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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마법사의 인생 룰루랄라-170화 (완결) (170/170)

제170화

새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이기 시작했다.

‘눈이네.’

몇 번째로 보는 눈일까.

잘 모르겠다.

곧 죽을 날을 앞둔 이선아는 커피를 타 온 뒤 베란다의 흔들의자에 앉아 담요를 덮었다.

멍하니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커피를 홀짝였다.

‘나도 나이를 먹긴 먹었네.’

아니, 진즉.

젊었을 적엔 추운 날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는 여름이 아닌 이상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마시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보는 눈이려나.’

왠지 모르게 곧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지않아서.

삶이 끝나리라는 직감.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과학 기술이 발달한 현재에도 수명은 어쩔 수 없는 문제이지 않던가.

게다가 몇 년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해 오고 있었기에 이선아는 제 죽음을 익숙하게 여기고 있었다.

유언도 이미 다 남겨두었다. 몇 남지 않은 지인들에게 작별 인사도 해 두었고, 조금 미련이 남는다면 자식과 손녀와 손주들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으면 좋겠는데.

‘어려우려나.’

비유나 농담이 아닌 진짜로 내일이나 모래일 것 같은데.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

후회가 없는 삶은 아니었지만.

“후후.”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시대에 걸맞지 않게 대가족을 꿈꿨다. 자식도 넷이나 나았다. 더 자식을 보고 싶었으나 금전이란 현실의 한계와 몸 상태 때문에.

‘넷 다 잘……은 아니지만 나쁘게 자랐지.’

중간에 이런저런 사건 사고도 잦았다.

뭐.

본디 삶에는 사건과 사고가 가득하니까.

‘돌이켜보면 하연이가 참 많이 도와줬어.’

이래저래.

그래서 하연이가 죽었을 때 참 많이 울었더라.

죽기 직전에도 나이를 먹었어도 어지간한 연예인 못지않게 관리를 잘했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유독 기억에 남는 하연이의 마지막 모습.

다만 안타까운 건 그녀의 마지막 인사.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보자고, 그 말을 지키지 못했던 게 조금 마음에 걸렸다.

어쨌거나.

“나쁘지 않은 삶이었어.”

그때.

“정말로?”

하늘에서 들려온 명랑한 목소리.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목소리인데.

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나쁘지 않은 삶이었어. 그나저나 정말로 죽을 때가 된 모양이야. 환청이나 듣고 있고. 또 거기에 대답을…….”

“환청이 아닌데. 위에.”

이선아가 그 목소리에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어?’

환영일까.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그리고.

“하, 하연이?”

젊었을 적의 이하연.

지금도 떠올리면 생생한 그녀의 모습이 이선아의 눈동자에 비쳤다.

예쁜 외모는 물론, 심성도 고와서 주위의 시기 질투도 많았던 그녀.

어쩌다 보니 친해져서. 그 인연이 죽기 직전까지 이어졌었는데.

“그때 약속 지키러 왔어. 죽기 전에 다시 보자고 했었잖아?”

“저, 정말 하연이니?”

“그럼.”

“죽을 때가 되었더니 옛 친구가 꿈에서 마중을 나오는가 보구나.”

“꿈 아니라니까.”

꿈은 아닐까.

하지만 이내 하늘에서 내려온 이하연이 뻗은 손으로부터 느껴지는 촉감.

“……그래서 너 거짓말하고 우리 집에서 잤잖아.”

“그래, 그랬었어.”

“우리같이 처음 봤던 영화는 기억나? 공포 영화였잖아.”

“내가 공포 영화 잘 못 보는 거 알면서 억지로 끌고 갔었던 것 같은데.”

“또 너 아들 처음 나았을 때 이름 말이야. 그때…….”

당사자가 아니라면 알 수 없는 추억들.

“진짜 하연이구나.”

“그럼 가짜겠어?”

“너무 젊어서. 젊을 때의 모습 그대로라 꿈인 줄로만 알았지. 그리고 분명히 장례식 때…….”

“뭐어. 위장으로. 진짜로 죽은 건 아니었어. 속인 건 미안해.”

이하연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운 일이 있어서.”

“그래, 그렇겠지.”

그 젊은 모습부터.

어림짐작이지만 설명하기 곤란한 부분들이 참 많을 것 같았다.

묻고 싶은 게 참 많았다.

이제는 사라졌다고 여겼던 호기심이 다시 고개를 치켜드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게 무에 중요할까.

이서연은 자신의 궁금증을 저 멀리 던져버리며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살아 있으면 자주 좀 찾아오지.”

“에이. 사회적으로 나는 죽었으니까. 네 삶에 끼어드는 건 조금…….”

“후후. 그래도 서운한데. 그런데 갑자기 오늘?”

“마지막이니까.”

그런가.

“마지막으로 인사. 이제 나를 기억하는, 정확히는 지금 이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은 네가 마지막이야.”

이하연이 씩 웃으며 환영을 덧씌웠다.

“이 모습이라면 네 손녀와 손주들이나. 또 몇몇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겠지만.”

갑자기 시간의 흐름이 가속하여 나이를 먹은 듯한 이하연의 모습에 이서연이 빙그레 웃었다.

“그 모습이 익숙해서 좋지만, 개인적으로는 젊을 때가 더 좋네.”

“그래?”

이하연이 환영을 지웠다.

은후로부터 배운 간단한 마법이었다.

“아마 내일까지일 거야.”

“내가 살날이?”

“응.”

“내일.”

“하루 일찍 왔어. 너무 딱 맞춰서 오면 정 없다는 소리 들을까 봐.”

이후 한동안 이하연과 이서연은 이야기꽃을 피웠다.

활짝.

“슬슬 졸리지?”

“조금…… 졸리네.”

“그럼 가 볼게.”

“벌써?”

“벌써는 무슨. 시계 보면 깜짝 놀랄걸.”

이서연은 아쉬웠다.

너무도 아쉬웠다.

하지만 예전과 다르게 그 아쉬움을 삼킬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안녕.”

“그래, 안녕.”

잠깐.

이야기하는 동안은 잠시나마 젊었을 적 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아서.

“후후.”

절로 웃음이 나왔다.

죽기 직전에 정말 좋은 선물을 받았다.

‘슬슬 들어가야 하는데.’

조금만 더.

이서연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눈을 시야에 담았다.

* * *

휘영청 떠 오른 달.

그 주위에서 바람과 함께 춤추고 있는 눈발들.

그런 하늘에서 이하연이 빤히 마지막으로 남은 자신의 친구를 바라봤다.

은후가 이하연을 뒤에서 꼭 앉으며 말했다.

“좀 더 있다 오지?”

“아냐, 그거면 됐어. 더는 서연이가 힘들어했을 거야.”

이하연이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끝이네. 우리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 없지는 않을걸? 네 시청자들만 해도 말이야.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이 꽤 있을 텐데.”

문제는 이하연이 방송을 다시 켤 수 없다는 게 문제였지만 말이다.

“가끔 게시판 들어가면 종종 글 올라오더라.”

“하여간 바보들이라니까.”

비록 인터넷으로 이어진 인연이라지만, 무엇이 그리 좋았을까.

무슨 미련이 남았길래. 그들은 이하연의 죽음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후에도 몇몇 시청자는 그녀의 채널에 꾸준히 놀러 왔다.

이전 영상을 다시 보기로 돌려보기도 하고. 또 게시판에 글을 남기기도 했다.

“깜짝 방송이라도 틀어볼래?”

“부우. 그러면 난리 날걸? 됐네요.”

만약에 그러고 싶다고, 자신이 원한다면 은후가 어떻게든 해결해줄 거라고는 걸 이하연은 알았다.

하지만 그런 부담을 은후에게 주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각오한 길 아니던가.

은후와 함께.

그래.

그것만으로도 이하연은 괜찮을 수 있었다.

“돌아가자.”

“그래도 돼?”

“여기서 언제까지 있게.”

“그거야 하연이 네가 만족할 때까지?”

“만족은…… 못 했지만. 됐어. 이거로 됐지.”

작별 인사는 제대로 했으니까.

“너무 그렇게 신경 안 써줘도 돼. 그러면 내가 오히려 불편하다니까.”

“그래도.”

“부우. 바보네 여전히.”

“…….”

이하연이 몸을 돌려 정면으로 은후를 꼭 껴안았다.

“괜찮아. 으응, 안 괜찮아도 곧 괜찮아질 거야. 이런 이별이 처음도 아닌데.”

보통 사람과 다르게 긴 수명을 갖게 되면서 이하연이 배우게 된 것 중 하나는 이별을 마주하며 감정을 수습하는 법이었다.

그래서 금방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그게 은후는 대견스러우면서도 못내 씁쓸해서.

“이럴 때마다 조금 미안해.”

“미안하기는. 그런 소리 하면 내가 혼낸다고 그랬지?”

이하연이 은후의 목을 살짝 깨물었다. 은후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다가 미소 지으며 물었다.

“지금 유혹하는 거야?”

“혼내는 건데.”

“이제는 안 당황하네?”

“같이 산 세월이 몇 년인데.”

다만.

설레는 건 여전해서.

이하연이 말을 돌렸다.

“오랜만에 승마할까.”

“승마?”

“응. 날아서 왔으니까. 갈 때는 좀 멍하니 있고 싶어.”

“그럼 그럴까.”

은후가 스타더스트를 불렀다.

‘대충 한 시간?’

지금 있는 곳은 중국 어딘가라고.

“한 시간쯤 걸린 데.”

“그럼 그때까지 이러고 있지 뭐.”

한 시간 뒤.

은후가 스타더스트 등에 올랐고. 그 뒤에 이하연이 탔다.

이하연이 은후의 등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집으로 가야지.’

덕진 공원의 낙원으로.

* * *

인구가 급속도로 감소한 대한민국.

지방 소멸이 당면의 문제가 된 이 시점.

전주는 그 문제에서 다소 빗겨나가 있었다.

정확히는 덕진 공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주거 지역만큼은, 그 이유는 덕진 공원에 자리 잡은 천도 복숭아나무 때문이었다.

덕진 공원에 그저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근처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몸이 건강해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며 컨디션이 좋아진다는 그런 이유로 사람들은 덕진 공원 주위에 거주 지역을 형성했다.

“과학적으로 아직 증명이 안 됐다고 말이지.”

그거로 논란이 불거진 적도 있었지만.

“직접 체감하는 우리는 뭐여?”

“그러니까 말여.”

젊었을 시절 서울로 올라갔다가 나이를 먹고 다시 고향을 찾은 김은혁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이 근처에 사는 노인네 중 잔병치레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니까? 그게 다 이 덕진 공원 때문이란 거는…….”

“하여간 그놈의 공원 찬양은.”

김은혁의 오랜 친구 이현수가 혀를 찼다.

“아, 진짜 내 말이 맞잖아? 죽을 날을 앞둔 우리가 건강한 이유. 그리고 병원에서도 해결 못 해서 골골거리는 놈들 와서는 회복하고 나간 사례가 수두룩하잖아?”

“맞지. 누가 모른대? 거 자랑도 한두 번이 야지. 그런데 못해도 우리 죽을 날이 찾아오려는 건 일이십 년은 더 살지 않으려나?”

이론이 아닌 현실적인 평균 수명이 백이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였다.

과학의 발전 덕분에. 물론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하겠지만.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령이 코를 쓱 훔치며 은후에게 말했다.

“잘 컸네.”

“그렇네.”

은후가 픽 웃었다.

“우리를 기억 못 하는 거 같지만.”

“은혁이랑 현수한테는 너무 오래전 이야기였을 테니까.”

예전과 비교하면 아이를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시대.

하지만 여전히 령은 아이를 위한 정령이었다.

다만 예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범위가 대한민국 전역이라는 것일까.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령도 덕진 공원에 잘 머무르지 않았다.

한 달에 두어 번. 그 외의 시간은 대한민국 전역을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어떨 때는 혼자서, 언제는 개구리와.

이번 같은 경우에는 연후와 함께 나갔다가 돌아왔다.

“오랜만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

“좋아.”

은후와 령이 낙원의 식당으로 향했고.

“오! 도령이랑 령이 왔구만!”

도깨비와 구미호가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오늘 령이 왔다는 소식에 내 푸짐하게 차렸지. 게다가 마침 타이밍 좋게 식구들 모두가 모였으.”

“날씨도 좋은데 야외로 나갈까요?”

구미호의 제안에 은후가 고개를 끄덕였고.

“성호 형이랑 연후 형이랑 개구리랑…… 어, 내가 다 불러올게!”

령이 쪼르르르 달려 나갔다.

하늘 고래는 평소와 다르게 허공이 아닌 호수에서 잠을 청하고 있었다.

아까까지 분명히 공원을 산보하던 스타더스트는 어디론가 달려 나가더니 자취를 감추었다.

‘하연이는 내가 부를까.’

은후는 자신의 연인을 찾으려 발걸음을 떼었다.

어느 여름.

평소와 다름없는 낙원의 모습이었다.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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