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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가왕-19화 (19/280)

제19화

동생 걱정을 덜어서였을까? 잠을 푹 잘 잤다. 새벽 여섯 시에 일찍 일어났지만 기분이 상쾌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달렸다.

달리면서 차근차근, 팀 미션 준비 상황을 점검했다.

비트는 재호 말대로, 전날 점심에 완벽하게 나왔다. 우아하면서 아름다운 왈츠 같은 음악이었다. 타악이 없이도 리듬감이 느껴지고, 가사가 없이도 아련한 사랑의 감정이 피어났다.

주환희도 가사를 순식간에 써냈다. 일단 감을 잡더니만, 10분도 안 걸려 한 호흡에 가사를 완성했다. 수정까지 쳐도 30분도 안 걸렸다.

재호와 함께 완성된 멜로디와 가사를 확인해보니 정말 놀라운 결과물이 나왔다. 비트와, 영화와 촥촥 달라붙는 멋진 노래였다. 내가 기억했던 재호와 주환희 팀의 이전 노래보다 훨씬 좋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 노래 검사를 받았다. 마이클 맥도날드 특유의 가벼운 가성과, 정직한 테크닉을 떠올리며 후렴을 불렀다.

<이제 당신을 놓치지 않아요. Let me show you my love to you 우우우~>

주환희와 재호, 모두 호평이었다. 힘을 빼고 가성으로 부르니까 훨씬 더 느낌이 산다는 반응이었다.

“횽은 어차피 성량이 너무 좋아서 이러케 해도 파워가 넘친대니까요.”

“힘을 안 줄 때 오히려 더 힘이 있어 보인다구.”

같이 곡 작업을 하더니만, 이제는 둘이 아주 죽이 척척 맞았다. 좋은 징조였다. 연습에서도 우리 셋은 팀플이 촥촥 맞았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오늘은 보컬 미션 마지막이 있었다. 여기서 우승하는 사람이 마음대로 팀 경연 순서를 정할 수 있었다. 이 상은 조금 탐났다. 하지만 보컬 트레이너가 내 약점을 아무것도 지적하지 않은 통에, 어떻게 ‘3일 사이에 실력이 늘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뭐 이미 계획은 나름 세워두었지만.’

그렇게 오늘 하루 할 일과 전략을 정리해가고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 앞에 누군가가 어정거리고 있었다.

‘못 보던 얼굴인데?’

숙소 앞의 남자는 뭔가 추레한 느낌이었다. 오대오 가르마로 축 내린 머릿결. 엄청나게 도수가 큰 잠자리 안경에, 사이즈보다 한참 큰 촌스러운 카키색 양복 차림이었다.

다가가서 우선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시죠?”

“앗! 죄송합니닷.”

남자는 연신 고개를 숙였다. 굉장히 저자세인 남자였다. 이름을 물었더니 ‘하늘’이라는 말만 어물대다가, 금방 사라져 버렸다.

뭐지, 싶었지만 일단 넘어가기로 했다.

* * *

우선 매일 오전을 장식하는 체력 미션이 시작되었다. 예상대로 두 명이 모든 운동 수치에서 가장 돋보였다. 댄스 가수 지망생이던 주환희와 문루아였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이번에 우승자는. 캠프 기간 동안 가장 많은 발전을 이뤘던 사람에게 수여됩니다. 우승자는 바로… 애드리아나입니다.”

와 하고 박수가 나왔다. 애드리아나는 문루아와 오민수가 있는 팀의 참가자였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군인 흑인 아버지를 둔 사람이었다. 유독 몸이 다른 사람들보다 컸지만, 3일간 식단 조절과 운동으로 군살이 확 빠졌다.

“애드리아나 참가자… 놀라워요. 3일 동안 무려 5kg이 빠졌어요. 게다가 대부분이 지방이에요. 박수!”

“캄싸합니다 캄싸합니다.”

뭐, 체력 미션의 상품은 PPL 건강식품이었다. 나와는 큰 연관이 없었다.

하지만 다음 미션의 보상은 달랐다. 비주얼 미션, 체력 미션과 함께 3대 미니 미션 중 피날레를 장식한 보컬 미션의 우승자는 경연 순서를 정할 수 있었다. 이건 반드시 우승하고 싶었다.

보컬 미션의 룰은 간단했다. 2일 전에 봤던 보컬 트레이너가 그대로 나를 트레이닝 했다. 그리고 참가자 모두를 트레이닝 한 후에, 기간 내에 가장 실력이 많이 늘고, 충고를 들었던 참가자를 선정했다.

떨리는 마음으로 보컬 트레이너의 방에 들어갔다.

“노을 군 왔어요? 3일간 연습 잘했나요? 뭐, 연습이 필요한가 싶지만. 호호.”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요? 무슨 노래를 연습했나요?”

“마이클 맥도날드 노래를 연구했습니다.”

트레이너 선생님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마이클 맥도날드? 굳이 그런 가수를 지금 왜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가창력이 뛰어나다거나, 트렌드에 잘 맞는 가수는 아니었으니 그럴 법했다.

“곡을 만들다 보니, 제 파트를 마이클 맥도날드처럼 불러 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을 받아서 해봤습니다.”

“너무너무 궁금해요! 바로 들어볼게요.”

최대한 가볍게, 최대한 감미롭게, 과한 리듬감과 테크닉을 내려놓고, 불렀다.

<왜 당신이 떠났는지, 왜 게임은 계속되는지,

이게 진짜라면, 이게 진실이라면.

말해봐요 어째서 우리가>

노래가 끝났다. 테크닉을 많이 쓰지도 않고, 톤도 가벼워서 노래를 부른 거 같지 않은 맹한 기분이었다.

트레이너 선생님을 힐끗 쳐다봤다. 멍한 표정이었다. 그러더니 툭, 말이 나왔다.

“노을 군! 이거에요.”

“이거요?”

“이게 노을 군의 개선점이었어요. 기교와 힘을 빼는 거예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아무리 김치가 맛있어도, 젓갈 맛이 센 김치만 먹고 싶진 않거든요? 가끔은 시원~하고 밍밍한 김치를 먹고 싶을 때가 있잖아요. 딱 노을 군이 이전에는 매콤짭짜롬한 김치라면, 지금은 시원한 김치랄까?”

뭔가 잘 이해는 안 가지만 대충 칭찬인 거 같았다.

“그래, 이렇게 부르면 노을 군도 새 지평을 열 수 있죠. 앞으로도 버스(Verse) 부분은 이렇게 살짝 대충 불러봐요. 특히 A파트에서 적절하게 이렇게 부르면 클라이맥스 부분이 확 살 걸요. 약한 맛이 있어야 강한 맛이 확 튀니까요.”

“감사합니다.”

“너무 대단하다 노을 군. 어떻게 말해주지도 않은 코칭 포인트를 스스로 찾죠? 나보다 트레이너로 더 나은 거 같아요! 저, 진짜 레슨 한번 해줄 생각 없어요?”

온 힘을 다해 정중히 거절했다. 왠지, 보컬 미션 예감이 좋았다.

* * *

그리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보컬 미션 우승자는… 권노을 참가자입니다!”

참가자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사회자가 우승자를 발표했다. 결과는… 들은 대로였다.

트레이너 선생님이 말을 보탰다.

“권노을 참가자는, 원래도 실력이 워낙 뛰어났어요. 솔직히, 나아질 점이 없다 생각해서 미션 우승은 안 된다 생각했어요. 이건 실력이 아니라 ‘개선’을 보는 미션이니까요. 하지만, 저도 못 봤던 개선점을 스스로 찾아낸 권노을 군이 우승자라 생각했습니다. 최고예요!”

고개를 끄덕, 굽혀 감사를 표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들고 진행을 이어갔다.

“우승자 권노을 군께서는 포상으로 오늘 저녁, 팀 미션 진행 순서를 정하실 수 있습니다.”

사회자는 이어서, 2위 ‘아차상’은 ‘애드리아나’가 받게 되었다고 해줬다. 가장 트레이너의 요청을 완벽하게 수행한, 사실상 1등이라는 코멘트도 함께였다.

애드리아나라면 기억나는 참가자였다. 가창력이 뛰어난 디바 타입의 흑인 혼혈 여고생 가수였다. 생방송 1라운드에 탈락했고, 그 이후에는 소식이 없었다. 하지만 굉장히 훌륭한 보컬의 소유자였다.

이번 생에서는 이전에 내가 기억하는 때보다 더 방송 분량을 가져가고 있었다. 보컬 미션 2위, 그리고 체력 미션 1위였다. 게다가 이전과는 달리, 문루아의 팀에 멤버가 되었다. 문루아는 아시아 최고 스타이자 이번 오디션에서 제작진의 히든카드이니만큼, 가장 분량이 많았다. 애드리아나의 분량도 상당할 터였다.

‘조금 경계해야겠군.’

하지만 계획에 큰 차질은 없었다. 우리에게는 재호의 작곡, 주환희의 멜로디와 가사, 내 보컬이 있었다.

그리고, 동생이 갑자기 우리 캠핑장에 온 덕에 얻은, 또 하나의 필살기도 있었다. 깜짝 놀랄 미래의 심사위원들의 모습이 벌써 눈동자에 아른거렸다.

“진짜 이제 무당이라도 되려나?”

* * *

오후 연습 시간 전, 제작진과 단독 인터뷰가 있었다. 이윤강 PD를 중심으로, 왕작가 등 핵심 제작진이 모두 들어왔다. ‘보컬 미션’ 우승으로 얻은 보상인 ‘순서 정하기’를 촬영하기 위해서였다.

당연히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내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불쾌했다. 후에, 나를 떨어뜨리려 방송을 조작하다 걸려서 방송 전체를 망쳤던 이윤강 PD가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앞에 있으면, 항상 기분이 나빠졌다.

“권노을 참가자 오셨슴까? 더 잘생겨지셨네요. 저희 트레이너분이 일을 잘하셨나 봅니다. 몰래 숙소에서 간식 먹는 거 아니죠?”

“네네 감사합니다.”

건성으로 대답했다. 이윤강 PD의 친절에 짜증이 났다.

이윤강 PD는 지금의 날씬하고, 덕질몰이하기 좋은 외모가 된 나에게는 퍽 다정한 사람이었다.

전생에 살쪘던 나는 볼 때마다 얼굴을 구겼다. 말도 하지 않았다. ‘저 새끼 언제 떨어지냐. 어디서 교통사고 나서 안 죽냐?’하고 외치는 표정이었다. 거기다가 일부 기획사처럼 알아서 돈도 갖다 바치지 않으니 더더욱 미웠을 터였다. 그러다 못해 주작으로 나를 진짜로 강제 탈락시켰었다.

하필, 오늘 인터뷰를 진행하는 건 책임 CP인 이윤강 PD였다.

“자, 노을 군 순서 정하시죠. 헤헤.”

헤헤거리는 웃음이 참 꼴 보기 싫었다.

“네 그럼 1번부터 순차적으로 정하겠습니다. 1번은…”

순서 정하기는 순식간에 정해졌다. 이미 순서는 다 생각해두었다. 사실 이번 대결은 라이벌 대결이라, 라이벌끼리는 붙어 있어야 했다. 거꾸로 말하자면 라이벌 팀 외에는 경쟁 상대가 아니라, 어디랑 붙어도 알 바 아니었다. 중요한 건 오직 우리 팀 ‘비원더’와 라이벌 팀 ‘달의 바다’의 순서였다.

그리고 아주 뻔하게, 마지막 직전에는 달의 바다, 마지막에는 비원더를 순서에 올렸다. 내 손에 카메라가 한 대, 내 얼굴만 잡는 카메라가 한 대 동원됐다. 그야말로 온몸이 카메라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끝났습니다. 이 순서로 하겠습니다.”

카메라가 내가 직접 판넬에 붙인 순서표를 찍었다. 촬영 종료였다. 제작진이 촬영 방에서 삼삼오오 나갔다. 나도 나가려던 참에, 이윤강 PD가 나를 붙잡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하시겠음까?”

말이 권유지, 사실 강요였다. 이전 생이라면 좋아했겠지만, 이윤강 PD의 정체를 알게 된 나에게는 불쾌한 자리였다.

* * *

이윤강 PD의 제안(이라는 이름의 강요)으로 단둘이 벤치에 앉았다.

이윤강 PD가 내게 말을 걸었다.

“캠핑 힘들죠?”

“아닙니다.”

“최대한 출연자를 배려하려고 하는데, 부족한 점이 많슴다. 불편한 점은 다 알려주시면 제작진 통해서 조치하겠습니다. 헤헤…”

“감사합니다.”

굉장히 자상하고 따뜻한 말이었지만 말을 마무리하는 ‘헤헤’는 마치 사악한 범죄자가 자신의 의도를 숨기려 작위적으로 짓는 웃음처럼 들렸다. 내가 살쪘을 때는 전혀 저런 비굴한 웃음을 짓지 않았다는 점도 불쾌 포인트였다.

“권노을 참가자님 평판이 정말 좋아요. 베이비 심사위원님은…”

자꾸 말이 뱅뱅 돌아갔다. 이윤강 PD와 오래 있고 싶지 않았다.

“피디님.”

“넵.”

“무슨 일로 저 부르셨나요? 다른 참가자와 형평성 논란도 있으니, 이렇게 부르신 건 정말 큰 필요가 있으셔서일 텐데요.”

“역시 권노을 참가자. 똑똑하심다. 헤헤.”

최대한 불쾌함을 감추고 담백하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

“그럼 용건을 여쭤봐도 될까요?”

사실 덜컥 걱정이 들었다. 돈 달라는 거면 어쩌나 싶었다. 당연히 내 수중엔 돈이 없었으니까.

“여동생분이 캠프에 오셨던데. 참 이쁘시던데요? 국악예고 가야금 전공이라니 이야기도 되고. 방송에 나오면 화제가 될 것 같은데…”

아하, 이제 이놈의 의도를 알았다. 동생을 방송에 내보내게 해달라는 뜻이었다. 나와 달리 동생은 촬영에 동의 각서를 쓰지 않았다. 사전 동의가 있어야 편집본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 동생이 이 캠핑장에 온 건 엄밀히 말하자면 학교 무단 이탈이었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굳이 바깥에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동생 마음이겠지만… 워낙 경황없어서 했던 일이라. 이번에는 안 나왔으면 합니다.”

“음…”

이윤강 PD가 실망스럽다는 듯 금방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빨리도 삐지는 타입이었다.

“만약 제가 생방송 무대에 진출한다면, 그때 미리 계획을 짜서 인터뷰는 하셔도 됩니다. 아, 만약 동생이 동의를 하면요.”

“권노을 참가자. 참 멋진 가수고, 팬이라서 제가 말씀 하나 드리겠슴다. 다른 참가자한테는 절대 안 알려주는검다. 헤헤…

갑자기 이윤강 PD가 내 어깨에 손을 탁하고 올렸다. 소름이 쫙 돋았지만 최대한 표정을 숨겼다.

“연예계는 말이죠, 목숨을 걸어야 됨다. 가수 하고 싶은 사람 쎄고 쎘슴다. 거기서 튀려면 가족도 팔아야 하고, 필요하면 팬티까지 벗어 던져야 돼요. 성공하려면, 그런 ‘결연한 각오’가 필요한검다. 헤헤…”

‘얼씨구, 아주 내 아빠 노릇을 하려 하네?’

어린 노무 새키에게 세상을 미리 알려주겠다며 선심 쓰는 태도로 포장했지만 결국 협박이었다. 이놈은 돈과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조작까지 하는 놈이었다. 협박 따위, 너무나 쉽게 저지를 수 있을 거라 봐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 동생 프라이버시를 팔아먹고 싶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그 카드를 써야 되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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