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가왕-7화 (7/280)

제7화

“참가자분들 번호표에 따라 서주시기 바랍니다!”

녹화 준비가 끝났는지 스태프가 참가자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관객석에 번호표 순대로 참가자들이 앉기 시작했다. 내 번호는 204번, 뒷자리였다.

‘재호는 안 보이는군. 앞번호인가?’

곧이어, 무대에 심사위원 3명이 올라왔다. 의외의 인선에 참가자들이 술렁였다.

“베이비? 요새는 작사가만 하고 외부 활동 안 하는 사람 아니야?”

“넵튠 한? 언제부터 슈퍼스타 시리즈가 현직 아이돌을 다 데려왔어? 하긴 아시아 원탑인 넵튠 정도면…”

“아니… 야, 그것보다 저거. ‘그 사람’ 맞냐?”

“저렇게 생긴 사람이 가요판에 또 있냐?”

‘역시나.’

90년대 최고의 여가수인 베이비, 그리고 한국에서 아이돌 메인보컬 하면 떠올리게 되는 넵튠 한. 여느 시즌에 비해 화려한 심사위원진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 중 압권은 가요계의 정점, 초대형 기획사 TYB 엔터테인먼트의 창립자이자 심장인 천채왕 대표가 심사위원장이란 사실이었다.

‘거의 티비에도 나오지 않는 사람이니까.’

참가자들의 시선이 모두 심사위원 중 정중앙에 서 있는 천채왕에게 집중되었다.

“기적을 만듭니다. 슈퍼스타 T! 슈퍼 캠프 이제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진행을 시작했다. 능숙하게 심사위원을 소개하고, 앞으로 일정을 알려줬다.

‘나는 뭐 이미 다 아는 내용이지만.’

가장 큰 반전은 이거였다. 바로 지금, 2차 예선을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300명 중 무려 100명이 탈락해서 집에 갔다. 명색이 캠프인데, 캠프장에 가보지도 못하는 셈이었다.

더 큰 반전은 2차 예선의 방식이었다.

버스킹 배틀.

아직 홍대 버스킹이 유행하기도 3~4년 전에, 버스킹을 대결에 도입해 화제가 됐었다.

룰은 간단했다. 야외에서 심사위원 1인당 100명의 참가자를 심사한다. 참가자에게는 3시간의 준비시간이 주어진다. 악기도 한 개만 쓸 수 있다.

‘음향시설도 없이, MR도 없이, 덜렁 무대를 준비하라는 변태적인 무대였지.’

엔간한 프로 가수도 부담이 될 미션이었다. 제아무리 가수라도, 좋은 음향시설이 없이 열악한 환경에서 감동을 줄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였으니까.

“…그럼 이제부터 줄 서서 악기를 하나씩 선택해주시면 됩니다!”

사회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참가자들이 달렸다. 먼저 줄을 서서 조금이라도 좋은 악기를 구하려는 시도였다.

‘나는 뭐, 이미 생각해뒀지만.’

* * *

산보하듯 걸어가도 중간 순위는 됐다. 체력을 레벨 업 해놓은 덕이었다.

‘이거, 가수 지망생들 너무 운동 부족 아니야?’

나도 이전 생에서는 압도적 꼴찌였다는 게 함정이지만.

먼저 줄을 섰던 사람들이 보였다. 공원에 제작진들이 악기들을 모아 두었다. 순서가 되는 참가자가 한 명씩 들어가서 악기를 골라 나왔다. 산더미처럼 쌓인 악기들 사이에서 참가자들이 헤매고 있었다.

“204번 참자가분, 들어가세요.”

내 차례가 되었다. 공원에 잔뜩 놓여 있는 악기들 사이를 여유 있게 돌아다녔다.

“오?”

빈티지 전자 키보드가 하나 있었다. 내 원래 계획은 아니지만, 상당히 좋은 악기였다. 무심코 손을 내밀었다.

“실례.”

‘뭐야?’

누군가가 내 손을 탁! 치더니 빈티지 피아노를 가져갔다.

‘이상한 놈 다 보겠네.’

약간 언짢은 기분을 뒤로하고 다음 악기를 구경했다. 고급 클래식 기타가 하나 보였다.

“이것도 괜찮네?”

“제 껍니다.”

또 누가 나를 퍽! 밀고 기타를 가져갔다.

‘뭐야, 이놈들?’

이제 보니 네댓 명 정도가 나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격투기 운동부라 생각해도 믿을 정도로 우락부락했다. 다들 정장 차림이어서 꼭 마피아 느낌까지 들었다. 모두 눈으로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이전 생에는 없던 이벤트였다.

‘좀 거슬리는데?’

어느새 그룹에 딱, 한 명만 남았다. 굉장히 건장한, 리더 격으로 보이는 턱시도 차림의 인물이 서 있었다.

‘한 번 장난 좀 쳐볼까?’

일부러 캐스터네츠를 만지작거렸다. 슬쩍 쳐다보니 턱시도 사내가 분노로 부들거리고 있었다. 턱시도 사내가 다가와 내게 나지막이 말했다.

“조롱하는 거냐?”

‘어쭈 왜 반말이야.”

굳이 흥분한 상대에게 넘어갈 필요는 없었다.

“괴롭히는 건 그쪽 아닌가요?”

“뭐라고?”

치밀한 타입은 아니었다. 톡 치면 퍽 하고 반응하겠다는 느낌이 왔다.

“대놓고 제 악기 쫓아다니면서 다 뺏고 있잖아요?”

“저기요.”

턱시도 남자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그냥 우연이거든요? 님이 남의 선곡 빼앗았던 일이 우연이었던 것처럼?”

치밀한 녀석이 아니라 쉽게 근거를 흘렸다. 도현준이랑 모종의 관계가 있는 녀석인 모양이었다. 그제서야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15년 전에는 없던 일이 생긴 거군. 도현준을 내가 떨어뜨려서, 그 나비효과로 이런 일이 생겼단 건가.’

의중이 대충 읽히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턱시도 사나이에게 적당히 좋은 신시사이저를 건네며 말을 걸었다.

“여튼 나 때문에 본인 대회 망치면 안 되니까 이거 가져가세요. 오디션은 봐야죠.”

턱시도 사나이가 훅 자기 얼굴을 내 코앞까지 밀착시켰다. 그가 메고 있던 나비넥타이가 내 가슴에 닿을 정도였다.

“야, 너 나 놀리냐?”

콧김이 피부에 닿았다. 화난 물소처럼 나를 들이받을 듯할 기세였다.

하지만 턱시도 사나이가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내가 좀 제작진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는지, 항상 내 곁에는 알게 모르게 카메라가 따라다녔다. 덕분에 패거리들이 내게 했던 괴롭힘들이 고스란히 카메라에 담겼다.

‘저게 어떻게 편집돼서 나올지 벌써 기대되네.’

그걸 모르는 턱시도 사내는 더욱 내게 거칠게 고함을 쳤다.

“나를 놀리냐고!”

사태가 심각하단 걸 눈치챈 제작진이 경호팀을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턱시도 남자가 콧김을 ‘흥!’하고 불더니 신시사이저를 들고 나갔다.

“너 두고 봐 새끼야.”

카메라 앞에서 저렇게 가볍게 속마음을 드러내길래 허술한 녀석인 줄 알았다. 그래도 경호팀 호출은 눈치챌 정도의 감은 있었다.

아쉽지는 않았다. 무력 충돌은 없는 편이 좋았다. 설사 내가 피해자 입장으로 방송에 나간다 해도 말이다.

슬쩍 전광판을 봤다. 심사까지 남은 시간이 표시되고 있었다. 2시간 27분 남았다. 쓸데없는 다툼으로 30분을 허비했다. 이래서 원재호가 계획에는 여유 시간이 필요하다 말했던 거구나 싶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두 시간 반. 빠듯하지만 다행히 내가 미리 계획해둔 무대를 준비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손을 뻗어, 생각해두었던 악기를 집었다.

‘이거면 충분해.’

* * *

3시간 후. 급하게 무대 연습을 끝낸 100명의 참가자가 야외 공원 무대에 모였다.

그리고 무대 한가운데에는 천채왕 심사위원이 섰다. 이번 라운드의 참가자 중 100명에게는 그가 직접 심사를 진행했다. 내 기억 속 예선과 똑같았다.

웬 시커먼 놈들 몇 명이 난입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내가 기억했던 과거랑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천채왕 심사위원이 마이크를 잡고 말을 시작했다.

“이제 심사 시작할게요. 순서는 공정하게 제비뽑기로 뽑겠습니다. 제가 부르는 참가 번호의 참가자는 앞으로 나와주세요. 첫 번호는… 298번!”

“넵!”

익숙한 얼굴이었다. 끝까지 남아서 나를 협박했던 턱시도 남자였다. 나에게서 빼앗아 간 신시사이저를 들고 왔다. 나한테는 강인한 척하더니만, 천채왕 앞에서는 고양이 앞 생쥐 마냥 벌벌 떨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타입인가? 뭐 나도 곧 강자가 될 예정이지만.’

그 사이 턱시도 남자의 노래가 끝났다.

‘평범하군.’

성량은 B+,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그 외에 모든 부분이 평이했다. 심지어 감정 표현은 F였다.

천채왕 심사위원의 낯빛이 매우 어두웠다. 이윽고 그가 천천히, 낮은 톤으로 말을 시작했다.

“이.랬.다.가.는… 동네 학교 노래자랑에서도 입상 못 합니다.”

참가자들이 술렁술렁 댔다. 놀란 모양이었다. 당연했다. 방송에서 천채왕은 사람 좋은 아저씨였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슈퍼스타 T 방송에서는 그의 가혹한 피드백이 모두 편집됐다. 그의 날 것의 피드백을 모두들 처음 본 셈이었다. 놀랄 만도 했다.

“하~ 이거,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하나.”

천채왕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알러지가 난 듯, 목을 손으로 탁! 탁! 쳤다. 마치 ‘너의 노래 때문에 알러지가 생길 지경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천채왕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지금부터 제 말은 모두 편집될 겁니다. 제게, 그리고 참가자한테도 좋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프로가 되고 싶다면 제 말을 잘 들으세요.”

턱시도 사나이의 얼굴이 당황으로 가득했다. 별말도 안 했는데, 이미 울 거 같은 표정이었다.

[야, 너 나 놀리냐?]

나를 협박할 때 그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천채왕 대표가 날카로운 피드백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노래는 이야깁니다. 감정을 전달하는 거라고요. 298번 참가자는 감정이 아니라 자기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나 목소리 커’ ‘나 고음 잘 내!’ ‘나 고음에서 거칠게 쇳소리 잘 내’ 근데 심지어 딱히 고음이 크게 매력 있지도 않네요. 조금만 음이 높으면 목소리가 가늘어져요. 동네 노래방에서 쫌 칭찬 받을 정도의 고음이에요.”

천채왕은 그 흔한 인신 모독 하나 없이, 조곤조곤 팩트로 디테일하게 턱시도 남자의 노래를 조졌다. 이게 팩트로 팬다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숨을 왜 여기서 쉬어야 하는지. 여기서 왜 이렇게 끝 음을 처리해야 하는지. 여기서 왜 고음을 비성이 아니라 진성으로 내야 하는지. 그런 고민 한 번도 안 해봤죠?”

천채왕의 질문에 턱시도 사나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런 디테일한 요소로 청자를 잡아채서, 결국은 깊은 마음속 감정을 끌어내는 존재가 바로 가수입니다. 목청이 큰 사람이 아니라요. 완전히 노래에 핀트가 어긋났어요.”

턱시도 사내는 팩트로 너무 맞아 그로기 상태였다. 불쌍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완벽하게 정곡을 찔린 모양이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수 하시려면 제발 음감 연습 좀 해주세요. 디테일한 음들이 삐걱대서 선곡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너무 음정이 플랫 됩니다. 이상입니다.”

이 말을 끝으로 천채왕은 마이크를 내렸다. 결과는 안 봐도 뻔했다. 100점 만점에 55점. 넉넉하게 탈락이었다.

“다음 참가자 번호 부르겠습니다.”

천채왕의 얼굴이 어두웠다.

지금 부르는 사람은 좀 불리할 터였다. 심사위원 기분이 저리 안 좋으니 말이다.

‘설마 이럴 때 내 번호 나오고 그런 거 아니지?’

“204번! 204번 나와주세요.”

설마가 사람 잡았다. 뭐 어쩔 수 없었다. 노래로 보여주는 게 유일한 방법이었다.

무대에 올라오는 내게 천채왕 대표가 말을 걸었다.

“잠깐만요, 204번 참가자.”

“예?”

“왜 악기 없이 빈손이죠?”

씨익. 웃음이 나왔다.

‘그 말을 묻길 기다렸습니다 천채왕 대표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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