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25화 (25/280)

제25화

뭐든지 가능하다 하니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이윤강 PD 경질시켜 주세요.’

‘오민수 보결 합격 취소해주세요.’

‘재호 누명 좀 풀어주세요.’

‘동생 대학 학비 좀 부탁드려요.’

‘저 우승시켜 주세요.’

‘월드 스타 만들어주세요.’

…망상이 아주 로켓을 타고 달나라까지 다녀왔다.

하지만 망상은 망상에서 그쳐야 했다.

“일단 가지고 있겠습니다.”

킵 해놓는 게 정답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많았다. 아니,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하지만 소원을 말하는 데도 큰 그림은 있어야 했다.

모든 그림을 다 그린 후, 눈동자만 찍으면 용이 될 때, 그때 화룡점정으로 이 소원을 쓰는 게 맞았다. 어쨌든 소원은 단 하나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당장 마땅한 소원이 떠오르지 않아서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선선히 말했다.

-이해 갑니다. 내일부터는 통화도 안 되는 거 알고 있죠? 마음 단단히 하고 내일 봅시다.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그러고 보니 잊고 있었다. 생방송 출연자는 모두 한 숙소에서 생활했다. 숙소에서는 외부와의 모든 연결이 금지였다. 핸드폰부터 노트북 인터넷 연결까지 모두 불가능했다. 방송분도 시청할 수 없었다. 세게 말하면 감옥 같은 삶이었다.

명분은 스포 유출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는 제작진이 마음껏 입맛대로 편집권을 내세우기 위해서, 그리고 마음껏 방송을 조작하기 위해서였다.

이전 생에서 내 분량은 대개 편집됐다. 슈퍼 캠프에서 내 활약상도 모두 싹 사라졌다. 그걸 바보같이 오디션이 다 끝나고 나서야 알았다. 이번에는 악마의 편집에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나를 포함한 11명의 참가자가 연예인의 상징, 카니발을 타고 숙소에 들어왔다. 슈퍼 캠프 당시보다 훨씬 쾌적한 숙소였다. 1층은 남자, 2층은 여성 참가자 방이 있었다. 거실은 1, 2층이 합쳐져 있었다. 천장이 높아 고급스러웠다.

제작진은 우선 모든 외부 연락책을 다 압수했다.

물론 내 구형 mp3 플레이어는 열외였다. 다행히 이 mp3 플레이어는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의 기록까지 모두 볼 수 있었다. 개중 다행이었다.

나는 재호, 환희와 같이 큰 방을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독방을 쓰고 싶던 눈치라, 이미 친해진 우리끼리 한방을 쓰기로 했다.

나만, 항상 독방을 쓰던 환희는 좀 유난을 떨었다.

“횽 저 텐트 좀 칠게요. 남이 보면 잠을 못 자서.”

“그래라?”

주환희는 어디서 구했는지 큼지막한 텐트를 침대 대신 쳤다. 뭔가 좀 유난을 떠는 거 같다는 표정을 재호랑 주고받았다.

주환희를 슬쩍 쳐다봤다. 전혀 농담이 아니었다. 이유를 이야기해줄 생각도 아직은 없어 보였다. 일단은 넘어가기로 했다.

* * *

주환희가 텐트에 틀어박히고, 재호가 샤워를 하러 들어간 틈을 타 나는 옷장에 들어갔다. 좁고 갑갑했다. 하지만 그게 또 은근히 고즈넉했다. 무엇보다 여기라면 mp3를 들키지 않고 볼 수 있었다. 이불을 덮고, mp3를 켰다.

‘잠깐 그러면 주환희도 혹시?’

쓸데없는 망상이었다.

여튼 준비는 끝났다.

이윤강 PD를 칠 근거는 충분히 마련했다. 어디서 증거를 찾아서, 어떻게 이윤강 PD를 쳐낼지까지 다 준비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는 거론 부족했다. 실행해야 했다. 일단 이윤강 PD가 조작했다는 물증을 찾으려면 설득이 필요했다.

게다가, 이젠 시간이 없었다.

[충격, 슈퍼스타 T 권노을, 주환희 연습생과 선곡으로 기싸움.]

[권노을 참가자의 계속되는 인성 논란, 뭐가 문제인가?]

[오민수 참가자 ‘권노을 참가자와 싸운 것 맞다’ 인터뷰.]

Mp3로 살펴본 미래의 내 기사들이었다. 가관이었다. 이윤강 PD가 악마의 편집으로 나를 나쁜 놈으로 몰아갔다. 게다가 오민수 참가자가 맞장구치는 인터뷰를 언론에 흘렸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다. 연락이 끊긴 참가자가 어떻게 인터뷰를 했겠는가?) 당연히 인터넷 커뮤니티도 나를 까는 글로 가득했다.

-얼굴값하네. 역겨운 놈.

-우리 환희 괴롭히지 마요?

-저런 사람은 방송이 좀 알아서 걸러야 하는 거 아닌가. 하여튼 방송사 직무유기다.

기사와 댓글만 봐도 답답해졌다.

지금의 타임라인으로 보면, 미래는 너무 늦게 공개됐다. 올해가 지나고, 내년에 진행되는 ‘슈퍼 스타 X’에서 꼬리가 잡혔다. 지나치게 방송 전 투표자 수를 조작하다가 팬덤이 검찰에 고소를 걸어 버렸다. 법적 근거가 아주 뚜렷하진 않았지만, 방송사가 이를 받아들여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를 걸어버리는 바람에 일이 커졌다. 그렇게 이전 시즌의 조작까지 모든 비위가 드러났다.

내년이면 너무 늦었다. 내 이미지를 지키고, 억울함을 최소화하려면 하루라도 빨리 이윤강 PD를 쳐내야 했다.

‘그러자면 내일이 중요해.’

내일이 바로 승부수였다.

* * *

숙소에서 자고 바로 다음 날, 우리는 새벽같이 허겁지겁 카니발을 타고 어딘가로 나갔다.

재호가 운전수에게 물었다.

“저희 어디로 가는 건가요? 이렇게 꼭두새벽부터 깨우셔가지구.”

“……”

운전수는 묵묵부답이었다. 뻘쭘해진 재호도 입을 닫았다.

‘일부러 저러는 거지. 방송을 위해서.’

슈퍼스타 T 제작진은 일부러 참가자들에게 최대한 정보를 덜 알려줬다. 그래야 참가자들이 제작진에 대응에 무방비로 당황할 터였다. 참가자는 자신의 맨얼굴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을의 위치였다.

회귀자인 내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슈퍼스타 T에서는 매 생방송마다 방송 분량과 재미를 주기 위해 ‘소 미션’을 하나씩 줬다.

첫 번째 미션은 CF미션이었다. 2005년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탄산수 브랜드가 슈퍼스타 T 공식 스폰서였다. CF 미션은 참가자들이 한 명씩 돌아가며 탄산수 광고를 찍는 컨셉이었다. 마지막에는 광고주가 가장 마음에 드는 광고 모델을 뽑았다. 그 광고 모델은 실제 광고 모델이 되는 영예를 얻었다. 덤으로 탄산수 10박스와 함께 말이다.

…뭐 까놓고 말하자면 전체가 거대한 PPL이라는 뜻이었다.

차가 멈추고, 참가자들이 모두 한 오피스에 왔다. 유리로 된 대형 테이블 근처에 참가자 11명이 모두 둘러앉았다. 방문이 열리고, 익숙한 사람이 들어왔다.

“저 사람은…”

“헉…”

참가자들이 모두 술렁댔다. 심지어 항상 포커 페이스인 재호나, 웬만한 VIP는 다 봤을 문루아조차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들어온 사람은 최갑경 CEO였다.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 ‘소행 그룹’의 둘째이자, 뮤직넷이 소속된 CG그룹의 오너였다.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선녀처럼 위로 올려 묶은 머리, 최고급 블랙 실크 드레스, 악센트를 주는 까띠에르 목걸이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귀족 같은 품격이 철철 흘렀다.

그녀가 상석에 앉자, 모두 자연스럽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반가워요. 방송을 통해 자주 뵌 분들이네요. 잘 부탁드립니다.”

다들 꾸벅, 목례로 답했다.

“오늘은 부탁이 있어서 나왔습니다. 저희 회사에서 새로 제품이 런칭됐어요. 이 제품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CF 촬영을 통해서요. 한 분씩 할거고요, 우승하신 분은 정말로 CF 모델이 되시는 영예를 드립니다. 절정 탄산수 10박스를 선물할게요.”

그러면서 최갑경 대표가 손가락으로 회의실 방문을 가리켰다. 어느새 탄산수 10박스가 쌓여 있었다. 장관이었다.

최갑경 대표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물론, 소정의 사례금도 드립니다.”

첫 미션의 시작을 알리는 말이었다.

* * *

30분 후 광고 촬영 세트장.

정신없이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대기실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메이크업을 하고, 의상을 갖추는 등 작업 중이었다.

나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노을 씨 정말 얼굴 축복받았네요. 운 좋은 줄 알아요. 머리 감고 헤어 메이크업만 한 번 할게요.”

…선생님이 내 얼굴은 건드릴 게 없다며 머리만 한 번 감자고 하셨다. 다행이었다. 이번 녹화에서는 CF 촬영 말고도 꼭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 그랬다.

제작진이 말을 걸었다.

“권노을 군! 들어오세요.”

바로 제작진을 따라 세트장으로 갔다. 조명 스태프부터 광고 대행사 직원까지 수많은 스태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PD가 한 명, 그리고 작가가 한 명 있었다.

PD가 먼저 내게 말을 걸었다. 조금 사무적인 톤이었다.

“안녕하세요 노경진 PD라고 합니다. 촬영 처음이시니만큼 빨리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제 말만 따라서 행동하시면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빨간 안경을 연신 손가락으로 위로 올렸다. 살짝 짜증이 나 있는 말투였다.

“네네 알겠습니다.”

CF 연기라니,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좋은 연기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깟 탄산수 10박스도 큰 관심이 안 갔다. 한마디로 이 미션 또한 내게 ‘버리는 미션’이었다.

‘곡 순서 정하는 게 좀 아쉽긴 하지만.’

소 미션 우승자는 다음 경연 순서를 정했다. 뭐 맨 처음만 아니라면야 해볼 만했다.

오히려 내게, CF 미션은 노경진 PD를 알아볼 기회였다. 노경진 PD가 내게 똑 부러지게 전체 계획을 말했다.

“이번 촬영은 이렇게 찍을까 해요. 우선 상체가 보이게 하나 찍을 거고요. 그다음에는 클로즈업, 그리고 군중 샷을 하나 찍을 겁니다. 탄산수 마시고 시원해하는 리액션 샷 하나 필요하고요. 그윽한 표정으로 음료수를 쳐다보는 컷도 하나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마시는 장면을 롱샷으로 하나 잡을 거예요. 아시겠나요?”

“네넵 알겠습니다. 솔직히 숙지는 안 되지만, 말씀 주시면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미리 말해드립니다.”

노경진 PD가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배우가 아니시잖아요? 그냥 제게 맡겨주세요. 노을 참가자님은 연기 잘 못 하셔도 됩니다. 제 머릿속에 그림이 있습니다. 질문하지 마시고, ‘내 연기’ 하려고만 안 하시면 1시간이면 끝납니다. 아시겠죠?”

애초에 나는 연기를 어찌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시키는 거만 하라는 말은 오히려 고마웠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잠시 이걸 봐주세요.”

흠짓 하고 놀랐다. 감독이 꼼꼼하게 손으로 그린 콘티들이었다. 내가 어떤 프레임에서 어떤 각도로 보여야 하는지 한눈에 보였다.

“딱 이대로 하시면 됩니다. 어떤 상황인지는 촬영 직전에 알려드리겠습니다. 질문 있나요?”

‘질문하지 말라면서요.’

“없습니다.”

“정답입니다.”

감독은 그렇게 말하더니 바로 자기 자리로 들어갔다.

* * *

50분 후.

“컷!”

촬영이 끝났다. 정말 일사천리긴 했다. 내가 한 일이라곤 ‘여기 봐주세요.’ ‘이런 표정 지어주세요.’ 같은 로봇 같은 조건을 그대로 해줬을 뿐이었다.

이래가지고 촬영이 됐을지 걱정이 되었다.

만약 내가 노경진 PD가 누구인지 몰랐다면 이미 화를 냈을 거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그는 예능 PD와 광고 감독을 거쳐, 최후에는 스트리밍 서비스 최고 히트 드라마 감독이 되는, 소위 늦게 터지는 천재 감독이었다.

게다가 그 사람, 원래 배우들을 희한하게 쓰기로 유명했다. 도구처럼 배우에게 자유를 주지 않고 마음대로 쓰는 대신, 역사에 남을 명작만을 만들었다.

촬영이 끝나자 노경진 PD가 한층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핫핫핫…. 진짜 딱 시키는 대로 해주셨어요. 덕분에 촬영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가편집본 한번 보시겠어요?”

‘그사이 편집을 끝냈다고?’

바로 감독 옆자리에 앉아 광고를 확인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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