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이윤강 PD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두 분이서 뭐 하시는 검까? 룰 위반임다. 헤헤… 숙소로 가 주셔야겠슴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차분히, 하지만 단호하게 말했다.
“심사위원 입장에서 참가자와 나누는 티타임입니다. 문제가 될 소지는 없는 거 같은데요.”
이윤강 PD도 이번에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담당 PD 입장에서 함께 들어야겠슴다.”
“뭐라구요?”
눈빛이 번득였다. 처음으로 천채왕 심사위원의 오싹한 모습을 봤다. 화를 잘 내지 않는 타입이라서 오히려 더 무서웠다. 내가 천채왕 심사위원 팔을 잡았다.
“괜찮습니다.”
이윤강 PD 앞에서라도 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말을 듣고 싶다면, 듣게 해주면 됐다. 오히려 실시간으로 반응을 볼 수 있어서 더 좋을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제 발로 기어 나올 줄은 몰랐지만’.
오히려 이윤강 PD가 지켜보고 있으니까 말이 술술 나왔다.
“슈퍼스타 시리즈는 모두 이윤강 PD에 의해 조작되었습니다.”
이윤강 PD가 꽥 소리 질렀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검까!”
천채왕 심사위원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이 PD 말은 나중에 듣겠습니다. 계속해 보세요. 권노을 군.”
이윤강 PD가 씩씩대는 소리가 차 문을 넘어 차내에까지 선명했다. 덕분에 오히려 말이 술술 나왔다.
“근거는 득표수입니다. 슈퍼스타 시리즈에서 의외의 결과가 나온 적이 많습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공감의 흐름이 끊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참가자의 득표율이 소수점 없이, 정수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수학적으로는 단 한 번도 일어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너무 많이 일어났습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은 눈을 감고 듣고 있었다. 눈을 꼭 감아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났었죠?”
“이분이 직접 알려 드릴 겁니다.”
적어 놓은 전화번호를 하나 천채왕에게 건넸다. 천채왕이 번호를 확인 후 바로 핸드폰으로 연락했다.
“권노을 군도 들을 수 있게 스피커폰으로 연결하죠.”
전화를 받은 상대방은 노경진 PD였다.
-여보세요.
“천채왕입니다. 권노을 군 부탁으로 통화합니다. 누구시죠?”
-슈퍼스타 T 조연출 노경진 PD입니다.
이윤강 PD 입에서 욕지거리가 작고 낮게 울려 퍼졌다.
천채왕 심사위원은 내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그리고는 통화를 이어갔다.
“뮤직넷 관계자분이 나올 줄은 몰랐네요. 하실 말 있으면 하시죠.”
-권노을 군의 추측대로, 슈퍼스타 시리즈에서 매번 득표율이 이상했습니다. 정수로 떨어지는 경우가 두 번째 시즌, 마지막 결승전에 처음 나왔는데요. 이후 세 번째 시즌에는 3번, 지난 시즌에는 무려 7번 나왔습니다.
“회사로 데이터 보내 주세요.”
천채왕 심사위원은 의외로 차분했다. 냉정한 목소리로 사무적으로 노 PD에게 말했다.
-어디로 보내면 될까요?
“문자로 연락처가 갈 겁니다. 그 친구에게 주시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전화가 끝났다. 천채왕은 전화가 끝나자마자 나를 바라보며 덧붙였다.
“수치상으로 있기 어려운 일이, 그것도 점점 많이 벌어졌다. 그게 의심스럽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득표율이 정수로 떨어진 때는, 제작진이 원하는 극적인 결과가 나오는 회차였습니다. 이상하지요.”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님까?”
이윤강 PD의 목소리가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확률이 낮다고 하지만… 그럴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은 없잖슴까. 헤헤…”
참다못해 내가 한 마디 쏘아붙였다.
“그런 일이 계속 일어난다고요?”
이윤강 PD는 최대한 웃음을 가장하며 말했다. 하지만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불쾌했다.
“세상에는 수치로 설명하기 어려운 일도 있는 법이니까요. 신은 믿지 않지만, ‘기적’이랄까요? 그런 운명적인 일이 가끔 존재하곤 함다. 헤헤…”
입에 침을 바르지도 않고, 믿지도 않는 거짓말을 했다. 효과는 없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의 얼굴은 이미 차가워져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일 따름이었다.
“심사위원장님. 주환희 아시죠?”
“환희 군은 잘 알죠. 오랜만에 내가 직접 뽑았던 친구니까.”
그건 몰랐던 사실이었다.
“그 친구에게 한번 전화를 걸어보시겠습니까?”
“왜죠?”
“전화해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참여자에게 전화는 불가능할 텐데요?”
“노경진 PD에게 부탁했습니다.”
다시금 이윤강 PD가 참지 못하고 낮은 목소리로 욕설을 했다.
바로 천채왕은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주환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뇽하세요 쌤!
“그래요. 메시지는 좀 했는데, 통화는 처음이네요? 무슨 용건이죠?”
-방송에서 도저히 납득가기 어려웠던 일이 이써서요. 당장 얘기하고 싶었는데, 노을횽이 조금맨 기다려달라고 해서. 지금 말씀드립니다.
이후 주환희는 차분하게 이번 오디션에서 있었던 이상한 일들을 이야기했다. 문루아의 점수가 갑자기 슬쩍 올라갔던 일부터, 원래 좋은 파트를 차지했던 내가 갑자기 제작진이 사정한 다음에 평범한 파트로 강등된 일까지, 전부 다 털어놓았다.
듣고 있는 이윤강 PD의 얼굴은 점점 썩어갔다. 천채왕 심사위원장은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입술을 점점 더 세게 다문 것 같기도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는 천채왕 심사위원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입니까 이윤강 PD? 제작진이 어떤 식으로든 결과에 영향을 미쳤나요?”
이윤강 PD는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지… 진행을 하다 보면, 어느 정도 룰 변경이 있을 수 있슴다. 불가피한 일인데요. 어떤 분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지만 의도는 없었… 슴다.”
이미 그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다음 타자도 준비했다.
문루아와 키미였다.
-이상했어요 선생님. 분명히 제가 최고 득점자가 아닌데, 최고 득점자가 되어 있더라고요? 괜히 불편하게 할까 봐 말은 못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바로 선생님께 알렸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이렇게 문루아가 증언했고,
-맞아요 선생님! 갑자기 파트 배분을 하니까 공평하게 배분해야 된다고 작가가 30분 넘게 읍소를 하는 거예요? 아니 그럴 거면 내게 왜 맡겼냐고요. 항의해봐도 시청자가 어쩌고 팬덤이 저쩌고 알맹이 없는 말만 했어요.
키미 작곡가도 가세했다.
아직 데뷔하지 않은 연습생인 주환희의 증언과는 차원이 다른 파급력이었다. 본인이 온전히 신뢰하는 직원들의 보고가 이어지자, 천채왕 심사위원의 눈은 더욱 싸늘하게 식었다.
이윤강 PD가 당황하며 어떻게든 말을 이어갔다.
“서... 설명할 기회를 주시면 다 할 수 있음다. 오디션 프로란 것이 워낙 변수가 많아서…”
“운이 좋으시네요 PD님.”
천채왕이 불쑥 말했다. 이윤강 PD가 되물었다.
“네?”
“운이 좋으시다고요. 제가 젊었을 때면 진짜 엄청난 일이 일어났을 텐데요. 이렇게 저희 회사를 대놓고 망치려고 작정한 사람을 제가 혈기왕성할 때 만났으면… 지금쯤 짱돌이라도 들었겠네요.”
천채왕 심사위원은 무시무시한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평온했다. 그가 갑자기 차에 시동을 걸었다.
“뭐 됐습니다. 운이 안 좋은 걸 수도 있죠. 여튼 앞으로는 서면으로만 이야기합시다.”
이윤강 PD가 황급히 창문 틈에 손을 집어넣으며 구걸했다.
“하… 한 번만 설명의 기회를…”
그때였다. 바깥에서 불쑥! 하고 몇 개의 팔이 나와 이 PD를 차 바깥으로 꺼냈다. 자세히 보니 TYB의 직원들이었다. 어느새, 이윤강 PD 차 주변에 매니저들이 모여 있었다. 그 사이에 천채왕 심사위원장이 부른 모양이었다.
이윤강 PD는 망연자실,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온몸으로 절망이 느껴졌다.
“아, 그리고.”
천채왕 심사위원장이 뭔가 생각 난 듯, 창문을 다시 열었다. 그리고 이윤강 PD에게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남겼다.
“슈퍼스타 T는 취솝니다.”
* * *
불쑥 천채왕 심사위원이 내게 말을 건넸다.
“숙소로 바래다 드릴게요.”
천채왕 심사위원은 바로 차를 몰고 나를 숙소로 데려다주었다. 차로 데려다주는 길은 조용했다. 화기애애하던 방금 전과는 사뭇 다른 드라이브였다. 그래도 음악을 일부러 나를 배려해서, 최신 R&B 발라드 차트 음악을 틀었다.
침묵 속에서 한 곡이 끝날 때쯤, 천채왕 심사위원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권노을 참가자.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알려줘서요.”
“아닙니다.”
“역시 이런 프로에 엮이면 안 됐네요. 원래 이런 프로가 시청자의 선택이니 뭐니 하면서. 위선으로 거짓을 만든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설마 진짜 수치를 바꿔버리는 짓을 할 줄은 몰랐네요. 거기다가 소수점이라니, 중학생도 알 수 있는 허술한 방식을… 내가 뻔히 참가하고 있는데.”
천채왕 심사위원은 어지간히 허탈한 듯했다.
“저도 처음에는 놀랐습니다.”
“이건 뭐 소원으로 칠 수도 없네요. 오히려 노을 군이 나를 구해준 건데요.”
그러면서 천채왕 심사위원이 손으로 대 팔을 툭 건드렸다. 이제까지는 조금 거리를 뒀다면, 이제는 정말 친밀해진 느낌이었다.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저... 슈퍼스타 T는 취소되는 건가요?”
천채왕 심사위원장이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아직 결정 안 했어요.”
“네?”
“그때 감정에 충실하게 한 말이에요. 사실 취소하는 게 정석이겠지만, 쉬운 건 아니죠. 이미 슈퍼 캠프까지는 방영이 돼버렸는데. 이걸 중지한다는 게 오히려 더 어려워요. 법적인 이슈도 있고.”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음으로는 취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아니라면 취소하면 생기는 법적 문제까지 검토해봤을 리가 없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오디션이 멈추면 안 됐다. 뭔가 읍소라도 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슈퍼스타 T가 사라지면, 저 같은 참가자는 갈 곳이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그냥 대놓고 내가 바라는 걸 말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운전을 하다 곁눈질로 나를 슬쩍 봤다.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스치는 걸 확인했다.
“이 오디션을요? 조작으로 점철된 프로그램을?”
역시나 내 생각이 맞았다. 천채왕 심사위원의 마음은 ‘취소’로 기울어져 있었다. 바꿔야 했다.
“심사위원장님께서는 살리실 방법도 아시리라 믿습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다시 눈을 정면으로 돌렸다. 온 힘을 다해 운전에 집중하는 모습이었다. 뭔가 생각할 시간을 버는 듯했다.
‘…어지간히 오디션을 유지하기 싫으신 모양이군.’
이해는 됐다. 이대로는 TYB라는 브랜드가 무너질 판이었다. 여기서 멈추는 게 가장 상식적인 선택지일지 몰랐다.
하지만 이 오디션에 모든 걸 건 내 입장에서 그건 안 될 일이기도 했다.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아 말을 계속했다.
“방금 전 알려드린 건, 참가자라면 누구나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다시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내게는 보였다. 그에 입에서 옅은 미소가 잠깐 스쳐 지나갔다.
“그건 그렇지요.”
“제 소원을… 이 오디션을 살리는 거로 해도 될까요?”
천채왕 심사위원은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묵묵부답이었다.
숙소에 도착해, 나를 내려주기 직전. 천채왕 심사위원이 나직하게 말했다.
“노을 군만 알고 있어요.”
“네네.”
“노을 군을 봐서, 이 오디션은 어떻게든 살리겠습니다. 방법은 만들어 볼게요. 대신!”
“네네.”
“처음부터 그걸 공개하진 않을 겁니다. 이건 노을 군만 알고 있어요. 알겠죠?”
“알겠습니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이번 일 정리되면 차라도 한잔하죠.”
그렇게 천채왕은 차를 몰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터덜터덜 숙소로 왔다. 많은 일이 있던 외출이었다. 다행히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숙소로 들어가자마자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 거리들이 보였다. 오민수가 또 자기 몫을 안 한 모양이었다.
‘이놈, 아직도 이윤강 세상인 줄 아는구만?’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오민상이 건들건들 부엌으로 놀러왔다.
“어디 갔다 왔어요 천재보컬님? 설거지하려는 거에요? 아 내가 내일 하려 그랬는데에~”
마음에도 없는 말인 게 뻔히 보였다.
“그냥 좀 볼 일이 있어서.”
“아니, 고득점자라 그러신가, 막 숙소 나가도 괜찮나 봐요?”
자꾸 틱틱 나를 말로 건드렸다. 당연하지만, 방금 이윤강 PD에게 있었던 일을 모르는 눈치였다. 아직도 제작진이 자기편 들어주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싱긋, 웃음이 나왔다. 달라진 현재를 알려 줄 차례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