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문루아가 나를 뚱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아무 감정도 없는 무표정이었다. 무표정한 입이 말을 열었다.
“덕분에 살았어요.”
“무슨 말씀이시죠?”
일단 시치미를 뚝 뗐다.
“당신, 알고 있었죠?”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문루아가 눈을 흘기며 말을 툭 내뱉었다.
“당신, 혹시 무당이에요?”
“무당 같은 걸 믿으시나요?”
“아뇨? 저 성당 다녀요.”
“아, 예… 좋은 일이죠…”
뭐라 대답하기 어려운 엉뚱한 답이었다.
“여튼 고마워요. 행운이었다고 해도.”
“무슨 말씀 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잘 풀렸다니 다행입니다.”
뻘쭘하게 서 있던 오민수가 끼어들려고 시도했다.
“저저, 그럼 문루아 님 일은 다 해결된…”
“잊어주세요. 자, 이제 폐 끼치지 말고 가죠.”
문루아는 오민수를 데리고 자기 연습실로 돌아갈 태세였다. 왠지 마음속에서 툭, 하고 장난을 치고 싶었다.
“살살 해주시나요?”
“네?”
문루아가 뒤를 돌아서서 눈을 번뜩이며 쏘아붙였다. 장난하냐는 듯한 태도였다.
“고맙다고 하셔서. 그럼 모레 경연 살살 해주시나 해서요.”
“아니요. 고마우니까 더더욱 최선을 다할건데요? 상상도 못 한 무대를 보여줄 건데요?”
문루아가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뭔가 입가에는 미소를 띤 듯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장난을 치는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나도 미묘한 미소로 답했다.
“기대하겠습니다.”
“기대해도 좋아요. 자, 이제 가죠. …님.”
빵 하고 웃음이 터졌다.
‘풋, 그렇게 온갖 위하는 척, 친한 척하더니, 문루아는 니 이름도 모르는 거냐.’
“오민수 참가자입니다.”
“알겠어요. 철수 님. 가요. 철수.”
“아니 오민수…”
“가요.”
오민수가 주춤주춤 문루아를 따라갔다. 그렇게 둘이 멀리 사라졌다.
저 멀리에서 우리를 보던 시선이 사라지는 것도 느껴졌다. 아마 문루아의 매니저가 멀리서 계속 그녀의 안전을 위해 경호하는 모양이었다. 아시아 스타니, 그 정도는 당연한가 싶기도 했다.
둘이 사라져도, 재호와 주환희는 아직 분이 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 횽! 다짜고짜 횽 멱살을 잡았던 놈이잖아요. 사과라도 받아야 된대니까요.”
“저런 똥매너 놈은 한번 쓴맛을 봐야 한다구.”
“아서라 니들. 복수는 직접 하는 게 아니야. 내버려 두면 하늘이 해주는 거지.”
뭐 하늘이라 말하면 좀 시적이고, 정확히는 ‘시청자’라는 존재가 천벌을 내려 줄 거란 걸 알고 있었다. 문루아 경호팀뿐 아니라, 우리를 찍고 있던 카메라도 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재미있는 광경을 안 보여줄 리 없었다. 어디까지 보여줄지는 몰랐지만, 제대로 이 PD가 ‘사탄의 편집’을 해서 시청률의 제물로 쓰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무슨 신부님 같은 말을 하는 거예요 횽. 횽도 성당 다녀요?”
“됐다 됐어.”
* * *
간신히 분위기를 다시 잡고, 영화감상을 끝냈다. 아직 작업에 들어갈 타이밍은 아니었다. 다시, 카메라를 앞에 두고 토론에 들어갔다.
환희는 뭔가 다급한 눈치였다. 우리에게 걱정을 토로했다.
“횽, 우리 바로 내일모레 무대 해야 하는데 너무 한가한 거 아니에요?”
재호도 초조한 듯 시계를 보면서 노트를 끄적거렸다.
“이건 환희 말이 맞아. 지금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딱 48시간 14분밖에 없거덩. 1분 1초가 아까운데.”
“자자. 링컨이 그랬어. 나에게 나무를 가는 데 1시간이 주어진다면 그중 45분을 도끼날 가는 데 쓰겠다고. 이렇게 처음에 토론을 끝까지 가는 게 제일 빨리 가는 길이야.”
“끄응….”
간신히 불만족스러워하는 둘을 테이블에 앉혔다. 조급해하는 건 이해됐지만 이럴수록 깊게 토론하고, 계획을 철저하게 짜야 했다. 그게 지름길이었다. 코러스로 참여했던 레전드 가수의 공연 준비 회의를 지켜보며 얻은 지혜였다.
“자, 우선 비트부터 시작하자. 재호, 너는 어떤 음악이 떠올랐어?”
작곡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가사와 멜로디를 먼저 떠오르지만, 가사와 멜로디를 먼저 쓰는 음악은 전체의 10%도 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음악은 우선 반주, 즉 ‘비트’가 먼저 나왔다. 그리고 그에 맞는 멜로디와 가사를 얹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우선 편곡 컨셉을 잡아야 했다.
재호가 자기 소감을 말했다.
“굉장히 우아한 영화였어. 두 남자와 한 여자가 추는 왈츠 같은 느낌?”
“오, 그거 굉장히 공감 가는데. 모든 장면에 리듬감이 느껴지더라.”
맞장구치자 재호가 신나서 적어 둔 노트를 보여주며 말을 이어갔다.
“맞아. 굉장히 품격 있구, 고급스러운 느낌? 그래서 베이비 심사위원님의 원곡도 잘 어울렸어. 나일론 기타와 어쿠스틱 드럼, 그리고 스트링 선율이 흐르는 고급스러운 재즈 선율이었거덩. 보기만 해도 대저택이 보이는 듯한 느낌이랄까?”
“영화를 보고 나니까, 영화의 느낌을 잘 살렸다는 생각이 들긴 해.”
새롭게 곡을 쓰겠다고 하니, 원래 레퍼런스 곡이 얼마나 잘 만든 곡인지 실감이 났다. 영화의 느낌은 살리되, 원곡과는 다른 방식으로 해야 했다.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침묵을 깬 건 주환희였다.
“어제 저녁 식사 같네요.”
“뭐?”
“그 와인 파티장이요. 영화에서 제일 인상적이던 장면. 그거 꼭 어제 식사 자리 가탔어요.”
그러고 보니, 어제저녁 대결 무대에서도 고급스러운 식사를 했다. 와인잔이 나왔고, 현악 4중주가 흘러나왔다.
잠깐, 현악 4중주…?
“그거야! 어제 그 분위기. 정말 ‘오명’이랑 잘 어울렸어.”
재호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실내악 느낌으로 가보자는 거야?”
“역시… 어렵냐?”
재호는 묘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보통 편곡자라면 어렵다고 하겠지만.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클래식 음악 작곡이 취미였거덩. 실내악 정도야 쉽지.”
‘…변태 새끼.’
재호는 크크큭, 중2병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노트에다 마구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영감이 폭발하는 모양이었다.
“가능해. 가능해. 이거라면 전혀 원곡과 다르면서, 영화의 느낌을 표현할 수 있겠어. 다만, 실내악 느낌이 나려면 드럼이 없는 게 좋은데, 가능하겠어?”
드럼이 없는 곡에 노래를 부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해봐야 알겠는데? 쭈, 너는?”
“저는 좋아요. 약간 애니메이션 ost 가틀거 같네요.”
일단 이 정도면 ‘고!’해야 했다.
“좋아, 재호 일단 그런 느낌으로 러프하게 편곡해줘. 그럼 그동안 쭈 너는 나랑 탑라인 이야기를 해보자.”
재호는 노트북을 키고 편곡 작업을 시작했다. 나는 주환희와 함께 탁자 위에 빈 공책을 하나 피고, 다시 회의를 시작했다.
“어때?”
주환희는 뭔가 감이 안 잡힌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횽,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남자 주인공에 공감이 안 돼요.”
“왜?”
“저 남자 주인공, 누가 봐도 첨부터 여자를 사랑하잖아요. 근데 왜 바보같이 그냥 다른 남자랑 결혼하게 두는 거예요?”
“그야 그게 일이라 그런 거잖아. 그 여자는 스파이니까.”
“일이 뭐가 중요해요. 사랑하면 가는 거지.”
“일 때문에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도 많아. 아이돌이라던지.”
‘아, 하긴 네놈은 좀 다르겠군.’
갑자기 외국인 여성과 당당하게 길가서 키스하던 주환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렬한 첫인상이었다.
“저는 아니에요. 남자 주인공 마음이 100% 이해가 돼야 가사가 술술 나오는데, 어렵네요. 잘 모르게써요.”
주환희는 가사에 맞는 감정과 장면을 상상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경험상 이러면 아주 좋은 가사가 나오기는 어려웠다.
이럴 때는, 안 되는 걸 붙잡고 있기보다는, 되는 거라도 하는 게 나았다.
“좋아… 그럼 일단, 이렇게 해보면 어때? 재호가 디테일 없는 러프한 비트는 금방 만들 거야. 그 반주에 맞는 멜로디랑, 적당한 데모 가사를 우선 만들어줘.”
“서사랑 아예 상관없이요?”
“그래. 오로지 음악에 맞춰서 사운드만 신경 써서. 그렇게 일단 큰 그림만 잡아 두고, 디테일은 같이 천천히 생각해보자고.”
“알게써요 횽.”
금방 재호가 러프한 비트를 가져왔다. 감성적인 피아노 두 대가 중심을 잡아줬다. 주 멜로디와 리듬을 모두 피아노로 해결했다. 여기에 산뜻한 현악기들이 강세를 줬다. 살짝살짝, 감탄이 나오는 코러스 라인까지 벌써 녹음이 되었다.
“이걸 30분 만에 만든 거야?”
“좀 화성 다듬고. 현악기들을 정리해야지. 클라이맥스에는 반도네온이나 하프라던가 여튼 좀 뜻밖의 악기를 추가하면 좋을 거 같구. 사운드 소스가 좀 더 필요해.”
“하루면 되냐?”
“내일 점심시간까지는 가능해.”
“진짜 너 대박이다.”
“우리 가족이 니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재호는 내 칭찬은 건성으로 듣고 바로 옆방으로 들어가 후반 작업을 시작했다.
‘니네 가족은 니가 마약을 한다 그럴 때 깜짝 놀랐을걸. 이제는 내가 구해 주겠지만.’
다시금 확신했다. 재호는 반드시 구해야 했다. 정말 누명으로 잃기에는 아까운 인재였다.
내가 뽑았지만 재호는 괴물이었다. 이런 독창적인 노래는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드럼이 없는 음악이라니, 차포를 떼고 하는 장기 같은 느낌이었다. 그걸 너무도 빠르게, 그리고 음악적으로 아름답게 해냈다. 마법처럼 놀라운 일이었다.
주환희도 감탄하는 표정으로 재호의 초안을 들었다.
“이거면 되겠냐?”
“충분해요 횽. 멜로디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자 제가 적어드릴 테니까 허밍으로 따라 해봐요.”
주환희는 재호의 비트를 틀어놓고는 피아노를 치며 멜로디를 중얼중얼거렸다. 신기하게도 곧 재호의 곡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돈워너비 유우우우~ 예에에에~ 노오오오~>
…가사는 외계어에 가까웠다.
“자 횽, 제가 부른 멜로디 따라 해봐요. 횽이 메인보컬이잖아요?”
<아돈워너비 유우우우~>
“노노!”
환희가 갑자기 피아노 연주를 멈췄다.
“왜, 내가 뭐 잘못 불렀어?”
“아뇨 횽. 제가 부르는 느낌하고 너무 다른데여.”
“그야 나랑 너랑 노래 부르는 방식이 다르니까?”
“아뇨 그게 아니라 횽. 너무 노래를 잘해요.”
“잘하는 게 좋은 거 아니야?”
“아뇨 이 노래는 그렇게 찐하게, 흐긴 가수처럼 부르면 안 돼여. 이 노래는, 블루 아이드 소울처럼 불러야죠. 그런 느낌이자나요.”
블루 아이드 소울, 백인이 부르는 흑인음악을 뜻했다. 흑인처럼 찐한 감성이나 리듬감은 없지만 대신 가볍고 산뜻한 느낌을 줬다.
“음, 나는 그렇게 노래를 불러 본 적 없는데.”
“횽 그러면 어차피 저랑 재호횽이 곡 만들려며는 좀 시간 걸려요. 그동안 마이클 맥더날드 곡 좀 듣고 카피하고 계세요.”
“오케이. 쭈, 너도 수고해.”
확실히, 곡 작업이 막상 시작되니 주환희도 프로다운 면모를 보였다. 아이돌은 아니지만, 최고의 탑 작곡가가 될만 했다.
그날, 나는 주환희가 추천해준 가수의 노래 카피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노래를 ‘대충’ 부르라는 말도 안 되게 어려운 미션을 소화하기 위해서였다.
* * *
저녁을 먹고 난 후에도, 연습은 계속되었다. 다만, 좀 더 정신이 없었다. 제작진이 한 명씩 기습적으로 불러서 인터뷰를 따기 때문이었다. 재호와 주환희도 한 번씩 불려갔다. 나도 곧 불려갈 듯한 분위기였다.
그때, 갑자기 내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국악예고입니다.
국악 예고라면 동생 학교였다. 이 야심한 시간에 전화는 처음이었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하고 무너졌다.
-동생분이 기숙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