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태연하게 이윤강 PD에게 폭탄을 던졌다.
“그러고 보니까, 문루아 님 점수가 좀 이상하더라고요?”
“예? 무슨 말씀을…헤헤.”
잘 숨겼지만, 나는 봤다, 0.1초 표정이 구겨졌던 순간이 있었다.
“이번 슈퍼 캠프 첫 미션에, 문루아 님 점수가 분명히 그렇게 높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그룹 멤버를 고를 때에는 저랑 같이 최고점 그룹에 끼어 있더라고요? 귀신이 곡할 노릇이죠?”
아마 완성 편집본에서는 장난질을 쳐서 아무 문제 없게 해두었을 터였다. 하지만 내 기억은 못 속였다.
“착각이심다. 자, 여동생을…”
“지금 캠핑장 앞에 진 치고 있는 기자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기자’라는 마법의 단어가 들리는 순간, 이윤강 PD의 가짜 ‘헤헤’ 미소가 사라졌다. 신기할 정도였다. 지금은 2005년, 아직 언론의 힘이 공고한 시절이었다.
“절 협박하시는 검까?”
“그냥… 연예계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결연한 각오’를 보여드리는 겁니다.”
이윤강 PD가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손으로 들고 있던 믹스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팍! 하고 구겼다.
“아이쿠, 화상이라도 입으시면 안 되는데요. 바쁘신데.”
“미지근함다.”
이윤강 PD의 표정이 굳어 있었다. ‘이 새끼가?’라로 눈에 쓰여 있었다. 이놈을 죽여 말어 라는 갈등을 하는 게 얼굴에 보였다.
아마 천채왕 같은 진짜 강자라면, 이런 얕은수를 쓰지 않았을 거다. 누군가에게 악의를 드러내 봤자 내 손해였다. 하지만 이윤강 PD처럼 내게 선빵으로 얕은수를 쓰는 놈에게는, 왠지 얕은수로 받아 쳐주고 싶었다. 어차피 저놈은 금방 무너질 썩은 나무 같은 놈이었으니까, 악의를 드러내고,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렇다고 지금 완전 적으로 돌아설 필요는 없었다. 툭,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제 착각이었나 봅니다.”
“네?”
“다시 돌려보니, 문루아 양이 점수가 저보다 높았던 거 같기도 합니다. 제 기억이 약간 착오가 있었던 거 같습니다.”
이윤강 PD는 ‘이거 뭐 하는 놈이지?’하는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이제 와서 왜 뒤로 물러서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왜긴 왜야, 분량은 있어야 하니까 그렇지.’
“여동생 편집만 잘해주신다면. 제 기억은 영원히 착오 없이 유지될 겁니다.”
이윤강 PD가 ‘크흣’하는 신음 소리를 냈다. 자신이 이번 대결에서 패배했음을 직감한 모양이었다. 그 녀석에게 편집권이 있다면, 내게는 숙소 앞에 진 치고 있는 기자들이 있었다.
“좋슴다. 여동생분은 생방송 후에 인터뷰 하겠슴다. 헤헤…”
헤헤거리는 걸 보니 금방 다시 제 페이스를 찾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가 나를 보는 눈에는 어느 정도 ‘경계’가 디폴트로 깔려 있었다.
뭐, 저놈하고 친구가 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이윤강 PD가 의혹의 눈초리를 남기고 스르륵, 뱀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짜증 나는 놈.’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재호였다.
-야, 왜 안 오냐구? 마지막 연습이 제일 중요한 거 몰라?
“아.”
그러고 보니, 오후 1시에 스튜디오 장비를 갖춘 연습실에 셋이 모일 예정이었다. 촬영 이후 미팅이 너무 늦어져서 생각 못 했다.
“쏘리, 지금 바로 갈게.”
전화를 끊고 바로 연습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걸으면서 곰곰히 방금 있던 일을 생각했다.
‘이윤강 PD의 재판을 다뤘던 문서들을 미리 mp3로 읽어 둔 게 정답이었어.’
천만다행이었다. 이윤강 PD의 재판 기록을 통해, 그가 했던 자잘한 주작질까지 모두 확인했다. 덕분에 갑작스런 위기에도 대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하기는 일렀다. 다음에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걸으면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확실해졌다. 이윤강 PD는, 그냥 두기에는 너무 위험한 놈이었다.
Mp3를 통해, 미래에 그의 투표 조작 사건 유죄 판결 이후 인터뷰도 읽어 두었다.
이윤강 PD는 ‘스타 PD’가 되어서 권력과 부를 얻고 싶어 안달 난 놈이었다. 어떻게든 김태호 PD, 나영석 PD급이 되고 싶어 안달이었다. 그렇게 대책 없이 프로그램 예산을 늘려, 방송국 임원들에 압박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삶이었다.
게다가, 슈퍼스타는 두 번째 시즌, B까지 절정을 달리다, 이후 쭈우욱 내리막길이었다. 투자는 점점 늘어났는데, 성과는 없었다. 초조할 만했다. 기획사 자신에게 바치는 돈도 줄어들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번에 시즌마저 망가지면 이윤강 PD는 모든 걸 잃을 터였다.
즉, 결론적으로 이윤강 PD는 지금,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나뿐 아니라, 누구라도 협박할 수 있었다. 방송 결과 조작도 쉬웠다. 이미 저지르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미 나를 경계하기 시작한 이상, 편집 장난질 이상의 그 어떤 요상한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아무래도, 오디션에서 안정적으로 내가 우승하려면, 이윤강 PD가 사라지는 게 여러모로 좋을 거 같았다. 게다가 이 녀석은 이미, 나를 대놓고 협박할 정도로 폭주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mp3를 통해 좀 더 많은 정보를 수집해서, 계획을 세워봐야 할 듯했다.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 * *
일단은 이윤강 pd 문제는 먼 이야기였다. 당장의 오늘 저녁, 대결이 중요했다. 연습실에 들어가자마자 pd 건은 잊고, 연습에 돌입했다,
이미 곡은 완성된 상태였다. 마지막 완성도 작업만 남아 있었다.
전체적인 마감질을 확인하고, 피드백하는 건 멜로디와 가사를 썼던 주환희의 몫이었다. 주환희가 나와 재호의 노래를 섬세하게 피드백했다.
“재호횽. 횽이 제일 중요해요. 처음과 마지막 파트를 책임지니까요. 처음과 마지막이 같은 잔잔한 저음이지만 다르게 들렸으면 좋겠어요.”
“알겠어.”
“한 번만 더 해보께요.”
주환희도, 재호도 진지하게 한 음, 한 음절, 한 호흡까지 나사를 꽉 조였다.
“다 같이 한번 불러 볼까요?”
셋이 다시 한번 불러봤다. 겉보기에는 완벽해 보였다. 다 부른 후, 주환희가 꼼꼼히 녹음한 곡을 들어봤다.
“노을횽은… 노래는 아예 손댈 게 없네요. 솔찌기, 대충 불러 달라는 거 못 할 줄 알았는데. 이게 됐네요.”
“그러냐. 고맙다.”
“근데 횽도 문제가 있어요.”
“뭔데?”
“제스처가 좀 아쉬워요. 너무 절제되어 있어요. 손만 살짝 들고.”
옆에 재호도 슬쩍 거들었다.
“그래, 니 노래할 때 손드는 거 꼭 코러스 같다구.”
“그래?”
‘사실, 코러스이긴 했지. 그것도 8년 차. 게다가 그 코러스를 소개해준 건 미래의 재호, 네놈이었고.’
뭐, 이미 바뀌어 버린 과거를 말해줄 수는 없었다. 약간 변명에 가까운 대답이 나도 모르게 나왔다.
“솔직히, 노래에만 신경 썼지, 제스처는 신경 쓰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네. 난 듣는 가수지, 비주얼 가수가 아니니까.”
주환희가 무슨 소리냐는 듯 구박했다.
“횽, 거울 안 봐요? 횽 개잘생겼어요.”
슬쩍 스튜디오에 놓인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봤다. 좀 생기긴 했다. 몸은 화사해졌는데, 내 마음은 아직 뚱뚱하고 소심한 찐따였나보다.
“여튼 그래. 뭘 할까? 쭈 니가 좀 말해줘 봐. 니는 대형기획사 연습생이었으니까 무대 매너 많이 연구했을 거 아냐.”
“뭐… 많이 있는데. 횽은 지금 대부분 소화가 어려울 거 가타요. 쉬운 거만 알려드릴게요.”
주환희는 내 온몸을 직접 틀면서 자세를 잡아줬다.
“노래랑 똑가테요 횽. 몰입을 깨지 않으면 돼요. 감정을 잡고, 그 감정을 시선으로, 또 손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시선은 누굴 봐?”
“카메라 볼 때도 있고, 청중을 찍을 때도 있고. 케이스 바이 케이스죠. 저는 청중 중에 한 명을 콕 찍어서, 노래 부르는 상대방이라고 생가케요.”
주환희는 참 센스있는 교사기도 했다. 어렵지 않게 내게 금방 제스쳐를 알려 줬다. 노래의 연장 선상이라고 하니 쉬웠다. 노래는 실컷 불렀으니까.
이렇게 4일간 함께 무대를 준비하면서 느낀 점이 있었다. 주환희는 정말 ‘물건’이라는 사실이었다. 슈퍼 작곡가가 되는 게 당연했다. 이렇게 뛰어난 친구를 대체 왜 아이돌로 데뷔시키지 않았는지 의아한 정도였다.
그때 불현듯 뇌리에, 주환희의 첫인상, 외국인 여자와의 키스가 스쳤다.
…역시 그게 문제구나, 싶었다.
* * *
최상의 컨디션으로 무대를 맞기 위해 연습을 일찍 끝냈다. 두 시간 전부터 최대한 대화를 줄이고, 물을 조금씩 많이 마셨다. 노래 연습 대신 준비한 반주를 들으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저녁 식사 장소이자 마지막 미션 장소로 향했다. 버스를 타고 참가자들이 도착한 곳은 강원도 해변가의 한 호텔이었다.
버스를 타고 레스토랑으로 들어가자, 입이 딱 벌어지는 광경이 펼쳐졌다.
레스토랑은 당시 유행했던 정통 사극풍으로 꾸며져 있었다. 음식도 모두 정통 한정식이었다. 재호에게는 좀 찔렸지만, 재호표 고품격 양식만 먹다 오랜만에 먹는 한정식 맛도 각별했다.
식사 중, 반찬을 리필하러 가다 우연히 문루아를 만났다. 같은 팀은 아니지만 4일 동안 이러 저러한 일로 부딪치다 보니, 이젠 친숙했다. 아시아 스타보다 옆집 누나가 된 느낌이었다. 먼저 안부를 물었다.
“오늘 준비 잘하셨나요 루아 님?”
문루아 또한 장난스럽게 받아쳤다.
“그럼요. 오늘 권노을 죽었어. 짐 쌀 준비해요.”
“쉽게는 안 될 겁니다.”
말은 자신만만하게 했지만, 조오오금 불안하긴 했다. 지난 대결보다 문루아는 훨씬 자신이 있어 보였다.
그리고 ‘달의 바다’팀의 무대를 보니, 자신감에 일리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 * *
마지막 대결 또한, 둘째 날 대결과 비슷했다. 레스토랑 무대에서 자웅을 겨뤘다. 다만 이번에는 심사위원과 참가자들 모두 식사를 멈추고 집중한 상태에서 무대를 봤다.
다른 팀의 무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감명 깊은 무대는 없었다. 그럴 만했다. 내 기억 속 슈퍼스타 T의 탑 4는 모두 ‘달의 바다’와 ‘비원더’에 있었다. 이번 그룹 미션이 사실상의 결승전급 대진인 셈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달의 바다’ 팀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곡명은 ‘달의 뒷면’. 매번 밝기만 한 달에도 잘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있다는 내용의 슬픈 자작곡이었다.
무대는 전반적으로 훌륭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뮤지컬을 연상시키는 고딕풍 음악이었다. 빛은 문루아가, 어둠은 애드리아나가 맡아 교차하며 부르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다른 멤버들도 이전보다는 훨씬 녹아들어 여러 역할을 소화했다. 마지막에 문루아와 애드리아나가 함께 초고음을 내며 절규하는 모습은 마치 고딕 뮤지컬을 보는 듯한 감동을 주었다.
짝짝짝 짝짝짝.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나도 자연스럽게 박수를 쳤다. 재호가 나를 툭툭 건드렸다.
“왜?”
재호가 말하는 대신, 손가락을 들어 주환희를 가리켰다.
“훌쩍훌쩍.”
주환희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뭔가 감정을 건드리는 노래였던 모양이었다.
일부러 주환희의 분위기를 띄워 주려 틱틱댔다.
“야 뭐 좋은 무대기는 했는데, 울 거까지 있냐?”
주환희는 고개를 저었다.
“뭐 왜. 우는 거 아니라고?”
주환희가 고개를 말없이 끄덕였다. 은근히 자존심이 강한 녀석이었다.
“됐어. 여튼 울면 노래 안 나오니까. 슬슬 준비하자.”
주환희는 딱 1초. 몸을 멈추더니, 바로 다시 여유만만한 본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얼굴도 냅킨에 물을 적셔 재빠르게 원상 복구시켰다. 여튼 무서운 놈이었다.
‘저놈, 배우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사이, 심사위원들도 ‘달의 바다’의 무대에 호평을 쏟아냈다. 뭔가 이번 대결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의 무대 차례가 돌아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