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툭.
툭.
창문을 노크하던 비는 어느새 소나기로 변했다. 거리에 오고 가는 차들도, 우리에게 매일 따스함을 선사하는 태양에도 지금 이 순간에는 자신을 봐 달라는 빗물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
지금 몇 시더라.
‘으으.’
이하연이 본능적으로 머리맡의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다섯 시.
이르다면 이르지만 아침형 인간이라면 일어날 법한 시간. 하지만 이하연에게는 이 시간은 항상 이르게만 느껴졌다.
공무원이란 직장을 다닐 때는 당연히 그랬고, 프리랜서로 어느 정도 시간의 자유로움을 얻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또 이 시간이네.’
요새 이하연이 이렇게 이른 시각에 일어나는 것은 꽤 흔한 일이었다. 결혼이란 부담감 때문일까. 은후와는 이미 이야기가 다 되었다. 남은 건 양가 부모님께 허락을 구하고 본격적으로 결혼식 준비를 하는 것.
괜스레 요새 압박감이 꽤 밀려왔다. 동시에 기쁨과 설렘도 찾아왔지만. 그래서 요새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하연은 괜스레 애꿎은 빗소리를 탓해본다.
‘배고프네. 아침…… 먹으면서 말할까.’
아직 알람이 울리려면 한참 남았다. 보통 일어나는 시간은 열한 시쯤. 알람은 열 시 반과 열 한시 두 번 맞추어 놓았다.
“일어났니?”
이하연이 눈을 비비며 거실로 나가자 커피를 마시고 있던 어머니가 반겨주었다.
“엄마?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잠이 잘 안 와서.”
이하연의 어머니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커피 마실래? 아니면 밥?”
“……커피. 토스트도.”
“그래.”
“아빠는?”
“자고 있어. 나이 먹으면 잠이 준다던데 네 아빠는 오히려 늘었더라.”
결혼 전에는 안 그랬던 것 같은데. 결혼 이후에는 자기가 안 깨워주면 일어나지 못한다며 이하연의 어머니가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투덜거림에 담긴 건 짙은 애정.
“나는 반대인데.”
이하연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러니?”
몇 번인가 인사를 하러 왔던 딸의 연인.
그녀가 어느 순간부터 자주 전주를 찾아서 연인의 집에 머물고 온다는 것을 이하연의 어머니도 알고 있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응. 아무래도 긴장감이 완전히 풀려서 그런 것 같아. 알아서 깨워줄 거라는 믿음이 있어서?”
“하기야 잠이 많은 건 네가 네 아빠를 닮았지.”
“우.”
“학교 다닐 때나 직장 출근할 때도 그랬잖아. 엄마가 안 깨워주면…….”
두 모녀는 여느 때처럼 일상에 관하여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좀 살 거 같다.’
커피의 따스함과 씁쓸함이 이하연의 정신을 일깨웠다. 이하연이 굳게 결심하고 툭 말했다.
“엄마.”
“응?”
“나 결혼하려고.”
“그러니?”
이하연의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대답했다.
“어?”
“뭘?”
“아니, 엄마가 별로 안 놀란 거 같아서?”
“아빠랑 엄마가 너 한두 해 보니. 대충 눈치깠지.”
“아니, 눈치를 채는 것도 아니고 까는 게 뭐야.”
이하연의 어머니가 픽 웃었다.
“요새 애들이 쓰는 말이라던데.”
“어디 가서 그렇게 말하면 주책이라는 소리 들어.”
“여하튼.”
“반대는 안 해?”
“왜? 반대해줬으면 해?”
“어…… 그건 아닌데.”
결혼은 현실이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돈.
돈이 없다고 하여 결혼하지 못하란 법은 없으나 없으면 없는 대로 고생길이 활짝 열렸다.
몇 푼 없이 결혼했던 이하연의 부모님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 남자 친구가 보내주는 술 말이야.”
“응? 어.”
“거기 회사 이사라며?”
“이사였던가? 전무라고 그랬던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높은 자리야. 지분이 얼마랬지.”
“초기 설립 멤버라면서.”
“맞아. 나이 때문에 일부러 대표나 사장은 안 한다고 들었어.”
세간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아는 사람만 아는 회사. 하지만 어느 정도 금전이나 권력이 있는 이들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러면 됐지. 돈 많잖아? 사람 됨됨이도 괜찮아 보이고. 너한테도 되게 잘하는 거 같던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다는 게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돈?”
“애는. 현실을 모르네. 물론 돈 이전에 애정이 있어야겠지만 말이다.”
“……돈은 나도 많은데. 아니, 은후에 비하면 적지만.”
“네가?”
“응.”
“그, 방송이라는 게 돈이 많이 되는 일이니?”
“꽤. 정확히는 방송보다 브이튜브에서 나오는 수익이지만. 이번 달만해도 엄마하고 아빠가 버는 거 이상으로 많이 벌었을걸.”
이하연의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정확히는 아니어도 자신들이 버는 금액을 대강 알고는 있을 터인데.
“그래서 세금이 걱정이야. 으, 아까워 죽겠다니까. 올해 세금 장난 아니게 나올 텐데. 아. 그러니까 그런데 엄마랑 아빠 시간 좀 내.”
“시간?”
“응. 상견례 해야지.”
“……그래. 상견례는 해야지.”
“그리고 가을이나 겨울에 어디 한 번 다녀와. 내가 돈 대 줄게.”
“어디를?”
“휴가. 미국 가보고 싶다고 그랬잖아. 멀어서 힘들면 옆에 일본이나 대만이나. 하여간 어디든. 가고 싶은데 말만 해.”
“어머. 오래 살고 볼 일이네. 딸이 여행도 보내주고?”
* * *
며칠 후.
‘장마철인가.’
은후가 침대에서 몸을 일을 켜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우.”
그건 안도의 한숨이었다.
비와 함께 얼마 전 상견례 때의 기억이 은후의 머릿속에 스르륵 하고 나타났다.
상견례.
결혼 전 양가 식구가 만나 서로 대면하고 인사를 하는 것. 다행히 무사히 끝이 났다.
‘처음에는 장소부터가 고민이었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일전 연인과 함께 방문했던 한식당 자목련을 선택했다. 적어도 은후가 가본 곳 중에서 그 정도로 고급스럽고 분위기가 있는 곳은 없었으니까.
분위기도 화기애애했고, 이야기의 흐름도 끊임없이 부드럽게 진행되었다.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면 결혼식 장소. 은후와 이하연은 야외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
덕진 공원에서.
평범하게 웨딩홀에서 해도 낙원의 주민들이 참여하는 건 문제가 없겠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돈이야 사실상 넘쳐났으니. 오히려 그래서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결국 결혼 당사자인 은후와 이하연의 의향에 따라 덕진 공원에서의 야외 결혼식이 결정되었다.
‘나머지는 스드메.’
스튜디오를 촬영하고. 드레스를 맞추고. 메이크업. 그 외에 청첩장을 만들고. 혼수도 어떻게 해야 할지 결정해야 했다.
예물이나 예단도.
사실 처음에는 양가 부모님만 모시고 미니 결혼식을 올리려고 했다. 과정도 대폭 축소하고. 하지만 대한민국에서 결혼식은 두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결국 보통의 결혼식을 치르기로 했다.
‘머리가 아프네.’
은후가 쓰게 웃었다.
딱히 못 할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낙원 식구들에게도 알려줘야지.’
은후가 가볍게 몸을 씻고 낙원으로 향했다.
익숙하게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자 언제나처럼 령이 쪼르르 마중 나왔다.
다만 평소와 다르게 우산을 들고 있었다. 평범한 우산이 아닌 종이로 된 우산이었다.
조선 시대 말기에 널리 퍼지다가 비닐우산이 개발된 이후 이제는 전통으로 남아 예술품으로만 취급되는 우산.
종이에 그려진 그림이 눈에 확 띄었다.
‘멋지네.’
한 폭의 산수화.
그림에 딱히 조예가 없는 은후가 판단해도 적잖이 멋진.
“멋있지?”
령이 신을 내며 말했다.
“이거 삼촌 창고에 있던 건데 빌려서 나왔어. 옛날에 유명한 화가가 그렸던 거래.”
“그래?”
“응응. 게다가 삼촌이 방망이로 두들겼더니 엄청 성능도 좋아졌대.”
“확실히 그런 것 같은걸?”
재질이 종이로 구성되어 있음에도 젖어 들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일종의 결계를 형성하고 있네.’
우산 중심으로 주위 공간으로부터 비를 빗겨내고 있는 걸 보면. 그래서 은후가 딱히 마나를 끌어 올리지 않았음에도 빗방울은 자연스레 주위로 흩어졌다.
단지, 령의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말이다.
“밥 먹었어?”
“아니.”
“그럼 밥 먹자!”
“밥은 좀 그렇고. 커피나 마실까?”
“커피…… 으, 은후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자주 마시잖아. 난 써서 싫더라.”
은후가 픽 웃었다.
“단 커피도 있어? 그런데 너무 달면 싫어하지 않아?”
“으응. 그래서 라떼가 좋아. 우유 넣으면 딱 좋더라고.”
그런 이야기를 나누며 은후와 령은 공원을 거닐었다.
“하연이 기억하지?”
“응. 은후 여자 친구.”
“결혼하려고.”
“응? 결혼?!”
령이 깜짝 놀랐다.
“응. 결혼.”
“와아. 어…… 그러면 이제 자주 못 오겠네.”
“왜?”
“결혼하면 결혼 생활에 충실해야지! 그래도 너무 안 오면 안 돼?”
령의 배려와 걱정에 은후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연이랑 같이 오면 되지.”
“그런가?”
“그럼. 하연이도 이제 낙원의 존재를 모르는 것도 아니니까.”
“으응.”
이윽고 낙원 주민들에게도 은후의 결혼 소식이 알려졌다.
“캬! 결혼! 왠지 그럴 것 같더니만.”
도깨비가 감탄했고.
“축하해요!”
모두가 축하를 전했다.
“앞으로 바쁘겠어요?”
“조금요?”
구미호가 빙그레 웃었다.
“조금이 절대 아닐걸요. 그나저나 결혼식이라. 좀 아쉽네요.”
“왜요?”
“저희가 참석하기가 좀 그렇잖아요?”
“식은 덕진 공원에서 올릴 예정이고. 제가 약간의 도움만 드린다면 참석하는 데에는 딱히 문제가 없을 겁니다.”
구미호가 눈빛을 반짝였다.
“좋네요.”
결혼식.
설렘이 가득한 단어가 아니던가. 하물며 낙원에서 그 누구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은후.
게다가 구미호에게 있어서. 아니, 낙원 주민들 모두에게 있어서 은인인 은후였으니.
“혹 오지랖이 아니라면 드레스는 제가 도움을 드려도 될까요?”
“드레스요?”
“네.”
“그, 드레스는 하연이 의견이 제일 중요해서요. 저는 괜찮지만요.”
구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당연한 말이고요. 신부의 의견이 제일이죠.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신부 마음에 쏙 드는 드레스를 만들 테니까요.”
구미호가 의욕을 불살랐다. 그렇지 않아도 은후에게 받은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고민이 많았었다.
어느 순간부터 줄곧. 다른 것도 아니고 결국 목숨값이지 않던가.
그런데 딱히 은후에게 도움을 줄 수단이나 방법이 마땅치 않았더라.
물론 이번 도움만으로 전부 갚을 수 없을 빚이지만 조금이나마 덜 수 있으리라.
“예물이랑 예단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요?”
“아직 딱히 결정된 건 없는데요.”
그때.
푸르르르르르륵.
덕진 공원의 허공에서 스타더스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타더스트는 은후와 계약을 맺었으나 자유를 보장받았다. 그래서 덕진 공원에 있는 예가 잘 없었다.
언제나 달리고 있었다.
이따금 덕진 공원을 들르긴 했지만, 항상 다른 곳에서 어디론가 쭉. 그러다가 은후의 마음이 평소와 다름을 느끼고 달려온 것이다.
푸르르륵!
뭔가 기쁜 일이 있는 거 아니냐며 스타더스트가 은후의 몸에 머리를 부볐다.
“그래.”
은후가 스터더스트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좋은 일이 있었지.”
스타더스트가 울었다.
- 좋네!
- 결혼?
- 그게 뭐야?
- 하여간 좋다는 거네!
평소와 다르게 마음이 오락가락하는 걸 보면…….
스타더스트는 그렇게 짧은 축하 뒤에 다시 허공으로 발을 박찼다. 다시 달리기 위하여.
정말 죽기 이전이나 그 이후에도 한결같았다.
달리고 달려서.
언제까지고 달리고 싶다고.
스타더스트는 현재 그 꿈을 이루었다.
‘꿈이라.’
꿈.
‘……내게도 꿈이 있었지.’
지금도 있을까.
‘그래.’
하연이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그리고.
낙원에서의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것.
‘내 꿈은 현재 진행형이구나.’
주위에서 은후의 결혼을 두고 잔뜩 들떠서 떠드는 낙원의 주민들을 바라보며 은후가 빙긋 웃었다.
부우우우우우.
하늘 고래가 길게 울며 분수를 내뿜었다.