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33화 (33/280)

제33화

‘왜 이분이 여기에?’

최갑경 CEO를 뒤따라 천채왕 심사위원이 들어왔다. 둘이 함께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갑자기, 느닷없이 최갑경 CEO가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재호가 손사래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님, 왜 이러세요. 부담스럽게.”

애드리아나는 눈을 크게 뜨고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도 일단 관망하기로 했다.

최갑경 CEO가 말을 이어갔다.

“방송에 신뢰가 훼손되었음을 확인했습니다. 폐사 직원의 불공정한 정황이 포착되었습니다. 이윤강 PD 및 기존 제작진은 제보자들 일부를 제외하고 모두 직위 해제 처리했습니다.”

다행히 노경진 PD와 윤결 작가는 그대로 제작진에 남을 모양이었다. 그들과 미리 접촉한 보람이 있었다. 기존 제작자들 중 믿을만한 사람이 없었다면 훨씬 방송을 지속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최갑경 CEO가 말을 이어갔다.

“모두 회사의 실패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저의 실패입니다.”

여전히 사무적이고 효율적인 말투였다. 하지만 그 안에는 미안함이 분명 깃들어 있었다.

나 외에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미리 미래를 알고 준비했던 내가 대화를 이끌어 갈 타이밍이었다.

“슈퍼스타 T는 앞으로 어떻게 됩니까?”

최갑경 CEO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취소도 고려했습니다. 하지만 참가자들과 시청자들에게 못 할 짓이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향후 오디션은 TYB 주도로, 저희 회사는 서포트만 하며 진행할 예정입니다. 신규 제작진을 빠르게 TYB 주도하에 충원했습니다. 그들이 원본 필름을 다시 기획하고 편집하고 있습니다. 방송을 재개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릴 거 같습니다.”

재호가 입을 열었다.

“왜 저희 셋에게만 이 이야기를 하신 거죠?”

묵묵히 듣고만 있던 천채왕 심사위원장이 오늘 처음 입을 열었다.

“문루아 양과 주환희 군은 TYB 소속입니다. 회사 책임자 입장에서 제가 직접 방금 해당 내용을 전달하고 오는 길입니다. 여기 세 분과 내용은 같았습니다. 입장은… 조금 달랐을 수 있지만요.”

재호가 되물었다.

“다른 사람은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다시 감정을 숨긴 상태로 말을 계속했다.

“다른 참가자들은… 말씀드렸다시피 TOP 11 모두가 이윤강 PD와 어떻게든 엮여 있었습니다. 편집에서 잘 봐주고, 거래를 하는 정황들도 포착되어 알아보는 중입니다. 해서, 고심 끝에 이분들은 모두 탈락 처리하고, 방송에도 완전 편집하기로 했습니다.

“뭣…”

재호와 애드리아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이전에도 짐작으로 말은 했지만, 사실로 확인이 되니 충격인 모양이었다.

내게는 아니었다. 이미 수백 번도 넘게 시사 취재 프로그램으로 확인한 내용들이었다.

이윤강 PD는 중대형 기획사를 갖은 수로 섭외했었다. 연습생이나 소속 가수를 출연시키면, 일정 분량을 보장하겠다는 약속은 예사였다. 심지어 특정 결과를 약속한 경우도 있었다. 납득이 가지 않은 결과 조작, 과정 조작은 모두 그런 거래의 결과였다.

TYB만은 그런 거래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기획사가 없었던 참가자가 오늘 모인 셋이었다. 확인 결과, 그 외에는 TOP 11 모두가 제작진과 기획사의 거래를 통해 통과한 참가자들인 셈이었다.

‘노래만으로 승부한다는 둥. 유전 유죄 무전 무죄를 없앤 유일무이한 기적이라는 둥. 온갖 미사여구를 늘여놓았지만. 사실은 자기들이 가장 불공정했지.’

이전 생에서는, 너무 늦게 문제가 밝혀졌다. 이번에는 아니었다. 너무 늦지 않게 밝혀져서 다행이었다.

그사이 감정을 얼굴에서 걷어 낸 천채왕 심사위원이 참가자들에게 말을 걸었다.

“방송에는 어디까지 공개할지 모르겠습니다. 대가성이 있는지 증명하는 게 쉬운 건 아니더라고요. 법적인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솔직하게 내보낼까 합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윤강 PD가 유흥업소를 매번 갈 정도로 허술한 사람이었지만, 매달 핸드폰을 폐기처분 할 정도로 치밀한 사람이기도 했다. 막상 조작을 다 공개하면 명예 훼손의 여지가 생길 수 있었다.

내게는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지만 말이다.

천채왕 심사위원은 다시 얼굴 표정을 풀고 말을 이어나갔다.

“최갑경 CEO님은 사실 굳이 안 오셔도 됐는데요. 꼭 피해를 본 참가자들에게 사과하고 싶다고 하셔서 부득이하게 이렇게 모시게 됐습니다.”

최갑경 CEO 또한 서둘러 덧붙였다.

“프로듀서님께서 이렇게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시 한번 정말 죄송합니다.”

여전히 걸어 다니는 에르메스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고급스러운 차림이었다. 그래도 느낌은 달랐다. 오늘은 어째 지난번보다 한층 저자세였다. 아무래도 천채왕 심사위원이 이번 건을 목표로 오너였던 최갑경 CEO를 크게 압박한 모양이었다.

아무리 천채왕 프로듀서가 가요계의 제왕이라 해도, 그래 봐야 TYB는 중견 기업에 불과했다. 한국 최강의 가문의 혈통인 최갑경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이렇게까지 압박할 수 있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장의 힘이었다. 문화의 힘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이제는 천채왕 프로듀서의 사과 차례였다.

“이번 오디션으로 피해를 본 세 분에게 저도 정식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90도를 넘어 거의 큰 절에 가까운 인사를 우리에게 했다. 이번에는 우리 셋 모두 일어섰다.

“아이구 심사위원장님.”

“Sir! 선생님도 속으신 거잖아요!”

천채왕 심사위원은 인사를 마치고 차분하게 앉아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어찌 보면 이번 오디션은 제 이름값을 믿고 올라 오신 건데. 이런 일이 생기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제가 철저하게 관리해서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의 진행 방향은 제가 책임을 지겠다는 약속을 드립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장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단호해 보였다. 믿음이 갔다.

이후 천채왕 심사위원장은 앞으로의 계획을 브리핑했다.

앞으로 3주간 방송을 쉬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슈퍼 캠프 이후에 모든 내용을 재편집하기로 했다. 솔직하게 지금까지 나왔던 문제를 방송으로 공개하기로 했다.

이후에는 이와 관계없던 다섯 후보만 가지고 세 번의 대결을 하겠다 했다. 세 번 대결의 평균 점수를 내서 우승자를 정하되, 마지막 대결은 두 번 해서 마지막 날의 가중치를 둘 예정이었다.

모두 상식적인 대응책이었다.

“…이상입니다. 혹시 의견이 있으신가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말을 마치고, 우리에게 공을 넘겼다.

나와 재호는 이견이 없었다.

“없습니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애드리아나만 묵묵부답이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물었다.

“애드리아나 양?”

“죄송해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인위적으로 보일 정도로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금 상황이 굉장히 짜증 나고 화가 나지만, 피해자들 앞에서는 그 티를 안 내려 노력하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가요 애드리아나 참가자님? 문제가 있으면 말하셔도 됩니다. 득표수 조작으로 탈락까지 경험하셨어요.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겠죠.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애드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너무 감사해요. 그게 아니라…”

애드리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누구도 없는 허공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탈락한 다음에, 미국에 사는 sister들이 같이 재미있는 거 해보자고 해서 쉬카고에 갔었어요. 거기에서 대회에 참가했는데. 그사이에 예선을 통과해서요. …그 팀, 제가 없으면 끝이에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기회가 있다면 보내 줘야죠. 무슨 대회인가요?

“글로벌 비전 송 콘테스트? 라는데요. 혹시 아세요?”

천채왕 심사위원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까지 본 모습 중 거의 제일 놀란 거 같았다.

“무조건 가야죠! 정말 축하해요. 꼭 미국 대표됐으면 좋겠네요. 핫핫 이거 애드리아나 양 입장에선 전화위복이네요. 저희 회사만 큰 손실입니다만.”

천채왕 심사위원의 태도를 보고 재호한테 슬쩍 물어봤다.

“글로벌 비전이 뭐야?”

재호가 황당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걸 몰라? 세계 최대 음악 대회잖아!”

“그런 게 있었나?”

그러고 보니 가끔 이름을 들어본 거 같긴 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애드리아나와 흥분해서 말하는 사이 재호가 내게 글로벌 비전이 얼마나 대단한 대회인지 열변을 토했다. 전 세계에서 매년 여는 세계 최대의 음악 대회인 모양이었다.

‘뭐 그래 봐야 오디션인데 뭐.’

그래도 세계로 벌써 진출한다니 놀라웠다. 갑자기 애드리아나가 부러워졌다. 한국 오디션에서 탈락했지만, 덕분에 먼저 세계 무대로 진출하는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언젠가 나도 세계 무대로 설 수 있으리라 다짐했다.

하지만 일단은 국내 최고가 되는 게 먼저였다.

“자, 여기에 사인하시면 두 분은 슈퍼스타 T에 참여하시게 되는 겁니다.”

국내 최고 가수가 되는 발판이 될, 슈퍼스타 T 출연 계약서에 다시 서명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내 손을 꼬옥 잡고 악수했다.

“고맙습니다 노을 군.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두 분, 언제든 고민 있으면 전화하세요. 기획사 사장이 아니라, 아는 선배 입장으로 받겠습니다.”

“네넵!”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이제 천채왕 심사위원이 친근해졌다. 처음에는 성공한 사람으로 멀게 느껴졌다. 이제는 오래 알고 지낸 친척 어른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한국 음악계의 제왕, 천채왕과의 관계, 어쩌면 그게 오디션 우승만큼이나 값진 성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TYB와 미팅이 끝나고, 애드리아나는 미국으로 귀국할 준비를 위해 서둘러 귀가했다. 재호와 둘이 남았다. 마침 딱 점심을 먹기 좋은 시간이었다. 재호가 먼저 제안했다.

“오랜만에 둘이서 식사라도 할래?”

“좋지.”

그러고 보니 오디션 시작 후에는 재호와 단둘이 볼 일은 거의 없었다. 항상 주환희 등 다른 누군가가 함께 있었다. 하긴, 심지어 동생이랑도 방송이 중지가 되니까 겨우 같이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친구와 단 둘이 있기도 힘들었다. 이게 연예인의 삶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무래도 메뉴는 더 까다로운 사람이 고르는 법이었다. 재호는 보기만 해도 건강해 보이는 샐러드 집을 골랐다. 재호는 올리브 오일과 비네거를 곁들인 새우 샐러드를, 나는 그린 샐러드를 곁들인 연어 샌드위치를 골랐다. 딱 봐도 재호 음식은 정말 적어 보였다.

“그거 먹고 되냐?”

“점심은 말야. 그냥 점을 찍는 식사라 점심인 거라구.”

“그래서 체력이 유지가 되냐?”

“오늘 저녁까지 다 정해둔 계획대로 되고 있으니까 걱정 마.”

그러고 보면 재호는 칼로리까지 분 단위로 계산하는 놈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도통 재호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조작 사태에 방송 녹화 중단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겪고 있으니 더욱 그랬다. 유독 재호가 피곤해 보이는 게 이해가 됐다.

재호가 샐러드를 우물거리며 말했다.

“천채왕 선생님, 전화번호 주셨더라. 아무한테나 주는 건 아니겠지?”

“그러게.”

그러고 보니 천채왕 심사위원이 전화를 직접 거는 대상이 많을 리 없었다.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재호가 나직하게 물었다.

“전화도 못 할 텐데.”

“왜?”

“너는 할 거야?”

“뭐, 필요하면 못할 것도 없지.”

“부담스럽잖아.”

“뭐가?”

재호는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뭐 사람마다 다른 법이니까.”

그렇게 뜻 모를 말을 하고 재호는 다시 샐러드를 먹기 시작했다.

하긴 뭐 취향이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가요계의 제왕인 사람, 그것도 60대의 사람하고 마음 편하게 이야기하기도 아무나 할 수는 없는 일인 모양이었다.

…내 정신 연령이 사실 20대 초반이 아니라 더 쉬운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였다. 언제나처럼 얌전하게 샌드위치를 물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허기가 몰려왔다. 그와 함께 주머니에서 mp3가 엄청난 진동을 울리기 시작했다.

‘뭐지?’

재호에게 양해를 구하고 바로 화장실로 뛰어 들어갔다. Mp3 화면을 켰다.

화면에는 경고 알람이 크게 띄워져 있었다.

[경고! 다이어트 후 100일이 지났습니다. 최후의 시련을 맞이하십시오.]

‘또 뭐야?’

[이번 시련을 이겨내지 못하면, 다시 원 체중으로 돌아가는 요요 현상이 올 수 있습니다.]

‘다시… 110kg 시절로 돌아가라고?’

그것만은 안 될 일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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