니다. 저희 회사의 명예를 걸고 말씀드립니다. 앞으로는 모든 공정에 제가 직접 참여하고, 검수하여 어떤 문제도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천채왕 심사위원이 손으로 허공을 가리켰다. 화면이 켜지면서 룰 설명이 나왔다.

“앞으로 3주간, 3번의 생방송 경연을 진행하겠습니다. 무혐의가 확인된 4명의 참가자, 문루아, 주환희, 원재호, 그리고 권노을 참가자들이 모두 참여합니다. 끝까지 탈락자는 없습니다. 3번의 경연에 평균을 내서, 최고의 가수를 뽑겠습니다. 마지막 날은 재미를 위해 대결을 두 번 진행해서 가산점을 주겠습니다.”

화면에서는 그래픽으로 한눈에 룰을 설명하고 있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장의 설명이 끝나자, 갑자기 화면이 암전되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의 목소리만 남았다.

“그럼 지금부터, 오늘은 자랑스러운 4명의 참가자들의 여정을 함께 감상하시겠습니다. 아, 그리고 아쉽게 우리와 함께하지 못한 애드리아나도요.”

그렇게 화면은 바로 문루아로 넘어갔다. 5명의 참가자의 그간 여정을 처음부터 보여줄 모양이었다. 참가자의 서사를 보여주면서, 조작 사태로 인해 떨어진 참가자들을 자연스럽게 편집에서 아웃시킬 수 있는 좋은 시도였다.

‘이미 오디션에서 벌어졌던 일을 다 아는 나에게는 좀 심심한 방송이지만 말이야.’

문루아는 첫날, 라멘집에서 매니저를 만났다. 오디션 참가 전 긴장을 풀기 위한 의식으로 보였다.

나는 이미, 그 장면에서 방송에 집중할 수 없었다.

라~~~~ 면~~~~~

갑자기 엄청난 식욕이 나를 엄습해왔기 때문이었다.

“라면… 먹고 싶다!!!”

무언가가 내 머릿속에 크게 외쳤다.

* * *

‘이게 mp3가 경고했던 그 배고픔이구만.’

설마 설마 했는데, 실로 엄청난 배고픔이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의 조언이 떠올랐다.

<차라리 식욕을 무슨, 악령에 씌였다던가 귀신이라던가, 여튼 남이라고 생각하세요. 하하! 무슨 미신이 아니라, 그렇게 ‘이 식욕, 욕망은 내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훨씬 쉬울 겁니다.>

이미지 트레이닝 해둔 대로, 정신을 집중했다. 내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놈, 이윤강의 목소리로 바뀌는 걸 상상했다.

“라면… 먹고 싶슴다!”

일단 욕망을 타자화하고 보니, 한결 여유롭게 대응이 가능했다. 일단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천채왕 심사위원의 다이어트 비결 넘버 원은 ‘무조건 직접 요리해서 먹어라’였다. 그래야 내가 뭘 얼마만큼 먹었는지 알 수 있다 했다.

라면 수프를 끓는 물에 넣었다. 그리고 준비해둔 곤약 면과 계란을 잔뜩 넣었다. 대충 라면과 비슷한 비주얼의 음식이 완성되었다.

“이런 건 라면이 아님다! 라면을 주세요. 헤헤…”

머릿속의 식욕이 생떼를 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라면을 위장에 쳐넣었다.

“으윽~~”

머릿속에서 식욕이 줄어드는 게 보였다. 100%의 식욕이 55%? 절반 조금 못 미치는 정도까지 줄어들었다. 아직 멀었다.

‘역시 계란만으로는 모자라나.’

내 몸은 탄수화물을 갈구하고 있었다. 지금은 탄수화물이랄게 없었다. 오로지 계란과 곤약 뿐이었다. 흰 쌀밥을 국물에 말아서 촥촥 먹으면, 그만큼 행복할 게 없을 거 같았다.

바로 지전차피를 꺼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추천한 음식 중 하나였다. ‘실리엄 허스크’라 불리는 일종의 씨앗 가루였다. 물에 1티스푼을 넣어 흔들어 마셨다.

“이… 이건 또 뭠까!!!”

내 몸이 혼란스러워하는 게 느껴졌다. 배가 고파 죽겠는데 왠 물이란 말인가. 마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의미가 분명해졌다.

위 속에서 서서히 실리엄 허스크가 물을 흡수해 팽창했다. 배가 불러오는 모습이 내게도 느껴졌다.

“꾸에에…”

서서히 물고문을 당하듯 식욕이 사라졌다.

거의 끝나갔다. 하지만 아직 끝은 아니었다. 내 안의 목소리가 안타깝게 내게 읊조렸다.

“튀김… 튀김 하나 정도 괜찮잖슴까?? 라면 먹고 디저트 하나 정도는…”

마지막으로 기름기를 요구했다.

“기름기… 기름기… 먹고 죽은 귀신이 기름기가 좔좔 흐름다…”

기름기를 원한다면 기름을 부으면 됐다. 바로 준비해둔 올리브 병을 땄다. 그리고 생올리브 유를 한 숟갈 입에 털어 넣었다.

“키엑?”

천채왕 심사위원이 준 꿀팁이었다. ‘배고플 때는 차라리 올리브유를 한 숟갈 먹어라.’

신기하게도 배가 가라앉았다. 식욕을 길들이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멈출 생각은 없지.’

바로 올리브유 한 숟갈을 더 털어 넣었다. 그리고 또 한 숟갈. 느끼해서 식도에서부터 기름기가 느껴질 때까지 마셨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사이 미지근해진 라면 국물에 다시, 계란을 3개를 풀어 넣어 마셨다.

“그 그만… 더 이상은 무림다!”

멈추지 않고, 계속 먹고, 먹고, 또 먹었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 상상 속의 식욕은 폭파되었다.

“끄아아아아… 악.”

배가 불렀다. 보통 이 정도 먹으면 다음 날 몸무게가 걱정이었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안 먹으려고 하지 마세요. 몸에 안 좋은 걸 안 먹으면 됩니다. 몸에 좋은 걸 대신 드세요. 그러면 괜찮아요.]

입가심으로 견과류를 먹으며 천채왕 심사위원의 말을 떠올렸다. 앞으로도 이런 원칙을 지키면 별문제 없이 체중을 지킬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끝내지 않았다. 바로 소파에 편하게 앉은 채로 ‘위버멘쉬의 회복력’을 사용했다.

30분간 수면으로 체력과 ‘의지력’을 완벽하게 회복한다.

그렇다 의.지.력.도. 회복된다.

쿨~~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잠이었다. 야식보다 달콤했다.

* * *

그렇게 30분이 지나자, 식욕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Mp3의 경고 메시지도 완전히 사라졌다.

‘다행이야.’

일단 한숨 돌렸다. 앞으로는 지금 내 몸무게를 유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긴장이 쭉 풀렸다. 이제야 TV에 다시 집중이 되었다.

방송은 어느새 내 출연분으로 넘어가 있었다. 마이크 넬슨의 노래를 부르는, 마지막 무대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이게 나구나.’

녹화된 내 무대는 언제나 낯설었다. 마음에 안 드는 버릇이나 표현, 호흡이 보였다. 실수도 조금씩 보였다. 앞으로 익숙해져야 했다.

다행히 반응은 좋았다.

-대박이다 진짜.

-오빠 나죽어

ㄴ엉엉 날 가져요.

ㄴ지금 안 들은 귀 갖고 싶다. 처음으로 들을꺼 아니야.

-원곡자보다 잘 부르는거 아님?

흐뭇하게 인터넷 반응을 모니터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ㄴㄴ 뭘 잘함? 원곡 망치네. 놀고 자빠졌다.

-꼭 저렇게 힘을 꽉 줘서 불러야 해? 부담스러운데?

-아 야밤에 저런 노래 듣고 어떻게 잠이 드냐. 어우~ 느끼함.

갑자기 인터넷 사이트에 악플이 도배되기 시작했다.

‘뭐지? 내 노래에 무슨 문제가 있었나?’

아니, 딱히 내 무대에 큰 문제는 없다 보는 게 맞았다. 전문가 심사위원진들은 흡족해한 무대였다.

다시 자세하게 홈페이지를 살펴봤다. 그제서야 이유가 보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