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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왕-23화 (23/280)

제23화

“저는 더 영향력을 얻고 싶습니다. 힘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고, 유명세라고도 표현할 수 있겠네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싱긋 웃었다. 대한민국 가요계에서 가장 강한 사람이라서였을지 몰랐다.

“강해지고 싶어요? 왜죠?”

…사실, 너무 쉬운 말이었다.

이전 인생에서 모든 이들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주환희는 결국 자기 꿈을 이루지 못했다. 재호는 누명을 쓰고 모든 걸 잃었다. 동생은 나의 무능력 때문에 결국 대학을 포기했다.

…그리고 나는 내 꿈을 잃고, 결국 목숨까지 잃었다.

이번 생에는 그렇게 둘 수 없었다. 주환희를, 재호를, 동생을,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그냥 둘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한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내 생각을 그대로 말하면 됐다, 물론 미래 예지는 빼고.

“저는 거창한 대의명분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일단 보이는 제 주변을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은 들었습니다.”

“주변이라면?”

“가족이나 동료입니다.”

‘사실 당신도 포함되어 있어요.’

이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구해야 할 대상에는 심지어 천채왕 심사위원도 포함되어 있었다. 가요계의 제왕, 천채왕 심사위원도 자신이 직접 참여한 프로그램이 조작 누명에 걸리자 곤욕을 치렀다. 매수와 아무 관계가 없었음에도 말이다. 본인 회사 소속인 주환희마저 조작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확인된 다음에야, 그는 누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막심한 피해를 입은 후였다.

이 프로그램에서 이윤강 PD를 도려낸다면, 그건 심지어 가요계의 제왕, 천채왕도 구하는 길이 될 터였다.

물론 그 김에 나도 구하면서 말이다.

“대의명분보다는 주변을 지켜주고 싶다라…”

넵튠 한과 베이비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그만큼 그들도 대답하기 곤란한 어려운 질문이란 뜻이 아닐까 싶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칭찬을 시작했다.

“방금 답변 너무 좋았어요. 지망생으로는 120짜리 답변이에요. 당연히 합격이고요. 여기서 면접을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근데…”

천채왕 심사위원이 갑자기 말을 멈췄다. 대신 씁쓸한 표정으로 허공을 쳐다봤다. 왠지 표정이 침통했다.

다시 그가 말을 이었다.

“제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요?”

천채왕 심사위원이 물병에 물을 천천히, 여유 있게 마셨다. 꿀꺽꿀꺽 소리가 전 방을 울렸다. 물을 다 마신 뒤에야 비로소 말을 다시 이어갔다.

“제 동기는 사랑이었어요. 멋진 남자가 돼서, 최고의 사랑을 만나면 행복할 거라 믿었습니다. 그래서 최고가 되기 위해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운 좋게 지금껏 잘 가고 있고요.”

‘그런데 내가 알기로는 천채왕 심사위원은 아내와 사별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바로 천채왕 심사위원이 그 부분을 말했다.

“그런데 제가 최고의 사랑이라 믿었던 아내가, 죽었습니다. 담배 한 모금 안 피던 사람이 폐암 말기라더군요. 매년 최고의 시설에서 받았던 건강검진이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렇게 아내를 보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고요를 깬 건 나였다.

“무엇을 깨달으셨나요?”

“권노을 군은 올라갈 겁니다. 강해질 거고요. 주변을 지키기도 할 겁니다. 지금껏 지켜본 권노을 군은 충분히 가능해요. 보증하지요. 하지만 강해진다고 주변에 사람이 많아지지는 않아요. 오히려 외로워지죠.”

강해질수록 외로워진다, 생각해보지 못한 말이었다. 사실 이전 생에서도 그만큼 높게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강한 사람, 좋죠. 하지만 그럴수록 인간 대 인간으로 관계를 나누기는 어려워져요. 아내가 떠난 후에, 아내 외에 저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로 남아 있던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요? 별로 없더라고요? 그래서 지금은 돈도 돈이지만 ‘사람’을 남기기 위해 이 사업을 합니다.”

사실 그렇게 와닿는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힌트는 이미 얻은 상황이었다.

[동생이 유일한 가족 보고 싶다고 투정 부리는 건 당연한 거라구.]

동생 일을 겪으면서 조금 이해를 하게 됐다. 원래는 물질적인 도움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동생 일을 겪으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일과 가족은 서로 싸우는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일을 잘한다고 가족과의 관계가 저절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때의 경험 덕분에, 지금 천채왕 심사위원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은 다시 커피를 쭈우욱 들이켰다. 커피를 마시면서, 감정으로 촉촉해졌던 그의 얼굴이 다시 원래의 에너지 넘치던 모습으로 바뀌었다.

“테니스 선수는 다른 어떤 종목보다 외로움을 호소해요. 왠지 아세요?”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테니스는 해본 적도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혼자 해서입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은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저희 회사에 들어와라, 저희 회사랑 같이 팀 활동을 하자. 뭐 그런 말은 아닙니다. 다만, 조심하지 않으면 올라갈수록 외로워질 겁니다. 저도 가요계에서 처음부터 아이돌 팀만 만든 거 아니에요 저는 솔로 가수였고요. 이런저런 솔로 다 겪어보고 내린 결론입니다. 지금부터 미리 준비하시면 좋을 거 같아서 굳이 말씀드렸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천채왕과 눈짓으로 소통한 넵튠 한이 바로 말을 이어갔다.

“축하드립니다 합격입니다.”

합격에 기뻤지만, 뭔가 앞으로 해결해야 한 큰 숙제를 하나 받은 느낌이었다.

* * *

합격 통보 후, 제작진의 지시에 따라 호텔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서는 합격자들 TOP 10에 붙은 합격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오민수까지 와서 TOP 11이 되었다. 참가자들은 브런치를 먹으며 합격을 축하했다.

다행히 비원더의 3인, 재호와 주환희는 모두 합격했다. 애드리아나, 문루아도 모두 통과였다. 자연스럽게 5인이 한 테이블에 합석했다.

문루아가 분위기를 띄웠다.

“다들 생방송 라운드 진출 축하해요. Cheers~”

환희가 머리를 긁적였다.

“치어… 뭐요?”

문루아가 장난처럼 틱틱 쏘아붙였다.

“환희 너 교포면서 Cheers도 몰라? 건배. 건배.”

“누나 미쿡에선 저 술 못 마셔요. 그런걸 어케 알아요. 여튼 건배 건배~~”

나는 완전히 파티에 어우러지지는 못했다.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그들과 어울려 담소를 나누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앞으로 할 일을 정리했다.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다음 질문에 해답을 찾아야 했다.

첫 번째 질문. 오민수는 왜 탈락했다 석연치 않게 합격했을까?

몰래 오민수를 쳐다봤다. 뭔가 눈치를 슬슬 보면서 최대한 시선이나 카메라를 피하고 있었다. 수상쩍어 보였다.

두 번째 질문. 이윤강 PD는 지금껏 얼마나 많은 반칙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하면 그가 너무 큰 반칙으로 오디션 전체를 망치게 하기 전에 그를 자를 수 있을까? 그의 대안은 있는가?

이윤강 PD는 가벼운 조작은 물론, 협박까지 서슴지 않았다. 문루아의 점수를 슬쩍 위로 올려 승자의 권한을 줬다. 자신이 찍고 싶은 영상을 얻기 위해 나를 겁박했다. 점점 정도가 심해졌다. 오디션이 계속될수록,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그 전에 그를 어떻게든 이 프로그램에서 내보내야 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질문. 그런 식으로 대회에 영향을 미치면서도, 나는 공정하게 오디션의 일원으로 남아서, 오디션에만 신경 쓰는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우승할 수 있을까?

우리 테이블의 5인을 슬쩍 쳐다봤다. 애드리아나는 탑8, 그 외에는 모두 탑4에 합격하는 이들이었다. 내 가장 큰 경쟁자들이라 봐도 됐다.

한 명 한 명 만만한 사람이 없었다. 절대적인 가수 경력에 오랜 기간 트레이닝한 보컬 능력까지 갖춘 문루아. 천재 편곡자이자 프로듀서이며, 개성 있는 저음까지 갖고 있는 재호. 연습생임에도 팬클럽을 몰고 다니는 천재 탑라이너 주환희. 그리고 흑인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압도적인 피지컬로, 이들 중 유일하게 나와 성량 대결이 가능한 애드리아나까지. 모두 하나씩 비장의 카드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다가 그들은 나처럼 방송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 없이 자기 노래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쉽지 않겠군.’

셋 모두 썩 쉬운 미션은 아니었다. 하지만 해내야 했다. 대신 나는 다른 모든 참가자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미래를 이미 다 알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그 미래가 어떻게 바뀌는지도 mp3로 확인해볼 수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해볼 만했다.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을 님 mp3 좀 보여줘요.”

“네?”

‘mp3를 왜 보여달라는 거지? 설마.. 들켰나? 그럴 리가?’

긴장하며 목소리가 보이는 방향을 봤다. 목소리의 주인은 문루아였다.

“노을 씨, mp3 좀 보여줘요. 대체 무슨 노래를 듣고 다니길래 노래를 그렇게 부르는지 궁금해요.”

“아…”

놀래라.

별일 아니었다. Mp3는 이미 확인해뒀다. ‘Gift Mode’를 해제한 mp3는 평범한 mp3 상태였다. 평범한 내 mp3를 건네줬다.

문루아뿐 아니라 재호, 애드리아나, 주환희까지 내 mp3를 쳐다봤다. 덕분에 다들 나에게는 신경을 껐다. (횽 횽은 무슨 찬송가를 다 들어요? / 흑인음악에 기초인 가스펠이라는 거다 이놈아…)

한숨 돌린 나는 바로 뒤이어 계획을 머릿속으로 짜기 시작했다.

제작진은 앞으로의 일정과 미션을 한참 뒤에 알려줬다.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오늘 이 브런치 파티가 끝나면, 바로 우리는 집에 갈 수 있었다. 짐을 싸고, 신변을 정리해서, 생방송 기간 동안 묵을 숙소 생활을 준비할 마지막 하루였다. 이후에는 탈락하는 사람만 숙소 방을 뺐다. 그렇게 결승전에 간 두 사람이 마지막까지 남게 되었었다.

그 하루가 내게는 소중했다. 숙소는 카메라로 가득했다. 화장실 정도 제외하곤 사각지대가 거의 없었다. 오늘이 생방송 전, Mp3를 마지막으로 실컷 보면서, 정보를 수집할 기회였다. 이를 통해서 생방송에서 내 문제들을 해결하면 되었다.

그때 재호가 내 팔을 툭 쳤다.

“야, 뭐 그리 심각해? 얼굴 피라구. 생방송까지 왔으면 성공한 거야.”

“그… 래. 고맙다.”

재호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축 처진 내 분위기를 띄워주기 위해서였다.

“우승 못 할까 봐 걱정인 건 알겠는데. 그건 걱정하지 마. 가수 생활 길다구.”

미안한데 어쩐다. 전혀 위로가 안 됐다. 가수 생활 길지 않았다. 재호는 몇 년 가지 못하고, 고꾸라질 운명이었다.

그래도 대답은 밝게 했다.

“고마워.”

주환희가 촐랑대며 끼어들었다.

“BAAAM~ 횽들 뭐 이리 진지해요! 생방송이라구요 생방송! 더 즐겨요!”

주환희의 밝은 모습도 썩 위로가 되진 않았다. 그 하이퍼한 표정 뒤에 뭔가가 감춰져 있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재호도 누명에서 구해줘야 하고. 거기다가 주환희는 뭔가 수상하고… 하여간, 생각해야 할 게 한두 개가 아니군.’

밥을 먹으면서 내 고민은 더 깊어져 갔다.

* * *

집에 돌아오자마자 우선 짐을 쌌다. 그래 봐야 일주일도 안 되었는데, 몇 년 만에 오는 집처럼 느껴졌다. 사실 노트북과 mp3 플레이어만 있으면, 다른 건 크게 필요 없었다. 최소한의 생필품만 캐리어 한 통에 넣었다.

이번 생에서는 월드 스타 가수가 되기로 결심한 이상, 이 정도는 익숙해져야 했다. 당일치기로 유럽에 공연에 갈 수 있는 가수가 되는 게 목표였다. 짐 따위는 라면 끓이는 시간 안에 쌀 수 있어야 했다.

짐을 다 쌌고, 집주인과 집세 및 각종 서류 처리도 합의를 봤다. 거칠 것이 없어진 나는 바로 mp3를 키고 이윤강 PD와 오민수에 대한 정보를 확인했다.

의외로 월척이 많았다. 처음에는 딱 하나, 그놈들을 물리칠 은색 탄환을 찾으려 하니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여러 서류들이 모두 사슬처럼 얽혀 있었다. 그 관계를 연결해 나가다 보니 어렵지 않게 내 목표를 이룰 수 있을 거 같았다.

정보 수집이 끝나가던 중, 갑자기 mp3에 경고 알림이 떴다.

[경고! 주변인의 미래가 바뀌었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확인해야 했다. 바로 버튼을 눌렀다.

깜짝 놀랐다.

재호가 마약 사범으로 잡혀가는 날이 오늘로 바뀌어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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