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오늘 마지막 무대입니다. 비원더!”
사회자의 말소리를 들으며 무대 앞으로 올라갔다. 사회자가 말을 먼저 걸었다.
“세 분 다 턱시도 너무 잘 어울리시네요.”
“감사합니다.”
오늘 또한 히치콕 컨셉에 맞춰서 3인 모두 턱시도에 나비넥타이 차림으로 왔다. 영화 ‘모명’의 남자 주인공 차림이었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말을 얹었다.
“훤칠한 청년 셋이 턱시도를 입고 있으니 참 좋으네요. 호호. 작사가 입장에서 궁금합니다. 이번 곡의 테마가 무엇이기에 이런 의상을 입으셨나요?”
송라이팅 및 작사를 담당한 주환희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주환희가 대답했다.
“네. 이번에는 베이비 선배님의 노래… 오명을 준비했습니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깜짝 놀라 ‘어머!’ 소리를 냈다. 주환희가 계속 설명을 이어갔다.
“선배님 곡 중에 제가 젤 좋아하는 노래예요.”
“저도 참 좋아하는 노래인데요. 그런 곡을 선곡하시다니 의외네요.”
의외라 생각할 수 있었다. ‘오명’은 베이비 심사위원의 최고 히트곡은 아니었다. 그녀에게는 시대를 대표하는 ‘현기증’ ‘보랏빛 반지’ ‘이창’ 등의 히트곡이 즐비했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아닌 ‘TYB 앤터테인먼트’로 보면 더더욱 대표곡이 아니었다. 굳이 이 곡을 왜 골랐을까 싶을 수 있었다.
이건 주환희보다는, 전체 총 계획을 세운 내가 대답하는 게 적절해 보였다. 주환희에게서 눈짓으로 마이크를 받았다.
“TYB 엔터의 곡이 대부분 그렇지만, 특히 오명은 지금 들으면 오히려 당대보다 더 좋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또, 원곡과, 원곡에 영감을 줬던 영화를 보니 남자 주인공의 입장에서 답가를 부를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웃으며 말했다.
“제작자로서 참 감사한 말씀이네요. 저희 회사는 대중성도 대중성이지만, 시간이 지나도 감탄할 수 있는 완성도를 중시합니다. 그걸 알아주시다니, 좋네요.”
베이비 심사위원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저도 제 덜 알려진 자식을 알려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럼 한 번 같이 들어볼까요?”
조명이 꺼졌다. 핀 라이트가 재호를 정확하게 비췄다. 재호가 담담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나를 떠나지 말아줘,>
재호의 목소리와 함께 경쾌한 피아노와 현악기가 들어왔다. 심사위원들이 ‘찌르르’ 전율하는 게 내게도 보였다. 재호의 편곡의 덕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였다.
<너를 사랑해. 말하지 못했지.>
재호와 환희가 ‘너를 ‘하지’ 부분에 살짝살짝 화음을 넣어줬다. 풍성한 자극을 줬다. 나도 일부러 살살 가성으로 대충 부르면서 셋의 목소리를 화합시켰다.
서서히 고조되는 감정을 후렴에서 짚어준 건 주환희였다. 내 아이디어였다. 비원더의 후렴하면 항상 심사위원은 나를 떠올렸다. 그걸 깨고 싶었다.
<너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어.
열쇠를 어디에다 둔 거야.
가르쳐줘. 그러면 내가 찾겠어.>
물론 그게 끝이 아니었다. 한껏 감정을 끌어올린 후, 후렴의 후반부에서는 내가 한 옥타브를 높여서 더블링했다. 내 산뜻한 고음이 들어가자 노래가 훨씬 강렬한 분위기가 되었다.
<너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어.
열쇠만으론 갈 수 없었어.
붙잡아줘. 네게 입 맞출 수 있게>
피아노와 현악기의 반주가, 순간 멈췄다가, 다시 시작되었다. 비트 드랍이었다. 드럼도 없이 하는 비트 드랍이라니, 들어본 적도 없지만 너무도 자연스러웠다.
브릿지 파트의 주인공은 재호였다. 화려한 현악기 연주가 이어졌다 우리의 비밀 병기 악기도 섞여 들어갔다. 연주가 멈추자 재호가 바로 개성 있는 애드립을 넣었다.
“워워워 워워워 워우 예에에에.”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나와 주환희가 함께 화음을 넣었다.
“예~~~에에에에~ 우우우우~”
서로 조금씩 다른 리듬감과 발음으로 애드립을 넣었지만, 미리 미친 듯이 연습한 덕분에 화음은 아름답게 들어맞았다. 재호가 디자인한, 생전 가요에서 듣기 어려운 복잡한 화성의 진행이었다.
이 감정의 여운이 지나기 전에 바로 후렴으로 다시 넘어갔다. 이번에는 셋이 번갈아 가며 멜로디를 불렀다. 부르지 않는 동안에 남은 멤버들은 때로는 저음, 때로는 고음으로 저마다 자기 색깔의 애드립을 넣었다.
<너의 마음에 들어가고 싶어.>
<워어어~ 우~>
물론 가장 화려한 고음은 메인 보컬인 내 몫이었다. 최대한 정성껏 대충 고음을 질렀다. 무겁지 않은, 가벼운 일식 경양식점의 튀김 같은 고음을 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모든 애드립이 잠잠해지고, 다시 마무리를 재호가 지었다.
<베이비, 이젠 떠나지 못해요.>
심사위원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워어어어어~~”
“휘이이익~~”
제작진은 물론, 참가자까지 일어나서 박수를 쳤다. 손으로 휘익~’하고 부는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심지어 상대편인 문루아, 애드리아나까지 기립 박수를 치고 있었다.
‘잘 된 거겠지?’
박수가 조금 잠잠해지자마자 천채왕이 말을 걸었다.
“영화를 제대로 봤네요! ‘You'll never get rid of me again.’ 영화 속 대사를 그대로 마무리에 넣었어요. 게다가 연인보고 ‘베이비’라니.”
천채왕 심사위원이 베이비 삼사위원을 보며 파하하 웃었다. 베이비 심사위원은 장난스럽게 대본을 천채왕에게 던졌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너무 웃어 생긴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TYB의 모든 곡은 제가 책임자입니다. 솔직히, 아마추어들에게 한 방 맞았어요. 현악 4중주에 피아노로 리듬감을 만든다? 제 원곡 프로듀싱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게 훨씬 창의적이에요. 재호 군. 이번 오디션에서 어떤 결실을 맺을지 모르지만. 끝나면 꼭 우리 회사 곡을 맡겨보고 싶네요.”
재호가 대답했다.
“아 그 아이디어는…”
내가 여전히 고개를 저으며 재호 입을 막았다. 나는 편곡 방향을 제안만 했을 뿐, 실제 편곡은 모두 재호의 기술이었다. 굳이 나를 내세울 필요가 없었다.
베이비 심사위원이 말을 거들었다.
“요소요소에 들어간 화음들도 너무 좋았습니다. 가사랑도 너무 잘 어울렸어요. 키스하는 장면에서 입술을 내밀며 발음하는 ‘우우우~’ 발음으로 화음을 만들다니.”
주환희가 뭐라 말하기 전에 잽싸게 내가 대답했다.
“가사와 발음은 모두 환희가 디자인했습니다.”
“What?”
주환희는 ‘왜 그래요 횽?’이라는 듯 눈빛을 보냈다. 최종 결정은 주환희가 했지만, 코러스 편곡의 큰 방향도 모두 내가 잡았다. 마찬가지로 실제 멜로디와 가사는 모두 쭈 것이기에, 아쉽지 않았다.
이번에는 넵튠 한의 심사평 차례였다.
“노을 군은 대충 부를 줄도 아네요. 이 정도 출중한 보컬이 덜어내는 게 쉬운 게 아닌데. 놀랍네요. 제가 한 수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야금은 누구 아이디어에요?”
씨익, 웃음이 나왔다.
심사위원 중 누군가는 알아채 주리라 기대했다. 우리의 비밀 병기를 말이다. 예상은 적중했다.
* * *
재호는 항상 가야금을 궁금해했다. 그래서 어제, 동생이 왔다 했을 때, 동생에게 가야금 진행을 알고 싶다고 졸랐다. 오랜만에 동생을 만나자, 짦은 시간에 재호는 가야금이란 악기의 특성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다. 마지막에는 어떤 악기 소스를 써야 하는지, 그리고 어떤 음을 써야 가야금 연주하는 듯한 느낌이 나는지까지 모두 알려줬다.
재호의 습득력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하루 만에 가상 스튜디오에서 가야금의 활용법을 터득했다. 그리고 그걸 과시하듯 쓰지 않았다. 곡의 딱 마지막, 클라이맥스 전주 부분에만 절묘하게 양념처럼 섞었다. 덕분에 곡의 마지막 부분에는 가야금과 국악 스케일 특유의 아련함이 첨가되었다. 마지막에 처음 가사와 비슷하게 마무리됨에도 뭔가 아련한 느낌이 드는 건 가야금의 덕이 컸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넵튠 한에게 감탄하는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야, 거기 가야금이 들어 있었어? 뭔~가 마지막 전주가 좀 다르다 싶더니만.”
“네 선생님. 자세히 들어보면 현악 4중주에 가야금이 들어 있어요. 절묘하게 섞여서 잘 느껴지지 않았는데.”
“녹화 끝나고 다시 찬찬히 뜯어봐야겠네.”
천채왕은 레코딩 이야기를 하자 새로운 장난감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이제 결과 발표의 시간이었다. 사회자가 능숙하게 시간을 끌었다.
“마지막 팀 배틀의 승자는~~~ 바로~~~”
달의 바다도 이번 무대는 훌륭했다. 내 기억보다도 더 좋은 무대를 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승리를 자신할 수는 없었다.
사회자가 맥을 탁 끊었다.
“누구일까요? 천채왕 심사위원님.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보셨습니까?”
천채왕 심사위원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마이크를 잡고 답변했다.
“시청자분들이 싫어하시겠네요. 말씀에 대답 드리자면, 사실 달의 바다와 비원더는 이미 프로 가수 수준인 참가자들이 워낙 많아서요. 실력 자체는 다들 출중해서, 그보다는 ‘변화’를 중점으로 봤습니다.”
“변화라고 하시면?”
“정말 뛰어난 참가자들이지만, 약점이 조금씩 있었거든요. 그 약점을 얼마나 개선했는지. 또 칭찬받았던 강점을 얼마나 살렸는지. 그 변화를 위주로 심사했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진짜 공개합니다. 마지막 팀 배틀! 그 승자는~~~ 바로~~~~”
무대 앞 스크린을 쳐다봤다. 펑 하는 폭죽과 함께 승자가 공개되었다.
…승자는… 비원더였다.
“축하합니다! 비! 원! 더!”
* * *
패자와 승자는 바로 냉정하게 갈렸다. 패자 팀 중 탈락자로 선정된 이들은 집으로 갔다. 승자팀은 호텔에 숙소를 잡아주었다.
숙소에 오자마자 뒤풀이를 시작했다. 제작진이 넣어 준 샴페인에 하몽, 고급 치즈, 견과류 등의 고급 안주를 곁들였다. 술이 달았다.
먼저 나는 주환희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환희 니 덕분이야.”
“에이, 왜 그래요 횽, 다 같이 한 거죠.”
“아니, 니가 아니면 졌을 거 같은데.”
천채왕 심사위원의 코멘트가 떠올랐다.
[노을 군의 제스쳐… 너무 좋았어요. 노래가 너무 뛰어나서 몰랐는데, 노을 군의 제스쳐는 확실히 무대를 서는 사람이라기엔 아쉬운 면이 있었거든요? 오늘은 전~혀 아니었어요. 진짜 ‘오명’의 주인공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훌륭했습니다.]
“환희 니가 제스쳐를 잡아준 게 컸어.”
“에이 횽. 그보다는 횽 동생이 찝어준 가야금이 컸죠.”
재호가 거들었다.
“가야금 좋았어. 내 곡에 드디어 한번 넣어보네.”
재호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할 때였다. 재호에게도 말을 건넸다.
“재호, 니 곡 덕분이야. 천채왕 심사위원을 놀랜 곡이 어디 몇이나 있겠냐.”
“니 노래만 하겠어?”
“짜식.”
그렇게 우리는 승리를 자축하며 늦은 밤까지 파티를 즐겼다.
* * *
다음 날 아침. 나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났다. 남들이 자는 새벽이 내게는 누구보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Mp3를 마음껏 보고 내 스탯을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 그랬다.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이후로 한동안 뜸해서 이젠 특성 추가는 없는 건가 싶었다. 다행히 아니었다. 일어나서 mp3를 확인해보니, 오랜만에 화면이 빛나고 있었다. 새로운 특성이 추가되어 있었다.
-위버멘쉬의 회복력
등급: B+
설명
: 체력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하루 1회, 낮잠 후 체력과 의지력이 완전히 최상위로 회복된다.
: 회복을 위한 최소 수면시간은 30분이다.
: 고통은 현실의 시금석 노릇을 하게 되는 법이다.
낮잠을 실컷 자면 원래도 회복이 되는 거 아닌가 싶긴 했지만, 그래도 체력 회복 메커니즘을 얻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앞으로 가수 활동을 하면서, 체력 싸움이 될 것이었다. 아주 유용한 특성이었다.
‘앞으로 많이 써먹겠군.’
Mp3 확인을 멈추고, 베란다 앞의 바다를 바라봤다. 참 먼 길을 돌아왔다. 생방송까지는 이제 딱 한 걸음이었다. 오늘 오전의 최종 면접이었다. 이 인터뷰만 잘 통과하면 바로 생방송 돌입이었다.
대부분의 멤버들은 면접에서 탈락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파트는 중요했다. 압박 면접을 통해 참가자의 캐릭터를 잡아주는 역할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전 생에서 나는 ‘자신감 부족’과 ‘제스쳐 부족’을 지적받았다. 이제는 두 문제 다 해결했다. 이번에는 어떤 질문이 나올지 아예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번만은 그냥 백지 상태로 부딪쳐야 했다.
‘뭐 산책이라도 하면서 준비해볼까.’
베란다에서 일어났다. 바깥을 갈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바깥을 살짝 봤다.
뭐지?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저 자식이 왜 여기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