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6화 (26/280)

제26화

“이게 말이 되나?”

미쳤다. 편집할 시간도 없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감각적인 영상이 나오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대사 하나 없이, 내용과 편집만으로 모든 감정이 전해졌다.

영상만 멋진 게 아니었다. 이미 찍어놓은 한 여성이 후덥지근한 자기 방을 치우는 모습을 찍어두었다. 이를 내가 나온 장면과 절묘하게 교차 편집했다. 내가 봐도 내가 나왔던 장면이 시원해 보였다. 땀이 주룩 흐르는 방에서 청소하는 여성과 교차하니 별생각 없이 탄산수 마시던 내 모습이 천국에서의 한 모금으로 보였다.

노 PD의 편집의 힘이었다.

3초로 느껴지는 1분이 지났다. 감독이 슬쩍 내게 물어봤다

“어때요?”

“굉장한데요. 편집을 어떻게 하셨어요?”

“편집이야 이미 제 머릿속에 있죠. 핫핫 그대로 붙이면 끝이죠.”

처음부터 완성된 화면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진짜 대단한 감독이었다. 영상을 보니, 저 사람 미래의 화려한 필모에 하나를 추가하고 싶었다. 월드 스타 권노을의 뮤직비디오 감독, 딱 이렇게 한 줄을 넣으면 딱 좋을 거 같았다.

“감사합니다. 믿고 찍은 보람이 있네요.”

“아닙니다. 노을 참가자님 마스크가 너무 대중적이에요. 얼굴이 영화에요. 진짜 편한 촬영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럼 제가 CF 모델 되는 건가요?”

노PD가 잠시 침묵했다. 그러더니 말을 이었다.

“무리 아닐까요? 문루아 양이 있는데.”

솔직한 돌직구가 날라왔다. 솔직히 나도 알고 있었다. ‘아시아의 달’ 문루아가 있는데 신인 가수를 뽑을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냉정하게 상황을 말해주는 노경진 PD의 태도가 호감이 갔다.

그렇게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대기실로 걸어가려 했다. 그때 누군가 내게 다가왔다. 방금 촬영을 노경진 PD와 함께했던 윤결 작가였다.

“저… 참가자님. 부탁드릴 일이 있는데요.”

“네네.”

마침 잘됐다. 노경진 PD와 함께 콤비였던 윤결 작가와 어떻게든 따로 말을 나눠 보고 싶던 참이었다. 먼저 이야기를 걸어주면 나는 편했다.

“여동생분 인터뷰 잡아도 될까요?”

아마 이윤강 PD가 시킨 모양이었다. 실제로 내가 생방송이 시작되면 방송 촬영을 해도 좋다고 말했었다.

“괜찮습니다. 약속했으니까요. 근데 이윤강 PD님이 직접 안 물어보시네요?”

“앗! 네…. 그건 조금…”

윤결 작가가 얼굴을 붉혔다. 아마도 이윤강 PD가 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이미 예상된 바였다.

말을 이어갔다.

“저 혹시 부탁 하나 드려도 될까요?”

“어떤…?”

“동생 인터뷰 때, 저도 옆에서 참여해도 될까요?”

“어…”

윤결 작가는 곤란하단 표정을 지었다.

“별 뜻은 없습니다. 다만 부모님이 모두 안 계셔서. 제가 유일한 혈육입니다. 연예인이 아닌 일반인이 방송 출연하는 게 위험하기도 하고 해서 보호자 자격으로 참관하고 싶습니다.”

“아… 음… 넵…”

윤결 작가가 내 명분을 듣더니 고민에 빠졌다.

사실 일부러 떠본 거였다. 뮤직넷의 제작진들은 악명이 높았다. 악마의 편집은 예사였다. 결정권자까지 같을 때 내 요구가 받아들여질 확률은 낮았다.

나는 그보다는 ‘윤결 작가와 노경진 PD가 내 제안에 어떻게 대응하는지’가 궁금했다.

윤결 작가가 고민을 끝냈는지 내게 말했다.

“PD님께 한번 여쭤볼게요. 노 PD님~”

내 요청을 들은 노 PD도 고뇌에 빠졌다. 그러다 내게 말했다.

“이윤강 PD님께 물어봐야 합니다. 솔직히 가능성은 낮은데요. 잘 말해보겠습니다. 확답을 못 드려서 죄송해요.”

합격이었다.

이 정도면 악마가 들끓는 뮤직넷에서, 양심적인 PD였다.

내게는 확신이 필요했다. 노경진 PD와 윤결 작가, 이 둘은 듀오로 이후 예능부터 드라마까지 종횡무진 활약하는 듀오였다. 실력은 보증됐다.

게다가 그들은 슈퍼스타 시리즈 조작에도 무죄임이 밝혀져 풀려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확신이 없었다. 혹시나 그들도 조작에 동조했으면 어쩌지? 라는 생각이 있었다. 결과는 합격이었다. 그들은 한통속이 아니었다.

사실을 안 이상, 이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야 했다. 이윤강과 오민수를 무너뜨리려면 내부인의 도움이 필수였기 때문이었다.

“뭐 어쩔 수 없죠. 그것보다, 두 분께 꼭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윤결 작가가 눈썹을 올렸다.

“네 말 해보세요.”

“아니요.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곳, 없을까요?”

* * *

케이블 방송국이란 곳은 참 희한한 곳이었다. 별별 숨은 공간이 다 있었다. 그중에서 구석의 독방 하나에 자리를 잡았다.

노경진 PD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시죠?”

“…”

쉽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지금부터 할 말이 얼마나 큰 파장을 불러올지 알고 있었으니까. 왜 천채왕 심사위원이 심사평 때마다 커피를 마시면서 시간을 끌었는지 이해가 됐다.

“알고 있습니다.”

윤결 작가가 웃으며 되물었다.

“뭘요?”

“윗선에서 투표 결과 장난치는 거요. 알고 있다고요.”

그 순간, 차가운 정적이 흘렀다. 윤결 작가는 너무 놀라 들고 있던 연필을 떨어뜨렸다. 노경진 PD 또한,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손가락을 위로 올렸다. 이전에는 짜증이라면, 이번에는 극도의 긴장이 느껴졌다.

노경진 PD가 서서히 입을 뗐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두 분은 참여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두 분께 말하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그냥 미래의 노경진 PD의 인터뷰 기사를 낭독하면 됐다. 이미 암기해 둔 내용이었다.

[이상하다고는 느꼈습니다. 슈퍼스타 시즌 F부터… 뭔가 결과가 너무 제작진의 바람대로 나왔습니다.]

“하지만 뭔가 지난 시즌부터 이상하다고는 느끼셨죠? 너무 결과가 제작진이 원하는 대로 딱 떨어진다고.”

윤결 작가의 어깨가 실룩댔다. 노경진 PD가 다시 말을 했다.

“글쎄요. 현실이란 게 그런 거 아닐까요?”

[한번은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이 선배, 정말 이상한 짓 한 거 아니냐고요. 그런데 내 목숨 걸고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설마 싶었는데…]

“이미 한번 물어보셨는데, 이윤강 PD가 잡아뗐죠?”

점점 더 두 사람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단호한 내용과 안 어울리는 자그마한 소리로 윤결 작가가 쏘아붙였다.

“증거도 없이 제작진을 의심하시는 건가요?”

[그때… 표 수를 확인했어야 했는데.]

“득표수를 확인해보시면 되지 않을까요?”

노 PD와 윤결 작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이미 이 두 사람의 실력과 도덕성에 배팅을 건 상태였다. 남은 건 설득뿐이었다.

“제가 참가자로서 오디션에 참여해보니까, 자꾸 이상해서요. 갑자기 점수가 바뀌질 않나? 순서가 바뀌질 않나? 그래서 집에 돌아갔을 때 이전 시즌을 봤는데요. 투표수가 좀 이상하더라고요?”

노 PD가 조용하게 대답했다.

“…이상했나요?”

요상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득표수가 딱 소수점 없이 정수로 떨어졌다. 거의 0%의 확률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직접 발견하는 편이 더 신뢰가 가리라 생각했다.

“직접 두 분이 살펴보세요. 그리고 문제가 있다면 다시 말씀 주세요. 다른 분들에게는 말하지 마시고요.”

제작진 중 누가 이윤강 PD의 끄나풀일지 몰랐다. 이 두 사람만 믿을 수 있었다.

…이 두 사람이 내 말을 들을지도 아직 확신이 서지 않았지만 말이다.

윤결 작가는 무릎에 손을 얹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쑥 그녀가 말했다.

“…저희에게 이야기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불편한 이야기인데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 이야기한 건 사실이었다.

“두 분이라면 제게 진실을 알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미팅은 끝났다.

* * *

007 작전처럼 따로 조용히 방을 나와 대기실로 돌아왔다.

‘이걸로 괜찮을까?’

내가 본 노 PD와 윤작가는 확실한 자기 기준이 서 있는 사람이었다. 이윤강 PD에게 넘어가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일단은 두 명이 필요했다. 이윤강 PD의 조작의 결정적인 증거는 제작진만 알아볼 수 있었다. 제작진 중 누군가가 확인해줘야 했다.

더 중요한 건 ‘대안’이었다. 나는 이 오디션이 살길 바라지, 죽길 바라는 게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이 주도하는 오디션으로 바뀐다면 오디션도 살고 나도 살 수 있었다.

미래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mp3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온통 카메라가 깔려 있어 확인이 불가능했다.

일단 두 사람에게 걸어 보기로 했다.

* * *

CF 촬영이 끝나고, 모두가 다시 처음 회의실로 모였다.

“우승자는…. 바로… 문루아 양입니다!”

역시나는 역시였다.

탄산수 10박스나, CF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이 정도는 무난했다.

다만 그다음은 조금 관심이 갔다. 바로 미션 공개였다.

최갑경 대표가 나가고, 바로 방이 암전됐다. 스크린에서 천채왕 심사위원장이 나왔다. 그가 쾌활한 표정으로 첫 번째 생방송 미션을 공개했다.

“첫 번째 미션은 바로… 팝의 제왕 마이크 넬슨 미션입니다!”

참가자들이 모두 술렁였다. 그럴 만했다. 마이크 넬슨의 음악은 단순 댄스 팝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르의 음악이 완성도 높게 담겨 있었다. 거기다가 마이크 넬슨의 퍼포먼스도 예술이었다. 만만하게 건드릴 수 있는 곡이 하나도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원곡에 집어 삼켜지는 강렬한 곡들이었다. 그만큼 선곡과 편곡에 신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 * *

차를 타고 연습실로 이동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비원더’ 활동으로 친해진 재호, 주환희와 같은 방을 잡았다.

마이크 넬슨의 음반들을 틀었다. 우선 선곡을 완료해야 했다.

주환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마이크 넬슨이라니 너무 어려워요 횽. 선곡부터 턱! 막혀요.”

재호가 면박을 줬다.

“너는 댄스 가수 지망생이잖아? 넬슨 곡 몇 개는 커버했어야 하는 거 아냐? 기본이라구 기본.”

“기본을 누구나 잘하면 그게 기본이에요? 게다가 춤도 잘 추지, 노래도 너무 독특하게 잘하지. 오히려 댄스 가수 출신은 이 곡을 더 잘 부르기가 어렵다구요. 커버할 때마다 똥망이었어요.”

마침 배경음악으로 튼 스피커에서는 마이크 넬슨이 록기타에 맞춰 노래했다. (Bite It!)

“하긴 뭐 나도 고민이야. 콰이엇 잭스의 편곡은 뭐랄까… 역대 최고거덩. 안 건드린 장르도 없구. 완성도도 높구. 뭐 수정할 데가 없어. 내가 여자여서 음역대라도 다르면 그걸 돌파구로 삼을 텐데 그것도 없구.”

“횽은 저음이니까 초고음인 마이크 넬슨하고 목소리는 좀 다를 수도 있겠는데요. 저는 미성이라 너무 겹쳐서 오히려 고민돼요.”

다들 선곡에 걱정이 많은 모양이었다.

사실 걱정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엔간한 노래는 다 폭망이 예상됐다. 내 거칠고 중량감 있는 발라드 목소리에 어울리는 마이크 넬슨 노래가 의외로 몇 곡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재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이럴 때는 노을이 니가 부럽네.”

“왜?”

“니는 그냥 목소리가 장르잖아. 아무거나 부르면 니 느낌이 난다구.”

“오히려 내 목소리에 어울리는 노래가 많이 없어. 다들 너무 마이크 넬슨스러워서.”

“무슨 소리야 딱 어울리는 노래가…”

재호가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었다.

“Be With You(너와 함께하기).”

나랑 재호가 동시에 같은 곡을 뽑았다.

발라드에 특화된 목소리를 가진 내가 잘 부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곡이었다. 전형적인 발라드의 구성을 갖고 있었고, 음역도 마이크 넬슨 특유의 중성적인 초고음이 아니었다. 평범한 남성 키에 가까웠다.

그때였다, 문을 확 열고 누군가가 들어왔다.

오민수였다.

“천재 보컬리스트 팀 방이네요?”

빈정대는 말투였다. 내가 말을 끊었다.

“무슨 일이시죠?”

“방문 좀 꽉 닫아요. 혼자 연습실 써요?”

그러고 보니 오민수 목소리는 처음 들었다. 쌀쌀맞은 건 내 상상과 비슷했다. 하지만 저음일 줄 알았는데 목소리는 뜻밖에 고음이었다.

오민수가 문을 쾅! 하고 닫았다. 다시 연습을 하려 하는데 갑자기 문을 획 열더니 오민수가 한 마디 토를 달았다.

“그리고 Be With You는 내 겁니다.”

그리고 쾅! 하고 다시 문을 닫았다.

일이 꼬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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