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11화 (11/280)

제11화

‘휴 끝났네.’

원재호와 앞으로 함께 쓸 숙소 방에 내 짐을 다 정리했다. 뭔가 뿌듯했다. 뿌듯한 마음에 무심코 고개를 돌려 원재호가 서 있던 자리를 봤다.

흠칫 놀랐다.

원재호 자리는 거의 호텔처럼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모든 옷과 물품이 매장 디스플레이처럼 각이 날카롭게 들어 있었다. 왠지 바닥까지 반짝반짝 광채가 나는 느낌이었다. 내가 짐 정리하는 사이에 짐 정리는 물론, 자기 자리 청소까지 한 모양이었다.

거실에 나가봤다. 재호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어느새 짐 정리는 물론 청소까지 마무리하고 여유 있게 커피까지 한 잔 마시고 있었다. 어디선가 첼로 연주가 흘러나왔다. 재호가 말을 걸었다.

“정리 끝났어? 커피 한 잔 타줄까?”

“너는 무슨 도술을 쓰냐? 언제 커피까지 끓였대.”

“5분이면 충분하그덩.”

사양하지 않고 재호가 주는 커피를 슬쩍 맛봤다. 매우 상쾌하면서도 은은한 산미가 느껴졌다. 커피알못인 내가 봐도 훌륭한 커피였다.

“지금까지 먹어 본 커피 중 제일 맛있다.”

재호가 흐뭇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앞으로 아침마다 마실 거야. 익숙해지겠지.”

“아침마다 커피를? 왜?”

“식사랑 설거지, 다 해주기로 했잖아.”

그러고 보니 재호가 그런 말을 했었다.

[내가 설거지 요리 다 할게. 제발. 노을아! 형님!]

“그걸 마음에 담고 있었냐.”

“한번 뱉은 말인데. 지켜야지. 게다가 냉장고에 요리재료도 많구, 장비도 좋구. 별로 어렵지 않을 거 같아.”

과연. 숙소에는 계란, 양파 등 기본 식재료부터 각종 향신료, 고기까지 다양한 음식이 잔뜩 있었다. 생활하면서 틈틈이 요리하는 모습을 촬영해서 편집에 써먹으려는 의도였다.

재호가 커피를 쭉 들이켰다. 약간 씁쓸한 표정으로 재호는 말을 이어갔다.

“주환희 그놈이 요리, 설거지 피해간다는 건 좀 그렇지만. 하긴 뭐, 연습생으로 맨날 남이 주는 밥 먹던 애가 해주는 음식을 먹고 싶진 않그덩~”

“저 매일 킴밥 먹어요.”

불쑥 주환희가 튀어나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사이 샤워를 했는지 포마드로 세웠던 머리를 자연스럽게 올백으로 내렸다. 올백이라 해도 머리를 내리자 훨씬 어려 보였다. S급 기획사 연습생다운 멀끔한 외모였다.

약간의 뒷담화를 했던 재호가 뻘쭘하게 말을 걸었다.

“…왔냐?”

주환희는 툭 툭 자기 할 말을 내뱉었다. 무덤덤한 표정이라 더욱 진정성이 느껴졌다.

“TYB라고 해서 연습생까지 으리으리한 데서 먹고 그러지는 아나요. 매일 김밥에 계란이죠. 저 성공해야데요.”

재호와 나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처음으로 보는 주환희의 진정성 있는 모습이었다.

원재호가 한층 누그러진 톤으로 주환희에게 대답했다.

“그건 뭐 나도 좋아. 이왕 그룹이 된 거 다 같이 잘해서 성공해 보자구. 나도 꼭 잘돼야 되거덩~”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서. 내 우승을 빼앗아간 녀석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월드 스타 한번 해보기 위해서. 그래서 내 지난 생을 바로잡기 위해서,

나도 잘 해내야 했다.

‘그 시작이 바로 이 팀 미션이지.’

‘슈퍼스타’ 시리즈에서 슈퍼 캠프는 보통 가장 주목도가 높은 구간이었다. 아직은 많이 노출되지 않아 참가자들이 신선했다. 게다가 팀 미션을 치루는 동안 다양한 경쟁과 협동으로 참가자들의 다양한 모습을 깊이 있게 보여줬다. 이때 주목을 받는 팬덤은 이후 가수 생활에서도 계속 함께하는 코어 팬덤이 되었다. 이전 생에서 말이다.

‘뭐, 가수 데뷔도 못 한 나랑은 상관없던 이야기였지만.’

이번 미션에서 잘해서, 팬덤을 모으는 일이 장기적으로 중요하단 뜻이었다.

“그럼, 우리 팀 미션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재호와 주환희가 나를 쳐다봤다. 처음으로 세 명이 잠시나마 한 마음을 가진 지금이 논의하기 적기였다.

주환희는 태평하게 소파에 털썩 걸터앉아 우리에게 틱틱 말을 걸었다.

“횽들, 그럼 노래 준비됐어요?”

재호가 눈빛을 부라리며 대답했다.

“또또또… 내가 왜 니 평가를 받아야 하나구.”

내가 말을 가로막았다. 건설적으로 이야기를 끌고 갈 방법이 보였다.

“자자. 노래 불러 보라는 말은 일리 있는 말이야. 주환희 쟤는 우리 둘을 잘 모르잖아?”

원재호는 여전히 마음이 안 드는 눈치였다.

“그래서 우리보고 쟤한테 오디션을 받으라구?”

“아니지. 서로 받는 거지.”

“뭐?”

“What?”

재호는 물론, 뚱한 표정으로 우리 둘을 쳐다보던 주환희도 내 말에 놀랐다.

“아무리 팬클럽까지 있다 해도 너도 고작 연습생이야. 우리는 너를 모른다고. 너도 우리에게 뭘 잘하는지 보여줘야 함께 팀을 짜고, 미션을 준비할 수 있지. 그렇지 않겠어?”

“유어롸잇. 횽 말이 맞아요.”

뜻밖에 주환희는 시원하게 대답했다. 주환희가 협조한 지금이 기회였다. 단숨에 분위기를 리드해서 주도권을 쥐었다. 산으로 가기 싫으니, 사공을 줄였다.

“좋아, 그럼 언제 할까?”

원재호도 주환희가 같이 오디션을 본다는 말을 듣자 한층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지금 바로 해. 어차피 둘 다 준비해놓은 레퍼토리 있잖아? 오디션 때 쓰려던 필살기 말고. 연습할 때 했던 거.”

* * *

30분 후, 우리는 다시 거실에 모였다. 나는 거실에서, 재호와 주환희는 각자의 방에서 최소한의 준비만 했다. 방에는 단출한 마이크 하나, 스피커 하나, 반주를 틀 수 있는 컴퓨터 하나만 있었다.

“그럼 내가 먼저 할게.”

솔선수범, 먼저 내가 준비한 MR에 맞춰 연습했던 곡을 불렀다. 알앤비 보컬 연습생의 바이블, 심사위원 넵튠 한의 솔로곡 'Break The One'이었다. 가장 자신 있는 선곡 중 하나였고, 그래서 가장 나 다운 선곡이기도 했다.

노래가 끝냈다. 주환희의 눈이 개구리처럼 커져 있었다. 말을 잇지 못했다.

“대엥~”

재호가 으쓱하며 말했다.

“하! 노을이 노래를 처음 들으면 보통 이런 반응이지. 알겠냐?”

‘왜 재호 니가 의기양양이냐.’

원재호는 계속 박수를 쳤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예 달라져 있었다.

“대엥~ 대엥~ 대엥~~! 진짜 미쳐써요. 성량이 왜 일케 좋아요?”

아무래도 이전 미션 때는 내 노래를 들어본 적이 없던 눈치였다. 하긴, 다른 참가자를 신경 쓸 타입은 아니었다. 주환희는 아직도 내 노래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듯,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걸었다.

“횽 여기 아니라, 아메리칸 아이돌 나가야 되는 거 아니에요? 너무 아까운데.”

미안하지만 나는 한국에서 보컬리스트로 월드 스타가 될 계획이었다.

“됐어 난 한국이 좋다. 자 다음 재호 네 차례.”

재호의 무대도 굉장했다. 모두가 다 아는 가요 ‘가슴 아파도 보고 싶다’를 흑인음악으로 재해석했다. 특히 드럼, 퍼커션 등 리듬 파트부터 피아노 같은 악기는 물론 코러스까지 섬세하게 조율한 오케스트라처럼 웅장한 편곡이 압도적이었다.

주환희는 이번에도 매우 놀란 눈치였다. 건들건들대던 양아치 끼가 싹 사라졌다. 자세도 뭔가 온순해졌다. 정말 궁금하다는 듯 재호에게 질문했다.

“비트에 코러스 트랙이 옴총 많네요?”

원재호가 뭔가 으쓱하며 대답해줬다.

“내가 코러스를 좋아해서.”

“트랙 몇 개를 쌓은 거예요?”

“100개는 넘을걸?”

“난 세 개도 어렵던데.”

놀람은 그만하고, 이번에는 주환희의 차례였다.

“쭈! 나와라.”

주환희가 눈이 땡그랗게 커져서는 내게 질문했다.

“쭈? 왜 제가 쭈에요?”

“주환희란 이름. 너무 발음하기 어려워. 자 쭈. 한번 보여줘 봐.”

주환희는 조금 툴툴대더니 이내 자기 자리를 잡았다. 전자 기타 하나를 잡은 채였다.

“우우우우우~ 오오오오오~ 예에~”

화려한 팔세토 애드리브와 함께 주환희의 노래가 시작됐다. 역시나 잘 훈련된 보컬리스트였다. 백발백중 저격수처럼 정확한 음과 박자로 노래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멜로디와 가사였다.

<유어 마이 샤넬

네 반점 하나마저 완전하니까

유어 마이 샤넬

나는 널 전부보다 더 원하니까>

별거 아닌 단어들로 쓰였지만 묘하게 마음을 울리는 가사였다. 왠지 멜로디도 가사와 착착 붙었다. 금방 뇌리에 남았다. 나도 모르게 ‘유어 마이 샤넬~’이라는 부분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회귀자로서 말하자면, 지금도 좋지만 몇 년만 지나면 더 유행할 타입의 세련된 알앤비 음악이었다.

‘이래서 이 녀석을 뽑았지.’

오디션에서 봤던 이 녀석의 재능은, 나와 재호와는 전혀 달랐다. 재호에게 없는 멜로디 메이킹과 가사를 채워줬다. 게다가 나와 재호와 보컬 스타일도 겹치지 않았다.

슬쩍 원재호를 쳐다봤다. 눈이 마주쳤다. 원재호는 씁쓸하게 한숨을 쉬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한다는 표정이었다. 원재호가 주환희에게 말했다.

“좋네. ‘네 마음을 긁어 일시불로, 나는 절대 안 버려 벼룩시장 안 고려’ 이 파트 뭔가 유치한데 계속 기억에 남을 부분이라 좋았어. 벌스에 가사들이 꼭 랩 같네?”

“저 랩 좋아해여. 랩도 가끔 해요.”

“그래. 요새 팝 시장도 그렇구. 랩 스타일의 가사가 대세기는 하니까. 나도 이런 가사를 쓰고 싶었그덩. 도저히 안 돼서 포기했지만.”

둘이 제법 친하게 음악 이야기를 시작했다.

온순해진 건 재호만이 아니었다. 나와 재호의 실력을 본 주환희가 한층 우리에게 공손해졌다. 어느 정도 우리를 인정하기 시작한 거로 보였다. 주환희에게는 없는 압도적인 성량의 보컬과, 편곡 실력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팀이 될 희망은 보이는구만.’

계획대로였다. 내 예상보다 좀 더 주환희가 독특한(?) 놈이었지만, 큰 계획은 문제가 없었다. 최고의 편곡 재능은 지녔지만 고음과 작사, 작곡 능력은 없는 원재호. 아이돌로서는 실패했지만 최고의 탑라이너(Top Liner)로써 수많은 히트곡의 가사와 멜로디를 만들었던 주환희. 거기에 보컬 몰빵이지만, 작곡이나 편곡 같은 건 전혀 모르는 나 권노을까지.

이 셋이라면 팀전 최상위권은 문제없을 정도로 포텐이 넘치는 팀이었다.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그때 갑자기 방 전화기 벨이 요란스럽게 울렸다. 마침 앞에 있던 내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정수입니다.

사회자의 전화였다. 숙소에는 카메라도 없는데, 왠지 방송 중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저절로 자세를 고쳐 잡게 되었다. 다른 멤버들에게 주의를 주고 스피커폰으로 바꿨다.

“네넵.”

-방 정리는 잘 끝나셨나요.

“네. 덕분에. 방도 너무 좋습니다.”

-잘 되었네요. 바로 슈퍼 캠프 첫 미션 드리겠습니다.

“!”

재호는 물론 항상 태평하던 주환희조차 눈빛이 반짝하고 바뀌었다.

-지금부터 3시간 후, 중앙의 공원으로 오시면 식사가 준비되어 있을 겁니다. 공원 중앙에는 무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무대라니, 뭔가 쎄했다.

-슈퍼캠프에 참여하는 8팀 전원이, 팀을 소개하는 무대를 하셔야 합니다.

주환희가 분에 못 이겨 토를 달았다.

“지, 지금이요?”

-네, 모두에게 같은 조건입니다. 장르부터 연주 방식까지 모두 자유입니다. 그럼, 건투를 빕니다.

사회자는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주환희가 투덜댔다.

“임파서블! 불가능해요. 어떻게 3시간 마네 무대를 준비해요. 선곡부터 비트까지 준비된 게 암것도 없는데.”

역시나 잘 갖춰진 정석 상황에 익숙한 대형기획사 연습생다운 마인드였다. 한 번 패닉을 끊어 줄 타이밍이었다. 일부러 차분한 톤으로 주환희에게 말을 걸었다.

“사회자분 말씀이 맞아. 모두에게 같은 조건이야. 게다가 너랑 재호, 둘이 힘을 합치면 못할 것도 없어. 자. 내가 생각한 곡이 하나 있어. 엄청 유명한 곡이고, 여자 곡이야. 남자가 부르면 굉장히 신선할 거야. 재호 니가 우리들 키에 맞춰서 편곡해줘.”

“좋지. 여자 곡을 남자가 커버하면 원곡 이미지가 덜 생각나기도 하구.”

역시 원재호, 말귀를 광속처럼 빠르게 알아들었다.

“바로 그거야. 그리고 쭈, 너는 내가 지금 노트에 가사 써줄 테니까, 바로 남자가 불러도 어색하지 않게 바꿔줘.”

“알겠어요. 횽. 근데 가사 다 쓸 수 있어요? 외웠어요?”

“당연하지.”

내 선곡은 수천, 수만 번 부른 노래였다. 까먹을래야 까먹을 수가 없었다.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딱 이맘때쯤 사회자에게서 전화가 오리란 것도, 그 미션이 기습 소개 무대 미션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미리 팀을 짜면서 우리 셋이 같이 어떤 노래를 부르면 좋을지까지 구상해두었다. 모두 내 계획대로였다.

…이제 가장 큰 난관만 남았다. 이놈들을 설득시켜서 내가 점 찍은 선곡을 부르게 하는 일이었다.

편곡을 위해 노트북을 꺼내며 재호가 내게 물었다.

“그래서, 고른 곡이 뭐야?”

아, 이거 왠지, 주환희 뽑자고 했을 때보다 더 파장이 클 거 같았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내 선곡을 알려줬다.

말하자마자, 바로 과격한 반응이 두 사람 모두에게서 날라왔다.

“What?”

“뭐? 카드소녀 베리 주제가? 야 임마!!”

‘...듣자마자 바로 쌍욕까지 날라 올 정도냐?’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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