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카드소녀 베리. 90년대 말 지상파에서 방영한, 우리 세대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전설의 애니였다. 소녀 만화지만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인기가 있었다. 최고 시청률은 40%에 육박했다.
무엇보다 주제가가 좋았다. 일본 원작과는 전혀 다른, 한국의 오리지널 곡이었다. 감성 돋는 가사와, 이와 딱 맞는 아련한 편곡으로 우리 세대의 마음속에 콕 들어간 노래였다.
“니들도 이 노래 알잖아?”
내 말에 원재호가 대답했다.
“아무리 유명해도, 오디션에서 이걸 부른다고? 고음도 없고. 구성도 너무 밋밋하지 않아?”
“구성은 극적인 요소를 넣으면 되지.”
“누가?”
“재호 니가.”
재호는 머리를 연신 위로 쓸어올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뭐 좋은 노래 많잖아. 막 고음 자랑하고, 가창력 뽐내고, 애드립도 넣을 수 있는 거. 그런 거 많은데 왜 굳이 이걸 하냐 이거지.”
아무래도 타겟을 바꿔야 할 듯했다.
“야 쭈. 너는 연습생이니까 매달 시험 보지?”
“그죠?”
“선곡에서, 남들이 다 부르는 노래 부르면 어떻게 되냐?”
“보통 평이 안 좋죠. 노을횽처럼 원곡 가수를 묻어 버릴 만큼 잘하면 모를까.”
그치, 내가 딱 듣고 싶던 말이었다.
“바로 그거야. 우리 세대라면 누구나 아는 노래. 하지만 맨밥처럼 약간 밍밍한 노래를 재호 니가 편곡으로 살리면 얼마나 돋보이겠어?”
재호가 무심코 끙끙대는 소리를 냈다. 여전히 머리를 사정없이 손으로 빗고 있었다.
“끄응…”
“자자. 시간이 없어. 빨리 편곡해줘. 나랑 환희 레인지는 대충 알지?”
“노을이 네놈 파트는 왕창 어렵게 해주겠어. 각오해.”
재호가 원곡을 뜯어보며 편곡을 시작했다. 우선 우리 셋의 키에 맞게 조를 옮겼고, 악기 구성과 코드를 조금씩 재호식으로 더했다.
그사이 나는 주환희와 가사를 수정했다. 의외로 원곡이 중성적이라 많이 바꿀 부분이 없었다.
오히려 인상적인 건 그 가사를 소화하는 주환희였다.
“캐치유 캐치유~ 캐치미 캐치미~”
진짜 뻔한 가사이고, 대충 부르는 거 같은데 뭔가 멋있었다.
‘이 녀석, 발음을 일부러 대충하네?’
항상 나는 발음이 잘 들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데, 주환희는 오히려 아니었다. 설렁설렁 불렀다.
슬쩍 물어봤다.
“너는 노래 부를 때 무슨 생각 하냐?”
“아무 생각 안 하죠.”
“그럼 그냥 불러?”
“노오~. 그냥 가사를 보고, 거기에 제 캐릭터나 생각을 섞어서 상상해여. 이 노래는 첫사랑 이야기니까… 초딩 때 짝꿍 생각? 같은 걸 하죠.”
“오호라.”
뭔가 이건 내 ‘감정표현’ 스탯 레벨업에 도움이 될법한 이야기였다.
그 사이에 재호는 빠르게 편곡을 완성했다.
“너무 유명한 곡이라 뭘 건드리기가 어렵네. 완성도도 높구. 일단 키만 니들한테 맞춰 봤어.”
재호가 컴퓨터로 비트 초안을 들려줬다. 가성으로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 세 명 각각의 파트를 짚어줬다. 화음 넣는 부분과 음까지 다 잡아줬다. 내가 뽑았지만, 물건은 물건이었다.
“됐지? 노을이 너는 약속대로 제일 높은 음이다. 그래 봐야 뭐 엄청 높은 거는 아니야. 귀여운 느낌으로 가야지.”
충분히 내가 부를 수 있는 정도였다. 게다가 워낙 감성 돋는 노래라 어느 정도 고음을 추가하고 화음을 넣어도 잘 어울렸다.
“좋았어. 아직 2시간도 더 남았어. 여유 있다 야.”
재호와 주환희 모두 투덜댔다.
“여유는 없그덩?”
“그건 아니죠 횽.”
“자. 연습하기 전에. 제일 중요한 결정이 하나 남았어. 바로 팀 이름.”
앞으로 5일간, 슈퍼 캠프에서 우리의 상징이 될 팀명을 정해야 했다.
“그냥 주환희, 원재호, 권노을 합쳐서 주재을 해요.”
“주재을이 뭐냐… 주재을이. 가사는 그렇게 잘 쓰는 놈이.”
재호와 주환희가 언쟁하는 동안 나도 고민을 시작했다. 금방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방금 우리 셋의 노래를 들으면서. 참 셋이 다르다 생각했거든? 근데 세 명 다 ‘알앤비’라는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거 같아.”
“알앤비 굳, 쪼아여.”
“동의해.”
주환희와 재호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음악에 대해서만은 죽이 잘 맞는 듀오였다.
“우리 셋을 묶을 수 있는 아티스트가 딱 하나 있더라고. 스티비 원더.”
최고의 알앤비 아티스트 스티비 원더. 내가 관심 있는 보컬로도 레전드, 재호가 좋아하는 악기 연주와 편곡으로 역사에 남을 천재, 거기다가 송라이팅과 히트곡으로도 역대급의 작곡가였다. 우리 셋의 재능을 모두 합친 느낌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추구하는 알앤비 음악의 전설이다.
“원더가 되자! 라는 의미에서 ‘비원더’어때?”
둘 다 동의했다. 대신 주환희의 아이디어로 숫자와 알파벳을 넣었다. (횽 요새는 이렇게 해야 힙해다니까요?) B1The. 약간 아이돌 같으면서 있어 보이고, 나쁘지 않았다.
“잘 해보자 비원더. 자 이제 딱 무대까지 두 시간 남았다. 재호야. 비트 틀어봐. 바로 불러 보자.”
주환희가 갑자기 손을 들었다.
“잠깐만요!”
“뭐냐?”
주환희가 말했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재호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왜? 지금 이동시간 고려하면 시간이 1시간 30분밖에 없그덩?”
“에이미가 곧 자기 나라로 귀국한다고 연락 와써요. 굿바이 키스만 해주고 큼방 올게요.”
….또 그거냐?
너무 황당해서 입을 다물어 버린 재호 대신 내가 대답했다. 말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래 가라. 가라.”
‘아이돌 연습생이라는 게 참… 희한한 놈이야.’
* * *
3시간 후 슈퍼 캠프가 진행 중인 중앙공원.
정원은 고급스러운 유럽 궁전 속 정원처럼 고급스럽게 치장되어 있었다. 분수 앞에는 현악 4중주 팀이 실내악으로 편곡한 TYB 엔터테인먼트의 히트곡 메들리를 연주하고 있었다. 종업원들이 식전 빵을 테이블마다 돌리고 있었다.
‘고급스럽군. 천채왕 프로듀서의 취향인가?”
천채왕 프로듀서는 소문난 와인 광이었다. 미래에는 와이너리는 물론 미슐랭 가이드 급 레스토랑까지 운영했다. 아마도 이건 그의 고급스러운 취향이 반영된 거로 보였다.
그에 맞춘 참가자들 복장도 우아했다. 모두 소위 연미복에 가까운 풀 정장 차림이었다. 원재호는 나비넥타이에 턱시도로 한층 왕자 같은 멋을 뽐냈다. 누가 봐도 코디 원픽이었다. 주환희 또한 짙은 와인 색의 더블 브레스트 수트에 황금빛 머플러를 둘러 과하지 않게 산뜻하게 마무리했다. TYB에서 미는 참가자다웠다.
내 옷도 많이 신경 써줬다. D&G 네이비 수트에 화이트 셔츠, 얼핏 생각하면 평범했지만 조끼까지 포멀하게 입혀서 격식과 품격을 과하지 않게 느낄 수 있게 해줬다.
‘이전 생에서는 대충 아저씨 검은 정장 입혀 주더니만.’
씁쓸한 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전 생에서는 사이즈에 맞는 옷이 없어서였다지만, 누가 봐도 PD픽이 아니라서 옷을 대충 입혔다. 이제는 대접이 달라졌다. 마치 방송사에서 ‘당신이 우승하기를 바랍니다’라는 메시지를 매 순간 남기는 것처럼 나를 극진하게 모셨다.
헤어 및 얼굴 메이크업을 받고 바로 우리는 지정된 자리로 앉았다.
“왓??!”
준비된 식사 테이블에 앉다가 주환희가 놀라서 신음 소리를 냈다. 나와 재호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그럴 만했다.
“왔어요?”
우리 테이블에서는, 천채왕 심사위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천채왕 프로듀서가 능숙하게 와인과 음료를 한 컵씩 따라주며 물었다.
“어때, 조율은 잘 되고 있나요?”
“네. 다들 워낙 프로페셔널하고, 서로 다른 능력이 있어서. 생각보다 좋습니다.”
“프로페셔널? 환희가요?”
쿨럭.
주환희가 우리 숙소 앞에서 찐한 키스를 하겠다며 나갔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5팀도 넘는 팀을 항상 운영하는 대형 기획사 대표임에도, 연습생까지 꼼꼼하게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아니면 그만큼 주환희가 요주의 인물이거나.’
천채왕이 시선을 서서히 주환희에게서 나로 돌려 말을 이어갔다. 블랙을 기본으로 화려한 황금빛 무늬가 들어간 수트가 번쩍였다. 마치 곤룡포 같았다.
“뭐, 그건 그렇고. 사실 노을 군에게 궁금한 게 많아요.”
“제게요?”
왜 굳이? 라는 의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말하지는 않았다. 여튼 내게 관심을 보인다는 건 좋은 신호였다. 처음에는 제작진의 관심, 이제는 천채왕의 관심까지, 이전 생에는 없던 일이라 미리 대응이 어려웠다.
“1차 예선에서 세계 제패를 하겠다고 했잖아요. 진심이에요? 왜 그런 생각을 한 거예요?”
‘세계 제패’라는 키워드에 꽂힌 모양이었다.
“가능할 거 같아서요.”
“동양인이? 그것도 한국인 남자가요?”
“네.”
“하하!”
천채왕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일본 최고의 여가수도 미국 진출했다 실패한 건 아나요? 게다가 서양 여성들은 동양인 남자에게는 성적 매력을 못 느낀다고 하던데. 제가 미국 유학을 다녀 왔었거든요. 80년대긴 했지만.”
“어떠셨나요?”
“네?”
“직접 보셨잖아요. 어떠시던가요?프로듀서님은 여성분들에게 인기 있으셨나요?”
“크하하하하하하!”
천채왕이 마치 장비같이 호탕하게 웃었다. 항상 품격있는 이미지던 그의 의외의 모습이었다.
“확실히, 저는 좀 인기가 있었어요. 댄스 파티에도 현지인 여성과 갔던 적도 있고.”
“그러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매력 있으시니까요.”
천채왕이 쑥스럽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에이~ 무슨 말을. 맞는 말이긴 해요 권노을 참가자.”
사실은 미래에 천채왕이 했던 인터뷰를 mp3 상태창을 통해 읽어 두었다.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이었다. 도움이 될까 싶어서 슈퍼 캠프 가기 전에, 심사위원들의 기사들을 읽고 온 게 주효했다.
“여튼, 실제로 동양인 남자라서 인기가 없는 게 아니라 생각합니다. 백인 남성들이 잡고 있는 기성 미디어가 진출을 막고 있는 것뿐이죠. 오히려 새로운 음악에 열려 있는 건 남성보다는 여성 청중인 경우가 많습니다. 세계 진출은 오히려 남성 가수가 더 가능성이 높다 봅니다.”
사실 미래에서 케이팝의 대성공을 봤기에 할 수 있던 말이었다.
천채왕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약간 미친 사람 보는 표정이었다. 원재호와 주환희 표정은 더 가관이었다. 대놓고 ‘쟤 미친 거 아냐?’라고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침묵을 깬 건 천채왕 프로듀서였다.
“좋네요.”
“네?”
“미친 말 하는 사람 좋네요. 약간 짜증도 나요. 가요계에서 제일 미친 말을 하고, 또 그걸 실현시키는 건 제 특기였는데. 저보다 노을 군이 더하네요. 꼭 젊은 시절 저 같아요.”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했다. 가요계 30년간 정점으로 군림하게 될 천채왕 같다니, 엄청난 찬사였다. 슬쩍 보니 카메라 최소 3대 이상이 나와 천채왕의 대화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노을 군은 음료 안 마시나요?”
“무대가 끝나면 마시겠습니다. 물은 혹시 있을까요?”
“그 생각을 못 했네. 왼편으로 가시면 드링킹 바가 있습니다. 거기에 물도 준비했으니 편하게 드세요.”
* * *
드링킹 바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자가 되니 휴우~ 하고 한숨이 나왔다. 미리 준비한 대로 말을 잘했지만, 생각보다 대형 기획사의 창업자와의 대화는 굉장한 스트레스였다. 자기만의 아우라가 엄청났다. 미소와 친절로 가득했지만 압박 면접을 받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왠지 질문이 나에게만 많단 말이야?’
물을 가지고 돌아오는 길에 뭔가 기묘한 시선을 느꼈다. 참가자 다수가 나를 악의를 갖고 쳐다보는 느낌이었다. 심지어 그중 한 놈은 내게 가운뎃손가락을 몰래 날렸다.
‘뭔데 이리 공공의 적이 된 거야?’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어느새 천채왕 프로듀서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주환희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빵과 고기를 흡입 중이었다. 그 옆에서 여유 있게 샐러드를 먹던 재호가 해맑게 나를 맞이했다.
“어 노을이 왔어? 그 사이 메인 디쉬 나왔다.”
“너 봤냐?”
“뭘?”
“참가자들이 우리 노려보는 거.”
“아 그거? 봤지~ 나도 눈이 있그덩~”
재호는 태평했다. 양갈비를 나이프로 잘라, 커리 소스를 찍어 샐러드와 먹는 데 온 힘을 집중했다.
“왜 그러는 거야?”
“쟤 때문이겠지. 주환희. 저 녀석, 누가 봐도 TYB 픽이잖아? 걔랑 같이하다니, 우리가 너무 야비하다 뭐 그런 거겠지.”
재호가 갑자기 내 귀에 입을 갖다 댔다. 혹시나 천채왕 심사위원장이 갑자기 돌아와서 듣지 못하게 조용히 말했다.
“게다가, 지금도 천채왕 프로듀서가 우리 테이블에 있잖아? 질투할 만하지.”
“그런가?”
사실, 뭐 상관없었다. 오히려 좋을 수도 있었다. 외부에 적이 있으면 내부 결속력이 더 강해질 수도 있었으니까.
“댕~ 이 양고기 너무 마시쒀요~”
……주환희, 저놈은 너무 태평해 보이긴 하지만.
그렇게 웃고 즐기는 사이에 어느새 발표회가 시작되었다. 생각보다 더 부담스러운 무대였다. 마이크는 있었지만, 야외 무대고, 심지어 식사까지 하는 통에 집중이 웬만하면 되지 않았다. 대부분 팀의 무대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에 띄는 팀은 있었다.
‘저 녀석은?”
내게 가운뎃손가락을 날렸던 놈이 있던 팀이었다. 그 팀의 중심에는… 아시아 최정상 가수, 아시아의 달, 문루아가 서 있었다.
‘나보고 주환희랑 있다고 빡쳐했던 놈이, 지는 현역 여가수랑 같이 팀을 맺었다고? 선생님 양심이?’
되려 웃음이 나왔다.
‘그래, …한번 니놈은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