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바깥에 서 있는 건 오민수였다. 내 뒤를 쫓아다니면서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던 놈이었다.
‘저 녀석은 어젯밤에 탈락했는데?’
어젯밤, 달의 바다는 우리 팀, 비원더에 빌려 패배했다. 패배 팀은 절반 이상을 탈락시키는 게 룰이었다. 심사위원은 문루아와 애드리아나, 둘만 남기고 모두 탈락시켰다. 오민수도 물론 탈락했다. 실제로 이번 무대에서도 딱히 한 게 없었다.
그런데 지금 저 녀석이 몰래 차에서 내려, 호텔 숙소로 들어오고 있었다. 심지어 카메라까지 대동한 채였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 * *
아침이 밝았다. 아침이 되면 하기로 계획해 놓은 일이 있었다. 동생이 일어나고, 수업은 시작하기 전인 시간에 맞춰 전화를 걸었다.
-전화 왜 걸었어? 오디션은 잘 됐어?
“그냥 하는 거지. 동생한테 오빠가 그냥 통화도 못 하냐?”
-꼭두새벽에? 웃기시네~ 결과나 말해.
역시나 동생, 눈치는 귀신이었다.
“예슬이 너는 오디션이란 오디션은 다 붙었지?”
-입시도 오디션이라면 뭐 글치?
“사실 이제 다 캠핑 미션 다 끝났거든? 최후 면접만 남았어.”
-진짜~~? 와 대박!!! 권노을 짱~
“쉿쉿. 방송 전까지는 비밀이야.”
-알게써.
“그래서, 나는 사실 면접이란 걸 받아 본 적이 없어서. 뭘 준비하면 좋을까?”
-글쎄~. 왜 가수를 하려 하는지? 그리고 왜 이 오디션에 참여했는지? 정도 물어보지 않나? 나도 그 두 개 물어봤거든. 국악 전공 왜 하냐. 우리 학교 왜 지원했냐.
“대답은?”
-그건 오빠가 알아서 찾아야지~. 내 대답 오빠가 쓸 거야?
그 말이 정답이었다.
동생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전화를 끊었다. 결국 가수를 지원한 이유와 오디션에 참여한 이유를 물어볼 거란 뜻이었다.
* * *
최종 면접은 당연하지만, 개인별이었다. 이제 아쉽지만 ‘비원더’는 해체였다. 재호와, 이제는 주환희 모드가 된 하늘이와 함께 호텔에서 조식 식사를 마쳤다.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로비에서 기다렸다. 심사위원들이 모여있는 방에서 개별 면접을 받기 위해서였다.
ㅎ 자로 시작한 성씨부터 참가자가 호령 되었다. 남은 참가자는 10명, 그중에서 역 가나다순으로 부를 모양이었다. ‘권’씨인 나는 아마도 마지막이었다.
주환희, 문루아, 그리고 애드리아나까지 하나하나 참가자가 사라졌다. 그러다 결국 나와 오민수, 단둘이 남았다. 이상하게 가나다순으로 오민수만 불리지 않았다.
‘보결이라서인가?’
애초에 남아 있으면 안 되는 녀석이었다.
여전히 오민수는 나를 썩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고 보면 저 녀석과는 말 한마디 한 적 없지.’
음침한 놈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번에는 지난번과는 달랐다.
지난번에는, 오민수 저놈이 내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다. 주환희 덕에 방송 분량을 챙긴 나를 질투하는 느낌이었다. (지는 문루아 꿀을 빨고 있던 주제에 말이다.) 이번에는 달랐다. 뭔가 나를 깔보고 비웃는 느낌이었다.
마치 미래를 알고 있는 나처럼, 뭔가를 알고 있다는 태도였다.
“권노을 참가자!”
마침 제작진이 나를 불렀다.
‘아무래도 이번 미션에 합격하고 난 다음에는, 오민수의 과거와 미래를 확인해봐야 할 거 같군.’
정보 수집을 다짐하며 심사위원에게 갔다. 일단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고, 지금 최종 면접에 집중할 때였다.
* * *
최종 면접은 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카페 곳곳에 카메라가 숨어 있었다. 심사위원 3명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카메라에 안 비치는 사각에는 이 PD가 서 있었다.
이윤강PD의 표정이 썩어 있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살짝(?) 찔러준 일에 대한 악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앞으로 촬영 분량이나 편집 각도에서 고생문이 훤했다. 메인 PD가 저런 표정이니, 제작진 도움은 받기 어려울지도 몰랐다.
그래도 별수 없었다. 동생을 팔아넘길 수는 없었으니까. 각오한 채로 참가자 자리에 앉았다.
“반갑습니다 권노을 참가자.”
셋 중 가장 연배가 어린 넵튠 한이 먼저 인사했다. 나머지 심사위원도 모두 가볍게 인사를 했다.
넵튠 한이 심사 진행 과정을 설명했다.
“마지막 관문입니다. 그동안 저희가 권노을 참가자를 지켜보면서 궁금했던 점을 모두 물어볼 겁니다. 그에 따라서 새로운 미션을 드릴 수도 있고, 조건부 합격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드물게는 탈락을 할 수도 있고요.”
“알겠습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장이 쾌활하게 말을 걸었다.
“권노을 참가자는 보면 언제나 피부 상태가 좋아요. 무슨 비결이 있나요? 특별한 화장품을 쓰신다거나.”
“아 딱히 그런 건 없는데요.”
베이비 심사위원이 장난처럼 천채왕 프로듀서에게 면박을 줬다.
“아이참, 선생님. 젊잖습니까. 저 때는 그냥 세수만 하고 자도 반짝반짝합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장도 지지 않았다.
“그 정도가 아닌 거 같은데? 뭔가 좀 특수한 노하우 있으면 좀 알려줄 수 있어요? 참고로 저는 항상 해양 심층수란 걸 마셔요. 이걸로 말할 거 같으면…”
천채왕 심사위원이 신나서 자기 물병을 들고 말을 이어갔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말을 끊었다.
“선생님. 진행하시지요. 권노을 참가자, 일정 힘들었습니다. 빨리 끝내고 쉬게 해주지요.”
천채왕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럴까?”
“그럼요~ 아유 죄송합니다 노을 군. 선생님이 건강 이야기만 하시면 이러세요.”
가요계의 제왕이라도, 수제자 앞에서는 사람이었다.
넵튠 한은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많이 본 모양이었다. 간신히 웃음을 참은 넵튠 한이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내게 면접 시작을 통보했다.
“그럼 질문 시작하겠습니다.”
이전 생에도 나는 면접 탈락은 하지 않았다. 크게 어려운 일은 없는 무난한 미션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이상하게 이전 생과 달리, 이번에는 불편하고 어려운 질문이 쏟아졌다.
“권노을 님 싸이월드가 개설되어 있던데요.”
넵튠 한이 질문했다.
“네넵.”
“저도 아이돌 그룹 출신이라 좀 아는데요. 처음에는 개인 온라인 활동은 안 하는 게 좋아요. 신인 가수는 우선 자기 이미지를 확실하게 각인시켜야 하거든요? 개인사는 방해가 됩니다. 특히 그게 권노을 참가자처럼 외형의 변화가 심했던 참가자라면 더더욱 그렇겠죠.”
“그렇군요.”
“미니홈피, 접을 수 있나요?”
“닫겠습니다.”
“좋습니다.”
이번에는 베이비 심사위원의 질문이 들어왔다.
“숙소 생활은 가능한가요?”
“지금도 4일간 숙소 생활을 했으니까요. 앞으로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아니죠 권노을 군.”
항상 친절하던 베이비 심사위원도, 이번에는 매우 단호했다.
“앞으로 생방송 무대 진출하는 6주동안… 이기면 이길수록 숙소에 남게 될 겁니다. 더 중요한 건 그다음이죠. 일단 가수가 되면 영원히 일종의 숙소 생활을 각오해야 돼요. 연예인의 삶은 사생활이 없습니다. 연애 같은 건 어렵고요. 특히 얼굴이 팔리면 클럽에 간다거나 하는 일은 불편할 수도 있어요. 괜찮겠어요?
“문제없습니다.”
원래 유흥 문화 같은 건 딱 질색이었다. 다만 왜 이렇게 진지하게 질문을 많이 물어보는지는 궁금했다.
분명 이전 생에서는 건강에 관련된 질문 몇 개만 대충하고 그냥 끝났던 관문이었다. 이번에는 질문이 시시콜콜 많았다.
처음에는 이윤강 PD가 시켰나 했다. 하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이윤강 PD는 조작도 매수도 심사위원들 모르게 혼자 주도했다. 이미 가요계 거물인 심사위원들에게, 제아무리 PD라 해도 영향력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작 나를 괴롭혀 달라고 부탁한다고 심사위원들이 PD 마음대로 움직일 리는 없었을뿐더러, 그런다고 그렇게 해줄 리도 없었다.
이번에는 천채왕 심사위원 차례였다. 명품 선글라스를 껴서 한층 표정이 무표정해 보였다. 항상 생글생글 웃던 평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권노을 군. 솔직히 묻겠습니다.”
“네네. 말씀하시죠.”
천채왕 심사위원은 엄청 대단한 질문을 하는 듯, 뜸을 들였다. 선글라스를 벗어서 안경 케이스에 넣었다. 자리 앞에 놓인 커피를 한 잔 마셨다. 질문이 그만큼 충격적이라는 뜻이었다.
“이건 방송에 나가지 않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묻고 싶습니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질문이기에, 이렇게 뜸을 들이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우리 회사에서 아이돌 팀 해볼 생각 없나요?”
“아이돌… 이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까 비로소 ‘아하’하고 감을 잡았다. 심사위원들은 내가 싫어서 질문이 많아진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게 너무 관심이 많아서 질문이 많아졌던 거였다.
‘한마디로, 이전 생에서 나는, 노래는 잘하니까 떨어뜨릴 수는 없지만, 가수로 영입하고 싶진 않은 자원이란 뜻이었군.’
지금은 내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TYB의 아이돌 제안은, 쉬운 제안이 아니었다. TYB는 웬만하면 아이돌 팀에서는 외부 인사 영입을 하지 않았다. 이건 그야말로 엄청난 인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이돌을 할 생각은 없었다.
“저는 아이돌도 좋아합니다. 찍어내는 상품이라느니 하는 말은 음악 시장에 이해도가 떨어지는 말이라 봅니다. 하지만 제가 좋은 아이돌 깜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은 처음에 내가 아이돌을 인정할 때는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렸다가, 마지막 문장에 이르러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요?”
“저는 춤을 못 춥니다.”
“연습하면 되죠.”
“저는 춤을 ‘아예’ 못 추고요. 무엇보다 춤 외에도 무대 매너나,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다양한 기술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 평생 노래만 했습니다. 저는 오디오형 가수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천채왕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내 대답을 들었다. 납득이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정말 영광스러운 제안이었습니다.”
“보컬리스트 지망생에게, 제가 실례를 한 것은 아닌가 싶네요.”
베이비 심사위원이 대뜸 끼어들었다.
“그러고 보면, 권노을 군 정도면 기획사가 줄을 섰을 거 같은데. 굳이 왜 오디션에 나왔지요? 박효신이 데뷔하고 싶다고 오디션을 보진 않잖아요? 그냥 데뷔하지.”
‘왜 이 오디션에 참가했어요?’ 동생이 알려줬던 족집게 과외가 그대로 들어맞았다. 물어보길 잘했다. 준비해둔 대답을 말했다.
“첫 예선 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살이 너무 쪘었어서요. 가수 제안은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우연이 이 오디션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요. 이걸 계기로 제 자신을 좀 바꿔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이어트부터 보컬까지 피나게 준비했습니다. 지금 오디션 성적이 좋다면 모두 그런 준비의 결과입니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을 들어 다른 심사위원에게 질문을 넘겼다.
질문을 이어받은 건 천채왕 심사위원이었다.
“이제… 거의 다 끝난 거 같습니다. 딱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질문일지 모릅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은 다시 커피를 쭈우욱 들이켰다. 중요한 질문일 경우에는 본인도 생각을 이런 식으로 다듬는 모양이었다.
“왜 가수가 되고 싶나요?”
또, 동생의 족집게 과외가 맞았다. ‘가수를 왜 지망하느냐’라는 질문이었다. 사실 이렇게 질문을 받지 않았다면, 절대 준비하지 않았을 질문이었다. 그만큼 내게는 너무 당연해 보였다.
다행히 미리 족집게 과외로 질문을 안 덕에, 대답을 준비해뒀다. 입을 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