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화
점심 메뉴는 샐러드와 샌드위치였다. 나도 모르게 불평이 나왔다.
“앞으로 항상 이렇게 먹는 거야?”
재호가 꼼꼼하게 자신이 먹는 음식을 노트에 기록하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TV에 나올 참가자들이니 체중 관리가 필요하지 않겠어?”
재호는 오히려 신나 보였다. 누구도 시키지 않아도 자기를 관리하는 놈이니, 남이 자신의 체중 관리를 함께 한다는 사실에 개의치 않았다.
주환희가 해맑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맞아요 횽. 연습생들은 맨날 이렇게 먹는다구요. 이보다 더 적게 먹게 하죠.”
“언제는 김밥만 먹는다며.”
사실, 점심에 뭐가 나오든 상관없었다. 못 먹을 운명이었으니까.
“재호야. 잠깐 내 점심 좀 맡겨놓을게.”
“어디 가?”
“갈 곳이 있어서.”
문루아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 * *
‘빈 서판의 잠재력’은 내 상태뿐 아니라 타인의 스탯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확인한 문루아의 체력 스탯은 무려 SS였다. 사실 10년 차 탑 댄스 가수니 당연했다.
‘내가 따라잡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다시, 아침처럼 편한 옷차림으로 숙소 주변을 뛰어다녔다. 달리는 문루아를 찾기 위해서였다.
[문루아 양은 노래 연습이나 무대 전에는 맨날 공복에 뛰던데.]
보컬 트레이닝 시간표는 이미 체크했다. 문루아는 바로 점심시간이 지난 막바지, 1시 30분에 트레이닝을 할 예정이었다. 그렇다는 뜻은 문루아는 점심 식사 시간에 공복에 달리고 있을 거란 뜻이었다.
숙소 쪽에도, 식당 근처에서도 문루아는 보이지 않았다. 점심시간의 끝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조금씩 초조해졌다.
속도를 줄여 천천히 걸으며 고민해봤다. 내가 문루아라면 어디에서 달릴까 떠올렸다. 그러자 한 장면이 떠올랐다.
[매니저랑 이야기하세요.]
오늘, 문루아가 피트니스 센터에서 했던 말이었다. 너무나 큰 열광을 받았기에, 사람들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가 몸에 배어 있었다. 그렇다면 달리는 모습도 절대로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사람들 눈에 안 띄는 곳은 캠프에서 딱 하나밖에 없었다. 나무로 우거진 중앙공원 속 숲길이었다. 오늘 천채왕 심사위원을 만난, 바로 그 자리였다.
숲길로 가자 부스럭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문루아였다. 머리를 질끈 묶고, 모자와 후드티로 온몸을 가려 누군지 알아볼 수는 없었다. 미리 문루아의 루틴을 알지 못했다면 그냥 지나칠 뻔했다.
달리는 문루아를 쫓아갈 생각은 없었다. 그건 너무 스토커스러웠다. 그냥 공원을 무작정 달리기로 했다. 러너들끼리는 동지애랄까, 특유의 동질감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운이 좋다면 그녀가 먼저 내게 말을 걸 수도 있었다.
20분 정도 달렸을까, 잠시 달리는 걸 멈추고 숨을 고르는 내게 문루아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점심시간에 뛰어요? 별나시네.”
“루아 님도요.”
문루아는 모자를 벗고, 목에 감았던 수건으로 얼굴에 땀을 닦았다. 비로소 얼굴이 보였다.
“권노을 참가자였죠?”
다행히 내 이름을 기억한 듯했다. 피트니스 센터에서 주변에 얼쩡댔던 보람이 있었다.
“맞습니다.”
“러닝 열심히 하나 봐요?”
“네네. 가수는 몸이 재산이니까요.”
“맞아요. 몸이 자본이죠.”
다행히 방금 전보다는 훨씬 긴장감이 누그러져 있었다. ‘러너’라는 정체성을 공유한 덕분이었다.
“맞습니다. 건강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좋은 감정도 소용없으니까요. 이렇게 야외 활동을 많이 할 때는 더 조심해야죠.”
“왜요?”
문루아가 신발 끈을 다시 고쳐 매며 물었다. 자연스럽게 힌트를 줄 기회였다.
“야외 활동을 하다 ‘쯔쯔가무시’라는 진드기병에 걸릴 수 있거든요. 걸리면 원인 모를 열, 오한, 두통 등이 생겨요. 혹시 주변에 그런 분 있으면 진드기에 물린 자국이 있는지 살펴보라 하세요. 일단 알면 별 것 아니니까.”
내가 말하는 동안 시시각각 문루아의 표정이 변했다. 내가 말을 다 끝냈을 때, 그녀 표정은 사색이 되어 있었다. 솔직히 좀 뜬금없는 어색한 TMI였는데, 아버지를 떠올리는 바람에 확 감정이 동요한 모양이었다.
“그걸… 어떻게…”
워낙 당황했는지 문루아 입에서 반말이 튀어나왔다. 사실 나보다 네 살이나 많으니 반말을 써도 큰 상관은 없었다. 일단 시침을 뚝 뗐다.
“뭐가요?”
“그걸 어떻게 알았지? 당신 사생이야?”
“그러니까, 뭐가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우연입니다.”
문루아가 의혹이 가득 찬 눈빛으로 날 노려봤다.
“나중에 봐요!”
문루아는 흘깃 나를 쏘아보더니 바로 어딘가로 달려나갔다. 매우 급한 표정이었다. 아버지에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니, 바로 얼굴 표정이 바뀌었다. 항상 갑옷과 투구 차림이던 기사의 평상복 차림을 본 느낌이었다.
‘여튼, 아버지가 무탈하기를.’
어디 사는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일단 사람 목숨은 살리고 봐야 했다. 누군가의 부모라면 더더욱 그랬다.
* * *
간단하게 샤워 후, 우리가 지정받은 연습실에 갔다. 재호와 주환희가 나를 맞이했다. 카메라와 스태프도 함께였다.
재호가 킵해놓은 점심을 건넸다.
“자 여기 점심.”
“땡큐.”
우걱우걱 점심을 먹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 사이 재호가 제작진에게서 건네받은 미션 봉투를 꺼냈다. 카메라 앞에서 다 같이 미션을 보고, 리액션을 찍겠다는 제작진의 뜻이었다.
미션을 열었다. 주환희와 재호는 ‘뜨악’하고 놀랐다. 나는 사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최대한 놀라는 시늉을 했다.
슈퍼 캠프 피날레를 장식하는 라이벌 팀 대결은 ‘키워드 자작곡 대결’이었다. 같은 키워드를 가지고 두 팀이 서로 만든 자작곡으로 무대를 꾸몄다. 가사부터 음악 컨셉까지, 아무런 제한이 없었다. 굉장히 자유도가 높은 미션이기에 역설적으로 준비과정을 편집하기 가장 좋았다. 입덕하는 팬들이 가장 많았던 미션 중 하나였다.
일단 슈퍼 캠프가 끝나면 바로 생방송 투표로 당락이 결정됐다. 그만큼, 생방송 직전에 이 미션에서 인지도와 팬덤을 최대한 키우는 일이 중요했다.
그렇게 중요한 미션에서 우리의 키워드는 바로… TYB였다.
재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생각 못 했네. 근데 말 된다. 이거 TYB 내전이잖아.”
TYB 소속 가수 문루아, 그리고 소속 연습생 주환희. 이렇게 둘이 ‘슈퍼스타 T’를 개최한 기획사, TYB에서 넣은 참가자였다. 그 둘이 붙었으니 TYB라는 키워드는 말이 됐다.
…물론 나는 이미 알고 있던 키워드였다. 그리고, 과거의 자작곡보다 오히려 좋은 아이디어를 준비해뒀다.
주환희가 말을 이어갔다.
“횽 저는 연습생 하면서 매달 시험을 봤어요. 그때, 저희 회사 선배들 노래 부르면 선생님들이 좋아했어요.”
내가 맞장구 쳐줬다.
“아무래도 그랬겠지?”
“그래서 제가 우리 회사 가수들은 레퍼토리를 많이 알아요. 말만 하세요.”
원재호가 고개를 저으며 말헀다.
“이건 자작곡 미션이라구. 창의력이 있어야 되거덩? 기성곡 부르면 안 된다구.”
주환희도 물러서지 않았다.
“에이, 그래도 레퍼런스가 있는 게 편하자나요.”
재호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누구 곡을 레퍼런스로 삼어? 천신군단? I.O.T? 다들 너무 뻔하잖아. 심지어 천신군단은 컨셉부터 두왑, 아카펠라 보이밴드였구. TYB 입장에서 그런 곡을 참고로 한 참가자를 얼마나 많이 봤겠어?”
슬슬 내가 중재에 나설 타이밍이었다.
“둘 다 일리가 있어.”
“횽이 무슨 황희 정승이에요?”
재호가 피식 웃었다. 그 사이 둘도 친해진 듯했다.
“레퍼런스는 있는 게 좋아. 하지만 너무 뻔하면 오히려 마이너스야. 지금 제일 핫한 아이돌인 ‘천신군단’은 패스. 해체한 지 3년도 안 된 ‘I.O.T’도 패스. 대결 상대인 문루아도 패스. 오리지널은 이길 수 없으니까.”
주환희가 불평했다.
“횽 그러면 남는 게 걸그룹하고 솔로들밖에 없는데.”
“바로 그거야. 솔로. 그중에서도 오래된 여성 솔로. 감성적인 음악이라 얼마든지 우리가 발라드로 바꿀 수 있는 가수.”
잠자코 내 말을 듣던 재호가 말했다.
“베이비 심사위원님 말야?”
“빙고.”
TYB 엔터테인먼트에는 문루아 이전에, 베이비가 있었다. 90년대에 중화권과 동남아를 중심으로 아시아를 주름잡던 솔로 여가수였다. 게다가 그녀의 음악은, 정통 댄스음악인 문루아와는 달리 감성적인 시티팝, 제3세계 월드 음악, 재즈 등, 발라드 적인 감성의 음악들이었다.
주환희도 납득했다.
“베이비 누나 곡들 좋아요. 시간이 지나서 지금 들으면 오히려 fresh한 느낌이 들 꺼 가타요. 그러고 보니 한 번도 불러 보겠단 생각을 못 해봤네요.”
주환희가 질문했다.
“그럼 무슨 곡을 할 건데?”
이미 계획은 세워둔 참이었다. 우리 세 명. 비원더에 딱 맞는 곡이 있었다.
“니들 ’오명’알지?”
베이비의 타이틀곡은 대부분 히치콕의 영화에서 모티브를 따 왔다. 영화광인 천채왕 프로듀서의 취향이었다. ‘오명’은 그 중, 영화 ‘오명’에서
영감을 받은 곡이었다.
한 여성이 있다. 그녀를 사랑하는 두 남자가 있다. 그중 적극적으로 들이대지 않는 남성을 사실 여성은 사랑한다. ‘오명’은 주인공 여성이 적극적이지 않은 남자에게 ‘내 마음속 비밀의 열쇠를 찾아줘요. 지하실 와인 병에 숨겨뒀어요.’라고 속삭이는 로맨틱한 노래였다.
재호가 물었다.
“그 노래를 남자 화자로 바꾸자고?”
“그래. 남자 주인공이 대답하는 가사로 노래를 만드는 거야. 항상 우물쭈물하던 남자가 드디어 결심해서, ‘다시는 당신을 혼자 두지 않겠어’라고 고백하는 노래를 만드는 거지. 괜찮지 않아?
재호는 좋다는 눈치였다.
“뭔가 로맨틱하구 좋을 거 같네.”
주환희는 연필을 머리에 톡톡 두드렸다. 뭔가 고민 중인 듯했다.
“원곡은 너무 여성스러운 멜로디라. 가사를 바꾼다고 우리한테 맞을 거 같지 아나요.”
내가 대답했다.
“아니 아니, 그냥 환희 니가 새로 가사랑 멜로디를 써줘.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게 아니야. 신곡을 써야지.”
“아 그르네요. 생각 못해써요.”
“원곡 오마주 정도는 해도 돼. 약간 비슷한 멜로디 진행이나 ‘비밀의 열쇠’ ‘영원 같은 키스’ 같은 키워드만 차용해.”
“오케이 알았어요.”
“재호, 너는 그에 맞는 편곡 아이디어를 좀 짜 보고.”
“문제없어.”
좌환희 우재호. 이 둘이라면 든든했다. 이미 이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얼마나 좋은 곡이 나왔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어.”
“What?”
“뭔데?”
주환희와 재호가 동시에 물었다.
“영화감상.”
일단 원곡인 ‘오명’과 비슷하면서, 좀 더 세련된 2천년대 감성의 곡을 쓰려면, 원곡만으로는 부족했다. 원곡의 뿌리인 ‘영화’로 가야 했다.
미리 구해둔 DVD를 노트북에 넣었다. (‘횽은 무슨 50년 전 영화 DVD를 가방에 맨날 들고 다녀요?’) ‘오명’을 같이 보기 위해서였다. 너무 오래된 흑백영화라 졸리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워낙 명화라 지금 봐도 재미있었다. 삼각관계, 스파이, 거짓 결혼 등 뒤틀린 소재로 가득했다. 실제로 주환희와 재호는 영화를 보면서 아이디어가 떠올랐는지 보면서 쉴새 없이 뭔가를 적었다.
‘나는 생각나는 게 하나도 없는데.’
역시나 나는 곡 쓰는 데는 취미가 없었다. 노래 부르는 일이 훨씬 재미있었다. 둘을 영화 보게 두고 노래 연습이나 할까 싶던 순간, 똑똑하고 누가 연습실 문을 두들겼다.
“누구세요?”
확인을 위해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가 다짜고짜 내 멱살을 잡았다.
“야 이 비열한 새꺄!”
나도 모르게 숨이 막힐 정도로 세게 잡았다.
“모 하는 거에요!”
주환희는 힘이 장사였다. 바로 내 멱살을 잡았던 누군가의 손을 뿌리쳤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상황이 파악되었다. 나에게 시비를 건 사람은 오민수였다. 씩씩 화가 난 상태였다.
“쥐새끼 같은 놈이 개수작을 부려?”
“뭔 수작을 부렸다는 거야. 똑바로 말 하라구.”
재호 또한 내 앞에서 오민수를 막아섰다. 싸움 잘해 보이는 둘이 앞에 있으니 든든했다.
“문루아 님이 니랑 이야기했다는데 그다음부터 갑자기 펑펑 우시고, 트레이닝도 빼먹고 어딘가로 나가버리시고. 지금껏 안 오셔! 도저히 연습이 안 돼. 무슨 짓을 한 거야! 우리 팀 연습 훼방 놓으려 그런 거 아니야!”
뭔가 한마디 하려 입을 떼는 그 순간, 어디선가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만 하세요.”
차갑고 단호하면서 프로다운 목소리의 주인은 문루아였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