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5화 (15/280)

제15화

“내기요?”

갑자기 웬 내기인가 싶었다.

“지금 성장 속도라면, 노을 군은 5일간의 캠프에도 순식간에 성장할 겁니다. 이렇게 빠른 사람은 처음 보는 거 같아요.”

“감사합니다.”

“다만, 아직은 루아에게는 미치지 못합니다. 노래 실력만 놓고 보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다만 무대를 휘어잡는 퍼포머로서, 또 다른 가수들과 함께 하는 리더로써 하는 말입니다.”

천채왕 심사위원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아무튼 문루아는 일본, 동남아, 유럽 등에서 활동하며 공연 팀의 리더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프로 가수 경력만 10년이었다. 노래 실력과는 별개로, 퍼포머로서 나보다 분명 노련한 면이 있었다. 단순 노래 실력이면 모를까, 팀 단위 공연이라면 상당히 불리했다.

생각을 빠르게 정리하고 재빨리 천채왕 심사위원의 말을 인정했다.

“그럴 거 같습니다.”

“루아와 노을 군이 1대1을 한다? 솔직히 루아도 어려울지 몰라요. 하지만 3일간 준비해서 만든 팀 무대라면? 어렵죠.”

팀 미션에서 패배하면 최소 1명, 최대 전원 탈락이었다. 아찔했다. 절대 패배하고 싶지 않았다.

천채왕은 말을 이어갔다.

“근데, 왠지 노을 군이 이길 수도 있을 거 같아요. 그래서 내기 한번 해보고 싶네요.”

“내기라면?”

“노을 군이 이번 대결에서 이긴다면, 소원을 하나 들어드릴게요.”

“무엇이든지요?”

천채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지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제 생각에, 외람되지만 심사위원장님이 너무 환희를 낮게 보시는 거 같습니다.”

“왜요?”

“이번 미션, 누구보다 주환희에게 유리하지 않나요? 그 친구의 특기가 작사, 멜로디 메이킹인데요.”

그게 내 복선이었다. 이번 미션은 ‘과거의 인물에게 바치는 노래’였다. 이미 죽은 인물에게서 영감을 받아, 자작곡을 만들라는 미션이었다.

천채왕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먹었다. 호두부터 아몬드까지, 다양한 종류의 견과류들이었다.

“환희가 작사, 작곡 능력이 있는 건 사실이죠. 하지만 그건 루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하 그렇구나.’

이제 이해했다. 천채왕은 뛰어난 프로듀서다. 아니, 한국 역사상 최고의 프로듀서일지 모른다. 80년대에 시작해서 90년대를 넘어, 2010년대까지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유일무이하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라도 미래는 몰랐다. 주환희가 아이돌로는 실패하지만, 절치부심해서 한국은 물론 세계를 놀라게 하는 작곡가 겸 작사가가 된다는 사실은 알 수 없었다.

그건 회귀자인 나만 아는 사실이었다.

짐짓, 모르는 척, 천채왕에게 질문을 던졌다.

“루아 님이 작사 작곡도 하시나요?”

천채왕이 미소를 슬쩍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보통 사람들은 루아가 그냥 댄스 가수인 줄 알죠. 사실은…”

천채왕이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선심 쓰듯 말했다. 문루아가 휴식 기간에 음악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것, 그래서 이제는 싱어송라이터로서 활동이 가능한 수준까지 왔다는 이야기였다.

“두렵네요. 갑자기 자신감이 떨어지네요. 그래도 꼭 이기겠습니다.”

나는 문루아의 미래도 알고 있었다. 그녀는 괜찮은 곡을 몇 개 남기지만, 미래에도 그녀의 최고 히트곡들은 모두 남에게서 받은 곡이었다. 대신 곡을 쓰면서 키운 곡 해석력을 활용해서 가창력을 인정받아, 진짜 6각형 만능형 가수로 인정받았다. 그게 그녀의 미래였다.

하지만 그걸 굳이, 천채왕에게 알려줄 이유는 없었다. 이건 ‘알려줄 필요 없는 미래’였다.

가지고 온 음식을 모두 까먹은 천채왕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죽지 않아서 좋네요. 노을 군을 보면, 너무 성장 속도가 빨라서, 자꾸 뭔가를 주고 싶네요. 사실 약간은? 이겼으면 좋겠네요. 물론 루아는 제가 키워낸 걸작품이라, 호락호락하진 않을 겁니다. 심지어 이제는 제 트레이닝을 넘어서, 아티스트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어요. 제 자부심이죠.”

문루아에 대한 자신감을 피력할 때는 진심이 묻어나왔다. 전심으로 자랑스러워하는 태도가 눈빛에 보였다.

“저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자, 이제 저는 아침 식사하러 이만…”

천채왕 심사위원은 주섬주섬 자기 짐을 챙겼다.

“엥? 방금 아침 드신 거 아닌가요?”

“이건 간식이죠. 다음에 노을 군, 건강 관리법 알려줄게요. 좀 더 친해지면.”

그리고 천채왕은 바로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고 보니, 나도 슬슬 아침을 먹을 시간이었다.

* * *

숙소로 돌아가 보니 이미 재호가 일어나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그 사이 재호는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이었다. 어제 내가 어지럽혔던 거실은 어느새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어딘가에서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피아노 연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너야말로.”

“나야 맨날 5시 50분에 일어나구, 6시 15분이면 밥을 먹잖아. 매번 똑같은 시간에 밥을 먹어야 컨디션이 유지가 되거덩.”

‘변태 같은 놈.’

일단 식탁에 앉으며 말을 계속 이어갔다.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잠이 자꾸 깨더라고.”

“아침 먹지? 계란 먹을래?”

“그래, 줘.”

“뭐로 할까?”

“뭐로?”

“프라이드 에그. 오믈렛. 스크램블드 에그. 수란…”

‘이놈은 계란으로도 외계어를 하냐.’

그러고 보니 재호는 시간 관리만 특기가 아니었다. 요리도 특기였다.

재호가 아침 요리를 하는 동안 오늘 일정을 떠올려봤다. 모두 내가 인덱스 카드로 숙지해 놓은 상태였다.

슈퍼 캠프 동안 2, 3, 4일은 이렇게 일정이 이뤄진다. 오전에는 개인 트레이닝을 한다. 체력 훈련과 보컬 훈련, 그리고 비주얼 훈련까지. 개인전이고, 가장 성적이 좋은 사람은 보상을 받았다.

오후에는 팀 무대 연습 일정이었다. 팀 메인 무대 미션은 ‘자작곡 미션’이었다. 내가 팀 구성을 편곡 뛰어난 비트메이커와, 작사 작곡 능력이 있는 탑라이너로 구성한 이유기도 했다.

자율 연습이 밤까지 이어진다. 저녁에는 방송 분량을 위한 다양한 게임과 인터뷰를 병행한다.

그나마 하루 중, 문루아를 만날 수 있는 건 개인 연습 중인 오전이었다. 개인 연습은 모든 참가자가 함께 모여서 진행했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체력 미션을 하는 피트니스 센터 시간이 가장 자연스러운 타이밍 같았다.

‘어떻게 말을 걸지? 팬이에요? 아니 무슨 사생팬 같잖아. 근데 그거 말고 대체 내가 라이벌 팀 리더랑 말할 이유가 뭐가 있어?’

이런 류의 고민은 딱 질색이었다. 그냥 미션 고민만 하는 게 더 성미에 맞았다.

하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부모님의 목숨이 달린 문제인데, 그럴 순 없었다.

‘천애 고아는 나 하나로 충분해.’

“뭔 한숨이냐? 계란 먹어.”

그 사이 재호가 계란 프라이를 접시에 담아 줬다. 계란이 식지 않도록, 접시까지 따뜻하게 데운 상태였다. 역시나 재호다운, 뭔가 변태 같은 정도의 섬세함이었다.

“환희는 안 줘?”

“지가 일어나야 해주지. 엄마도 아니고 일어나게 해줄 순 없다구.”

“그건 그러네.”

연습생이라고 일찍 일어나지는 않나? 싶었다.

재호가 목소리를 살짝 낮춰 말했다.

“저놈, 어제 향초 폈던데? 방에서 좋은 냄새가 나.”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 향초 냄새가 났었다.

“그놈이 웬 향초? 여자라도 방에 데려온 거 아냐?”

그렇고 저렇고 한 짓을 해서 방에 땀 냄새를 지우려 그랬다는 뜻이었다.

“설마.”

“걔 평소 행실을 보면, 그놈이라면 가능하거덩?”

“어젯밤에, 늦게까지 노래 연습하더라. 뭐 홈 트레이닝이라도 했나 보지.”

재호는 커피 포트에서 커피를 조심조심 내리며 말했다.

“걔가? 향초까지 피워 놓고? 너무 안 어울린다구.”

불현듯, 어제 주환희가 잠깐 보였던 얼굴 표정이 떠올랐다. 원망과 슬픔이 가득 어린 얼굴이었다. 그것도, 함께 연습생이던 넵튠 한에게 보냈던 표정이었다.

“그 녀석에게 우리가 모르는 면이 있나 보지.”

진심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 * *

주환희는 정확하게, 체력 미션 시작 직전에 일어났다.

“요~ 와썹 횽! 좋은 아침이에요.”

“여어~ 쭈!”

“아. 그 ‘쭈’! 안 하면 안 돼요?”

‘겉보기에는 전혀 숨겨진 면 따위는 없어 보이긴 하네.’

바로 우리는 최소한의 정비를 거치고, 캠프 내 피트니스 센터에 갔다. 개인 미션인 ‘체력 미션’을 진행할 곳이었다

미션은 간단했다. 오늘 몸 상태를 측정했다. 오늘, 내일, 그리고 모레 헬스 트레이너의 메뉴를 소화해, 내일모레 다시 체력을 확인할 예정이었다. 기본 체력과 그간 변화를 해서 ‘체력왕’을 뽑아, 서프라이즈 상품을 나눠 주는 미션이었다.

상품은 비밀이라고 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최신 건강식품이었다. 돌이켜 보면 모두 PPL이었다.

건강식품은 내 관심 밖이었다. 이 미션은 그냥 적당히 하기로 했다. 방송 분량과 이미지만 신경 쓰면 됐다.

그리고 이젠 또 하나가 생겼다. 어떻게든 문루아에게 아버지의 병에 대해 알려줘야 했다.

마침 문루아가 물을 마시러 가는 게 보였다. 바로 뒤를 따랐다.

문루아는 나이키 트레이닝복에, 레알 마드리드 저지 차림이었다. 댄스 가수라서 그럴까, 정말 말랐다. 다리가 내 팔보다 가늘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댄스 가수답게 온몸이 강인해 보였다.

물을 마시려 간 문루아는, 종이컵을 찾지 못했다. 당황한 눈빛이었다.

‘기회다.’

바로 정수기 옆 서랍에서 종이컵을 꺼내서 문루아에게 줬다.

“고마워요.”

바로 문루아는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아 저… 혹시…”

“쉿!”

문루아는 바로 입술에 손을 가져가더니 ‘쉿’이라 말했다.

“매니저랑 이야기하세요.”

건방지다는 기색은 전혀 없었다. 그보다는, 팬들의 등쌀에 10년째 시달린 프로 아이돌의 능숙함이 엿보였다. 적당히 예의 있고 적당히 거리감을 주는 태도였다. 바로 문루아는 다시 운동하러 피트니스 센터에 들어갔다.

‘아니, 쿨한 건 좋은데. 그럼 어떻게 말해주지?’

* * *

다음 일정은 보컬 미션이었다. 보컬 트레이너를 만나, 개인적으로 상담을 받았다. 3일 후, 가장 약점을 많이 개선한 참가자에게 포상으로 간식을 줬다.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되던 미션이었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적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가장 실망스러운 미션이 되었다.

“노을 군을 뭘 가르쳐요. 제가 레슨을 받고 싶은 심정인데요.”

TV에도 자주 나오는 슈퍼 보컬 트레이너라 기대했건만, 딱히 가르칠 게 없다고 했다.

“아예 해주실 말씀이 없나요?”

“노을군 심사 영상을 보면서 살펴본 결점은 ‘발음’이었어요. 근데 지금은 그사이에 발음 디자인을 신경 쓰고 있네요? 파열음이 주는 리듬감과 청각이 잘 느껴져요. 기껏 레슨 준비했는데… 너무한 거 아니에요?”

“죄, 죄송? 합니다?”

“그 외에 테크닉 같은 건 솔직히 취향 문제라. 저는 지금 노을 군 정도 기교가 딱 좋아요. 건드리고 싶지 않아요.”

아무래도, 내가 배워서 해결해야 할 문제는 이미 뛰어넘은 듯했다.

“진짜 대단해요. 노을 군은 무슨 루틴도 없어요?”

“루틴이요?”

“왜 있잖아요. 노래 부르기 전에 사과를 하나 먹어야 한다거나. 립트릴을 한다거나.”

나는 그냥 전날 금주하고, 일찍 자는 게 전부였다.

“아 그런 거 있으면 멋있겠네요. 좀 루틴이 있으면 약간 예술가 같을 거 같은데.”

“에이. 루틴 없어도 잘하면 그게 더 멋지죠. 프로들도 루틴이 필요한 사람 많아요. 문루아 양은 노래 연습이나 무대 전에는 맨날 공복에 뛰던데.”

‘오호라. 노래 연습이나 무대 전에는 공복에 뛴단 말이지?’

문루아의 아버지를 구할 힌트를 얻은 듯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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