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7화 (27/280)

제27화

선곡 선정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우선 소미션 우승자인 문루아가 순서를 정한다. 거기에 그 순서와 동일하게 선곡을 정하는 방식이었다.

문루아가 CF 미션에서 이긴 건 내가 기억하는 과거와 같았다. 그리고 내 순서는…

1번이었다.

그렇다는 건, 내가 첫 스타트를 끊는 불리함이 있지만, 대신 선곡의 우선권은 내게 있다는 뜻이었다.

내가 먼저 나서서 논의를 시작했다.

“그럼 한번 이야기해볼까? 쭈. 넌 어떤 무대를 해보고 싶어?”

열띤 토론 끝에 우리 셋의 선곡과 편곡 방향이 대충 정해졌다. 편곡이 특기인 재호, 멜로디와 가사를 변형하고 재해석하는 능력이 탁월한 주환희, 그리고 노래하는 내가 합치니까 확실히 착착 계획이 세워졌다.

* * *

그렇게 보람찬 1시간의 연습시간이 끝나고, 우리는 다시 강당에 모였다. 선곡을 위해서였다.

이윤강 PD가 봉투를 꺼냈다.

“문루아 님이 직접 선택하신 순서를 공개하겠습니다!”

이 PD는 나름 분위기를 띄운다고 목소리 톤을 올렸다. 하지만 부족했다. PD가 진행자 롤을 가진다는 사실이 영 어색했다. 슈퍼스타 T에는 라이브 방송을 전담하는 프로 사회자가 있었다. 아니면 심사위원이 화면을 통해서 진행할 수도 있었다.

예전에는 그냥 이상하네 하며 넘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이윤강 PD는 튀고 싶어 안달이었다. 어떻게든 포스트 김태호, 포스트 나영석이 되고 싶어 데굴데굴 구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꾸 무리수를 뒀다. 그 끝에는 결국 조작까지 갔다.

“1순위는… 권노을 참가잠다.”

이미 알고 있던 대로였다. 마지막은 문루아. 재호와 주환희는 중후반부에 포진됐다. 그리고 바로 내 다음 순서는 오민수였다.

얄궂은 운명이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순서였지만 생각할수록 그랬다.

다음은 선곡 순서를 정할 차례였다. 내가 제일 먼저일 터였다. 이윤강 PD가 진행을 계속했다.

“자 다음은 선곡 순서임다. 선곡 순서는… 공정하게 뽑기로 하겠습니다.”

‘뭐라고?”

분명 이전 시즌에서도 라이브 순서는 공연 순서대로 골랐었다. 추첨이라니, 들어 본 적도 없었다. 룰이 고무줄처럼 바뀌고 있었다.

아마도, 나를 엿 먹이기 위해서였다.

문루아가 입을 열었다.

“순서 추첨이라니, 처음 들어보네요?”

이윤강 PD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무슨 뜻이시죠?”

“보통 선곡은 공연 순서대로 고르지 않았나요?”

“헤헤… 문루아 님은 그렇게 하면 마지막에 고르게 됩니다. 굳이 자신에게 불리한 질문을 하시네요”

이윤강 PD가 헤헤 웃으면서 최대한 예의 바른 척했다. 포장지에 불과했다. 왜 귀찮게 구냐는 비아냥이었다.

“그냥, 이상해서요.”

“랜덤 요소가 있으면 더 흥미로울 거 같아서 추가한 방식임다. 이해해주세요. 헤헤…”

거짓말이었다. 내가 선곡 1순위를 가지는 게 싫어서 바꾼 룰이 분명했다. 룰이 뒤바뀌고 있었고, 그 칼날은 나를 겨누고 있었다.

“그럼 모두 모여주세요. 순서 뽑겠슴다.”

이윤강 PD의 주도로 모두 순서를 뽑았다. 오민수이 1순위였다. 나는… 마지막이었다.

이것도 조작이었을까? 한번 제작진에게 신뢰가 깨지니 별생각이 다 들었다. 이게 조작이라면 철두철미하게 다 조작했을 거 같고, 아니라 생각하면 굳이 이런 것까지 조작하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했다.

여튼 오민수은 당연히 Be With You를 골랐다.

차선책은 Take Back였다. Be With You 다음으로 일반적인 발라드 곡이었다.

2순위는 문루아 차례였다.

“Take Back으로 하겠습니다.”

그다음 옵션으로 내가 생각한 곡은 Let's Talk였다. 내 특기와는 조금 다른 미디움 템포의 밝은 팝이라 아쉽긴 했지만 나름 명곡이었다. 내가 새롭게 해석할 여지도 있었다.

그 사이, 3순위던 주환희가 선곡을 끝내고, 4순위 애드리아나가 자기 곡을 뽑았다.

“Let's Talk요.”

‘이런…’

내가 좋아하는 곡은 남들이 보기에도 좋았다. 내게 남은 옵션이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재호는 다행히 자신이 원하던 곡을 뽑았다. 그리고 11번째, 마지막이던 내 차례가 되었다.

“마지막, 권노을 참가자. 헤헤…”

이윤강 PD가 비죽 웃었다. ‘엿 먹어봐라 이놈아’라는 표정이었다. 역겨웠다.

남은 옵션이 거의 없었다. 어린 시절 노래나, 아니면 내게 맞지 않는 댄스 장르의 곡밖에 남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 없음다. 빨리 골라 주세요. ‘아웃 오브 타임’임다. 헤헤…”

이윤강 PD는 승리에 기쁨에 취해 있었다. 안 되는 영어를 어색하게 하면서 실실 웃었다.

‘잠깐. 아웃 오브…?’

딱 하나, 남아 있는 선택지가 있었다.

“정했습니다.”

* * *

그날 저녁 연습실.

밴드 리허설이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슈퍼스타 T 하우스 밴드와 함께 참가자들이 의견을 교환하며 연습을 준비했다. 하우스 밴드와 연습하지 않는 10명의 참가자들은 자유롭게 연습실에서 곡 준비를 했다.

재호가 우선 밴드 연습실에 들어갔다. 나는 피아노를 연주하며 무대를 구상했다.

이윤강 PD가 비웃으며 했던 엉뚱한 말에서 힌트를 얻었다.

‘아웃 오브.’

내 선곡은 ‘Out Of Mind’였다. 마이크 넬슨의 솔로 첫 앨범의 발라드 싱글이었다. 워낙 유명한 곡이었다.

하지만 괜히 나나, 다른 참가자가 빼놓은 게 아니었다. 구성도 지나치게 단순했고, 진행도 요즘 스타일과 너무 달랐다. 70년대 곡이니 당연했다. 그렇다고 손을 대기에는 원곡이 너무 훌륭해서 편곡하기도 골치 아팠다.

하지만 떠오르는 전략이 하나 있었다. 이거면 충분해 보였다.

그때, 다목적홀 문이 쾅 하고 열리고 재호가 나왔다.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왔다. 슬쩍 재호에게 말을 걸었다.

“밴드랑 연습 어땠어?”

재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대답도 재호답지 않게 감정이 묻어났다.

“말도 마. 얼마나 고집불통인지.”

“그래? 의외네? 밴드 마스터분 되게 좋아 보였는데.”

“아니 마스터분 말고. 드러머가 문제야.”

“아하.”

그럴 만했다. 슈퍼스타 T 하우스 밴드의 드러머 박찬용은 60살에 가까운 노장이었다. 80년대 거장들의 세션부터 2010년대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다. 실력은 최고였다.

문제는 고집이었다. 워낙 경험이 많다 보니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내가 코러스로 참여했던 레전드 가수도 간신히 설득할 수 있었다. 쉬이 신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내가 제발 템포 좀, 메트로놈 90 정도로 올려달라 그랬거든? 근데 끝까지 75로 가겠다는 거야. 이 리듬이 그루브를 느끼기 좋다나? 아니, 내가 내 템포로 해석하겠다는데 왜 그걸 바꾸려고 하냐구.”

재호가 씩씩댔다. 항상 쿨했던 재호에게서는 정말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편곡이 특기인 재호는 편곡 방향에서는 철저한 자기 세계가 있었다. 그걸 간섭하면 예민해졌다.

“그래서 어쩔 거야?”

“글쎄 모르겠네. 30분간 아무것도 못 하고 끝나버렸어.”

내 기억에 재호는 과거에 이 첫 무대를 망쳤었다. 지금 보니 밴드와의 갈등 때문이었다.

재호가 머리를 벽에 쿵쿵하고 박았다. 키도 큰 녀석이 그러니까 방까지 울리는 느낌이었다. 워낙 고통스러운 모양이었다.

사실 이건 스스로 해법을 찾아야 할 문제였다.

하지만 힌트 하나 정도는 괜찮아 보였다.

“드러머가 마음에 안 든다.”

“그 사람 똥고집이 마음에 안 든다구.”

“그럼 말이야, 니가 지휘자가 되면 되잖아?”

“지휘자? 내가?”

재호가 자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눈이 동그래졌다.

그때, 애드리아나가 다목적홀에서 나왔다.

“아 벌써 애드리아나 연습 끝났네. 내 차례다. 간다.”

힌트를 잘 소화해서 써먹는 건 재호 몫이었다.

* * *

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우스 밴드가 강당 무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밴드 마스터가 반갑게 나를 맞았다.

“어~ 노을 군 반가워요. 자식뻘이니까 말 놓아도 되죠?”

“네네 괜찮습니다.”

강압적인 느낌은 없었다. 소위 ‘좋은 사람’ 느낌이었다. 밴드 마스터가 키보드로 내 선곡의 주 멜로디를 쳐보며 말했다.

“노을 군 선곡이 참 좋던데! Out Of Mind라니. 이게 대체 언제적 곡이고. 내도 발매 때는 못 들어본 곡인데. 나중에 들어보고 울었지, 울었어.”

“좋아하시는 곡이라니 다행이네요. 연주도 쉬우실 거고.”

밴드 마스터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몇만 번은 머릿속에서 연주해 본 곡인데 뭐. 눈 감고도 칠 수 있지. 자 그럼 해볼까? 아, 그러고 보니, 뭐 편곡에 요구사항 있어? 되도록 맞춰서 해줄게~”

그때, 뭔가가 번득였다. 내 눈에는 보였다. 그때까지 지루하게 드럼 스틱을 돌리던 박찬용 드러머가 눈을 번득이는 모습이었다. ‘편곡에 요구사항’이란 말이 그렇게 기분이 나쁜 모양이었다.

‘가수는 노래만 하면 된다 이건가. 내가 전문가니 나만 믿으란 건가.’

참 희한한 양반이었다.

여튼 내 대답은, 박찬용 드러머가 참 좋아할 말이었다.

“없습니다. 그냥 편하실 대로 하시면 됩니다. 되도록 원곡 느낌 살려서요.”

멀리서 봐도 박찬용 눈빛이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물론, 갈등이 싫어서 회피하는 건 아니었다. 계획이 있었다.

연습을 시작했다. 편곡 갈등이 없어서였는지, 연습은 일사천리로 끝났다. 박찬용 드러머도 신명나게 드럼을 쳤다.

성격이 좀 희한했지만 실력은 정말 굉장했다. 그냥 정박의 평범한 발라드 드럼을 칠 때도, 묘한 그루브가 있었다. 절묘하게 강약과 템포를 조절했다. 분명히 정확한 템포로 치는데도, 박찬용의 드럼을 따라가면 자연스럽게 감정이 고조되었다. 달리 국내 최고의 드러머가 아니었다.

다행히 밴드 마스터의 나에 대한 평가도 괜찮았다.

“야 노을이! 미쳤다 미쳤어. 노래 왤케 잘해. 너 혹시 이거 떨어지면 나랑 뭐 하나 하자. 꼭 연락해라!”

밴드 마스터가 번호 주면서 흥분할 정도면, 뭐 괜찮았던 거 같았다.

* * *

소미션 우승자에게는 또 하나의 특혜가 있었다. 숙소의 각종 집안일 당번을 마음껏 정할 수 있었다.

내 당번은…

“권노을 군과 오민수 군은 쓰레기 담당!”

오민수가 확 짜증을 냈다.

“아, 왜요!”

11명이 식사를 하다 보니 쓰레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음식물 쓰레기와 재활용 등 귀찮은 일이 많았다.

하지만 그보다는 나랑 같이 당번인게 짜증이 난 눈치였다.

사실 나도 싫었다.

문루아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둘이 친해져 봐요 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최대한 포커 페이스를 유지했다. 온갖 각도에서 카메라가 나를 잡고 있었다. 악마의 편집을 방지하려면 편집을 해도 문제가 없는 인간이 되어야 했다.

식사가 끝나고, 바로 음식물 쓰레기와 각종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나왔다. 11명이나 되다 보니 그렇게 됐다. 하필 메뉴도 치킨이었다. 최애 음식이건만, 쓰레기 당번이 되자 닭 뼈 때문에 치킨까지 꼴 보기 싫어졌다.

투덜대면서 음식물 쓰레기와 쓰레기를 정비했다. 11인분 치킨의 닭 뼈가 특히 처치 곤란이었다.

처음에 좀 깔짝대며 쓰레기 정리를 돕던 오민수가 슬쩍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내가 물었다.

“어디 가요?”

오민수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급한 일이 생각나서. 이것만 하고 올게요.”

뭔가 의심스러웠다.

* * *

결국 오민수는 오지 않았다. 쓰레기는 내가 독박으로 다 버렸다. 오민수 방에 슬쩍 가봤다. 방문을 두드리려 했다.

“쿠우우우울~”

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었다. 코 고는 소리가 방 바깥에서도 들렸다. 독방이니, 오민수밖에 없었다.

이거, 편집으로 나오면 씹히기 딱 좋을 텐데 싶었다.

‘잠깐.’

번뜩하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바로 내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방에는 다행히 재호와 주환희가 없었다. 바로 장롱으로 숨어 들어가 이불 속에서 mp3를 켰다.

역시나 없었다. 과거에 오민수는 카메라 앞에서 뻑큐를 날렸다. 또 일을 시키면 오만상을 찌푸렸다. 자기 당번 역할을 안 했다. 욕먹을 일만 골라서 했다. 그런데도 나쁜 기사가 미래에도 하나도 없었다. 편집이 그를 띄워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건 오히려 약점이었다. 이놈의 아킬레스건을 찾아내고 말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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