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동생이 사라졌다. 왜?
‘나가야 할 일이 있었을까? 고3이 갑자기 그럴 일이 뭐가 있어. 마음에 문제가 있었나? 어제까지 통화 잘했는데. 유괴당했나? 기숙사에서 무슨 유괴야. 게다가 우리 집이 무슨 돈이 있다고?’
아무리 경우의 수를 따져봐도, 이상했다. 경우의 수를 따지다 문득, 내가 지금 들고 있는 게 핸드폰이란 사실을 떠올렸다. 바로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뚜. 뚜뚜.
뚜뚜. 뚜뚜.
‘제발 받아라, 제발!’
통화 연결음이 만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딸깍.
-여보세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여보세요’였다. 마음과 달리, 입으로는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야, 너 어디야? 지금 선생님이 너 찾고 난리야. 빨리 기숙사로 돌아…”
그 순간 너무 놀랐다.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왜냐면 내 앞에, 여동생이 서 있었으니까.
* * *
그러니까, 여기는 내 숙소 앞이었다. 그리고 내 앞에 있는 저 교복 차림 여고생은, 내 동생이었다.
조합하자면… 아니, 조합이 안 됐다.
“너 왜 여깄냐?”
“나 여기서 잘 거야.”
“뭔 소리야. 참가자도 아닌데, 니가 여기서 어떻게 자?”
“작가 언니가 자고 가도 된댔어.”
“아니, 고3이 왜 갑자기 여기에 왔냐고…”
“니는 맨날 캠프에서 재미있게 살잖아. 나는 못 와? 나도 여름방학 있거든?”
“재미라니. 탈락할까 봐 매 순간 목숨을 걸고 분투 중인데. 그리고 애초에 너는 참가자가 아니잖아.”
“아 몰라 나 여기서 자러 갈 거야. 늦었어.”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가 있을 리 없는 시간이었다.
한숨이 나왔지만, 일단은 현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래, 일단 맘대로 해라. 늦었으니까 오늘은 자고, 아침은 같이 먹자.”
“구래!”
동생이 쫄쫄 제작진에게로 가버렸다. 정말로 작가가 동생을 어딘가 재워 주기로 한 모양이었다. 싫지만 ‘저게 어떻게 편집되려나…’같은 얄팍한 생각도 조금, 아주 조오오오금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동생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그날 밤에는 역시나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간신히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재호에게 먼저 상황을 설명했다. 동생과 아침을 같이 먹기로 했으니 말은 미리 해야 했다.
“동생이 왔다구?”
“그래.”
재호랑은 어린 시절부터 동네 친구니만큼 동생하고도 안면이 있었다.
“예슬이는 가야금 전공이었지? 재미있는 악기지.”
역시나, 저놈은 사람보다 악기에 더 관심이 있었다.
“뭐 그렇지.”
“근데 왜 왔대?”
“몰라.”
“몰라?”
재호는 ‘니가 그걸 모르면 어떡해’라는 표정이었다. 뭐 그렇다고 모르는 걸 알게 되지는 않았다.
사실 내가 알고는 있어야 했다. 부모님이 안 계신 지금, 고작 한 살 위이지만 내가 동생의 부모와 다를 바 없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몰랐다.
따르릉.
또 전화가 울렸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빠, 혼자 밥 먹어. 나 아침 운동 좀 할게.
“운동? 니가 무슨 운동이야. 숨쉬기 운동 말곤 다 귀찮다고 했잖아.”
-아 됐어. 언니가 불러. 나 간다. 쫌 따 연락할게.
그리고 전화가 끊겼다. 정말 혼란스러운 통화였다.
‘운동? 언니? 쫌 따 연락? 그럼 언제 돌아가는 거야? 아니, 애초에 가긴 가는 거야?’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 거 같았다.
우왁!
…진짜로 계란을 코로 넣을 뻔했다.
“뭐하냐 노을이 너.”
재호가 커피 그라인딩을 멈추고, 내 앞 탁자에 앉았다.
“뭘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예슬이는 항상 좋은 학생이었는데. 땡땡이라니.”
“땡땡이? 지금 여름이잖아. 방학 아냐?”
“방학이라도 기숙사에 있기로 했으니까.”
“수업은 있는 거야?”
“잘 모르겠는데.”
“넌 그것도 모르냐?”
그러고 보면, 성적에는 신경 썼지만, 그런 건 전혀 몰랐다.
“그걸 알았어야 하는 건가?”
“야, 당연하지. 얼마나 집에 오고 싶겠어?”
“집에 오면 뭐해 아무것도 없는데. 차라리 연습 시설 빠방한 기숙사가 훨 낫지.”
“집에는 니가 있잖아 멍충아.”
“나? 내가 있어서 뭐 어쩔 건데.”
“동생이 유일한 가족 보고 싶다고 투정 부리는 건 당연한 거라구. 잘 이야기 해봐.”
“그런가? 내가 이상한 건가?”
뭔가 어색했다. 아무리 상식적인 재호의 말이라 해도, 쉬이 믿겨지진 않았다.
그날 아침, 피트니스 센터에서의 체력 미션은 역시나 말아먹었다. 운동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주환희와 문루아, 두 댄스 가수 출신들이 날아다녔다. 그러면서도 나는 동생 생각에 집중이 안 됐다.
사실 체력 미션은 소위 ‘버리는’ 미션이었다. 체력 미션은 탈락 여부와는 큰 상관 없었다.
그리고, 점심시간 전, 미션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비주얼 미션’이었다.
참가자들이 모 패션 브랜드의 샵에 떡 하니 떨어졌다. 저렴한 올드 네이비 류의 상품부터, 적당히 고급스러운 바나나 리퍼블릭 느낌의 옷까지 다양한 상품군이 갖추어진 곳이었다.
그리고 한가운데에는 슈퍼스타 T의 비주얼 디렉터이자 TYB의 비주얼팀 팀장, 주소율 매니저가 떡 하니 서 있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앞으로 여러분을 매력 뿜뿜으로 만들어 줄, 주소율이라고 합니다.”
짝짝짝. 참가자들이 박수를 치며 환영했다.
“그 전에 부탁드릴 일이 있어요. 일단 여러분이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 알고 싶어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무대에서 어떤 옷을 입고 싶은지 골라서 가져오세요. 15분 드릴게요. 이게 미션입니다. 시~작!”
주환희가 당황스러운 듯 더듬거렸다.
“What? 더 설명은 없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도 피차 마찬가지였다. 5초 정도 서로 눈치를 보더니, 일단 옷을 고르려 다들 뛰쳐나갔다.
남은 건 나와 문루아, 딱 둘 뿐이었다. 문루아는 아마도 10년 넘게 가수 생활을 했으니, 자기 의상을 고르는 노하우가 쌓여 여유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동생 생각에 정신이 온통 팔려있었다.
“뭐 하세요?”
문루아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냥 좀 생각할 게 있어서요.”
사실 비주얼 미션도 내가 버리는 미션이었다. 의상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 부상인 간식도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우승하는 재호와 준우승하는 문루아에게 모든 걸 맡기고 적당히 있을 요량이었다. 이제는 다른 고민이 생겼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예슬이 생각하는 거예요?”
“네?”
주변을 둘러봤다. 문루아뿐이었다. 동생 이름을 말한 게 문루아라는 뜻이었다.
‘그 이름이 왜 당신 입에서 나와?’
“예슬이 생각 하냐구요.”
“당신… 아니, 루아 님이 어떻게 예슬이를 알죠?”
“어제 예슬이 우리 방에서 잤어요.”
오만가지 생각이 순간 머리를 스쳤다. 왜 아시아 스타의 숙소에서 여동생이 잠을 잤을지, 무슨 사고는 치지 않았을지, 지금 우리 대화는 녹화가 되고 있는지 등등,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카메라 찾는 거예요? 여기는 없어요. 다들 참가자들이 옷 고르려는 장면을 찍으러 갔으니까.”
내가 카메라를 찾고 있다는 걸 읽은 모양이었다.
일단 심호흡을 하고 상황을 돌이켜봤다. 카메라가 없다면, 그래서 동생 이야기가 전파에 타지 않는다면, 이 상황은 딱히 나에게 나쁘지 않았다. 어차피 버리려는 미션이었다. 궁금증이나 풀어보기로 했다.
“예슬이랑 어떻게 만나셨어요?”
“연습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못 보던 여고생이 작가와 이야기하는 모습을 봤어요. 국악예고 교복이라 반가워서 말을 걸었죠.”
“국악예고 학생이란 걸 교복만 보고 알았다고요?”
“저, 국악 좋아해서요.”
“아…네…”
문루아도 재호처럼 음악에 있어서는 엉뚱한 면이 있었다.
“어젯밤에도 이야기 많이 하고, 오늘도 아침에 같이 운동했어요. 아무래도 음악 하는 친구라 이야기가 많이 통하던데요?”
오늘 아침에 말했던 ‘아침 운동’이 저걸 말하는 거였다.
“그렇군요.”
“뭐, 물어보고 싶은 거 없어요?”
문루아 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씨익 웃고 있었다. 뭔가 놀리려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어보면 말해주실 건가요? 미션 시간도 짧은데.”
문루아는 쿡쿡 소리 죽여 웃으며 말했다.
“저는 어차피 옷 고르는데 5분이면 충분해요.”
냉큼 받았다.
“네, 그럼 대체 동생은 왜 온 건지 아시나요? 고3이라 시간이 하루도 아까운데.”
“가족을 한 번도 못 봤잖아요. 가끔은 가족을 봐야죠.”
“매일 통화하고 있습니다.”
“부족해요.”
“게다가, 동생은 고3이고, 저도 인생 일대의 기회인 오디션에 참여 중이니까. 이럴 때는 서로 기회를 잡으려 노력해야죠.”
그랬다. 지금은 내 인생의 한을 풀 기회였다. 동생의 대학 진학, 그리고 내 가수 인생 성공을 통한 대학 진학금 및 서포팅 금액 마련까지 둘 모두를 이룰 수 있었다.
내버려 두면 동생은 한예종 국악과에 들어가, 세계적인 국악 음악가가 되는 기회를 잡을 테니까, 그때까지 지원 가능한 사람이 되는 게 목표였다.
“나도 그랬어요. 내 데뷔가 중요하다며, 데뷔 직전에 가족들이 거의 보러 오지 않았죠. 집중력이 흩어진대나? 너무 우울한 나날이었어요. 그때 상처가 지금까지 마음에 남아 있어요.”
문루아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속에 눈물이 느껴졌다.
“그래서 예슬이를 금방 이해하셨던 거군요.”
“가장 취약한 순간일수록, 곁에 있어서 힘이 되어 주면 평생 그 기억으로 함께 살 수 있을 거예요.”
“정기적으로 동생을 보면 좋을까요?”
“그건 알아서 찾아요. 내가 어떻게 알아요?”
문루아는 머리를 질끈 묶고, 달려나갔다.
하하, 하고 씁쓸한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는 내가 동생에게 돈 외에 필요한 걸 줄 차례였다. 힌트는 충분히 얻었다.
* * *
비주얼 미션은 내 기억 그대로 원재호의 우승, 문루아의 준우승이었다. 나는 전체 꼴찌였다. 덤으로 주소율 매니저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오마이갓! 권노을 참가자 이게 옷이라고 가져온 거예요? 앞으로 절대 직접 의상 고르지 마세요.) 체크 반바지에 체크 남방을 입은 내 모습도 웃음 포인트였다.
계획대로였다. 어차피 우승을 못 할 바에야, 아예 꼴찌라도 해서 방송 분량이라도 채우는 게 나았다. 어차피 탈락 여부를 반영하는 미션도 아니었으니 더욱 그랬다.
‘일단 아직은 다 내 계획대로야.’
* * *
비주얼 미션 다음은 점심시간이었다. 이번에는 동생에게 미리 연락해서 단둘이 내 숙소에서 식사를 함께했다.
“먹어.”
동생은 전화 때와는 달리, 눈치를 봤다. 뭔가 ‘내가 너무 나갔나?’ 싶은 표정이었다.
“화 안 났어?”
“왜?”
“오늘도 기숙사 안 갔잖아.”
“가야 할 때 되면 가겠지 뭐. 1년 쉴래?”
“아니! 미쳤어?”
“그래. 있고 싶을 때까지 있다 가.”
묵묵하게 제작진이 준 샐러드와 두부를 먹었다. 침묵이 흘렀다.
내가 침묵을 깼다.
“같이 살까?”
“같이?”
“기숙사, 사실 안 살아도 되는 거잖아? 보호자 있으면. 집에서 출퇴근해도 되니까.”
“오빠 괜찮아?”
“그럼. 그래서 네 컨디션 관리도 해주고, 매일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그럼 좋을 거 같아. 지금 가장 중요한 시기니까.”
동생은 땅만 쳐다보며 느릿느릿 대답했다.
“그… 래…”
울먹임이 살짝 느껴졌다.
“근데 어차피 좀 걸릴 거야.”
“왜?”
“슈퍼 캠프 끝나면, 바로 생방송이거든. 숙소 생활해야 해. 끝날 때까지. 그러니까 9월까지는 못가. 우승할 거니까.”
“와… 권노을! 자신감 미쳤는데!”
금방 동생은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이 좀 진지한 이야기를 할 타이밍이었다.
“예슬아 나는 니가 세계적인 음악가가 될 거라 믿어. 그래서 지금까지 그랬고, 앞으로도 너를 더 밀어붙일 때도 있을 거야.”
“피~.”
“하지만 니가 대단한 음악가여야 내 동생인 건 아니야. 내 동생이니까,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면 좋겠을 뿐이야. 괜찮지?”
선후 관계가 다르다, 이게 내가 내린 해답이었다.
“응!”
동생이 훌쩍이면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 * *
동생은 바로 버스를 타고 기숙사로 돌아갔다. 학교에는 내가 갑자기 급하게 놓고 온 게 있어서 부득이하게 내게 방문한 거로 말해두었다. (혼났다. ‘권노을 보호자! 앞으로는 절대 그러시면 안 됩니다!’)
재호와 주환희에게도 간단하게 동생 이야기를 설명했다. 함께 식사한 경위를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재호는 감동했는지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놔 임마! 남자끼리 징그럽게.’) 주환희도 감명 깊게 들은 모양이었다. 내게 당당하게 말했다.
“횽. 횽 얘기 들으니까 이제 알 거 같아요.”
“뭘?”
“남주의 마음을! 남자 주인공은 여주가 진짜 멋진 스파이가 되길 바랐던 거에요. 그녀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막상 그렇게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니까 자신이 미련한 짓을 했다는 걸 Get it! 한 거죠. 둔탱이니까.”
어쩐지 주환희 말 들으면서 내 귀가 간질간질했다.
“내 욕하는 거냐.”
“이젠 가사 완성 가능할 거 같아요. 쫌만 기대려주세요.”
그리고 주환희는 자기 방에 처박혔다. 그렇게 30분도 지나지 않아 가사와 멜로디가 완성됐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리듬감 있고 아름다운 가사였다.
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최종 미션 준비는 착착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게 결전이 날 아침이 밝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