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2화
오민수 앞에 성큼 걸어갔다.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오민수가 능글맞게 물었다.
“왜 그래요 보컬 천재님. 뭐 할 말 있어요?”
오민수는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빛은 살짝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곧 쓰나미가 될 예정이었다.
“제작진이 좀 문제가 생긴 모양이던데요.”
“그래요?”
오민수 표정이 떨떠름했다. 제작진과 짝짜꿍하던 참가자였으니 그럴 법했다.
하지만 뭐 이 정도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뭐, 제작진과 특정 기획사의 관계가 문제가 되었던 모양이던데요?”
오민수 눈이 더 크게 흔들렸다.
싱긋, 하고 웃었다.
“뭐, 저희들이랑은 큰 상관 없는 일이니까요. 그럼 전 갑니다.”
오민수는 망연자실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사실 거짓말이었다. 기획사와의 관계가 문제가 된 건 아니었다. 핵심은 조작 논란이었다. 아마 앞으로 조작의 이유를 살펴보면서, 자연스레 기획사와 이윤강 PD의 관계가 문제가 될 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걸 조금 앞서가서, 미리 알려줬다. 미래에 다가올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그에게 다가갈 것이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라는 고통이.
불쌍한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기획사의 라인을 이용해서 오디션을 마음껏 우롱했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를 차례였다.
혼자서 하는 설거지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 * *
일정을 마치고 방에 돌아왔다. 어느덧 잘 시간이었다. 재호는 샤워를 끝냈는지 머리를 꼼꼼히 헤어드라이기로 말리고 있었다. 주환희는 자기 텐트에 들어가서 랜턴을 키고 뭔가를 부스럭대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내게 특별했다. 그들에게 곧 다가올 미래를 알려주고 싶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비밀로 지켜달라 부탁한 부분을 제하면 문제는 없어 보였다.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불렀다.
“재호야. 쭈?”
둘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왔어요 횽?”
“여어.”
둘 다 뭔가 다른 일에 몰입하고 있었다.
“할 말이 있어.”
“얘기해.”
둘 다 태평했다. 그야 내가 앞으로 무슨 말을 할지 몰랐으니 그럴 만했다.
문을 잠갔다. 혹시라도 오민수나 다른 조작 연관자가 듣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조연출님이랑 확인해봤는데, 조작 맞는 거 같아.”
갑자기 재호가 벌떡 일어나 창문에 커튼을 쳤다. 주환희도 텐트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두 사람에게 간단한 상황을 모두 설명했다. 사건의 경위부터, 이를 이윤강 PD 앞에서 천채왕 심사위원에게 말한 이야기까지 모두 전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오디션은 끝내지 않겠다’고 약속한 부분을 제외하곤 모두 말했다.
주환희는 절망했다.
“이 오디션… 끝난 거겠죠? 나도… 끝난 거 같아요.”
내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야야. 왜 또 그래.”
하지만 주환희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은 듯했다.
“이게 마지막 기회였어요. 제가 먼저 수상하다고 했지만. 경고의 의미 정도로 끝날 거라 생각했죠. 설마 이 정도일 줄은…”
“쭈…”
뭔가 내가 아직 모르는 복잡한 사정이 주환희에게 있는 모양이었다. 차마 주환희에게 ‘천채왕이 오디션은 멈추지 않을 거라 말했다’라고 말은 할 수 없었다. 위로하는 게 최선이었다.
“야 너는 기획사도 좋잖아. 그리고 오디션 이미 많이 방영됐잖아? 함부로 방영 중단이 되진 않을 거야.”
주환희는 고개를 저었다.
“선생님 성격에… 이런 문제랑 타협하실 거 같지는 않아요. 각오해야죠.”
재호는 묵묵히 머리를 빗으며 침묵을 지켰다. 마음의 준비를 하는 모양이었다.
또 이야기해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기회를 봐서 몰래 문루아에게도 사건 경과를 말해주었다. 문루아는 주환희처럼 크게 감정이 변하지는 않았다.
“그랬군요.”
너무 태연해서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
“침착하시네요?”
“천채왕 선생님께 통화로 뭔가 이상하다고 말했잖아요? 이 정도는 각오했죠. 일본이나 구룡도에서는 더한 일도 겪었는데요 뭐.”
문루아는 별 것 아니란 듯 무심했다. 이게 경험의 차이란 건가 싶었다.
그렇게 내가 말해야 할 모든 이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누군가는 절망했고, 누군가는 사색에 잠겼으며, 누군가는 태연했다. 나는 mp3로 미래를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렇게 누군가는 잠 못 이룰 새벽이 지났다.
* * *
다음 날 새벽. 일어나서 몰래 2층 베란다로 나갔다. 누구 눈치도 안 보고 마음껏 mp3를 보기 위해서였다.
“어?”
베란다에는 낯익은 녀석이 있었다. 머리를 포마드로 깔끔하게 다듬지 않고, 렌즈를 끼지 않아서 잘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주환희였다. 옷도 뭔가 후줄근했다.
“여어! 쭈!”
“아 형이에요?”
‘얘 뭔가 말투 바뀐 거 같은데.’
지금 그런 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일단 녀석 옆에 앉았다. 최대한 따뜻하게 말을 걸었다.
“잠 못 잔 거야?”
“자다 깨다 했어요. 고민이 많다보니까…”
주환희가 말을 하며 마른세수를 하는 시늉을 했다. 잠도 자지 못한 듯했다.
“이번 오디션이 마지막 기회라는 게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예요 형.”
“너 여기서 성과 없으면 잘린다고? 설사 그게 제작진 탓이라도?”
“아~뇨! 누구도 그렇게 말한 적은 없죠. 그래도 감이란 게 있잖아요.”
“그 감이 니가 이번에 인기를 못 얻으면 끝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죠.”
주환희는 말을 하면서도 슬픈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산골짜기라 그런지 벌써 해가 서서히 뜨고 있었다.
주환희를 뚱하니 쳐다봤다. 말투만 바뀐 게 아니었다. 표정도 항상 까불대고 장난기 있던 ‘인싸’의 모습이 아니었다. 뭔가 어두우면서 진정성 있는 아싸의 얼굴이 되었다.
평소에는 차마 물어보지 못한 질문도, 왠지 지금의 주환희에게는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애초에 쭈 너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인재야.
주환희가 눈을 크게 떴다. 이내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곤 나지막하게 말했다.
“…고마워요 형.”
‘이놈, 진짜 말투 어떻게 된 거지? 태도는 어떻고? 꼭 다른 사람 같은데?’
궁금증을 꾹 참고, 말을 이어갔다.
“노래도 엔간한 전문 보컬리스트 쌈 싸 먹는 수준이고. 작사 작곡도 수준급이고. 그렇게 오래 연습생을 했는데, 춤도 팀 무대를 망칠 정도로 못 할 거 같지는 않고. 몸도 좋고. 대체 뭐가 문제야?”
주환희는 씁쓸한 미소를 띠며 듣고만 있었다.
이왕 말한 거, 차마 하지 못한 말 한마디를 더했다.
“…설마, 여자 문제냐?”
“하하!”
주환희가 크게 웃었다. ‘설마요’하는 느낌의 표정이었다.
“그거… 아니었어?”
“지금까지 그거라고 생각한 거예요? 제가 여자 만나고 다녀서?”
그를 봤던 첫날, 외국인 여성과 찐하게 키스를 하던 주환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첫날부터 외국인분하고… 그러고 있었잖아? 나랑 재호는 당연히 그게 문제일 거라 생각했는데?”
“형~ 아이돌 팬덤 그렇게 빡빡한 사람들 아니에요? 연애하는 티 안 내면 뭐 죽이진 않아요. 우리 회사도 티 안 내고 연애하는 사람 많아요.”
살짝 항의하는 톤이었다.
“그럼… 뭐야?”
주환희는 하늘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천천히 내게 얼굴을 돌렸다. 항상 하던 포마드 머리가 단정하게 내려와 있었다. 콘택트렌즈 대신, 지적인 느낌의 큰 뿔테 안경을 썼다. 분명 같은 사람인데…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게…”
그때였다.
“노을 군~ 벌써 일어났어요? 어이구! 환희도 있네?”
소리가 있던 마당으로 시선을 내렸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어느새, 베란다 앞마당에 와 있었다.
그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 잠깐 숙소 거실로 내려오세요. 문루아 양과 원재호 군도 함께.”
* * *
거실에 4명이 내려왔다. 뭔가 느낌이 싸했다. 뭔가, 하룻밤이 지난 사이에, 집이 텅 빈 거 같은 느낌이었다.
“꼭두새벽부터 불러서 죄송합니다. 잠깐 탁자에 앉으시죠.”
비원더 3인과 문루아가 자리에 착석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단도직입으로 말했다.
“노을 군이 어제 이야기 해줬죠?”
재호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네…”
“어젯밤에, 저희 회사가 조금 연구를 해봤습니다. 이윤강 PD, 별로 조심성은 없더라고요? 조작도 조작인데, 특정 기획사들과 너무 가깝게 지냈어요.”
내가 물었다.
“가깝게 지냈다고 하시면…?”
“방송 온 에어 직전까지 유흥업소에 갔다 사우나에서 잠깐 쉬고 출근하기를 반복했더라고요? 말은 그냥 놀기만 했다고 하는데요. 누가 그걸 믿겠어요?”
천채왕 심사위원장의 함의를 알 것 같았다.
사실, 오디션 프로 CP는 접대도 업무다.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한 업무일지 몰랐다. 대개 CP는 프로의 디테일을 볼 시간은 없었다. 오히려 편집에 꼬치꼬치 관여하는 이윤강 PD가 별난 인간이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느낌일 터였다. CP는 기획사 임원과 술자리를 해서라도 친해져서 유망주를 방송에 섭외했다. 이를 위해서 술자리도 필수 요소였다, 라고 이윤강 PD는 말할 수 있었다.
원래는 그럴지 몰랐다. 하지만 지나치게 적극적인 조작 행위가 밝혀진 지금은 달랐다. 같이 술을 마셨던 기획사의 소속 연예인이 조작으로 인해 혜택을 봤다면 어땠을까? 꼼짝없이 접대의 대가로 등수를 준 셈이 되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장이 말을 이어갔다.
“여튼 저는 복잡한 걸 싫어해서. 일단 이윤강 PD의 접대와 아무 상관이 없는 4분만 숙소에 남기고 전부 귀가 조치했습니다.”
다들 무언으로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하룻밤 사이에 숙소에 인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애초에 탑 11명 명 중, 이윤강 PD와 관계없는 사람은 4명뿐이라는 점은 또 새로웠다. 사실상 TYB 소속 가수 두 명과, 무소속인 나와 재호 외에 모든 출연자가 이윤강 PD와의 접대 관계로 엮여 있는 사람들인 셈이었다. 놀랄 노 자였다.
누구도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할 때, 문루아가 말을 꺼냈다.
“선생님.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천채왕이 90도로 고개를 숙였다. 가요계의 제왕의 뜬금 인사에 모두 숙연해졌다.
“일단, 이 방송의 책임자로서, 참가자분들께 죄송한 마음입니다. 사과드립니다. 그리고…”
천채왕 심사위원이 나를 슬쩍 쳐다봤다. 싱긋, 하고 웃기도 했다. 이 무거운 주제로 이야기를 시작한 뒤로 첫 웃음이었다.
“그리고 노을 군에게는 고맙구요. 덕분에 큰 화를 면했네요.”
“아, 아닙니다!”
왠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화급히 답례 인사를 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다시 말을 이어갔다.
“아직, 어떻게 할지는 정하지 못했습니다. 4분 참가자분, 저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십시오. 네 분에게 폐는 끼치지 않겠습니다. 그건 보장합니다.”
주환희가 크게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보였다. 안도한 모양이었다. 환희는 물론 모두 감사의 표시를 했다.
“감사합니다!”
천채왕에게 감사 인사를 하는 주환희는, 다시 어느새 내가 알던 평소의 그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왜 기분이 좋아졌는지 알 것 같았다. 주환희는 이번 오디션을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그리고 방금 전까지 그 오디션이 끝나는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천채왕 심사위원장은 속행하겠다고 약속했다. 아직 주환희의 가수 인생은 끝나지 않았다.
‘…사실 저 녀석을 TYB가 함부로 버릴까 의심스럽기는 한데. Mp3를 살펴봐야겠어.’
집으로 가기 위한 짐을 싸는 동안 슬쩍 주환희에게 떠봤다.
“환희 너, 잘됐네? 코인 하나 남았다?”
“그러게요 횽.”
주환희가 실실 웃으며 대답했다. 능글맞은 것이, 내가 늘 알던 그 주환희였다. 그 모습을 보니 어젯밤부터의, 담백하고 진지했던 주환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너 나한테 하려는 말 뭐였어?”
“아 횽, 별거 아녜요. 신경 쓰지마요.”
“아, 그냐.”
…어째 주환희 이 녀석, 뭔가 보기보다 복잡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집으로 귀가한 후, 1주일을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mp3를 나침반 삼아, 마음껏 능력치를 올리고 다듬었다. (평균 능력치는 어느새 A에 육박해 있었다.) 오랜만에 동생을 집으로 불러 함께 식사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보람찬 1주일이 지나고, 천채왕 심사위원의 연락이 왔다. 그렇게, 처음으로 TYB 본사로 초대를 받았다.
TYB 회의실이라고 특별히 다를 점은 없었다. 유독 TYB 소속 가수들의 CD가 가득 담긴 수납장이 있다는 점과 좋은 스피커와 악보 고정대가 있었다는 점 정도 독특했다. 회사에 국룰인 하얀 책상과 의자에서 뻘쭘하게 서 있었다.
나 말고 손님은 딱 두 명밖에 없었다. 재호와 애드리아나였다.
내가 먼저 애드리아나에게 인사를 했다.
“애드리아나 오랜만이네.”
“오빠도 Long Time No See. 오랜만이야.”
“어떻게 왔어?”
“I Don’t Know. 갑자기 회사서 Call이 왔어.”
그때 갑자기 회의실 문이 열렸다. 당연히 천채왕 심사위원이나, 다른 TYB의 직원이 올 거라 예상했다.
전혀 아니었다.
“안녕하세… 헉!”
CF 미션에서 봤던, 굴지의 대기업 소행 그룹 오너 최갑경 CEO가 불쑥 들어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